Enemy of the Greatest Psychic Ever RAW novel - Chapter 339
337 – [7회차] 회귀의 끝
민지의 어깨를 붙잡은 그날, 내게는 함께 죽음을 선택할 기회도, 불행한 그녀를 죽이고 다음 그녀를 행복
하게 만드는 기회도 모두 존재했다.
그러나 나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선택을 내렸다. 바로 민지와 함께 현실세계를 등지고 칩거하는 선택이었
다.
“모두의 믿음을 저버리고 또 다시 배신한 너를 우리가 이대로 순순히 보내 주리라 생각하나?”
“그래야 할 거다. 목숨도 구해주면서 너희에게 진 빚을 갚고자 탑의 소원까지 써줄 생각이 있으니깐.”
“탑의 소원권을! 그 귀한 기회를 우리를 위해 쓰겠다니.”
나는 강진혁과 로리 헤더웨이를 돌아보았다.
“너희에게는 돌아가야 할 사람들이 남아있다.”
“…….”
“이진태와 장규아는 탑에 들어오지 못했어요. 이민지가 죽인 게 틀림없어요. 아무도 절 기다리지 않을 거
예요.”
민지는 슬픈 미소를 지었다.
“사실이야.”
나는 로리 헤더웨이를 설득했다.
“그래도 그 두 사람의 소원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는 건 이제 이 세상에 오직 너 한 사람뿐이다. 로리 헤
더웨이. 그들의 소원이 진정으로 복수 하나뿐이었나?”
그는 망설였다. 이내 스스로가 망설였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고,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양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 끝에 내린 결정을 나는 지금도 기억했다.
“우리 셋이 바란 소원은 새로운 세계를 떠돌며 즐기는 것. 그 티 없이 밝은 꿈을 복수라는 이름으로 더럽
히고 싶진 않지만, 당신들을 용서하지도 않겠어요. 영원히 기억할 거예요.”
희생의 탑의 정복을 끝마친 뒤, 나는 강진혁과 저항군의 소원을 대신 빌어주었다.
인류에게 스펙터들의 침략을 막을 수 있는 최후의 거점도시를 만들어달라는 소원이었다. 세월의 탑에 필
적하는 희생의 탑의 소원은 과연 대단했다.
그 스펙터들의 대도시에 못지않은 초대규모 신도시가 하루아침에 한반도에 나타났다.
“정말로 후회하지 않아? 난 도령이한테도 몇 번이나 세뇌를 걸고 내 뜻대로 조종했어.”
“민지.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이해해. 그러니 더는 자책하지 마.”
“흑, 흐윽…”
우리는 인류 최후의 거점을 뒤로한 채, 이진태에게 계승받은 소원권으로 아차원의 문을 열었다.
***
▷백광의 탑의 소원권이 발동합니다.
▷당신의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사람이라고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 무인도와 같은 세계.
증오도, 질투도, 아집도 존재하지 않는 고요한 호숫가.
그 앞에 그림처럼 세워진 저택이 우리 두 사람의 거처였다.
“대체 무슨 소원을 빈 거야?”
“동화 같은 세계에서 살고 싶다고 했어. 누구도 상처 입히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세계에서 수명이 다하
는 그 날까지 민지 너와 둘이서 살고 싶다고.”
“풋.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변하지를 않는 구나, 도령이는. 요즘 애들은 다섯 살부터 동화를 졸업하는데.”
나 역시 동화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그런 꿈같은 세계의 이야기는 오히려 경멸하는 편에 가까웠다.
그러나 동화밖에 없었다. 민지와 내가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세계 따위는, 결국 현실세계에서는 존재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런 세계 속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젠 알려줘. 네가 지워버린 내 기억에 대해서.”
“…….”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 이제 누구도 우리를 해치지 않아.”
민지는 울었다. 초월지경의 고수라는 사실이 무색하게도 그녀는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악이 만연하는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강한 힘을 지니고 모든 악을 척결한다면 비로소 평화가 찾아오리라
믿었던 내게, 그 모두를 이루었던 민지가 서럽게 울었다.
“아이를, 흐윽. 낳고 싶을 뿐이었는데. 그것뿐이었는데…….”
“아이?”
“나도 김다연처럼, 흐윽…….”
민지로부터 직접 기억의 결락을 전해 듣는 순간.
