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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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
세현은 날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한 번 발을 내딛을 때마다 십여 미터 이상을 죽죽 미끄러지는데, 그럼에도 주위는 아무런 변화 없이 마치 유령이 지나간 것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예전에 그가 움직일 때마다 주변에 광풍이 불어닥치던 것과는 아주 대조적인 장면이다.
딱히 주의를 기울여 주위에 영향이 안 가도록 통제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조용히 움직이는 편이 정신사납지 않고 더 낫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주위 마력이 알아서 동조하며 직접 신경 써 통제하는 것처럼 모든 반향을 소거시켰다.
그건 일정 명백히 세현의 통제를 벗어난 일이었다. 이 세계 자체가 알아서 협조해주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자연스레 떠나기 전 유르미아를 보러갔다가 마주한 레야의 말이 떠오른다.
– 폴바르, 당신은 점점 신이 되어가는 중이군. 내 본신이 그랬던 것처럼. –
약간이지만 머릿속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스스로 어렴풋하게만 눈치채가던 것을 정면에서 알려주었으니 그럴 수밖에.
허나 세현은 그에 너무 구애받지 않았다. 그 말을 한 레야도 사실은 신이 된다는 게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 강대하던 수호룡조차 정말로 신이 되어본 것은 아니니까.
자신의 길은 스스로 개척하는 법, 그는 여태까지 혼자서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이겨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투콰학!
기분 내키는대로 힘주어 땅을 밟자 그의 신형이 포탄처럼 치솟았다. 곡선을 그리지 않고 일직선으로 레일건처럼 쏘아진 신형이 순식간에 하늘로 치솟아 구름 밑까지 날아오른다.
위에서 내려다본 한반도는 그리 넓어보이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아 가로지를 수 있을 만큼 작은 땅, 한때는 이 작은 땅조차 넓다고 여기며 살았는데.
이 조그마한 땅에 수를 헤아리기 힘든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게 새삼 신기하게 느껴진다. 마치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본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다.
누이 혜진과 함께 이 광경을 보면 좋아할 것 같다. 혜진이 좋아할 거란 생각을 하자 아엘라와 유르미아의 얼굴 역시 떠오른다. 유르미아는 아직 어리니까 좀 더 자라면 비행기를 태워줘야겠다. 김유린도 좋아할 것 같다. 아이 같은 성격의 제자이니 분명 좋아하겠지.
문득 어제의 대련이 떠오르자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합격술이라며 보여준다던 것은 과히 나쁘지 않았다. 반쯤 몸을 영체화시키며 조직적으로 달려드는 트윈테일들과 김유린의 합공은 꽤 제법이었다.
돌아가면 김인환과 신소진 그리고 이예슬의 무공도 점검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이, 그는 서울은 물론 휴전선까지 훌쩍 넘어 평양 지역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시선을 아래로 내려 지상을 살핀다. 안력을 끌어올리자 평범하던 갈색 눈이 진한 자색으로 물들며 그가 보는 광경을 망원경처럼 잡아당겼다.
세현은 어렵지 않게 지상에 자리한 길드성을 찾아냈다. 과연, 예전에 했던 추측이 맞았다. 서울에 길드성이 없었으니 그보다 위쪽에 하나 있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지금 그 길드성의 상태는 썩 좋지 않았다. 달려드는 좀비들을 상대하느라 상당히 바빠 보인다. 당장 달려드는 좀비들의 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그는 그 길드성을 지키는 이들이 무사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자색빛으로 물든 눈동자가 길드성에서부터 북쪽으로 향한다. 시야에 스치는 모든 곳에 좀비들이 보였다. 그 수는 북쪽으로 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 어느 순간부터는 땅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바노프의 보고가 맞았다. 아무리 적어도 천만 이상, 어쩌면 억 단위가 넘어갈 엄청난 물량의 좀비들이다. 그것들이 걸친 옷가지와 소지품 등에 간간이 새겨진 문자를 보니 대부분 중국에서 넘어온 것들이다.
과거부터 중국은 인해전술을 즐겨 사용했다. 이제는 인해전술에 이은 시해전술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의지가 아닌 다른 무엇인가의 의지에 따라.
세현은 그냥 지나가는 대신 그 엄청난 좀비들의 해일을 눈에 담았다. 원흉을 처리하러 가는 김에 대충 청소를 해두면 저 평양의 길드성에 있는 자들이 좀 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서울이 공격받는 시기도 뒤로 늦춰지겠지.
저 끝도 없이 많은 좀비들을 쓸어버리는 것에 가장 적합한 공격방법은 뭘까. 그것을 고민하며 천천히 힘을 끌어올릴 때였다.
