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206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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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 살려주시오. 제발, 제발!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요! 원하는 게 있다면 말로 하시오! 뭐, 뭐든지 들어드릴 테니까! –
땅을 기는 벌레가 애원한다.
그 어떤 해충보다 혐오스러운,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 동시에 한없이 증오스러워 그 살점 하나하나를 완벽하게 짓이기며 최대한 오랜 시간 고통받게 만들고 싶은.
–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나? –
– 모르오! 모른다니까! 면식조차 없지 않았소! –
– 왜 없나. 나는 네놈의 얼굴을 수천, 수만 번이 넘도록 보았는데. –
– 그, 그럴 리가? –
– 오랜 시간 이 순간을 꿈꾸며 염원했지. 그런데 모르겠다고? 네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아직도? –
– 모른다니까! –
모른다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
모를 리 없다. 이놈은 알고 있다. 죄를 알면서도 그것을 죄라 여기지 않을 뿐.
가슴속에서 용암이 끓는다. 그냥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안을 갈라보면 시뻘겋게 달아오른 불덩이가 보일 것 같다. 화산이 폭발하듯 금방이라도 분노가 형상화되어 입 밖으로 불길과 함께 콸콸 쏟아질 것 같다. 지금 당장이라도 이놈을 천 갈래 만 갈래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얼마나 고대했던 순간인데 그리 쉽게 끝낼 수는 없지.
– 남궁설을 기억하겠지. –
– 그…… 대, 대체 당신이 어떻게 그 여자를……? –
상황을 이해한 놈, 남궁민중의 얼굴에 천천히 절망이 드리운다.
상대의 원한이 무엇인지 알았으니까, 빠져나올 수 없는 그물에 걸렸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곤 몰랐겠지. 아무런 배경도 힘도 없는 여자를 네 마음대로 갖고 놀 때는 좋았겠지. 그랬던가? –
– 나, 나는…… 나는…… 나는 결코 고의로 그런 게…… 주, 죽게 만드려는 생각은…… –
– 상상도 못 했겠지. 내가 원한으로 증오를 벼릴 때 네놈은 아무것도 모르고 삶을 즐겼겠지. 하지만 드디어, 네 죄악의 대가를 치를 시간이다. –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빛과 같던 여자를 기억한다.
화인처럼 머리에 남아 눈을 감아도, 잠을 잘때도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가 이 거칠고 험난한 세상에서 처음으로 마주한 오아시스였다.
그것을 이놈이 송두리째, 그것도 아주 참혹하고 비참한 방식으로 눈앞에서 박살내버렸다.
– 약속하마. –
너는 최대한 오래 살아있을 것이며, 네놈의 시체는 네놈 부모가 보아도 이것이 한때 인간이었다는 것조차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절대고수가 내뿜는 심해처럼 짙고 짙은 살기에 짓눌린 남궁민중은 말조차 제대로 내뱉지 못하고 꺽꺽댔다. 그 역시 나름 고수라 할 수 있는 자였음에도 이미 마음이 꺾여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고작 이런 놈 때문에.
겨우 이런 놈 따위에게.
“……”
눈을 뜨니 낯익은 천장이 보인다. 화려하면서도 그것이 과하지 않아 아름답고 장엄한 왕의 처소.
꽤 오랜만에 꾼 꿈인데 하필 이런 꿈이라니.
딱히 업무랄 것도 없고 귀여운 딸 유르미아도 이제 제법 컸는지 정현욱을 호위로 대동한 채 어디론가 놀러가버린, 한가한 오후에 아엘라가 찾아왔다. 그리고 간만의 뜨거운 정사를 나눈 뒤 잠깐 오수(午睡)를 즐겼지.
이 행복한 시간에 난데없이 복수의 순간이 꿈으로 나오다니.
잠결에 뒤척이는 아엘라의 머리를 반사적으로 쓰다듬으며 그는 생각에 잠겼다.
어째서 그런 꿈이 나왔는지 알 것 같았다. 그에겐 인간으로선 충분히 오랜 세월을 살아온 경험이, 단순히 살아오기만 한 것이 아닌 각종 고난을 겪으며 모진 풍파를 견뎌낸 통찰력이 있었다.
“트라우마인가……”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 그렇게 잃고서도 한동안 복수조차 하지 못했다. 힘이 없었으니까.
