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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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의 증명
남색 등급 이상부터만 생각해도 꽤 된다.
이아노소그와 케르시타 여왕이 있었고, 남색 등급보다 강하지만 보라색 등급에는 살짝 못 미쳤던 크로나드의 파편이 있었다. 수호룡과 함께 최근에 상대한 악마는 명백하게 보라색 등급이다. 세현은 적어도 그 둘이 보라색 등급 중에서도 약한 편은 아닐 거라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그는 에레도스 사태가 발생한지 별로 오래되지 않았음에도 꽤 많은 수의 엄청난 강자들을 상대한 셈이다. 그가 들었던 다른 세계의 멸망 과정과 비교했을 때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사실 크로나드는 몰라도 수호룡의 경우, 그가 가진 ‘신성 파괴자’ 칭호가 아니었다면 만날 일이 없었을 존재다. 해당 칭호 아래에 있는 ‘에레도스의 눈이 주시한다’는 표현이 아주 의미심장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이 대단한 시스템이 주시하고 있다는 메시지가 결코 평범할 리 없지 않은가.
어쨌든 더 물어볼 것이 있다. 원로 천족이 말하는 내용 중 그가 몰랐던 게 많았다.
“보라색 등급이 어떻게 생기는지 말해줄 수 있나?”
– 그것은 말하자면 학살의 총화(總和)다. 에레도스에 의해 파괴된 세상이 무수히 많다는 것은 알고 있나? –
“그 정도는 알지.”
– 하나의 세상이 멸망하면, 그때까지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사용자로서의 권능을 박탈당하고 유민이 된다. 그렇게 시스템의 부산물처럼 다른 세상에 투입되는 거지. 하지만 그들이 성장 가능성까지 박탈당한 것은 아니야. –
세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아엘라에게서도 들은 내용이다.
유민, 그러니까 아엘라의 표현을 따르자면 이주자들 역시 사용자처럼 괴물을 사냥하는 것으로 힘을 키울 수 있다. 물론 인간을 사냥하는 것 역시 포함된다.
형식은 물론 다르다.
사용자처럼 상태창과 스킬창 등을 사용할 수 없다. 힘이 성장하긴 하나 그것을 원하는 대로 세세하게 분배할 수 없고 ‘스킬’이라는 편리하고 강력한 권능 또한 사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눈동자 색이 시스템의 체계에 따라 변한다.
– 대부분의 유민은 원 세계 주민들의 레벨 업을 위한 사냥감으로서 얼마 지나지 않아 죽는다. 간혹 협력하는 방식으로 살아남는 유민이 있지만 소수이고, 아주 희박한 확률로 원 세계 주민들을 역으로 사냥하며 힘을 키우는 존재들이 나타난다. 그들이 일정 수준의 강함을 이룩하면 폐쇄되지 않은 장소에서도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을 구축할 수 있게 되지. –
“필드형 던전.”
– 그래, 바로 그것. 그들이 토벌되지 않고 계속해서 힘을 키우다가 그 세계가 멸망하게 되면, 다시 다른 세계로 넘어가 영역을 구축한다. 그렇게 상상할 수도 없는 오랜 시간을 떠돌다 보면 결국은 보라색 등급이 되는 거야. 꾸준하게 지속해온 어머어마한 학살을 통해서. –
“그 외의 방법으로 보라색 등급이 된 존재가 없다는 건가?”
– 여태까지 알려진 바론 그렇다. 에레도스의 방식상 언젠가는 반드시 등장할 수밖에 없는, 합당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그 이상의 힘을 가진 부정(不正)한 존재들인 셈이지. 마치 용량이 제한된 항아리에 과도하게 부어져 쌓인 물과 같다. 그것이 어찌 자연스러울 수 있을까? 시스템이 그들을 어떻게 생각할진 모르겠지만 우리가 보기에 그들은 일종의 암세포야. 좀 더 들어볼 텐가? –
세현이 당장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할 이유가 없다. 자신들의 에레도스에 대한 분석을 알아서 들려준다는데, 이 기회를 걷어차는 건 바보나 할 짓이다.
– 그럼 자리를 옮기지. 시험은 통과다. –
“보상은?”
