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217
217====================
최초의 검귀
청월의 옵션으로 인해 잘린 날개의 단면에서 불길이 치솟기 시작한다. 그것을 흑마력으로 억누르며 페하브가 미친듯이 검을 휘둘렀다.
그야말로 목표를 가리지 않은 무차별 공격, 하수가 그런다면 더 없이 멍청한 짓이겠으나 상대는 신체능력에서 세현조차 압도하는 악마대공이다. 게다가 실상 보이는 것처럼 마구잡이로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것도 아니었다.
가공할 힘과 속도, 세현의 시야를 온통 메우며 날아드는 묵빛 강기의 칼날들 하나하나가 미묘하게 방향을 틀며 착시현상을 일으킨다. 좀처럼 피할 길이 보이지 않아 세현 역시 허공에서 몸을 휘돌리며 세차게 검을 내질렀다.
자하 제 삼식, 만화(萬花)
악마대공이 뿜어낸 수많은 공격을 마찬가지로 수 없이 많은 자색 꽃잎들이 마주한다.
도저히 포착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휘몰아치는 수천 수만의 꽃잎들 하나하나가 전부 강기를 뛰어넘는 의형기로 이뤄진 파괴의 정수, 악마대공이 전력으로 쏟아낸 공격들이라 해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만한 것들이다.
무수히 많은 폭발이 일어나며 세현과 페하브 사이의 공간이 거세게 뒤흔들렸다. 높은 하늘이 아니었다면 대지에 또 다시 무슨 상흔을 남겼을지 모를 재앙적인 파괴!
그렇게 공격을 완전하게 막아낸 그 사이, 악마대공의 진짜 노림수가 드러났다. 세현이 이기어검술로 시선을 분산시키고 회심의 일격을 날렸던 것처럼 검격의 장막 뒤에서 한순간 갑작스레 무시무시한 기운이 치솟는다.
서로서로 부딪혀 충격파를 뿜어내며 소멸하는 기운들의 틈새로 검을 수평으로 한 채 허리 뒤로 힘껏 젖힌 페하브가 보인다.
공격은 인식하기 무섭게 이뤄졌다.
그 도달은 심지어 인식보다 빨랐다.
세현의 시야에서 세상이 두 조각 났다. 기실 여태까지의 악마대공이 보여주었던 공격들 모두가 그러했지만, 이번 것은 그야말로 차원이 다르다.
이미 베여버린 것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의 섬찟함이 덮쳐왔다.
생각하고 결정하기에 앞서 본능에 따라 움직인다. 들어올린 청월과 그의 몸 전체를 감싸며 일어난 진한 자색빛 의형기에 순식간에 도달한 페하브의 거대한 일격이 충돌했다.
흡사 개미가 해일을 막는 듯한 모습으로, 가장 먼저 청월이 꺾이며 그것을 쥐고 있던 세현의 두 손목이 꺾였다. 신체의 외부는 물론 내부까지 의형기가 최대로 부여되어 그 굳건함이 극에 달한 상태였음에도 날아든 공격의 위력이 그것을 상회했다.
꺾이다 못해 마침내 부러지는 두 손목을 따라 기울어지는 검날 위로, 또 하나의 지평선이라 해도 믿을 검은 참격이 미세하게 방향을 틀며 미끄러져 내달린다. 최대한 고개를 뒤로 젖히는 세현의 이마 위쪽을 아슬아슬 스치고 지나가며 머리카락을 뭉텅이로 잘라낸다. 직접 닿지도 않은 이마의 피부가 그 위의 호신의형기에도 불구하고 깊게 베여 피가 뿜어졌다.
세현이 한때 무림에서 숱하게 겪었던, 죽음이 바로 곁을 스치고 지나가는 감각이 선명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는 살아남았다. 으레 큰 공격을 가하고 난 뒤 그렇듯, 채 자세를 수습하지 못한 페하브를 노리고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세현이 유성처럼 쏘아졌다.
완전히 부러진 두 손목을 자하기로 감싸 강제로 움직이며, 어느새 손에서 떨어진 청월이 한줄기 섬광으로 쏘아지고 그 뒤를 길게 뻗어진 무형검이 커다랗게 허공을 쪼개며 뒤쫓았다.
급하게 움직인 은빛 마검이 이기어검으로 움직이는 청월을 막아냈으나 그 바로 뒤를 쫓아온 무형검까지 막아내진 못했다.
뿜어지는 암흑을 가르고 자색빛 광휘를 뿜어내는 무형의 칼날이 악마대공의 신체를 왼쪽부터 반대편 옆구리까지 사선으로 스친다.
고래들의 싸움에 끼어든 작은 새우처럼, 사방 가득한 마력들이 거대한 힘에 휘말려 폭주하는 거센 흐름 속에서 대량의 붉은 피가 흩뿌려진다.
