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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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
세현의 능숙하고 정성어린 추궁과혈을 받고 신체상태가 점점 좋아지는 것을 느낀 혜진이 울상을 지었다.
몸의 컨디션은 더없이 좋아졌지만 이게 끝나면 다시 그 지옥 같은 버피를 해야 한다.
“다 됐다. 그럼 이제……”
“이제 짐 싸야지!”
“아니, 그건 내가 할 거야. 버피 50회 실시.”
“히잉……”
“귀여운 척 말고, 실시!”
혜진이 투덜거리며 일어나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몇 번 호흡을 고른 후 운동을 시작했다.
“지금 흘린 땀만큼 나중에 피를 덜 흘릴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움직여.”
힘드니까 말 걸지 말라는 표정으로 혜진은 열심히 운동했다. 잠시 그런 누이를 지켜보던 세현은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커다란 가방에 짐을 싸기 시작했다.
여행용 가방 3개에 가져갈 수 있는 모든 것을 차곡차곡 집어넣는 중이었다. 이걸 그대로 매고 간다면 세현은 몰라도 혜진은 상당히 고생할 정도로 꾸역꾸역 밀어넣었다.
당연히 이걸 그냥 들고 다닐 생각은 아니었다. 전에 괴조를 처치하고 얻었던 노란색 룬 하나로 상점에서 ‘아공간 주머니’를 구입했다.
아공간 주머니, 이름에서 연상할 수 있는 바로 그 기능을 가진 주머니였다. 허리춤에 찰 수 있을 정도로 작지만 입구가 고무줄처럼 크게 늘어나고 안에는 시커먼 어둠이 가득하다. 상점의 설명대로라면 지금 그가 챙기는 짐 정도는 무리없이 넣을 수 있을 터였다.
한참을 그렇게 짐을 싸고, 지친 혜진을 추궁과혈 해주던 세현은 마침내 누이가 더 이상은 절대 운동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서야 말을 꺼냈다.
“이제 자하신공을 가르쳐줄 거야.”
세현은 드러누워 다 죽어가는 것처럼 헥헥대는 혜진을 다독여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명문혈에 손을 대며 자신도 자세를 잡았다.
“절대 입 열지 마. 되도록이면 움직이지도 말고.”
“저번처럼?”
“그래.”
물론 그때만큼 과격하게 기를 운용할 생각은 없었기에 설혹 혜진이 갑자기 움직이거나 말을 한다고 해도 위험한 일은 없다. 그래도 움직이면 방해가 되니 다시금 주의를 줬다.
“그럼 시작한다.”
그 말과 함께 내공이 혜진의 몸으로 들어가 자하신공의 경로를 돌기 시작했다.
혈도의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혜진에게 구결을 설명하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다. 이렇게 일단 몸으로 체득하게 만든 후 혈도에 대한 공부는 따로 시키면서 천천히 알려주는 게 효율적이다.
자하신공의 전수를 끝내면 마지막으로 이곳에서 밤을 보낸 후 떠날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한 준비였다.
상념을 접은 그가 다시 내공의 운용에 정신을 집중했다. 혜진이 확실히 기억할 수 있도록 반복해서 돌려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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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딜 갔다가 이제야 와! –
찢어지는 고함과 함께 울음이 터져나왔다.
세현은 현관에 그대로 주저앉아 서럽게 울기 시작하는 초췌한 모습의 누이를 보고 말문이 막혔다. 목구멍에 무언가 틀어박힌 듯해 미리 준비했던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정말로 보고 싶었다.
자신의 60년이 이곳에선 고작 일주일이었다는 것을 알고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저주를 퍼붓던 하늘에 감사를 표할 정도로.
그런데, 그 일주일도 혜진에겐 말 못할 고통이었던 듯했다. 얼굴만 봐도 아무런 연락이나 단서 없이 종적이 묘연해진 동생을 얼마나 걱정했을지 눈에 선하다.
가족이란 게 그렇다.
평소 그다지 의식하지 않고 의지할 일이 없더라도, 갑자기 없어지면 그 걱정과 불안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특히나 그들 남매는 부모도 없이 서로를 의지하며 커온 탓에 더더욱 그랬을 것이었다.
서로가 모든 일을 의논하며 해결해왔다. 세상에서 온전히 믿을 사람이라곤 서로가 유일했다. 그만큼 사라졌을 때의 여파도 컸을 것이다.
– 미안해. –
그가 원해서 사라졌던 게 아니다. 여기에 오기까지 생사고비를 수도 없이 넘었고, 남들은 감히 상상하지도 못할 험난한 가시밭길을 걸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주저앉아 우는 혜진의 손을 잡으며 사과했다.
진실로, 오래도록 그리워하며 잡고 싶었던 손이었다.
– 정말 미안해. –
거기서 세현은 눈을 떴다.
잠결에 흘린 약간의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몸을 일으킨다.
