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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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날 준비
“누나.”
혜진은 동생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깨어났다.
“일어나. 긴급상황이야.”
“……긴급?”
잠이 싹 달아난 그녀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일단 옷부터 입어. 같이 나가자.”
“어, 응. 알겠어.”
세현이 방 밖으로 나가자 한혜진은 급히 옷장 문을 열었다. 자는 도중에 긴급하게 뛰쳐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서 바깥에서도 입을 수 있는 편한 트레이닝복을 입었다. 딱 겉옷만 걸치면 되는 상태였다.
그녀가 빠르게 옷을 입고 나오자, 세현은 그녀의 복장을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내 뒤에 있어. 나한테서 멀어질수록 위험하다는 거 명심하고. 알겠지?”
“응.”
혜진을 마지막으로 돌아본 후 곧장 현관으로 움직여 신발을 신는다. 그리고 조용히 문을 열었다.
띠리릭-
적막한 복도에 전자도어락 소리가 울린다. 세현이 저질렀던 살해의 증거들, 피와 시체들은 어느새 사라진 후였다. 그 대신 정체 모를 몇 개의 덩어리들이 계단과 반대편 구석에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었다.
세현은 이미 알고 있었다. 현관문 바깥에서 그가 죽였던 시체를 탐해 증거를 치워준 괴물이 있다는 것을. 고맙게도 말이다.
놈은 시체를 먹는 것에 만족하고 그대로 돌아섰는데, 그건 서로에게 꽤 운 좋은 일이었다. 물론 괴물에게 적용되었던 행운은 이제 끝났다.
으아아아악!
위층에서부터 비명소리가 울려왔다. 괴물은 내키는대로 움직여 이제는 위에서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 예상대로라면 아마 내려오면서 자신이 들르지 않았던 집들을 다시 한 번 훑을 것이다. 허기가 사라지면 사냥을 멈추는, 그런 종류의 생명체로는 보이지 않았으니까.
문득 뒤를 돌아보자 혜진이 몸을 덜덜 떨면서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주먹을 쥐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상황에 엄청나게 긴장한 모습이다.
“긴장 풀어.”
“응.”
“과하게 긴장하면 안 좋아. 오히려 굼떠지니까.”
여전히 경직된 채 고개를 끄덕이는 혜진을 보던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녀의 손을 잡고 내공을 흘려넣었다.
손에서부터 따스한 느낌이 퍼져 전신을 휘감았다. 혜진의 잔뜩 굳었던 몸이 스르륵 풀렸다. 그녀가 얼핏 웃어보인 순간, 다시 위쪽에서 비명과 함께 끔찍한 소리가 울렸다. 그녀의 몸이 다시 굳었다.
“이대로 가자.”
둘은 손을 잡은 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 어디 가는 거야? 방금 위에서 비명지른 거 아냐? 그런데 왜 가?”
“잡으러.”
“꼭 가야 돼?”
“내려오면서 다시 해를 끼칠지 모르잖아. 딱히 피할 이유도 없고.”
콰르릉!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이 친다. 사납게 휘몰아치는 비바람이 음산함을 더했다.
공포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상황에 혜진은 극도로 긴장했다. 주저앉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오로지 맞잡은 동생의 손에서 흘러오는 따뜻한 기운 덕분이었다.
철퍽… 철퍽……
그때, 빗소리 중에도 계단을 울리는 선명한 물소리가 있었다. 혜진은 숨쉬는 것조차 잊고 기척을 죽였다. 세현 역시 계단을 오르던 것을 멈추고 놈이 오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마침내, 점점 커지던 물소리가 윗 계단 모퉁이를 돌아 정체를 드러냈다.
전신이 물로 이뤄진 듯 반투명한, 오랑우탄과 같이 긴 팔에 언뜻 보기에 두꺼비를 닮은 머리를 가진 외형, 그리고 투명한 몸체 안에서 징그러운 느낌의 선홍빛 정체모를 내장기관들이 꿈틀거리는 괴물이다.