그의 시선이 북쪽으로 돌아갔다. 그로서도 볼 수 없을 만큼 먼 곳에서 한 줄기 살의가 찌르듯 날아든다. 동시에 아래쪽에 우글거리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좀비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위로 치켜들어 세현이 있는 쪽을 노려봤다. 꽤 소름끼치는 장면이었다.
이것들을 조종하는 놈이 그의 존재를 알아챘다.
“……이 거리에서?”
아무래도 예상보다 더 재미있어질 모양이다.
@
느껴진다.
지금까지 만났던 것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력한, 취할 수만 있다면 단번에 그를 미답의 경지로 이끌어줄 향기롭고 거대한 힘이!
악마가 광소를 터뜨리며 손에 들고 있던 인간의 두개골을 으스러뜨렸다. 그곳에서 희미하게 뿜어진 영체가 비명을 지르며 허공을 배회하다 악마의 입 안으로 빨려든다. 비루한 시체들 대신 제법 지성이 있는 영혼체를 만들던 중이었는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 거기 가만히 있어라…! 제발…!! –
너무나 간절한 외침 이후 공간이 폭발했다.
– 이 하등한 세계에 너 같은 존재가 있었다니! –
쾅!
악마의 신형이 잔상과 함께 허공을 찢어발긴다. 펼쳐진 날개가 수십 배는 더 커지며 사방 하늘을 가릴 것처럼 펼쳐져 흩어지고, 그 찰나의 잔상이 스러지기도 전 이미 수 킬로미터 이상 뻗어나가는 움직임에 따라 대기가 폭발하며 주변을 초토화시켰다.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재앙, 백여 미터 아래이 있던 좀비들의 몸뚱이가 물풍선처럼 퍽퍽 터져나가며 피와 내장을 흩뿌린다. 그렇게 수천 마리의 좀비들이 학살당한 후에야 악마는 자신의 감각을 건드린 존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악마가 상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겉모습은 그가 여태껏 수도 없이 죽인 인간과 같았으나 악마는 속지 않았다. 저것은 인간이 아니다. 그 거죽을 뒤집어 쓴 무언가! 과거 자신의 목숨마저 위협하던 그 강대한 존재들과도 능히 견줄 수 있는, 어쩌면 그보다 더 강한 괴물 같은 존재!
뻗어진 손에서 붉은빛 섬광이 쏘아진다. 가느다란 레이저처럼 허공을 관통한 그것은, 마주 날아온 자색빛 탄지와 부딪혀 어마어마한 폭발을 일으켰다.
빛이 사방을 물들이며 완벽한 구형의 폭발이 급속도로 확장한다. 한 발 먼저 뿜어진 충격파가 근처 사방을 후려쳐 으깨버린다. 아래에 수도 없이 몰려있던 좀비들은 이번에도 벌레처럼 으깨지며 빛의 파도에 휩싸였다.
그 강렬한 충격파의 중앙을 아무렇지도 않게 통과한 악마가 인상을 찌푸리는 상대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음속을 아득히 초월한 공격이 소리조차 따돌리며 머리를 노린다. 그에 대응한 상대의 허리춤에서 번뜩이는 자색빛과 함께 칼날이 날아들었다.
다시 충돌, 그리고 예정된 폭발과 굉음, 충격파.
– 캬아하-!! 하하하하하-!! –
세상을 무너뜨릴 듯 발생하는 굉음마저 집어삼킬 광소가 쩌렁쩌렁 울려퍼진다. 악마의 검은 두 날개가 거대하게 펼쳐지며 두 눈에서 보랏빛 서광이 폭발하듯 뿜어졌다.
그야말로 악마(惡魔).
단순한 악마가 아닌 대악마, 마왕이라 해도 믿을 법한 끔찍하고 두려운 힘의 방출.
그 순간 재차 자색빛 섬광이 번쩍였다.
아니, 번쩍였다 싶은 순간 이미 도달한 청월(淸月)의 칼날이 악마의 검붉은 정수리를 가르고 그 안의 더 이상 질길 수 없는 근육과 이 세상 강도가 아닌 뼈까지 절단한 후 사타구니로 빠져나온다.
“시끄럽게.”
푸화악!
검은빛 피가 뿜어졌다. 머리부터 가랑이까지 갈라졌던 악마의 전신이 검은 안개로 부서져내린다. 그리고 십여 미터 뒤쪽으로 멀쩡한 악마의 모습이 나타났다.
– 아아, 너무나 기다렸다. 이 순간을 기다렸어. 그대를 먹는 순간 나는 완전해진다. 알 수 있어…… 확신이 든다! –
지저의 어둠이 으르렁거리는 듯 거슬리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사방을 울린다.
