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189
189====================
왕국
하지만 그건 자신의 생각일 뿐 군주의 생각이 아니다. 그는 눈을 감고 여태껏 그가 속한 집단이 걸어온 길을 차근차근 되새겼다.
당연하지만 외국인은 이바노프였다. 중국 세력과의 첫 접촉이라 이렇게 직접 나섰다. 심문은 이들이 깨어나기도 전 자백제를 마시게 해 반 최면에 걸린 상태에서 진행했고, 따라서 추이젠은 모든 정보를 자신이 내뱉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미지는 두려움을 만든다. 이자를 살려보내면 분명히 어떤 식으로는 류한과 엮을 수 있다. 두 세력의 접촉시기가 앞당겨지고 분쟁이 생길 확률이 올라간다.
하지만 그게 과연 군주가 원하는 일일까?
한세현은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지 원하는 때에 쓸어버릴 수 있다. 굳이 류한의 힘이 없더라도 그는 그 자체로 재앙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게 단순한 정복이 아니기 때문에.
혹자는 정복하되 지배하지 않는 자를 위대한 영웅이라 칭하지만, 그게 말이 되는가? 한바탕 휩쓸어버린 후 수습조차 하지 않고 내버려둘 거면 대체 왜 풍파를 불러온단 말인가? 능력이 부족해서 손도 대지 못하는 것을 듣기 좋게 포장하는 것은 아닌가?
정복하는 것보다 지배하는 것이 더 어렵다. 그렇게 봤을 때 한세현은 그야말로 완벽한 지배자였다. 이바노프는 그를 처음 알게 되고 만났던 순간부터 단 한 번도 실망한 적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스스로의 욕심 대신 군주의 방침을 따르기로 했다. 그게 신하로서의 올바른 태도일 테니.
체하지 않도록 하나하나 천천히, 정복은 언제든지 가능하나 지배는 시간이 걸린다.
그렇다면 괜히 이쪽을 노출시킬 이유가 없다.
“죽기 전에 할 말은?”
“……결정을 내린 모양이군.”
이바노프는 별다른 대답 없이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어떻게 나를 발견했소? 어떻게 그 정보들을 알아냈고?”
“……”
“어차피 죽일 생각 아니오? 여기서 당신이 영화 속 악당처럼 모든 계획을 떠벌거린다고 내가 주인공처럼 구출될 일은 없을 텐데.”
“그래, 아마도 그렇겠지.”
이바노프는 그 말 이후 피던 담배를 바닥에 툭 떨어트렸다.
“하지만 이 세상엔 아직도 내가 모르는 게 많아. 마법과 아이템 같은 것들…… 변수가 많지. 지금의 대화를 누군가 도청하고 있지 않다고 확신할 수 없는 일 아닌가.”
“걱정도 많으시군. 그런 것은 없소.”
“그래, 없겠지. 그래도 물론 나는 조심할 테지만.”
“그렇게 조심한다는 작자가 얼굴은 왜 보여줬소?”
“이게 내 진짜 얼굴이라고 말한 적 있나?”
이바노프가 품에서 단검을 꺼내들었다. 세현에게 받은 전설급 아이템 증오가 아닌, 상점에서 쉽게 구매할 수 있는 기본적인 단검이었다.
“내가 당신에게 원한 살 일은 하지 않은 듯한데, 최대한 빠르게 고통없이 죽여줄 수 있소? ”
“그 정도는 해주지.”
이바노프가 추이젠의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 예상보다 한 박자 빠르게 단검을 목덜미에 찔러 넣었다.
마치 두부를 찌르듯, 소리도 없이 파고든 날이 추이젠의 치명적인 급소를 끊었다.
“잘 가시게.”
대답은 없었다. 힘없이 늘어지는 추이젠을 뒤로하고 이바노프는 걸음을 옮겨 방을 나섰다.
@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다.
마침내 좀비 청소 작전이 마무리되어 류한은 예정대로 평양의 길드성을 포함한 더 북쪽의 강계시에 있는 길드성도 확보했다. 그리고 아직 확보하진 못했으나 강계 길드성에서 동북쪽에 있는 과거 옌볜 조선족 자치주에 자리한 주인 없는 길드성의 존재를 확인했다.
좀비들이 휩쓸고 간 지역이 결코 작지 않다. 찾아보면 분명 더 많은 거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별로 필요 없지.”