스치듯 들리는 비명성과 함께 악마대공이 추락을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회피를 시도한 건지 몸통이 완전히 잘리는 것은 막았으나 스친 것만으로도 충분히 치명상이다. 폭주하듯 뿜어지는 묵빛 흑마력 안쪽에서 미처 꺼트리지 못한 청월의 불길과 냉기가 확연하게 보였다.
겉으로 보이는 부상도 심각하겠지만 그 부상을 통해 침투한 세현의 의형기가 날뛰는 상황이 더 심각할 것이다. 제 아무리 최초의 검귀이자 마계를 지배하는 다섯 악마대공 중 하나라도 신이 된 세현의 힘에 정통으로 직격당하고도 온전히 몸을 놀릴 수는 없을 터.
추락하는 악마대공을 쫓아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는 그의 머릿속에서 찰나간 수많은 상념이 스쳤다.
악마대공, 최초의 검귀, 학살자 페하브.
확실히 강한 적이었다. 전투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그 무엇하나 위협적이지 않은 공격이 없었다. 하나같이 몸에 두른 호신의형기로도 결코 막아낼 수 없는 공격들 뿐이었다. 그 중 어느 하나라도 맞았다면 지금 서로의 처지는 완전히 뒤바뀌었으리라.
정말로, 특별하게 위험한 싸움이었다. 그가 어떤 특성을 가졌고 어떤 경험을 거쳐왔는지를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다.
그는 싸움에서 방어와 회피를 극히 중요시하는 무림인이다.
상대에게 칼 한 방 맞으면 당장 목숨이 오락가락 하는 것이 당연하던, 그런 식으로 경지에 오르기까지 수도 없는 사선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무인이다. 경지에 오른 후에도 마냥 편하고 쉬운 싸움만 했던 것이 아니다. 그때에도 상대의 공격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당하면 목숨이 위험하긴 마찬가지였다.
지구로 돌아와 에레도스 시스템을 조우하고 나서도 마찬가지.
크로나드의 파편과 수호룡과 악마, 보라색 룬을 얻었던 세 존재는 분명히 위협적인 적들이었다. 비록 그가 그들을 상대하며 별다른 큰 부상을 입진 않았지만 그건 힘에서 압도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싸우지 않았다면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악마를 상대할 때보다도 더 완숙하게 강해진 그의 이마를 찢어내고 두 손목까지 박살내버린 페하브는 확실히 특별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와 같이 검을 사용하는 적이 아닌가? 그녀가 보여준 수없이 많은 검로(劍路)들이 지금도 눈앞에서 아른거리고 있었다. 목숨을 건 싸움이었기에 더욱 강렬하게 남는다.
죽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것은 처음이다.
그러나 자신을 죽이겠노라 공언한 상대를 살려두고 싶지도 않다.
그는 노회한 무림인, 작은 감정에 충실해 적을 살려두기에는 너무 많은 풍파를 겪은 사람이다.
“잘 가라.”
그렇기에 세현이 어느새 손아귀로 돌아온 청월을 휘두를 때는 일말의 망설임도 담겨있지 않았다.
이미 전투력을 상실하고 몸조차 가누지 못하며 추락하는 상대의 심장을 향해 단 한 톨의 방심도 찾아볼 수 없는 매서운 찌르기가 빛살처럼 떨어졌다.
@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지?
어느새 떠오른 의문과 함께 불현듯 정신을 차린다. 시야에 보이는 것은 여전히 추락하고 있는 악마대공 페하브, 그리고 그녀를 향해 떨어져 내리는 그 자신의 찌르기.
둘을 감싸고 여파에 휘말려 회오리치는 마력의 폭풍이 보인다. 그 뒤편의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무섭게 움직이던 별무리들이 보인다. 그 아래 땅과 맞닿은 지평선 아래부터 아름다운 빛무리를 품은 숲과 평원이 보인다. 한쪽에는 하늘로 치솟기 전 그와 페하브가 만들어낸 싸움의 흔적이 거대한 상흔으로 대지에 남은 모습도 보인다.
모든 것이 너무나 뚜렷하게, 그리고 더 없이 비정상적인 모습으로 고요히 자리하고 있었다.
정적이 그를 덮친다.
소리와 움직임, 그 어떤 움직임이나 변화조차 잡아낼 수 없는 절대적인 멈춤.
사고를 한계까지 가속하여 거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세상을 감지할 수 있는 세현조차 느껴본 적 없는 기괴함.
정말로, 시간이 정지해 있었다.
– 꼭 죽일 필요까진 없지 않나. –
심지어 세현 자신의 육체까지, 심장의 맥동과 혈류의 움직임까지 완벽하게 멈춰버린 그 시간 속에서, 어느새 그의 앞에 나타난 영롱한 빛무리가 작은 아이의 형상처럼 말을 걸어온다. 도무지 성별이나 연령을 짐작할 수 없는 환청 같은 목소리였다.
