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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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하게 알고 있습니다. 허나 양측에 어떠한 불미스러운 일은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불미스러운 일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다르지. 수시로 영토를 침범하고 국경 부근에선 병력의 움직임까지 포착되는데, 무슨 생각이지?”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우리 반고 왕국의 입장이 명확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동맹을 원합니다.”
그는 그 말 이후 세현의 반응을 살피듯 잠시간 눈을 마주했다.
“양국의 동맹은 지금 당장은 물론 미래에도 크나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절 대표는 그리 말하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잠깐 살핀 류한의 국왕 한세현의 얼굴에는 뚜렷한 표정은 없었다. 하지만 미약하게 찌푸려진 미간을 보면 기분이 썩 좋지는 않으리라.
그럴 수밖에.
그들의 국왕 장한위와 비교하면 새파랗게 젊다 할 수 있는 나이, 그럼에도 이 정도의 왕국을 일궈낸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결국 사람의 운명은 하늘이 정해주는 것인지 류한은 위기에 봉착했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남색 등급 괴물의 정보를 건네준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어차피 죽어 없어진 괴물에 대한 정보이니 그리 중요하지 않을 뿐더러, 그것을 통해 남색 등급 괴물의 무력수준에 대한 정보를 류한에게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알기 때문에 독이 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말뿐인 동맹을 서로 신뢰하긴 힘들지 않겠습니까? 역시 뒤가 불안한 상태로 남쪽의 괴물 토벌에 집중하긴 어려우실 겁니다. 그래서 말씀드리길, 혈맹이 되는 것은 어떻습니까?”
은근한 협박이 섞인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다.
모른다면 거절할 수 있다. 남색 등급 괴물이 얼마나 강력한지 제대로 모르고 있다면, 북쪽과 남쪽 어느 하나를 적절히 견제하면서 다른 하나를 우선 해결한다는 발상을 할 수 있다. 류한이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그게 가능하고 불가능하고를 떠나 양국간의 마찰이 발생해 불필요한 원한이 생긴다. 첫 단추를 잘못 끼게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선택이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류한은 이 제의를 거절할 수 없다.
반고가 원하는 것은 류한과의 마찰이 아니었다. 제 아무리 상대가 남북 양쪽으로 전선이 형성되어 위기에 처했더라도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
“우리 반고의 장한위 국왕님께선 가족이 없는 혈혈단신이십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류한 국왕님께선 누이 한 분이 있으시다고 알고 있습니다. 혈연을 통한 양국의 결합은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반석 같은 관계가 될 것입니다.”
동맹은 구실이자 시작이다. 통째로 낼름 집어삼키기엔 부담스러우니 시간을 들이는 거다. 류한 국왕의 누이는 볼모로 삼기에 충분하고 그 능력이 출중하다 하니 써먹기도 좋다. 또한 광휘술사로 직접 전투원이 아니기에 다루기도 쉽다.
지원해준다는 이만 병력은 적극적인 협조를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생색내기용에 불과하고, 오히려 지금의 위기를 질질 끌며 최대한 이 왕국을 좀먹어 갈 의도마저 있었다.
이른바 개구리 삶기 작전……
그런 생각을 하던 사절단 대표는 문득 주위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흡사 우주공간에 떨어진 것 같은 기이한 감각이 그를 사로잡는다.
해서,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든 그는, 어느새 자색으로 물든 한 쌍의 눈동자를 마주하고 돌처럼 굳어버렸다.
세상 모든 것이 사라지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불타는 듯 선명한 눈동자만이 남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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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맹?”
담담한 느낌의 어조였으나 그 안에 느낀 진득한 살기는 누구나 느낄 만한 것이었다.
적대적 의도가 깔려 있으리란 것은 진즉에 눈치 채고 있었다. 이승원에게 말했듯이, 어디까지나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기에 그저 놔두었을 뿐이다.
하지만 감히 어떻게 이런 생각을?
목숨까지 바칠 정도로 깊게 사랑해서 결혼을 허락해달라 무릎 꿇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인질로 써먹을 테니 공물처럼 바치라고?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의 누이를?
“무슨 생각을 하나 궁금해서 놔두었더니, 내 누이를 바치라고 해?”
