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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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왕(神王)
“식량이 없었다는 모양입니다만, 부길드장님의 판단이 필요합니다.”
이바노프가 정중하게 말했다. 혜진이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생존을 위해 같은 사람을 먹었다.
그냥 용인하고 넘어가기 쉽지 않은 일이다. 간단하게 생각해봐도, 식량이 될 사람을 어떻게 골랐느냐부터 문제가 많다. 누군가 자진해서 희생했다거나 투표와 같은 민주적인 방식으로 골랐을 것 같진 않다.
동생의 의견을 물어볼까? 하지만 용인 길드성에 갔다는 말을 듣고 생각을 바꿨다.
“제가 가보죠.”
“알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같은 질문은 던지지 않았다.
혜진은 이바노프가 진정한 군주로 여기는 이의 누이, 달리 뚜렷한 문제점이 있는 것도 아닌데 옆에서 첨언을 하는 건 신하로서의 태도가 아니다.
해서 그들은 구출되었다는 그 생존자들에게로 향했다. 혜진이 포탈을 열고 이바노프와 정현욱, 그리고 박수진과 스무 명 정도의 정보요원과 감찰단원이 뒤따랐다.
장소는 평양의 길드성 근처에 있던 노동당원 전용 대피소 입구였다.
좀비들의 파상공세를 버티다 못한 길드가 무너지면서 다들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는데, 그 중 일부 사람들이 과거 대피용으로 만들어놨던 벙커의 위치를 알고 있어 그곳으로 대피한 것이다.
문제는 관리상태였다.
북한은 모두가 알다시피 식량기근이 심각하던 곳이다. 거기에 관리자들의 부정부패도 심했다. 덕분에 원래라면 벙커에 적재돼있어야 할 식량이 하나도 없었다. 과거 이곳을 담당하던 자들이 죄다 빼돌려 팔아먹은 듯하다.
주변 류한 전투원들이 모습을 드러낸 혜진 일행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가볍게 그 인사들을 받아넘기며 한곳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생존자들 이백여 명을 살폈다.
다들 추레한 행색에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구조됐다는 기쁨에 흥겨워하던 것도 잠시, 자신들을 구출한 사람들이 과거 남조선이라 부르던 지역에서 왔고 분위기도 마냥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을 느끼자 꽤나 위축된 기색이다.
그들은 지금 나타난 혜진을 보며 저들끼리 작게 수군거렸다. 복장도 다르고 주변의 류한 전투원들이 정중하게 인사까지 했으니, 현재 이곳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라는 건 확실히 알았을 것이다.
혜진은 잠시 이마에 착용한 리오론도 왕가의 서클렛을 만지작거렸다.
이들에게 무슨 질문을 해야 할까. 질문의 목적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대표가 누구지?”
“접니다.”
한 남자가 조심스레 손을 든다. 나이는 대략 30대 중반 정도로 보인다. 조금 마르긴 했지만 몸에 들어찬 근육이 잘 단련된 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혜진이 물끄러미 쳐다만 보자 그가 뒤이어 자기소개를 했다.
“평양 자주천하일통 길드의 용사장 서대홍이라 합니다.”
자주천하일통, 참 거창한 길드명이라 생각하며 속으로 헛웃음 지은 그녀가 물었다.
“식인을 했다고 들었는데.”
“맞습니다.”
“자세히 말해봐.”
“식량이 없었고, 그래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짤막한 설명 후 침묵이 이어진다. 혜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세히 말하라고 했을 텐데.”
“더 자세히 말입니까? 왜죠?”
“그야-, 정도를 벗어났다면 그냥 보내줄 생각이 없으니까.”
혜진이 독한 마음을 먹으며 말했다.
누군가를 말 한 마디로 죽인다.
그것이 지금 같은 세상에서 권력자가 갖는 힘이다. 혜진은 그런 권력에 아직 익숙하지 못했다.
하지만 죽여야 할 이라면 죽여야 겠다고, 언젠가는 반드시 그런 일이 생길 것이라 각오하고 있었다. 그녀의 동생은 류한을 만들었던 초기부터 생존과 미래를 위해 많은 사람을 죽였다. 헌데 여기서 누나인 그녀가 깨끗한 척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
언젠가 세현이 말했듯, 그녀는 이제 지배자였다. 해야 할 일이라면 반드시 해야 한다.
“저희를 죽이신다고요?”