▷세뇌해제 트리거가 충족되었습니다.
▷이민지가 아이에 대한 언급을 함으로 인해 세뇌가 자동으로 해제됩니다.
▷세뇌해제의 반동으로 대상을 향한 격렬한 반감이..
초능력이 선사하는 본능적인 불쾌함.
마음 속 깊이 끓어오르는 불쾌한 감각을 강제로 찍어 눌렀다.
능력에 지배당하는 삶도, 증오에 지배당하는 삶도 끝났다.
남은 것은 두 사람만의 세계.
이딴 충동 따위에 지배당하기에는 너무 먼 길을 와버렸다.
▷자력으로 세뇌 페널티를 해제했습니다.
▷이민지를 향한 적대감이 사라집니다.
나도 모르게 치켜든 주먹을 펼쳐 민지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놀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던 민지가 눈을 감았다.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괜찮아.”
“내가 밉지 않아?”
“물론 밉지. 그래도 그 이상으로 고마워.”
살아가는 이유.
민지는 내게 이 낯선 세계에서 살아갈 목표를 만들어줬다.
여기가 바로 내 인생의 종착점이다.
실패한 것도,
잘못된 것도,
무너진 것도 아니다.
“줄곧 바랬어. 우리 둘이서 평생 함께 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이제야 겨우 그 소원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문만 열면 새로운 음식이 나오는 냉장고와 한 시간마다 깨끗
한 상태로 돌아가는 식기들이 있는 동화 속 세계에서.
“알려줘. 나 같은 여자의 어디가 그렇게 좋아? 하정아처럼 부유하지도 않고, 김다연처럼 꼼꼼하지도 않
고, 강유아처럼 애교가 많지도 않은데.”
“대신 누구보다도 믿음직하지. 날 위해서 전세계를 적으로 돌렸잖아. 그런 여자는 세상에 둘도 없어.”
어느 날은 민지가 물음을 던지고 내가 대답했다면.
“그런데 유아가 애교가 많다니, 뭘 잘못 아는 거 아니야?”
“틀림없어. 기억 전송으로 본 그 강유아 맞잖아.”
“말도 안 돼. 걔의 어디가 애교로 보여?”
“늘 도령이 근처를 서성거리잖아. 꼭 고양이처럼.”
“그런 얘기 하지 마. 괜히 보고 싶어지잖아.”
“미안.”
또 다른 날에는 내가 물음을 던지고 민지가 대답했다.
대화가 늘수록 수련시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사실, 더 이상 수련을 할 이유도 없다.
“이 검도 로리 헤더웨이한테 돌려줄 걸 그랬어.”
“안 돼. 얼음물이 마시고 싶을 땐 그 검이 제일 빠르잖아.”
“검왕이 그 얘기 듣거든 땅을 치고 후회할 거야. 괜히 나한테 검 맡겼다고.”
“애초에 그 검 나 죽이라고 준 거 아니야?”
“어… 음. 그러네.”
분초를 따져가며 치열하게 수련과 전투, 작전모색으로 보내던 시간은 사라졌다. 검왕지보를 비롯한 무기
들은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레 벽이나 창고에 놓여졌다.
치열하게 몸을 혹사시키는 대신 손을 맞잡고 호숫가를 거닐었으며, 때로는 집 앞 그네에 앉아 구름을 올
려다보았다.
‘진즉 탑에 소원을 빌 걸.’
좀 더 빨리 그러지 못한 게 아쉬울 정도로 하루하루가 평온하고 즐거웠다.
***
비 오는 날에는 저택 앞 정자에 누워 함께 빗소리를 만끽했다. 바람 부는 날에는 바닥을 구르는 낙엽소리
를 만끽했다. 눈 내리는 날에는 고요한 겨울의 정적을 만끽했다.
계절이 돌아오거든 새침하게 불어오는 봄바람이 나무를 흔드는 소리를 만끽했다.
“냉장고의 음식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몰라. 동화 속의 세계니까 원리 같은 건 없겠지.”
“가끔 저 냉장고를 뜯어보고 싶어.”
“그러지마. 음식이 안 나오게 되어버리면 어쩌려고 그래.”
“역시 그건 무섭지?”