신화적인 공포에 압도당한 사절단 대표의 눈을 통해 그가 했던 생각의 파편들이 흘러든다.
각종 추상적인 느낌과 이미지와 단어들로 이뤄진 사고의 집합체, 일 초에 수십 수백의 색이 번쩍이는 듯한 그 덩어리 속에서도 세현은 필요한 모든 것을 구분지어 뽑아냈다.
그래, 그럴 수 있다.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럴 수 있다. 이 세계에 자신의 제국을 우뚝 세우고 싶다면,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깊게 남기고 싶다면 다른 국가의 위기를 틈타 뒤통수를 치려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일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 했다.
너무나 황당하고 화가 나는 가정이라 떠올릴 수조차 없었다.
아침에 꾸었던 꿈이 떠오른다. 혜진과의 여러 추억들도 흡사 여러 장의 사진처럼 떠오른다.
번개가 번쩍이는 듯한 섬광과 함께 수십 수백의 장면들이 세현의 머릿속에서 초고속으로 지나간다. 아무 연관이 없는 상황임에도 그때의 감정이, 그 증오와 분노가 차올라 그의 숨을 가쁘게 만들었다.
에레도스 사태 이후 지금처럼 감정이 들끓어오르는 것은 단언컨대 처음이다.
그에게 혜진이 대체 어떤 존재인가?
[이 빌어먹을 놈들이 감히……!]의지가 형상으로 화한다. 동시에 사절단 인원들이 피를 토하며 휘청이다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사절단 대표 한 명은 나름 무사했다. 안색은 곧 죽을 사람처럼 푸르죽죽 했으나 그는 피를 토하지도 않았고 여전히 서 있었다.
“개구리를 삶겠다고. 그래, 잘 알겠다. 그럼 이제 이쪽의 대답을 들려주지.”
이후 세현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이바노프에게 말했다.
“한놈 남기고 다 죽여서 목을 들려보내.”
“알겠습니다.”
왕명을 받은 이바노프가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내가 직접 간다고 전해라. 어디 막을 수 있으면 막아보라고.”
마지막으로 사절단 대표를 노려본 그가 몸을 돌려 홀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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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절단이 한 명만 살아남아서 돌아왔다. 나머지는 전부 목이 잘린 채로 몸은 돌아오지도 못하고 머리만 달랑 돌아왔다.
“허.”
장한위는 대체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공포에 질려 제정신이 아닌 사절단 대표에게 물러가라 말한 후, 대전에 덩그러니 남은 머리들만 바라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중요한 인재들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반고를 대표해서 간 자들이다. 지금 결코 일어나선 안 될 일이 일어났다.
“당장 응징해야 합니다!”
“감히 사절단의 목을 쳐 보내다니! 이건 엄청난 도발입니다. 상상하지도 못할 무례입니다!”
이미 소식을 듣고 대전에 모인 간부들 전부가 얼굴을 붉히며 노기를 표출했다. 설마 상대가 이런 식의 대응을 해오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그야 물론 가능성 중 하나로 남겨두긴 했으나, 어떻게 미치지 않고서야 정말로 이런 짓을 해온단 말인가?
이것은 둘 중 하나가 죽자는 말과 다름이 없다. 특히나 중국인은 체면을 중시하기로 유명한 종족, 이런 식의 모욕을 참고 넘긴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일개 개인이라도 그럴진데 국가라면 더더욱 그렇다.
“음……”
장한위는 고민했다.
역시 젊어서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건가? 이 정도의 굴욕조차 감내할 수 없을 정도로?
아니면 달리 믿는 구석이 있는 건가? 남색 등급 괴물을 상대하면서 그들까지 동시에 상대할 수 있다고?
“지금도 올라오고 있는 정보에 따르면, 류한의 남쪽에 자리한 언데드 괴물은 우리 반고가 상대했던 괴물보다도 강력한 것으로 보입니다.”
“괴물 본신의 실력은 모르겠으나 그 세력만 보면 훨씬 거대합니다. 설령 우리라고 해도 놈들을 격퇴하긴 어려울 것입니다.”
“게다가 놈들의 세력이 제주도에 정착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바다를 사이에 둔 지형적 이점을 고려한다면 류한이 단기간에 언데드를 토벌할 가능성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언데드들은 멍청하지 않습니다. 제대로 된 첩보활동을 할 능력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류한의 기세가 주춤한다면 결코 그냥 지켜볼 놈들은 아닙니다.”