자신도 모르던 내면 한구석에 지금의 평온이 외부의 힘으로 깨져버릴지 모른다는 공포가 존재했던 모양이다. 다시 한 번, 악의가 그의 삶을 침범해 유린할지도 모른다고.
그러고 보면 그는 류한 간부들의 안전에 매우 신경을 썼다. 전략적인 측면에서 당연한 일이었지만, 어쩌면 그 저변엔 다시는 주변 사람을 잃고 싶지 않다는 공포가 자리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가 무림에서의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기어코 지구로 귀환했던 것 역시, 단순한 가족으로서의 사랑 때문만이 아닌 이번엔 누이마저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크게 한 몫 했을 것이다.
제 아무리 강철 같은 인간이라도, 설령 그 누구보다 신에 가까운 세현이라 해도 근본이 인간인 이상 공포와 두려움 같은 부정적 감정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는 옆에서 잠든 아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마음을 달랬다.
이런 때 그녀가 곁에 있어서 다행이다. 제 아무리 마음이 마모되었다 한들, 결국 누군가 곁에 없으면 외로워지는 것이 또한 사람 아닌가.
그렇게 부드러운 고요를 벗삼고 진정한 그는 허공에서 태블릿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쉬는 사이 새로 처리해야 할 일이 없었는지를 체크했다.
그때, 방 한쪽의 테이블 위에 있던 기계가 부우웅 진동했다. 다름 아닌 핸드폰이다. 과거의 스마트폰과 외형이 비슷하지만 그 내부 구성은 전혀 다른, 새롭게 만들어진 물건.
무려 에레도스 시스템에서 아이템으로 인정해주는 물건이었다. 꽤 흔하다 할 수 있는 뛰어남 등급이긴 하지만 사실 그 정도만 해도 대단한 거다. 게다가 이 물건이 상징하는 바를 떠올리면 더더욱 그렇다.
핸드폰은 찬란했던 인류 문명의 상징 중 하나다. 아직 완전하게 옛날의 핸드폰만큼 다양한 일을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시간이 해결해줄 것, 머지 않은 미래에 예전의 핸드폰이 갖고 있던 모든 편의를 되찾을 수 있으리라.
어쨌든 그는 진동을 멈춘 핸드폰을 허공섭물로 손에 가져왔다.
이바노프에게서 문자가 하나 와 있었다.
@
약 보름간 반고 왕국의 도발이 이어졌다.
처음 괴물을 쫓아왔다는 변명으로 영토를 침범했던 그들은 이후로도 꾸준히 모습을 드러내며 신경을 건드렸다. 명백하게 이쪽을 도발하는 행동이다.
게다가 그렇게 단순히 도발만 하는 것이 아닌, 국경이라 할 수 있는 부근으로 적지 않은 규모의 반고국 병력이 움직인 징후를 포착했다. 덕분에 제주도로 넘어가 언데드들을 공략하려던 작전이 전면 중지됐다.
평양의 영주로 임명된 이승원에게서 보고가 왔었다. 상황에 대한 설명과 상대가 한 번만 더 영토를 무단으로 침범하면 공격해도 되겠냐는 허락 요청과 함께.
하지만 세현은 일단 보류하라 지시했다.
“공격할 거면 진즉에 공격했겠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니 일단 놔두도록.”
도전하는 자에게는 용서가 없는 세현이지만 최소한 상대가 대체 무슨 생각을 했기에 이러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반고 왕국에서 사절단이 출발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상대가 이쪽에 정보원을 풀었다면 류한 역시 마찬가지다. 대놓고 모습을 드러내며 이동하는 사절단을 포착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바로 그 이바노프의 문자를 받은 지 이틀이 지난 시점.
마침내 그는 용인 길드성 1층 홀에서 사절단을 맞이했다.
일전에 보았던 것과 같은 다소 과하게 화려한 의복을 입은 자들이 세현에게 고개를 숙인다. 총 인원은 열두 명, 상대국의 순간이동 게이트를 사용하기에 적절한 수였다.
“류한의 국왕님을 뵙습니다. 강녕하신 모습을 보니 기쁘군요.”
“그래. 무슨 일이지?”
세현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사절단은 잠시 저들끼리 쳐다보더니, 처음 대표로 인사를 올렸던 자가 뒤에 있던 자에게 무언가를 받아들었다. 작은 USB였다.