무림에서 지구로, 집으로 돌아왔을 때의 일이다. 왜 이런 꿈을 꿨을까, 어쩌면 오늘 이 정든 집을 떠나는 날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잠시간 멍하니 꿈을 회상하며 잠을 떨쳐낸 그는 곧 화장실로 향했다. 세수를 위해 세면대 앞에 섰는데, 공교롭게도 물이 나오지 않는다.
“……음.”
딱 떠나기로 한 날에 물이 끊기다니,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하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그는 욕조에 받아놓은 물로 가볍게 씻기를 마친 후 부엌의 냉장고 문을 열었다. 역시나 전기가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냉장고 안에 있던 식량은 어제 모조리 아공간 주머니로 옮겼다. 주머니 안에서는 음식이나 물건이 변질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기능이 없었다면 음식들을 모조리 버려야 했을 거다.
“일어났네?”
그때, 혜진이 방문을 열고 나오며 말을 걸어왔다.
“방금 일어났어. 누나도 씻어. 받아놓은 물 있으니까 그걸로. 물이 끊겼더라고. 전기도 끊어졌고.”
그러면서 세현은 열린 냉장고 문 안쪽을 가리켰다. 혜진이 약간 무거운 표정으로 음, 하는 소리를 냈다.
“오늘 떠나는 거 알지?”
“알아.”
혜진이 화장실로 들어갔다. 누이가 씻는 사이 세현은 마지막으로 집안을 돌아다니며 더 챙길 만한 물건이 없는지 살폈다.
그렇게 한 시간 후, 그들은 현관을 나서 문을 닫았다.
평소와 같은 도어락의 전자음이 어쩐지 아련하다. 더 이상 이 소리를 들을 일은 없을 것이다.
“회사가 그리워.”
계단을 내려가며 혜진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그렇게 가기 싫던 곳인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까 거기도 막 가고 싶어져.”
“일상이 그리운 거지.”
세현이 웃으며 한 말에 혜진도 머뭇거리다 마주 웃었다.
“내가 계속 이러면 안 되겠지? 너도 걱정이 많을 텐데.”
“괜찮아. 원래 그랬으니까. 뭘 새삼스레……”
“뭐라고?”
약간의 농담과 함께 투닥거리던 둘이 밖으로 나오자 떠오른 해가 거리를 환하게 비추는 중이었다.
아직 일주일도 안 됐는데 사람의 관리를 받지 못한 단지 내부는 완전히 엉망이었다. 여기저기 흩뿌려진 정체모를 고깃조각들과 핏자국, 찢겨진 옷가지와 주인 잃은 신발, 방치된 차량과 파손되고 헤집어진 보도블럭 등이 눈에 띈다.
그리고 어제 내린 장대비 때문인지 대부분의 땅이 얼음으로 덮여있었다. 이건 좀 귀찮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아니라 혜진에게.
“캬아아아악!”
마지막으로, 길 한가운데에 사지가 모두 부러진 채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좀비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캬아아악! 캬아아-!”
“시끄럽게.”
놈은 팔다리가 전부 부러졌는데도 어떻게든 그들에게 다가오기 위해 몸부림치는 중이었다.
저놈을 저렇게 만든 건 분명히 어떤 사람일 터, 어떻게 죽이는 지 몰라서 저런 식으로 처리해놓은 듯하다. 머리가 반절 이상 으스러졌는데도 움직이는 걸 보고 완전히 질려버렸을지도.
푹!
“칵…!”
다가가 오른쪽 어깨를 찌르자 좀비는 언제 움직였냐는 듯 축 늘어졌다. 시야 오른쪽 구석에서 희미하게 떠오르는 경험치와 룬 획득 메시지를 일별하며, 천천히 다른 쪽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가족끼리 피난을 가려는 건지, 부부로 추정되는 남녀 한 쌍과 딸로 짐작되는 젊은 여성이 보인다. 셋이서 각자 배낭을 하나씩 짊어진 채였는데, 가장으로 보이는 남자는 피묻은 알루미늄 배트를 들고 있었다.
“저기, 설마 한세현?”
그 중 젊은 여자가 갑자기 그에게 아는 채를 해왔다.
정확하게 이름을 불렀다. 세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얼굴이 눈에 익긴 익는데, 누군지 좀처럼 떠오르질 않는다.
“……누구신지?”
“나 기억 안 나? 김유린!”
“김유린?”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되짚었다. 반백 년이 넘는 세월을 무림에서 보냈다. 그렇지만 간신히 하나의 이름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여자애다. 외모도 괜찮고 성격도 활발해서 사랑까진 아니지만 은근히 마음에 두었던 기억이 있다. 영화 한 편 보자고 데이트 신청을 했다가 단번에 거절당했던 것도 같이 떠오른다.
이 동네에 산다는 건 얼핏 들었었지만 설마 여기 살고 있었을 줄이야. 인연이라면 인연이다.
“그래. 기억난다.”