세현은 새롭게 차지한 평양 길드성에서 간부들의 회의 도중 그렇게 말했다.
“사람 없는 영토는 먹어봤자 요새 이상의 의미가 없어. 우리는 천공성이 있으니 굳이 거점을 서둘러 늘릴 필요가 없다. 설령 누가 중간에 채간다 해도 문제는 없고. 다시 빼앗으면 그만이니.”
“그럼 언제 확보할 생각이십니까?”
옌볜 조선족 자치주의 길드성을 발견해 직접 보고했던 신소진의 질문이었다.
“일단은 먹은 것부터 확실하게 정리할 거다. 평양은 공사를 좀 할 생각이야. 서울에서 지원자를 받아 일부 이주시킬 거고, 강계 길드성은 순수 군사요새로 삼을 거다. 전략적 가치가 높아.”
강계 길드성이 자리한 위치는 한반도로 들어오는 본격적인 길목과 같다. 만약 중국에서, 혹은 러시아에서 내려오려 할 경우 반드시 근처를 지나야만 한다. 만약 강계를 무시하고 들어갔다간 뒤가 막힌다.
모든 것은 세현이 부재하는 상황에서도 약점이 없을 만큼 확실하게 설계해야 했다.
그는 자신이 없으면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는 허수아비 세력을 만드려는 게 아니다. 국가가 되었으면 그가 직접 나서지 않아도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할 만한 역량을 갖춰야 한다.
그래야 그가 앉은 자리와 가진 권력이 더욱 빛나는 것이다.
“성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 하고…… 대관식에 반고(盤古)국 사절이 올 예정이야.”
반고국, 한창 좀비 청소 작전이 이뤄지고 있을 무렵 이바노프가 그들의 정보원을 통해 알아낸 하남성 지역에 위치한 국가였다.
세현은 보고를 받은 후 얼마간 고민하다 그들에게 정식으로 사신을 보냈다. 그리고 돌아온 사신단은 세현에게 그들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와 태도를 전해들었다.
발전 정도는 당연히 류한보다 뒤떨어진다. 하지만 머릿수는 정말로 어마어마한 듯하다. 이슈로는 근래들어 사방에서 바퀴벌레처럼 출몰하는 정체불명의 악마숭배자들 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다는 듯하다.
“이리저리 잴 것 없이 딱 하는 만큼만 대해줘라. 정중하게 나오면 정중하게, 무례하게 나오면 무례하게, 만약 허락없이 무기를 뽑는다면 죽여도 좋다. 괜히 외교 신경을 쓸 필요 없다는 뜻이다.”
“알겠습니다.”
“예.”
모두가 대답과 함께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세현이 따로 말해주지 않았다면 분명 그런 것을 신경 썼을 거다. 상대측에서 다소 무례하게 나와도 일단 참고 지나갔을지도.
“주겨도 조타!”
그때, 낭랑한 목소리가 차분하던 분위기의 회의실을 울렸다. 모두의 시선이 단번에 세현에게 향한다.
정확히는 세현의 품에 안긴 유르미아에게 향했다.
유르미아는 한두달 전과 비교했을 때 젖살이 많이 빠지고 키도 조금 자랐다. 그때가 완전 아기였다면 이제는 아기와 어린이의 경계선상 정도는 되는 모습이다.
하지만 그런 순수한 아이는 아빠를 따라 회의실에 들어왔던 탓에 아직 배우지 않아도 될 것을 배우고 있었다.
“주겨도 조타! 신경 쓸 피료 없다!”
“우리 딸, 심심했니?”
“아니. 심심하면 주겨도 좋아!”
“……그런 걸로는 보통 죽이지 않는단다.”
“나도 아라. 그냥 따라해봐써. 주겨도 조타! 아주 조타!”
여기저기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에 유르미아가 뭐 때문에 웃는지도 모르고선 함께 키득거린다. 결국 세현 역시 자신의 무릎에 앉은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허허 웃었다.
이렇게 귀여울 수가 있나.
세상 그 어떤 아이를 데려와도 유르미아만큼 깜찍하진 못할 거다. 그는 아직도 가끔 딸을 볼 때마다 이 아이가 자신의 딸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
“반고국이 뭐야?”
“우리 말고 다른 나라야. 저기 멀리 있어.”
“다른 나라? 멀어?”
“멀지. 유르미아가 걸어서 가려면 몇 달은 걸릴 걸?”