서대홍이라 이름을 밝힌 남자의 표정은 굉장히 미묘했다. 겁에 질린 듯하다. 혜진과 박수진을 포함한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남자가 겁을 먹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바노프는 아니었다. 그는 겁먹은 표정 뒤에 감춰진 비웃음을 읽었다. 아마 혜진이 너무 쉽게 속내를 밝혔기 때문이 아닐까. 그녀의 외양과 행동을 보고 어리숙하다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
물론 이바노프는 상황에 개입하지 않았다. 혜진은 굳이 상대와 심리전을 하지 않아도 된다. 서클렛이 있으니까.
“솔직하게 말해라. 사람을 먹은 게 가볍지 않은 일이라는 건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저희는…… 전부 자세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조금 길어도 괜찮습니까?”
혜진이 고개를 끄덕이고 남자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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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피소의 강철문을 닫아 잠그고 삼일이 지났다.
가장 큰 문제로 부상한 것은 단연 식량이었다.
대부분의 이들이 각성자였기에 룬으로 시스템 상점에서 식량과 물 등을 살 수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그건 효율이 아주 안 좋았다. 언제 구조받을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 최대한 아끼고 아껴도 버틸 수 있는 건 고작 보름 뿐이다.
어떻게 살아남긴 했지만 대피소 내의 분위기는 지극히 절망적이었다. 희망적인 말을 하는 이가 아무도 없을 정도로, 오히려 누군가 암울한 소리를 내지 않은 게 다행이라 생각될 정도로.
그건 생존을 위한 방어기제일 뿐이었다.
생존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말로 내뱉는 순간, 이곳에 있는 최소한의 질서조차 깨져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짙어지는 절망과 함께 알 수 없는 긴장감이 생겨났다. 별 이유도 없이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게 됐다. 그나마 우호적으로 대화를 나누던 이들조차 더 이상 말을 섞지 않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기이할 정도의 침묵이 대피소 벙커 내부를 가득 채웠다. 그렇게 다시 삼일이 넘도록 아무런 말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마침내 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불편한 3층 침대가 닭장처럼 빼곡하게 들어선 숙소 공간에서, 그 목소리는 생각보다 크게 울렸다.
“계속 생각을 해봤는데…… 이렇게 전부 죽는 건 너무 불합리하지 않아?”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목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여기엔 아무짝에도 도움 안 되는 사람들이 있어. 이곳까지 도망 올 때도, 그리고 앞으로도. 나는 32레벨 전사야. 여기까지 오면서 앞장서서 길을 뚫었지. 만약 벙커가 뚫린다면 다시 앞장서서 좀비놈들을 막아낼 테고. 그런데 이제 룬을 다 썼어. 당장 내일부터 굶어야 한단 말야. 내 덕에 살아있는 놈들은 며칠은 더 잘 먹을 텐데.”
“그래서?”
누군가 짜증처럼 물은 후,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냥, 그렇다고.”
그렇게 다시 하루가 지났다.
“이봐.”
한 전사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안경 쓴 남자에게 말했다.
“너, 나 기억하지?”
“……누구신지?”
“내 덕에 살았잖아. 너한테 달려들던 좀비를 내가 죽였다고. 그것도 두 마리나.”
“사람을 잘못 보신 듯하오만.”
“아니, 아니야. 정확하게 기억해. 바로 옆에 떨어져 있던 군고구마 상점 간판까지 기억하고 있어. 글자는 붉은색이었고 바탕은 흰색이었지. 길 반대편에는 망가진 버스가 있었고, 너는 상점 안에서 튀어나온 좀비에게 죽을 뻔했는데, 내가 이걸 휘둘러서 구해냈어. 너는 내게 고맙다고 했지.”
그러면서 전사는 자신의 허리춤에 달린 메이스를 손으로 툭툭 건드렸다.
“이제 좀 기억이 나나?”
“모르는 일이오.”
“거짓말 마라. 내 덕에 살아놓고 이제는 모른 척을 하겠다고?”
잔뜩 소리를 낮춘, 허나 분노가 가득 담긴 으르렁거림에 연금술사 직업을 가진 안경 쓴 남자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번들거리는 눈이 당장이라도 자신을 죽일 듯 무섭다. 이자가 자신에게 요구하는 게 뭔지 짐작했다. 그래서 모르는 척을 했는데, 운 나쁘게도 그는 자신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먹을 걸 줘. 많이 바라지 않아. 딱 오늘 먹을 것만, 물도 약간 더해서. 그거면 충분해.”