쿠르륵!
물이 부글거리는 듯한 소리를 낸 녀석이 붉은빛 유리알 같은 눈을 굴려 세현을 쳐다봤다. 혜진은 비명을 지르려는 입을 틀어막았다.
놈의 입이 벌어졌다. 동시에 세현의 손이 들렸다.
퍼억!
끼아아아아악!
파열음과 함께 사방으로 분홍빛 살점들이 비산한다. 괴물의 비명이 쩌렁쩌렁 울렸다. 입에서부터 시작된 혀는 중간이 완전히 짓이겨 끊어진 채였다.
계속해서 비명을 지르던 괴물이 한순간 분노 가득한 움직임으로 전력을 다해 계단을 내려왔다. 물로 이뤄진 몸이 던지듯 뛰어오르는 순간, 세현은 다시 손을 뻗었다.
자색빛 궤적이 그어져 괴물의 몸체를 중앙, 선홍빛 내장을 꿰뚫었다. 괴물의 몸이 달려들던 기세 그대로 허물어지며 사방으로 대량의 물을 쏟아냈다.
순식간에 혜진을 끌어안고 물러선 세현 덕에 둘 모두 젖지 않았다. 그는 혜진을 다시 내려놓으며 물바다 중앙에서 경련하는 내장기관을 유심히 살폈다.
꿰뚫린 구멍에서 끊임없이 울컥이며 핏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도저히 내장의 크기에 맞지 않는 엄청난 양의 혈액이다.
“으욱…!”
코에 직접 달라붙는 듯한 진득한 피비린내에 혜진이 헛구역질을 했다. 세현은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말했다.
“확실히, 좀비가 전부가 아니네. 조만간 떠나야 될 듯한데.”
“……어디로? 생각해둔 곳은 있어?”
“방어에 용이하면서 괴물들한테 쉽사리 무너지지 않을 만한 곳. 식량이나 생필품 같은 것들을 많으면 더 좋고.”
하지만 그런 완벽한 조건의 건물이 대체 뭐가 있을지, 말을 꺼낸 세현도 선뜻 떠올릴 수 없었다. 당장 생각나는 곳들은 한두 명이 방어하며 지내기엔 지나치게 넓은 곳들 뿐이다.
아아아아악…!
건물밖 멀리 어딘가에서 사람의 비명이 들려왔다. 이 물로 이뤄진 괴물, 세현이 내심 물두꺼비라 이름 붙인 괴물의 침략을 받은 곳이 이 아파트 동만은 아닐 것이었다.
“사람을 모아야 돼.”
“뭐라고?”
갑작스런 혜진의 말에 세현이 고개를 돌렸다.
“우리 둘만으로는 무슨 일을 하려고 해도 손이 부족하잖아. 너는, 너라면 구심점이 될 수 있어.”
“……”
솔직히 의외였다.
혜진은 여전히 겁먹은 표정이었지만 눈빛은 선명했다. 결코 사고가 흐트러진 모습이 아니다.
“언제까지 둘이서 도망만 다닐 생각이 아니면, 사람들을 구하고 안전한 곳으로 모으자. 그렇게 거점 같은 걸 만들면 결국 우리한테도 도움이 될 거야. 그렇지?”
“……그렇겠지.”
“지금 말해봐. 가능할 것 같아? 어려울 듯하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충분히 가능해. 음…… 그래, 가능해. 누나 말이 맞아.”
그는 항상 방관자였다.
무림에서 60년이란 세월을 보내며, 그곳에서 온갖 사건사고에 휘말리고 다양한 인연을 쌓아 지도자의 위치까지 올랐어도 그는 방관자이며 또한 운명의 순응자였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상황이 선택을 강요하기 전까지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여본 적이 드물다. 그가 무림에서 이룩했던 것들은 그저 살아남기 위해 발악하는 도중 저절로 따라온 것들이었다.