“몇 달이나?”
아이의 눈이 동그래진다.
세현은 회의를 하던 것도 잊고 무한의 주머니에서 커다란 고급 지구본을 꺼내들었다. 언제부턴가 그는 유르미아가 뭔가를 질문할 때마다 대답해주기위해 이런저런 잡다한 물건들을 수납하고 있었다.
이 지구본도 그것들 중 하나다. 그는 지형의 높낮이까지 제법 세밀하게 재현해낸 지구본에서 한반도를 찾아낸 후 가리켰다.
“지구에 대해서는 잘 알지?”
“응. 우리가 사는 별. 이건 지구본.”
“그래. 바로 여기가 우리가 있는 땅이야.”
“류한 땅?”
“그래, 류한 땅. 반고는 여기 있어.”
그리고 세현이 중국 땅 섬서성 지역을 가리켰다.
“가까운데? 멀다고 했자나.”
“보기엔 가까워 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멀어. 엄마가 있는 용인하고 여기하고는 얼마나 멀까? 유르미아가 걸어서 가려면 얼마나 걸릴 것 같니?”
“으음… 한 시간?”
“일주일은 더 걸릴 거야. 잘 보렴. 여기에서 여기까지가 얼마나 먼 거리냐 하면……”
평소의 세현에게선 찾아보기 힘든 자상한 모습의 교육이 이뤄졌다.
유르미아는 새로운 왕국이라는 주제와 장식품 혹은 장난감으로 써도 좋을 법한 뛰어난 퀄리티의 지구본에 온통 주의를 빼앗긴 채 연신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 부녀의 모습을 회의실에 자리한 간부들이 흐뭇하게 지켜봤다.
대관식까지 일주일 남은 시점이었다.
@
신소진은 다르바드로 가는 사절단에 자진해서 대표로 합류했다.
다르바드에서만 나는 보석, 내부에 은은한 빛을 머금고 아롱거리는 그것은 허락없이는 유출할 수 없는 매우 귀한 물건이다. 사실은 다르바드의 마법사들이 원하는 만큼 찍어낼 수 있는 물건이지만 진실을 아는 자들은 거의 없다. 공급은 오로지 류한의 뜻에 의해 이뤄지고 그건 최고급 사치품으로 분류되기에 충분히 아름다웠다.
신소진은 그 보석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사절단에 지원한 것이다. 물론 그건 그녀 개인의 사소한 목적일 뿐이고, 사절단이 가게 된 이유는 샬란들이 사용하는 게이트 때문이었다.
그녀는 다르바드에 가서 그곳의 두 지배자인 파트릭과 뷰리앙을 만나 게이트에 대해 논의했다.
놀랍게도 이들의 게이트 중 하나는 바다 건너의 아메리카 대륙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곳을 통하면 미국과 접선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녀는 그 게이트의 오픈과 사용권에 대해 협상하러 왔다.
그리고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샬란 종족이 가진 합격진에 대한 것이었다.
다르바드의 지배자는 원래 셋이었다. 멜그소가 세현과의 전투에서 죽어 둘이 되었는데, 그 와중 보여줬던 그들의 합격진은 무림에서 다양하고 강력한 여러 종류의 합격진을 봐왔던 세현에게도 아주 인상깊었다.
보라색 등급을 상대하기 위해 다수가 오직 하나에게 모든 전력을 집중할 수 있는, 그 자체로 하나의 마법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뛰어난 완성도의 합격진.
샬란들의 문명은 결코 얕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적어도 군사적인 부분에서는 지구의 인간들보다 몇 배는 더 뛰어나다. 보라색 등급 괴물을 하나 이상 막아냈던 것이 바로 그 증거다.
그런 샬란들이 종족의 명운을 걸고 최선을 다해 만들어낸 합격진이다. 근접전을 맡는 전사에서부터 원거리 공격을 담당하는 궁수와 주문을 사용하는 마법사까지, 어느 하나 힘을 낭비하는 일 없이 태엽처럼 맞물리며 하나의 강대한 적을 상대할 수 있다.
탐나지 않을 수 없없다. 류한이 그 합격진을 배울 수 있다면 세현의 도움 없이 남색 등급 괴물 정도는 무난히 쓰러트릴 수 있게 될지 모른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늘은 진짜 오후에 한 편 더 올리겠슴다. (__);;
부디 재밌게 읽으셨길 바라며 추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