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192
192====================
왕국
축제는 대관식이 끝난 후로도 삼일 동안 유지됐다.
축제가 끝난 후 류한의 영주들과 동맹 세력, 그리고 반고국 사절까지 모두 돌아갔다. 며칠간 북적거렸던 곳이 조용해지니 그게 텅 비어보이는 것은 꽤 흥미로운 감상이다.
세현은 천공성에 자리한 자신의 방에서 창문을 통해 아래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천공성 내부를 넘어 성벽 밖 아래 까마득하게 펼쳐진 지상이 보인다. 원래라면 잘 안 보여야 정상인 거리였으나 세현의 눈엔 지표면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이 전부 보였다.
천공성이 떠있는 곳은 평양성 위였다. 좀비 청소 작전이 마무리되었지만 천공성은 여전히 전진배치한 이후로 빼지 않았다. 덕분이랄지 평양성 근처에서 벌어지는 공사현장을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이 쓰레기들을 치우고 부실한 건물들을 무너뜨린다. 새 건물을 짓는 데 필요한 건설자재를 나르고 건축가 직업을 가진 생산직들이 그것들로 설계도에 따라 건물을 지어간다.
생각해보면 저들 전부가 그의 뜻에 따라 일하고 있는 것이다. 명령을 내리는 자와 받는 자, 이곳은 적정 보수를 받으며 일을 하는 장소일 뿐이지만 만약 전장이라면 어떨까.
세현은 그 합리와 불합리의 모순을 잘 알고 있었다. 한때 전쟁터를 찾아 떠돌며 명령을 받아 싸우던 낭인으로서 뼈져리게 잘 안다.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선 뛰어난 지휘관의 명령을 따를 필요가 있다. 제 아무리 똑똑한 개인들이 모인 집단이라도 협동을 위해서는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모두가 의식을 공유하며 즉각적 합의에 의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초정신집합체가 아닌 이상 그렇다.
모순은 여기서 발생한다.
계급에 따른 명령체계는 승리를 위한 합리적인 시스템이다. 자신들의 집단을 지키지 못한다면 침략자들에 의해 구성원 모두가 유린당할 테니까. 하지만, 그 승리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 개인에게 자신이 죽은 후의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게 정말로 합리적인가?
싸우면 죽는다. 싸우지 않아도 죽는다. 그렇다면 싸우다 죽는것이 낫기 때문에 싸우는 것인가? 적에게 투항하거나 일찌감치 도망치는 것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도 있을 텐데.
그런데 만일 모든 개인이 그런 식의 사고방식으로 행동한다면 인류가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을까. 무엇이 더 중요한가? 개인인가 집단인가? 희생정신은 정말로 위대한 것인가 아니면 본연의 생존본능을 무시하고 남은 자들의 배만 불려주는 짓인가?
사람은 태어나 자라며 타인 혹은 집단을 위한 희생은 고결하고 위대한 것이라 배우며 자란다. 다시 악마의 말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그 모든 것은 정말로 도구에 불과할지 모른다. 지배자들이 군중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낸 프레임.
똑똑-
들리는 노크 소리에 세현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저절로 열리는 문 사이로 혜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네가 연 거지?”
“자동문은 아니니까.”
픽 웃은 그녀가 들어와 소파에 앉는다. 그 사이 문은 저절로 닫혔다. 그가 다양한 일에 리모컨 대용으로 사용하는 허공섭물이다.
“무슨 일이야?”
“그냥. 뭐 하고 있을까 싶어서?”
세현은 자신이 보던 창문을 가리켰다.
“풍경 구경 중이었어.”
“늙은이처럼?”
“따지고 보면 나는 늙은이 맞지.”
혜진이 웃음을 터뜨리고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서 세현의 옆에 섰다. 아래에 보이는 풍경을 감상하던 그녀가 입을 연 건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가끔 지금이 안 믿겨져. 과거의 내가 이런 상황이 될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그런 느낌? 몇 년 전만 해도 그냥 평범한 회사원이었는데.”
“나는 그냥 대학생이었고.”
무림으로 날아가버리기 전까지 그랬다. 세현이 창문 밖을 가리키며 물었다.
“보여?”
“뭐가? 공사현장?”
“그래. 저기서 일하는 사람들.”
“잘은 안 보여.”
“따지자면 저 사람들은 전부 우리 뜻에 따라 일하는 거야. 마음만 먹으면 내일 당장 공사범위를 늘릴 수도 완전히 중지시킬 수도 있지.”
“음……”
혜진이 힐끗 세현을 쳐다봤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감을 못잡은 듯하다.
“책임감을 가지라는 거야?”
“뭐, 그것도 중요하지. 지배자의 말 한 마디는 수많은 아랫사람들에게 분명한 영향을 미치니까. 생각없이 산을 치우라고 명령하면 그걸 실제로 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어.”