– 페하브는 내가 아끼는 아이야. 이번 싸움을 계기로 스스로의 부족한 점을 깨달을 수 있다면…… 어쩌면 반신 노빌리시에모프(Nobilliciemofe)가 될 수도 있겠지. –
마신이다.
– 그래, 내가 이 세계의 신이다. –
생각에 화답하듯 대답이 돌아온다. 그때쯤 세현은 간신히 자신의 신체에 대한 통제권을 찾아가고 있었다.
시간이 멈췄다는 듣도 보도 못한 기현상 속에서 의식을 차리고 어떻게든 몸을 움직일 해답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그 역시 신성을 가진 덕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수족을 자유로이 움직일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멈춰버린 심장을 뛰게 하고, 혈류를 움직이고, 눈알을 돌리고, 입술을 달싹이는 정도.
“나를 어떻게 할 거지?”
통제권을 되찾은 입으로 말하자 마신이 고개를 갸웃했다.
– 아무것도. –
“아무것도? 네가 아끼는 부하를 죽이려 했는데?”
– 싸움을 먼저 건 것은 페하브니까. 게다가 도움을 준 손님을 죽이려 들 정도로 내가 한가하거나 무도하지도 않지. –
“……”
– 혹 나와 싸우고 싶은가? –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몸으로, 세현이 고개를 저었다. 마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끄덕였다.
이곳은 마신의 홈그라운드, 모든 악마들의 숭배를 받는 마신은 이 세계의 주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존재다. 서로의 가진 힘을 비교해 설령 세현이 더 강하다 할지라도, 이 세계 전체를 압도할 정도가 아니고서야 마신을 이길 수는 없다. 그 자신이 신이기에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지구였다면 몰라도 마계에서 그와 싸우는 것은 자살행위일 뿐이다. 설령 세현보다 더 신으로서의 관록이 깊은 천신이라도 이곳에서는 마신을 상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이곳에 수호교의 신앙이 널리 퍼진다면 또 모르겠지만, 당연하게도 그럴 일은 없다.
세현은 딱히 적대적이지 않은 마신에게서 잠깐 주의를 돌려 주변 세계를 둘러봤다. 모든 것이 멈춰버린 장면은 이제 기괴함을 넘어 일종의 경외를 그에게 선물하고 있었다.
신으로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못 할까 고민한 적 있지만, 이렇게 시간을 멈춰버린다는 상상은 해본 적은 없다. 직접 보고서도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감이 잡히지도 않았다.
세상은 넓고 강자는 많다.
신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우주에는 그보다 더 강한 존재들이 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정체되려 했던 그의 마음을 마신이 나타나 직접 다그쳐준 듯한 느낌이다.
네가 신이 되었지만 정점에 다다른 것은 아니라고.
– 용건이 마무리 되었으니 돌아가고 싶겠지? –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건가?”
– 타계의 신이 왔는데 주의를 돌릴 수 있을 리가? 허나 우리의 만남은 좀 더 공식적이고 격식 있는 자리에서 제대로 이뤄졌으면 하는 바램이야. 그러니까 이만 돌아가게. –
마신이 손을 휘젓자, 아무런 징조도 없이 순식간에 붉은빛 게이트가 생겨났다.
– 그리고, 그래도 손님인데 달랑 천공성 하나 들려주고 보내기엔 천계 보기에 체면이 서질 않는군. –
뒤이어 마신은 어느새 떨어지던 페하브의 옆에 나타나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그녀에게서 뿜어져나온 소량의 흑마력이 원형의 고리 형태로 모여들어 일종의 팔찌처럼 변한다.
다시 세현의 앞으로 돌아온 마신이 그 묵빛 가느다란 팔찌를 건넸다.
– 비록 일회용이지만 받아두게. 쓸 곳이 분명 있을 테니. –
뚜렷한 형태 없는 마신의 얼굴 부분을 쳐다보던 세현이 느릿하게 손을 뻗어 그 팔찌를 받아들었다.
마신은 더 이상의 볼일이 없다는 것처럼, 세현에게 손을 흔들며 얼른 돌아가라고 재촉했다. 어쩐지 그를 빨리 보내고 싶어하는 기색이다.
세현도 부상까지 입은 마당에 자신보다 강한 마신을 상대로 뻐팅기기엔 껄끄러웠던 터라, 그 역시 순순히 통제권을 되찾은 몸을 움직여 게이트로 향했다.
그렇게 짧고 굵었던 마계의 방문이 마무리되었다.
============================ 작품 후기 ============================
부디 재밌게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 (__) 추천 한 방 꾹!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