– 당연히 지급해줘야지. 저 수정구에 손을 올리면 두 가지 스킬과 전직 기회가 부여될 거다. –
세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당장 움직이는 대신 감독관 디크라엘을 쳐다봤다.
“내게 할 말이 있을 텐데?”
사과 요구였다.
그는 세현이 부정을 저질렀을 거라 확신했던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행동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서로 주고받은 모욕의 수준이 비슷하긴 하지만 원인을 따져보면 누가 잘못했는지는 명백하다. 게다가 세현은 먼저 한 수 접어주고 시험을 한 번 더 치루기까지 했다.
– 죄송합니다. –
그렇기에 감독관 디크라엘은 고개를 숙였다. 아니, 단순히 고개만 숙인 게 아니었다. 원로 천족이 나타났을 때처럼, 한쪽 무릎을 꿇으며 가슴에 손을 올렸다.
– 도전자 한세현, 그대의 말이 맞았습니다. 제 능력이 부족해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놓고 그대의 탓이라 모함을 했으니, 제 잘못을 인정합니다. 진정으로 사과드립니다. 또한 그대가 시험을 두 번이나 완벽하게 통과했음을 재고하여, 감독관의 권한으로 베메스타 크레움에서 통찰의 권능을 반출하겠습니다. –
– 통찰안을? –
가만 있던 원로 천족이 꽤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세현에게 말했다.
– 그 정도면 충분한 보상이겠군. 설명을 듣는 것보단 직접 보는 게 어떤가? 마음에 들 것이라 장담하지. –
통찰안이라 하니, 어떤 종류의 능력인지는 대충 추측이 된다.
“만약 마음에 안 들면?”
– 내 권한으로 바꿔주지. –
“좋아. 사과를 받아들이겠다.”
세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디크라엘이 자리에서 일어서 수정구로 향했다. 이후 손을 대고 눈을 감은 채 일 분 정도를 가만히 있다가 뒤로 물러섰다.
자신의 차례임을 안 세현이 두 천족이 그러했던 것처럼 수정구로 다가가 손을 올렸다. 표면에 손이 닿자 예상외로 물컹한 느낌이 든다. 동시에 전기장 같은 찌릿한 느낌의 파동이 순식간에 몸을 훑고 지나갔다.
– 사용자 한세현, 인증 완료되었습니다. –
– 칭호 ‘하늘의 시련을 통과한 자’를 획득합니다. –
– 특전 스킬 ‘통찰의 눈’을 획득합니다. –
– 스킬 ‘천상의 가호’를 획득합니다. –
– 스킬 ‘하늘의 날개’를 획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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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귀인 세현이 전직할 수 있는 직업은 ‘성검사’였다.
방어구 착용에 제한이 없고 검의 사용에 약간의 혜택을 받는다. 직업의 변경에 따라 처음부터 다시 선택할 수 있는 스킬들도 흥미로운 것이 많았다.
하지만 그는 진지하게 고민한 결과 전직하지 않기로 했다.
얻는 부분도 있으나 잃는 부분도 있다. 바로 공격력이다.
방어적 측면에서 이득이 꽤 컸지만 지금보다 공격력이 약해진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전직하는 게 더 좋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세현은 좀 다르다. 천상의 가호라는 사기적인 스킬까지 얻은 마당에 굳이 방어를 위해 공격을 포기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가 가진 ‘공격은 최선의 방어’라는 믿음은 여전히 굳건했다.
– 선택은 끝났나? –
“그래.”
– 아쉽군. 성검사가 된 그대를 보고 싶었는데. –
그 말과 함께 원로는 자신의 옆쪽으로 손을 휘저어 포탈을 만들어냈다. 이곳에 나타날 때와 같은 황금빛 포탈이었다.
– 바로 가지. 이야기하기 좋은 장소가 있으니. –
원로가 먼저 포탈을 넘는다. 뒤를 따라 움직이던 세현이 힐끗 옆을 쳐다봤다.
감독관 디크라엘이 제자리에서 오른쪽 손을 가슴에 대며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더 없이 정중한 태도였다.
그는 포탈을 넘으며 이들 천족에 대해 생각을 정리했다.