대한민국에서 군대에 대한 농담 중 이런 것이 있다. 사단장이 ‘저 산이 너무 높네’ 하면 진짜로 그 산을 깎아내려야 한다고. 다양한 버전이 있지만 어쨌든 내용의 핵심은 그렇다.
“원래는 그냥 기분이 어떠냐고 물어보려 했어.”
“아, 음. 그래. 나는 또.”
혜진에게 지속적으로 제왕학을 가르치다 보니 무슨 질문만 던지면 그런 쪽으로 대답하려 한다. 혜진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감상에 빠졌다.
“묘한 기분이야. 나쁜 쪽은 당연히 아니고. 책임감도 느끼는 것 같아.”
“스스로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은?”
“그런 것도 없지 않지.”
혜진이 픽 웃었다.
“막상 내가 해낸 건 별로 없는데. 자조가 아니라 사실이 그렇잖아?”
“내 기준에선 충분히 잘 해줬어. 정 납득이 안 가면 타고난 복이라고 생각해. 원래 인생은 불공평한 거야.”
“아, 그래. 타고난 복…… 내가 동생을 잘 두긴 했지.”
세현의 어깨를 톡톡 두들긴 그녀가 다시 소파로 가 털썩 앉았다. 그리고 다시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나 정도면 걱정 없고 행복한 거겠지?”
약간 나른한 듯한 어조로 혜진이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
“아니. 별 건 아니고 오늘 아침에 꿈을 꿨거든. 왜 그 아파트 사기 전에 월세로 살던 집 있잖아?”
세현이 무림으로 날아가버리기 전, 그들 남매는 투룸 빌라에서 살던 적 있었다.
절대로 좋은 집은 아니었다. 지저분한 화장실 타일은 여기저기 잔뜩 깨져 있었고 벽지는 곰팡이 슬고 낡아 떨어졌다. 여름에는 각종 벌레가 쉬지 않고 출몰했고 겨울에는 대체 어디서 바람이 새는지 냉기가 흘렀다.
무엇보다 집주인의 성격이 고약했다. 말투부터 퉁명스러웠고 월세로 들어왔음에도 화장실의 깨진 타일이라든가 도저히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기름때에 찌들었던 가스렌지 등을 절대 교체해주지 않았다. 결국 벽지는 그냥 놔뒀고 가스렌지는 자비를 들여 교체했다. 절대 그대로는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 집으로 이사왔던 첫날 밤, 세현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방 모퉁이의 거뭇한 곰팡이 자국을 바라보며 한참을 미동도 없이 그냥 침대에 앉아 있었다.
집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헌데 그것을 바꿀 능력이 없다.
그러니까, 돈이 없다.
현재의 자신들에게 이 추레한 곳이 최선이라 생각하니 견디기 힘들었다. 고약한 집주인 할매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감내하며 근방에서 월세가 싸다는 이유로 당연히 받아야 할 권리를 받지 못하는 것에 화가 났다.
다들 그렇게 사는 거라고, 돈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고.
간신히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고서야 잠이 들었다. 아마 그때쯤 분노가 서러움으로 바뀌었던 것도 같다.
“끔찍한 곳이었어.”
“에이, 끔찍할 정도까진 아니었잖아?”
짐짓 유쾌하게 말하는 혜진이었으나, 모르긴 몰라도 그녀 역시 그 집에 들어온 첫날 좋은 기분으로 잠들지는 못했을 거다.
“그 집주인 할머니 어떻게 됐을까?”
“뒈졌겠지.”
신랄한 말에 짧게 키득거린 혜진이 아예 소파에 드러누웠다.
천공성의 방 천장은 어느 곳이건 빛을 머금어 아름답다. 심지어 이곳은 왕의 방, 당연히 천공성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다. 천장에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빛무리가 아롱거리며 내부를 밝히고 있었다. 전등처럼 키고 끌 수 있는 빛무리다.
“자세하게 무슨 꿈이었어?”
“그냥 그 집에서 살던 꿈. 월세 걱정에 잠 못 이루고, 친구는 빌려간 돈도 안 갚고, 출근하니 상사는 괜히 갈구고…… 웃긴 건 깨니까 지금이 다행이라고 느껴지는 거 있지. 안전하긴 그때가 더 안전했을 텐데.”
“지금이 더 안전할 걸?”
세현이 창가 근처에 있던 테이블에 엉덩이를 걸쳤다.
“그때는 나도 평범했으니까 무슨 일이 벌어져도 지켜줄 수가 없었어. 교통사고라든가, 강력범죄라든가. 왜 그런 이야기도 있잖아. 아무렇지도 않게 신발 좀 빌려 신는다 말하고 외출했던 동생이 공사장에서 떨어진 건축자재에 숨졌다는.”