그는 그것을 세현에게 보여주기 위해 두 손 위에 올리고 공손히 내밀었다.
“이것은 우리 반고 왕국의 선물입니다.”
“그게 뭔데?”
“우리 반고 왕국이 산동성에서 사냥했던 남색 등급 괴물에 대한 정보입니다.”
“흐음?”
꽤 의외다.
그간 도발행위를 지속해놓고 왜 이런 호의를 보여주는 걸까.
세현이 손짓하자 옆에 있던 이바노프가 움직여 사절단 대표의 손에서 USB를 받아들었다. 이후 홀 한쪽의 테이블 위에 있던 노트북 컴퓨터를 가져와 USB를 연결해 열어보자, 과연 사진과 그림 및 텍스트로 잘 정리된 자료가 있었다.
세현은 이바노프에게서 해당 노트북 컴퓨터를 건네받아 자료를 살폈다.
반고 왕국은 산동성의 남색 등급 괴물을 사냥했다. 그 준비에서부터 과정과 결과에 이르기까지 제법 상세한 정보들이 있었다. 적어도 그들이 상대했던 남색 등급 괴물에 대한 것은 자세히 알 수 있을 정도로.
사냥당한 놈은 세현이 강원도에서 마주했던 이아노소그와 비슷한 수준인 듯했다.
모든 정보를 100% 제공한 것은 아니었기에 이들이 얼마의 피해를 입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세현의 개인적 경험과 보고서의 내용을 토대로 유추해보면 피해가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름 가치있는 정보다. 하지만 엄청나게 유용한 정보까진 아니었다.
이들이 건네준 정보 속 남색 등급 괴물은 현재 류한이 상대하는 언데드 군주와는 전혀 다른 타입이다. 이 정보의 쓸모라 하면 그저 남색 등급 괴물의 대략적인 무력 수준과 어느 정도 준비를 해야지 공략할 만한지 참고할 수 있는 정도 뿐이다.
이걸 왜 건네줬을까?
어쨌든 정보를 건네준 것 자체는 꽤 도움이 됐다. 비록 이미 죽어서 없는 괴물에 대한 정보라지만 나중에 비슷한 타입을 상대하게 될지 누가 아는가?
“고맙군.”
세현이 간단하게 인사하자 사절단이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이걸 전해주려고 온 건가?”
“우리 반고 왕국은 류한 왕국과 좀 더 긴밀한 친교를 나누고 싶습니다. 세상이 이리 험한데, 그저 인사만 하고 지내는 것보단 서로 도우며 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흠.”
그는 들고 있던 노트북 컴퓨터를 다시 이바노프에게 건네며 말했다.
“우리가 어떤 놈들을 상대하는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소문은 달리는 말보다 빠르다고 하지요. 남쪽에서 언데드들이 출몰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쩌면 바다 건너 제주도가 그 사악한 괴물들의 본거지일지도 모릅니다. 사실이라면 토벌하기 까다롭겠지요.”
“그래서 도와주겠다?”
“바로 그렇습니다.”
톡 톡, 세현의 손가락이 의자 팔걸이를 두들겼다.
“어떤 방식으로?”
“이만의 병력을 지원하겠습니다.”
적은 수가 아니다.
에레도스 사태를 겪으며 인구가 크게 줄었을 것이 분명한데, 그럼에도 이만이나 되는 병력을 지원하겠다니 역시 대륙인가 싶다.
“다만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말해봐라.”
하지만 역시나, 아무리 사람이 넘친다 해도 오직 순수한 호의로서 이만 병력을 지원해줄 리는 없었다.
“첫 번째는 온전한 지휘권을 보장해주셔야 합니다.”
“지원군이지만 독립적으로 행동하겠다?”
“완전히 별개로 행동하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합당한 작전이라면 따르겠지만 그렇지 않는 작전이라면 거부하겠다는 말이다. 실상 타국의 지원군에게 명령에 절대복종하라고 요구할 수도 없으니 어떻게 보면 합리적인 조건이다.
“두 번째는 양국의 동맹입니다.”
“동맹?”
세현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졌다.
“동맹을 원한다고?”
“그렇습니다.”
“최근에 우리 영토 북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서 하는 말인가?”
그건 절대 동맹을 원하는 자들이 보여줄 모습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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