다소 선민사상에 물든 모습이 보이지만, 실제로 이들은 매우 뛰어난 종족이기에 그것을 탓하기가 애매하다. 되려 원로가 그를 대하던 태도나 감독관이 잘못을 인정하고 보상까지 챙겨주던 모습을 고려하면 상당히 깨어있는 종족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만 보면 천족은 선과 정의를 추구한다는 말이 과히 틀리지 않았다. 영원불멸할 지도자인 신의 존재와 오랫동안 쌓아온 문명 및 교육의 힘 덕이리라.
만약 인간이 이들과 같은 환경과 힘을 갖는다면 대체 무슨 꼴을 보여줄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모르긴 몰라도 엄청나게 추악할 게 분명했다.
포탈을 통과해 나타난 곳은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푸른 하늘을 아래로 온갖 아름다운 식물들이 자라난, 그리고 고급스런 원목 테이블과 의자가 놓인 아담한 장소다. 차 한 잔 마시며 사색을 즐기기에 더 없이 좋은 곳이었다.
– 어떤가? –
“괜찮군.”
– 차는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대접하지. –
원로는 세현에게 자리를 권하며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면서 손을 튕기자 원목 테이블 위에 희미한 빛이 서리며 찻잔과 병이 나타났다. 투명한 수정으로 된 병 안에 연한 주황빛 차가 가득 담겨있다.
– 아직까지 통성명도 안 했군. 피세티엘이라고 한다. 그냥 편하게 이름으로 불러도 좋아. –
“그래, 피세티엘. 아까 하던 이야기부터 바로 하지.”
세현은 제 집에 온 것처럼 병에 담긴 차를 찻잔에 따랐다. 원로 피세티엘도 병을 건네받아 자신의 찻잔에 차를 채웠다.
– 보라색 등급 존재들이 암세포와 같다는 이야기까지 했지. –
“그렇지.”
– 일단 처음부터 차근차근 이야기 해야겠군. 시작에 앞서, 내가 해줄 이야기는 정확한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두게. 그저 우리 천계의 학자들이 세운 그럴 듯한 이론일 뿐이야. –
그는 가볍게 차를 마신 후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에레도스는 끝없이 팽창하는 우주에서 마찬가지로 끝없이 생성되는 수많은 세계들을 적절히 제어하고자 만들어졌다. 관리 없이 방치한 우주는 언젠가 반드시 그 어떤 존재도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혼란 그 자체가 되어버릴 테니까.
무한한 가능성이란 그것이 무시무시한 재앙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태초부터 우주를 보아온 어떤 위대한 존재가 있었다면, 그는 제 아무리 작은 가능성일지라도 이 아름다운 우주가 파괴될 위험을 남겨두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 물론 누가 만들었는지는 추측도 못하고 있지. 그래도 한 가지 알아낸 건, 에레도스는 현재까지 알려진 그 어떤 세계보다도 오래되었다는 거다. –
어쩌면 우주의 시작과 함께 했을 수도 있다.
에레도스 시스템은 시시각각 팽창하는 우주를 따라 그 시작점일 어딘가에서부터 함께 팽창한다. 그렇게 영역을 넓히며 새롭게 생성된 세계를 만날 때마다 가치를 시험한다.
이 세계는 살아남을 자격이 있는가?
시련을 견뎌낸 세계는 시스템에 속하게 된 채 존속한다. 반대로 견디지 못했거나 혹은 에레도스를 거부하려 든 세상은 가차없이 파괴되어 사라진다.
– 알겠지만 에레도스는 마주친 세계의 현재 상태만을 따지지 않아. 제 아무리 약하고 쓸모없는 세계라도 성장할 기회를 주지. –
원 세계의 주민들은 사용자라는 권능과 함께 성장 가능성을 얻는다. 그리고 다른 파괴된 세계에서 넘어온 유민들을 상대하며 점차 강해진다.
그렇게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 세계는 시스템에 편입되어 살아남는다.
안전을 보장받음과 함께 행여나 발생할지 모를 혼란을 방지하는 억제력 또한 생긴다. 시스템에 의해 관리당하는 것이다.
“처음 에레도스가 시험했을 세계들은? 최초에는 유민도 없었을 텐데.”
– 최초엔 에레도스를 만든 존재가 직접 몇 개의 세계를 시험했을지도 모르지. 가치 없는 세계 몇 개를 골라낸 후에는 시스템이 알아서 할 수 있었을 테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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