“그거 진짜 슬픈 이야긴데.”
“반면 지금은, 적어도 누나는 그런 사고를 당할 일 없어. 나는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해. 아마 당시로 돌아가면 엄청 불안할 거야.”
“지금도 다른 사고가 일어날 수 있잖아. 엄청 강력한 괴물이 나타난다든가.”
“누나, 나 신이야.”
세현이 피식 웃었다.
“솔직히 이제 뭐가 나타나든 질 거라고 생각되지가 않아. 여기는 내 안방이야. 내가 다른 세상으로 쳐들어가는 거면 몰라도, 쳐들어온 놈들은 전부 이길 걸.”
“……그래 그래. 듬직하네. 그럼 안심해도 되는 거야? 나 늙어서 평온하게 죽을 수 있어?”
“그럼. 결혼은 생각 안 해?”
“결혼?”
혜진이 누운 그대로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에 드는 남자가 없어. 그리고 아무도 나한테 접근을 안 해.”
그게 혜진의 최근 고민 중 하나였다.
왕의 누이라는 신분은 굉장히 높다. 처음부터 혜진을 보아왔던 초기 멤버들조차 그녀를 굉장히 어려워하는 판국에, 나중에 들어온 인원들은 더했다. 앞에서 제대로 고개도 들지 못한다. 그런 상황에 대체 누가 그녀에게 접근할 수 있을까.
“그러다 노처녀로 죽을 텐데?”
“너도 아엘라 아니었으면 노총각으로 죽었을 거 아냐?”
“음…… 그랬겠지.”
누이의 연애사에 깊게 관여할 생각이 없는 세현이 어깨만 으쓱했다.
“알아서 잘 해봐. 대신 이상한 놈 데려오면 안 돼. 내가 검증할 거야.”
“얼씨구, 매형을 네가 검증하시겠다? 아예 그냥 접근금지 표지판이라도 걸지 그러냐? 누굴 평생 독신으로 만드려고.”
“결혼할 생각이 있긴 있어?”
“글쎄에…… 잘 모르겠어. 그냥 이렇게 살아도 될 것 같은데? 너는 어때? 결혼하니까 좋아?”
“그럼.”
자동으로 아엘라와 유르미아가 떠오른다. 그날 아엘라가 세현에게 부탁해오지 않았다면 현재의 그녀도, 사랑스러운 유르미아도 없었겠지.
처음 유르미아가 태어났을 때의 그 감각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날 오로지 자신과 누이인 혜진에게 맞춰져있던 세계의 관점이 움직였다.
지켜야 할 이들이 늘었다. 하지만 결코 부담스럽거나 기분 나쁘진 않았다. 약점이라고도 생각지 않는다.
“나랑 아엘라랑 물에 빠지면 누굴 구할 거야?”
그때, 혜진이 장난삼아 물어왔다. 세현이 눈 한 번 깜빡이지도 않고 곧장 대답했다.
“아마 누나를 구하겠지.”
“진짜로?”
“벡스는 수영을 잘 할 테니까.”
“아니 이 바보야, 원래 이런 질문에는 둘 다 수영을 못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잖아.”
세현은 피식 웃었다. 혜진이 다시 물었다.
“누굴 구할 거야?”
“그래도 누나를 구할 것 같은데.”
“……야, 네 부인한테 그러는 거 아냐.”
“타박할 필요 없어. 그런 상황이 생길 리 없으니까.”
하지만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그런 비슷한 상황이 생긴다면 그는 누이를 구할 것이다.
딸인 유르미아와 혜진이 동시에 위험에 처한다면? 그래도 누이를 구할 것 같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는 사이 무림에서의 시간이 떠오른다.
그가 살아올 수 있었던, 그렇게 필사적으로 살아남으려 발악했던 이유가 바로 혜진이었다. 처음 가족에 대한 애정으로 시작했던 그 목표는 이제 그의 생존본능을 담당하는 불변의 기둥이자 떼어낼 수 없는 강력한 집착이 되어버렸다.
소중한 사람들 누구를 가져다대도 아마 그는 혜진을 최우선으로 구할 것이다.
그것으로 다른 소중한 이가 죽는다면 평생을 지독히 고통받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할 것이다.
내가 이상한 것인가? 잠시 고민해봤으나 애초부터 답이 없는 문제다. 세현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찰나의 단상을 털어버렸다.
============================ 작품 후기 ============================
지인이 갑작스레 상을 당해 거제도에 좀 갔다왔습니다. 굉장히 멀더군요. 연재가 많이 늦어 죄송합니다. (__)
부디 재밌게 읽으셨길 바라며 추천 부탁드립니다. 내일도 한 편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