– 드디어,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버틴 내 기다림의 보답이 눈 앞에 있구나! 그대 이름이 무엇인가? 어느 세상에서 왔지? 그대는 얼마나 긴 인고의 시간을 버티고 얼마나 많은 고난을 헤치며 그렇게 강해졌는가? 그대도 내가 탐나지 않나? 분명 탐이 날 테지? 자, 어서 대답해줘라. 이름이 뭔가? –
“말이 많은 놈이군.”
– 말이 많다? 그래, 말이 많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마침내 운명의 순간을 눈앞에 두었거늘 내가 이…! –
스카카각! 카칵!
섬뜩한 절삭음이 터졌을 때는 이미 사방 허공에 자색빛 거미줄 같은 균열이 간 상태였다. 허나 악마는 이번에도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나갔다.
– 그만, 그만! 이런 역사적이고 위대한 순간을 앞두고 어찌 그리 인내심이 없는가! 이 경우 없는 것 같으니라고! –
“……경우가 없어?”
황당해서 중얼거린 그 순간 악마의 몸이 부서졌다. 동시에 한없이 확장된 어둠이 미처 피할 새 없이 주위 사방을 감싸며 세상 천지를 어둠으로 물들였다.
어둠에 갇힌 존재는 몇 번 눈을 깜빡인 후 한쪽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이윽고 어둠이 총천연색으로 물든다. 다시 어둠이 사라지고 세상이 드러나는 듯한 모습, 그러나 보이는 광경은 그가 방금 전까지 있던 지구가 아니었다.
낡은 옷가지를 입은 사람들이 주변을 스쳐 지나간다.
발성이 시끄러운 이계의 언어가 들리고 동아시아 모든 문화의 건축양식을 뒤섞은 듯한 목조건물들이 보인다.
얼굴에 흉터가 난 무인 한 명이 모퉁이를 돌아 나타나자, 주변에 있던 아낙 몇 명과 한량들이 얼른 길을 비켜섰다.
뒤이어 악마가 속삭였다.
– 그대는…… 놀랍게도 인간이군. 믿기 힘들지만, 내가 이곳에서 수도 없이 죽였던 인간이야. –
@
– 인간이 어떻게 이런 힘을 가졌지? 아무리 봐도 믿을 수가 없어. 그 연하디 연한 육신을 단련하고 조잡하기 짝이 없는 날붙이를 휘두르는 것만으로 이렇게 강해질 수 있단 말인가? 마력, 그래, 마력을 다루는군. 하지만 태생적으로 마력기관조차 없는 하등한 생물이 이렇게나 마력과 친화적으로 변하다니?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베벨비아의 리미라들조차 이런 식의 성장은 불가능할 터인데? –
말이 너무 많다.
이 악마는 정말로 말이 많았다. 처음으로 조우한 보라색 등급의 괴물이 수다쟁이 투 머치 토커라니.
하지만 놈이 가진 힘만은 진짜였다. 일단 그의 공격을 두세 차례나 피해없이 견뎌냈다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다.
새삼스레 샬란들이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이런 놈들을 두셋이나 막아냈다니, 그들의 문명이 원래 얼마나 번성하고 강력했는지 실감이 든다. 한 마리도 막아내지 못하고 멸망했다는 리오론도가 정상으로 느껴졌다.
이곳 지구 역시 그가 없었다면 이 악마는 온 세상을 멸망시키고도 남았을 것이다. 리오론도가 그러했던 것처럼.
세현은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지는 저잣거리의 광경을 보며 말했다.
“이 환영은 뭐지?”
– 환영이 아니라, 그대의 정신과 뿌리의 세계를 투사하는 것이다. 평탄치 않고 꽤나 피냄새가 나는군. 하지만 가진 힘에 비하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야. 인간 한세현, 그대의 이름이 맞는가? 맞겠지? –
세현은 잠시 이 악마와 어울려주기로 했다. 처음으로 조우한 보라색 등급의 괴물이니, 다짜고짜 죽이는 것보단 대화를 나누면서 정보를 좀 캐내야 할 듯하다.
“그렇다만.”
– 대단한 정신력과 도덕(道悳)심이로군. –
“도덕심?”
그가 헛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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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파트 시작입니다.
어제, 그러니까 월요일에 아버지 모시고 병원 갔다왔습니다. 11월 중순에 수술 스케쥴 잡았네요. 부디 이번에도 무사히 지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재밌게 읽으셨길 바라며 추천 꾹! 한 번 부탁드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