그때쯤, 세 사람은 세현과 혜진에게 접근해 일정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잘 지냈어? 아니, 그러니까…… 지금 이런 얘길 할 상황이 아닌가?”
“반가워요. 김인환입니다.”
그때, 김유린의 아버지가 먼저 앞으로 나서며 손을 내밀었다.
“……네, 저도.”
세현도 마주 대답하며 검을 옮겨잡고 악수했다.
일단 태도가 썩 마음에 든다.
딸의 친구라고 대뜸 반말을 하는 것이 아닌, 협력이 가능한 한 명의 성인으로 보는 자세다. 이런 상황에서 현명한 대처라 할 수 있다.
“유린이하고 친구인 듯한데, 같이 동행하는 게 어때요? 따로 움직이는 것보단 안전할 겁니다.”
최소한의 신뢰를 가질 수 있는 상대라 생각해서 손을 내미는 듯했다. 어쩐지 사업가 같은 냄새를 풍긴다.
세현이 별다른 대답이 없자 김인환은 다시 물어왔다.
“혹시 따로 정해둔 목적지라도?”
“마트부터 들러서 필요한 걸 챙길 생각이었습니다.”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닌 듯한데요.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게 움직일 것 같은데, 만약 그러면 괴물들이 사람을 쫓아 거기로 몰려들지도 모릅니다.”
“그럴지도요.”
세현도 그 정도는 짐작했다. 다만 거기에 뭐가 있든 다 처리해버릴 수 있으니 가려고 한 것이다.
그는 문득 이 남자가 무슨 계획을 갖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베라 호텔로 갈 겁니다.”
“베라 호텔?”
“걸어서 두세 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곳인데, 아직 내부 인테리어가 안 끝나서 오픈하지 않은 곳이거든요. 아마 조만간 오픈할 예정이었을 건데, 어쨌든 거기엔 당장 사용할 수 있는 물자가 꽤 많을 겁니다. 운 좋으면 식자재 같은 것도 냉동고에 있겠죠. 오픈을 안 했으니 사람도 없을 것이고, 그러면 괴물이 있을 확률도 낮을 테고.”
“음…… 괜찮네요.”
빈 호텔이라.
방비만 잘 한다면 잠깐 머물기엔 나쁘지 않을 듯하다. 위층이 아닌 아래층을 주로 사용하면 유사시 도망가기도 편할 것이고.
“그래도 좋기만 한 건 아니고 위험할 수 있습니다. 거기가 꽤 번화가라서, 가는 길에 괴물들을 많이 마주칠지 모르거든요. 어쩌면 호텔 안에 특수한 괴물이 있을지도 모르고.”
김인환은 그때 세현이 든 검과 죽어버린 좀비를 힐끗거렸다.
“그런데, 그거 진검이지요? 방금 전에 저걸 찌르시던데.”
“네.”
“좋네요. 같이 가실래요?”
“아뇨.”
세현은 바로 거절했다.
“마트부터 들를 겁니다. 필요한 게 있어서.”
“……위험할 텐데.”
그렇게 말하며 김인환은 세현과 혜진의 모습을 살폈다.
아공간 주머니에 짐을 챙겼지만, 그걸 모르는 이의 눈에는 아무런 짐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짐이 없다는 것은 당장 먹을 식량도 없다는 뜻이다.
냉철한 사업가처럼 보였던 중년의 얼굴에 은근한 갈등이 서렸다. 옆에 있던 김인환의 아내가 그걸 눈치 챈 듯, 얼른 뒤쪽으로 그를 끌고 가더니 속닥거렸다.
– 제발 그러지 좀 마. 괜히 우리까지 위험해지잖아. 당신은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러고 싶어? –
– ……그래도, 아직 애들이잖아. 유린이 친구라고. –
– 그러니까, 지금 유린이까지 위험해질지도 모르잖아! 그래도 괜찮다는 거야? –
– 나쁘게만 생각하지 마. 검을 들고 있잖아. 그리고 방금 좀비 죽이는 거 못 봤어? 같이 움직이면 분명 도움이 될 거야. –
– 아무리 무기가 있어도 괴물들이 사방에서 달려들면 어떻게 배겨? 그리고 쟤가 나쁜 마음 먹으면, 그땐 또 어떻게 할 건데? 당신 말처럼 칼을 들고 있잖아? –
그들 나름대로는 들리지 않게끔 속삭이는 건데, 당연하게도 세현에겐 모두 들렸다.
무인들이 사용하는 전음까지 엿들을 수 있는 그다. 일반인의 속삭임을 듣는 것은 아무것도 안 해도 가능한 일이었다. 오히려 듣지 않는 게 더 어렵다.
“세현아,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그냥 우리랑 같이 가자. 응? 혹시 먹을 것 때문이면 조금 나눠줄 수도 있어.”
“얘는!”
김인환과 귀엣말로 옥신각신하던 여자가 놀라서 김유린을 불렀다.
하지만 이미 내뱉어진 말, 그녀는 곧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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