분노를 드러낸 전사 사내가 갑작스레 태도를 바꿔 애원하듯 말한다. 연금술사는 눈을 꾹 감고 갈등의 기색을 드러냈다.
이런 상황에서 하루치 식량과 물의 가치는 얼마나 대단한가.
하지만 주지 않는다면 무슨 일을 당할지 아무도 모른다.
“여기 있소.”
결국 그는 시스템 상점을 이용해 탁구공 만한 크기의 빵 세 개를 구매하고 약간의 물이 든 목제 수통과 함께 건넸다.
“그래, 고마워. 이걸로 네 목숨값 일부를 갚았군.”
“……일부라고?”
“그럼 일부지. 설마 이걸로 목숨값 전부를 갚았다고 생각한 거야?”
하지만 그런 논리라면, 죽을 때까지 식량을 제공해야 한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 생각을 읽은 것처럼 전사가 말을 이었다.
“이봐, 나를 봐. 네가 지금 이렇게 보고, 숨쉬고, 생각하고 있는 게 전부 내 덕이란 말이야. 내가 그때 너를 구하지 않았으면 이미 죽어 좀비가 됐을 텐데, 그런데 나보고 고작 하루치 식량으로 만족하라고? 네 목숨값이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하지만…… 그러면 결국 계속 식량을 달라는 말 아니오?”
“그래야지, 당연히 그래야지. 죽을 때 같이 죽을지언정 생명의 은인을 외면하면 안 되지. 그건 죽어도 할 말 없는 후안무치한 짓이야.”
대답은 없었다. 전사는 당연히 그래야지, 라는 말을 반복한 후 그에게서 얻은 식량을 갖고 자리를 떴다.
애초에 결과가 정해진 일이었다.
연금술사는 비전투직이라 죽었다 깨어나도 전사를 이길 수 없다. 게다가 상대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줬다는 엄청난 명분까지 갖고 있다.
차라리 처음부터 죽을 각오로 부정했다면 모를까, 하루치 식량과 물을 건네주며 전사의 말을 사실로 인정해버린 지금 태도를 바꾸는 건 무리였다.
그러니까, 이제 그는 빈털터리가 될 때까지 식량을 뜯기게 되었다.
고개 숙인 연금술사의 표정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그날 밤, 고요하던 숙소에 비명성이 울렸다.
피곤에 절어 기절하듯 잠들었던 전사는 가슴팍을 파고드는 날카롭고 뜨거운 통증에 번쩍 눈을 떴다. 반사적으로 뻗어진 손이 자신을 기습한 자의 목줄기를 틀어잡아 조른다.
30레벨을 넘긴 전사의 악력은 무시무시했다.
피가 뿜어진다. 상대는 순식간에 목울대가 뜯기며 비명조차 내지 못하고 죽었다.
“이런… 씨발!”
강건하고 질긴 육체는 기습적으로 파고든 단검을 훌륭하게 저지해냈다. 덕분에 즉사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반 정도는 날이 박혀들어 피가 철철 흘렀다.
그는 비틀거리면서도 자신을 기습한 자의 얼굴을 살폈다. 흘러내린 안경을 보고 거칠게 시체를 밀쳐버린 그가 근처 깨어난 자들을 향해 외쳤다.
“치료를… 치료를 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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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술사는 누군가를 치료해준다고 배고파지지 않는다. 정신력을 약간 소모하긴 하지만 날카롭게 찔린 상처 하나 치료하는 건 일도 아니다. 또한 기습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굳이 외면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전사는 살아남았다.
“시체의 처리를 두고 말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자연스레 식량으로 삼자는 이야기가 나왔죠. 그게 계기입니다.”
담담하게 늘어놓는 이야기는 제법 세밀해서 그때의 상황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전사는 시체의 소유권을 주장했습니다. 거기에 그를 치료했던 신성술사도 끼어들었고, 시체를 불에 구워줄 마법사도 끼어들면서 세 명이 소유권을 갖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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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요리사가 있었으면 그 역시 자신의 몫을 주장하며 끼어들었을지도 모른다. 같은 ‘식재료’라도 요리사의 손이 닿으면 각종 특수효과가 붙는다. 그건 랜덤이 아니기에 포만감을 오래 유지시켜주는 효과를 더할 수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곳에 요리사는 없었다. 애초에 비전투직 연금술사가 살아남은 것도 아주 드문 케이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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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한 편 더 올릴 예정입니다.ㅋㅋ
부디 이번 편도 재밌게 읽으셨길 바라며 추천 꾹 부탁드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