대전에 자리한 참모진들이 너도나도 의견을 쏟아냈다.
하나같이 확실한 정보를 토대로 한 정확한 분석, 설령 천공성의 위력이 그야말로 경천동지하다 해도 언데드와 반고 둘을 동시에 막아낼 수는 없다.
“그래서, 그대들의 생각은?”
“개구리 삶기 작전이 실패했다면 본격적인 압박에 들어가야 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반 죽음에 이를 때까지 몰아붙인 후 확실하게 굴복시켜야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많은 피를 흘릴 필요는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리 된 이상 동맹국으로 예우할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격한 마찰이 일어나겠지만, 세심한 계획으로 통제한다면 오히려 더 빠르게 통합이 가능해질 겁니다. 전화위복 아니겠습니까?”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를 시키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의 누이는 정실 아닌 첩으로 받아들이고 자식은 이곳에서 수학시켜 후일 훌륭한 반고의 신하가 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들은 이미 류한의 항복이라도 받아낸 것처럼 말했다. 무장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명령만 내려주신다면 당장 평양성 인근부터 불태우기 시작하겠습니다.”
“가용한 모든 중화기를 동원하는 것만으로도 강력한 압박을 가할 수 있을 겁니다. 하루에 일 미터씩만 이동해도 놈들은 견디지 못할 겁니다.”
“어차피 폭약은 남아도는 실정이 아닙니까? 묵혀둔다고 유용해지는 것도 아니고, 지금이 바로 사용할 때입니다.”
폭약의 유용성은 시간이 갈수록 줄어든다. 이미 잘 키운 전투원 한 명이 전차 한 대와 비슷한 몫을 하는 상황, 시간이 흐르면 더 이상 전차와 장갑차 같은 것은 덩치만 크고 무겁고 불편한 무기가 되리라. 하지만 아직은 충분히 유용하고 강력한 무기다.
“헌데, 놈이 일주일 후에 직접 오겠다고 했다는데.”
“……그야, 홧김에 한 말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이쪽으로 공격해오는 것은 자살행위입니다.”
“만약 정말로 놈이 병력을 끌고 온다면 그대로 박살내주면 될 일입니다. 되도록 생포해야겠지요.”
“천공성에 대한 대비는 끝났습니다. 설령 예상보다 천공성이 강력하더라도 피로스의 승리 그 이상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항우처럼 말이지요.”
피로스의 승리, 이겨도 결코 득이 되지 않는 승리를 말함이다. 항우 역시 매 전투에서는 이겼으나 결국 전쟁에서는 졌다.
천공성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그것이 반고의 쏟아내는 포화를 모두 견뎌낼 정도로 막강한 무기라 해도 아직은 하나밖에 없다. 천공성이 움직이는 순간 우회한 반고의 병력이 평양성을 불바다로 만들 것이다. 정말로 망해버릴 작정이 아니라면 제 본진이 털리는데 공격에 천공성을 끌고 적진 깊숙하게 들어올 수는 없으리라.
“일단 대비는 해두지. 놈이 예고한 시일이 지난 후, 아무 일도 없다면 이쪽에서 움직인다.”
장한위는 결정을 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류한의 행동은 어리석기 짝이 없다. 백 번 양보해서 제 누이가 자신의 왕국보다 소중하다 해도, 어차피 류한이 망하면 그들 역시 살아가기 힘든 것이 명약관화 아니던가?
워낙 의외의 반응이 돌아와 잠시 더 신중을 기울여봤을 뿐이다. 달라지는 것은 없다. 방식과 시간의 차이가 생길 뿐, 결국 반고는 류한을 짓누르고 한층 더 거대한 제국으로 우뚝 서게 되리라. 그야말로 하늘이 돕고 있었다.
이곳에 자리한 이들 중 그 누구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안 돼…… 안 돼……!”
다만, 대전에 자리하지 못하고 제정신이 아닌 채 자신의 숙소에 갇히다시피 한 사절단 대표만이 헛소리처럼 그런 말을 내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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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보기 파트 끝입니다!
부디 재밌게 읽으셨길 바라며 추천! 부탁드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