해가 지날수록 민지는 점차 웃음을 되찾고 특유의 장난기가 조금씩 되살아났다. 민지가 생도시절의 순수
했던 면모를 되찾으니 나까지 절로 젊어진 기분이 들었다.
“있지, 가끔은 우리만 이런 세계에 온 게 비겁하게 느껴져. 밖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분명 괜찮을 거야. 소원권으로 도시까지 만들어줬잖아.”
“그러려나? 내가 떠났으니 스펙터들도 자유의지를 되찾고 다시 인간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겠지?”
공중전함 같은 터무니없는 최종병기를 개발한 시점에서 그리 원만하게 관계가 회복될 것 같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한다.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민지에게는 그럴 가능성이 차고 넘친다고 말할 거다.
“분명 그럴 거야. 그러니 더는 죄책감을 갖지 않아도 돼.”
“…고마워.”
아마도 평생 잊을 수는 없을 죄책감을 덜어주고자 노력하고 불안을 달래주었다. 올드 원처럼 세상을 못
부숴서 안달이 나거나 강반검처럼 기를 쓰고 구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세계는 세계, 우리는 우리.
다소 냉정하다고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그 모든 사건을 겪은 우리들은 자연스레 세상과 담을 쌓았다. 죽은
이들에게 미안하다고는 생각해도 평생을 죄책감 속에 살 수는 없었다.
“앗, 이거 봐. 치즈돈까스랑 메밀국수가 먹고 싶다고 쪽지를 넣어놨더니 정말로 치즈돈까스랑 메밀국수
가 나왔어!”
“주문도 받는 냉장고였냐…”
황당해서 그리 중얼거렸지만 정작 다음 날 아침에는 나 또한 자연스럽게 먹고 싶은 메뉴를 적어 넣었다.
현실세계와는 다소 동떨어진 법칙으로 돌아가는 세계이지만, 그것이 가져다주는 편리함은 물리법칙과
상식에 대한 집착을 가볍게 미룰 수 있게 해주었다.
“도령, 이것 봐봐!”
요술냉장고에 적응한지도 대략 10년쯤 지난 어느 날, 민지가 호화로운 음식이 가득 담긴 냉장고를 보여
주었다.
“오우. 오늘은 무슨 메뉴를 적어서 이렇게 잘 나왔어?”
“장난삼아 하정아의 아침식사라고 적어봤어.”
“…그럼 우리 하정아 아침식사를 뺏어먹는 거야?”
아침식사를 고스란히 복사한건지, 물리적으로 뺏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골 때리는 장난임은 틀림없
었다.
전자라면 우리만 웃고 넘어갈 일인데 후자라면 하정아는 느닷없이 아침식사가 실종된 거다.
“역시 이런 메뉴는 그만두자. 너무 민폐야.”
“그래도 도령이도 궁금한 사람이 있지 않아? 이 사람은 어떤 아침식사를 먹을지 알고 싶다, 하는 사람이
라던가. 히힛. 표정 보니까 떠오르는 사람이 있구나?”
“음… 개인적으로는 로리 헤더웨이가 궁금해.”
이진태랑 장규아가 죽고 뭘 먹고는 다닐지 신경 쓰인다. 다음 날 아침에 확인한 그의 식단은 걱정해서 손
해 봤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맛있는 철갑상어의 캐비어였다.
하정아의 식사처럼 만한정석은 아니더라도 작은 양이나마 맛이 충족되는 식단에 재미가 들려 며칠을 내
리 로리 헤더웨이의 식단을 쪽지에 적었더니 신기한 일도 생겼다.
“앗, 디저트로 나온 아이스크림 안에서 쪽지가 나왔어!”
“이건… 포춘쿠키인가?”
음식 안에 쪽지를 넣어둔 덕인지 로리 헤더웨이가 남긴 쪽지가 우리에게도 전해졌다.
[내 음식 그만 훔쳐가세요] [나한테 왜 이래요] [돌려줘요 내 캐비어]“…쪽지로 아침식사를 뺏어먹는 건 그만하자.”
“응…….”
식사자리에서의 즐거움이 하나 줄었다고 우리의 일상이 지루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지난 1년보다는
다음 1년이 더 즐겁고, 지난 10년보다는 다음 10년이 더 행복했다.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어느 날, 민지의 마주잡은 손이 차갑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태어난 때는 달라도 갈 때는 같이 가자더니.’