그렇게 살아남은 세월이 무려 60년이니, 습관이 될 만도 했다. 혜진이 말하기 전까지 그는 전혀 적극적으로 움직일 마음이 없었다. 그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냥 상황이 변하는 것에 따라 움직이려고 했다.
미래를 대비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그가 무림에서 살아온 방식 그대로였다.
적극적으로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닌, 수동적으로 상황에 맞는 최선의 선택을 내리며 무사평안하게 살아남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방식.
무엇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전자든 후자든 각각의 장단점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기존의 사회체계가 완전히 붕괴했을지도 모르는 이 혼란 속에서라면.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편이 더 많은 것을 거머쥘 수 있을 것이다.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다. 굳이 예전의 방식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것도 정을 내리칠 이가 있을 때의 이야기, 극소수를 제외한 기존의 권력자들은 모조리 몰락할 것이다. 혼돈이 지나간 후에는 반드시 새로운 질서가 도래하는 법.
문득 세현은 다시 혜진을 쳐다봤다.
바로 지금, 만들고 싶은 질서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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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가 무너지잖아. 천천히 해도 괜찮으니까 정확하게 움직여.”
세현의 엄격한 지적에 혜진은 흐트러지던 자세를 다잡았다. 하지만 십 초도 지나지 않아 슬금슬금 다시 자세가 무너진다.
다리를 굽혀 앉으며 손을 바닥에 짚고 다리를 쭉 피면서 팔굽혀펴기 한 번, 그리고 다리를 원위치시킨 후 일어서며 점프 한 번.
흔히 버피테스트라 불리는 운동을 혜진은 벌써 50회 째 하고 있었다. 평소 운동과는 별로 연이 없던 그녀였기에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땀을 줄줄 흘려대는 것이,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버텼다. 이를 악물고 움직이는 신체에서 아지랑이 같은 열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평소 운동을 하지 않는 사람이 버피를 정확한 자세로 50회 넘게 하는 것은 엄청나게 힘든 일이다. 그냥 버피도 아니고 팔굽혀펴기와 점프까지 합친 버피다. 그런데도 혜진은 버텨내고 있었다.
모두 세현이 해준 벌모세수 덕분이다. 전신혈도가 타통된 그녀의 몸은 이미 일반인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 운동을 하면 할수록 그것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여 더욱 강해지는 마법 같은 육체다. 내공의 축기 역시 범인보다 몇십 배는 빠를 터였다.
그녀가 가진 광휘술사라는 직업과는 별개로, 세현은 자신의 자하신공을 가르쳐줄 생각이었다. 이미 자신의 몸에서 마력은 내공과 서로 간섭하지 않는 별개의 힘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체크했다. 광휘술사라는 직업에 충실한다면 무공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안 배우는 것보단 확실히 나을 것이었다.
“그만.”
“으윽.”
세현의 그 말에 혜진은 곧장 벌러덩 드러누웠다.
“주, 죽을 거 같아.”
“엄살은. 잠깐 그대로 있어.”
그는 드러누운 혜진의 옆에서 팔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손에서부터 일어난 은은한 자색빛 기운이 잔뜩 지친 혜진의 몸속으로 순식간에 빨려들어간다.
혜진은 몸에 들어와 뜨거운 느낌과 함께 사방으로 흩어지는 자하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게 내공이야?”
“맞아. 지금 하는 건 추궁과혈이라는 거야.”
“그게 뭔데?”
“음…… 보다 발전된 안마기술이랄까.”
고난이도의 기공술인 추궁과혈을 고작 안마기술로 폄하시킨 세현은, 말과는 다르게 상당히 집중하고 있었다.
기를 통해 뭉친 근육과 기혈을 풀어주고 내구성까지 올려주는 작업이다. 실수한다고 큰일이 나는 건 아니지만 좋을 것도 없다. 아무렇게나 해서는 안 되는 작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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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재밌게 읽으셨길 바랍니다. 추천 꾹! 부탁드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