나보다 먼저 수명이 다해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민지의 얼굴은 으레 죽은 자들이 짓는 고통어린 표정
대신 평안한 행복이 느껴지는 잔잔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당신의 초능력이 긴 인생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래. 긴 인생이었지. 하지만 이제는 끝이야. 이번 회차는 마지막이고, 민지가 죽을 땐 나도 죽기로 결심
했으니깐.’
▷당신의 초능력이 죽음이 두렵지는 않느냐고 묻습니다.
‘전혀.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사는 게 두려웠지. 그런 점에서 난 이제 두려울 게 없어.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
았으니까. 넌 어때. 민지와 함께 보낸 지난 세월, 만족했어?’
▷당신의 초능력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한 때는 음험하고 불길한 알림창만 띄우던 선택능력도 평화로운 나날에 감화된 것처럼 차분하고 온화한
성향으로 변화했다. 이제는 이 능력이 마치 내 아이처럼 느껴졌다.
한참 회귀를 반복하고 서로 등처먹을 생각만 하던 시절이라면 어림도 없겠지만, 지금은 끝을 앞두지 않았
는가.
▷당신의 초능력이 고맙다고 말합니다.
‘뭐가 고마워?’
▷당신의 초능력이 회귀의 끝을 맞이하겠다고 결심을 내린 것이 자신에게도 안식과 평화를 선사해주었
다고 말합니다.
지금껏 궁지에 몰려 무엇을 희생할지, 누구를 죽여야 할지나 선택해야 했던 선택능력은 이번 7회차의 지
난 수십 년간은 전혀 다른 선택만을 해왔다.
민지를 기쁘게 하려면 어느 색의 꽃이 좋을지, 어떤 모양의 눈사람이 좋을지 따위를 선택했다. 그 시간은
나와 민지뿐만 아니라 [강제하는 선택] 능력에게도 뜻 깊은 시간이었다.
‘미안하다. 좀 더 빨리 이런 기쁨을 느끼게 해주지 못해서.’
▷당신의 초능력이 지난 과거를 모두 부정하지는 말라고, 강적을 상대로 함께 싸워왔던 경험들도 무척
스릴 있고 즐거웠다고 말합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 신진대사를 늦추며 천천히, 마치 깊은 잠에 빠지듯이 심장박
동을 늦췄다.
최고나 최선은 아닐지라도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온 지난 나날들의 기억들.
때로는 힘들고 때로는 즐거웠던 순간들의 끝에 웃으며 손을 내미는 민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늦었잖아.
-미안. 그래도 금방 따라왔어.
멋쩍은 미소를 마지막으로 온 몸의 감각이 사라졌다.
지난 모든 회차를 통틀어 가장 평온한 마지막이었다.
***
▷당신은 죽었습니다.
▷7회차 종료
▷사인 : 인위적인 신진대사 조절에 의한 자살.
▷회귀가 종료되었습니다.
▷클리어 점수 계측이 생략됩니다.
▷End No.2 : Happy Ending – 두 사람만의 세계(EX)의 열람을 완료했습니다.
▶마지막 엔딩을 열람하시겠습니까?(Yes / No)
▷정상적이지 않은 접근입니다.
▷마지막 엔딩의 열람을 권장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초능력이 그런 선택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접속이 부정되었습니다.
▷접근이 부정되었습니다.
▷허가가 부정되었습니다.
▷경고. 경고. 경고.
▷End No.3의 파일에 심대한 정신오염 가능성이 감지되었습니다. 해당 엔딩의 위험성이 지나치게 막대
합니다. 열람자의 정신이 파괴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모든 경고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마지막 엔딩을 열람하시겠습니까?(Yes / No)
의 IF격 파멸엔딩 외전입니다. 사실상의 정식엔딩은 7회차이므로 본편은 완결을 낸 셈이지요!
연재하면서 몇 달간 몸이 너무 아파서 집필하기 유독 힘든 글이었기에 작가의 본체도 기가 고갈된 느낌이
네요 ㅠㅠ
엔딩 3는 며칠 정도 쉰 뒤에 짧게나마 내보고자 합니다. 파멸엔딩의 구상은 정해져있는데 히미코엔딩은
생각해본 적도 없어서(…) 겸사겸사 고민해봐야겠네요!
[■■■회차] 끝내지 못한 자의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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