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226
226====================
문명화
외교사절단은 용인의 류한 본성, 이제는 왕성이라 불리는 곳에 도착해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류한의 문명에 감탄을 금치 못하던 그들은 어쩐 일인지 얼마 전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호위대장이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고 방을 나서자, 그들은 상당히 넓은 크기의 응접실을 제대로 살펴볼 수 있었다.
이제 류한의 왕성은 길드성 최고레벨에 도달했다. 그 웅장함과 장엄함 섞인 화려함은 무엇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공간왜곡을 통한 넓이 역시 엄청나서 밖에서 보기에는 그리 크지 않은데 막상 안으로 들어오면 어지간한 종합운동장 몇 개를 합쳐놓은 만했다.
“정보력을 중국으로 집중한 건 실수였어.”
클리포드가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헤르난데스가 심히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심지어 제가 남색 등급 이종족 마법사의 존재를 보고했는데도 그랬지요. 그 결정이 아주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닙니다만.”
일단은 한반도의 류한과 우호적인 관계를 확인했고, 동아시아로 가는 유일한 통로인 유적과 가장 가까우며 향후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할 확률이 매우 높은 국가는 중국이었다. 정보력을 그쪽으로 집중한 건 나름 이유가 있다. 그리고 모든 정보력을 한반도에서 철수시켰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남겨둔 약간의 정보원들로는 류한 정보부장 이바노프의 눈을 피해 활동할 수 없었을 뿐이다. 어떤 세력도 확실한 동맹도 아닌 세력의 정보원들이 자국 영토에서 활개치도록 놔두지 않는다. 그렇게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정보망은 완전히 끊어졌었다.
덕분에 이들의 발전도는 물론 종교에 대한 것까지 아무것도 모른 채 오게 됐다.
“수호교,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클리포드가 헤르난데스에게 목소리를 낮추고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이곳에 들어오기 바로 전, 신전을 발견하고 호위대장에게 저 건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종교건물 같은 느낌이 들긴 했는데 진짜로 그랬다. 게다가 기존의 종교가 아닌 새로운 신을 모시는 종교였다. 바로 류한의 국왕인 한세현을.
“글쎄요……”
헤르난데스는 말을 아꼈다. 주위를 슬쩍 돌아보는 모습이 이곳이 속 터놓고 대화를 나누기엔 그리 적합치 않은 곳이라고 하는 듯하다. 클리포드 역시 두 번은 묻지 않았다.
다만 그 둘의 머릿속에서는 비슷한 생각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들의 경험으로 생각했을 때, 살아있는 사람을 신으로 모시는 종교가 정상적이었던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이 사이비었다. 설령 수호교가 그런 사이비가 아니라 할지라도, 거부감이 생기는 것만은 어쩔 수 없다. 그들은 독실한 크리스천(Christian)이다. 만약 무종교자였다고 쳐도 감상은 비슷했을 거다.
중요한 것은 이거다. 류한의 국왕 한세현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신으로 삼는 종교를 창시했는가?
그것이 만약 히틀러와 비슷한 독재적 광기에서 비롯되었다면 더 없이 위험하다.
계속 생각해도 그러했다. 신전의 규모와 그곳에 드나들던 사람들의 수, 그리고 관련 이야기를 해주던 호위대장의 태도를 생각했을 때 수호교는 이미 이들의 삶에 깊숙히 침투해 있다. 종교마저 틀어쥔 국왕은 대체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직접 물어보면 안 됩니까?”
그때, 곁에 가만히 있던 카스트로 중위가 말했다. 그에 클리포드와 헤르난데스의 시선이 꽂혔다.
“뭐라고 물을 텐가? 무슨 목적으로 그런 종교를 창시했느냐고?”
“그런 질문은 해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괜히 감정만 상하지요. 제 말은 수호교 자체에 대해 물어보자는 거였습니다. 교리라든가, 특징이라든가, 외교사절의 임무 중 하나가 상대국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니 충분히 해봄직한 질문 아닙니까?”
“흠.”
클리포드가 잠시 까슬한 턱을 매만지더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의식중에 수호교를 나쁜 목적을 가진 사이비라고 단정하듯 생각해버렸다. 이건 확실히 그의 실수다. 카스트로 중위가 제안하기 전에 외교관이 생각해냈어야 했다.
“고맙네.”
무엇에 대한 감사인지는 명확하다. 중위가 미소를 띠는 그때, 갑작스레 응접실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안으로 들어섰다.
“응?”
“으음?”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던 외교사절단 인원들이 들어선 사람의 정체를 확인하고 주춤거렸다.
아주아주 귀여운 소녀, 이제 초등학생이나 되었나 싶은 아이, 그런데 그 외양이 범상치 않다. 빛을 반사하는 새하얀 눈 같은 머리카락에 자수정처럼 반짝이는 보랏빛 눈동자가 확 들어왔다. 평범한 사람보다 길쭉한 모양의 귀는 덤이다.
헤르난데스는 뒤늦게 그 소녀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얼른 인사를 했다. 상대가 엄청난 폭풍성장을 했지만 외견적인 특색이 너무 뚜렷했기에 그는 소녀가 누구인지 확신할 수 있었다.
“유르미아 공주님이시군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주님을 뵙습니다.”
일행에게 상대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헤르난데스의 인사에 클리포드 역시 서둘러 인사를 하고, 다른 외교사절단 인원들 역시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고개를 숙였다.
헤르난데스는 유르미아가 아주 어릴 때 그녀를 본 적 있다.
반면 유르미아는 그를 기억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저씨들 누구에요?”
“미국을 대표해서 온 외교사절단입니다. 저는 클리포드 제레드라고 합니다.”
“미국? 태평양 건너 대륙에 있는 큰 나라?”
“그렇습니다. 아시는군요.”
“혹시 저를 기억하십니까?”
클리포드의 대답에 이어 헤르난데스가 질문을 던지자, 그를 다시금 빤히 쳐다보던 유르미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를 본 적 있어요?”
“네. 공주님이 아주 어리셨을 때 본 적 있습니다.”
“으응, 그래요? 나는 잘 모르겠는데……”
그럴 일도 아닌데 약간 미안한 기색을 띄는 모습이 너무 귀엽다. 한때 예쁜 딸을 갖길 소원하던 클리포드가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외교사절단 일행 중 몇 명 역시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한 명은 상대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표정관리를 하지 못하고 잇몸이 드러나게 웃었다.
헤르난데스 역시, 그 치명적인 귀여움에 절로 흐뭇해지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면서도 폭풍성장에 놀란 마음도 같이 다스려야 했다.
역시 이종족이라 성장이 빠른 모양이다. 인간의 아이였다면 아직도 그가 예전에 봤던 모습이랑 별 차이가 없었을 텐데.
한편, 유르미아는 별다른 생각 없이 그냥 돌아다니고 있었을 뿐이다. 정현욱이 돌보는 아이들 중 그녀와 친한 아이들을 찾으려는 목적이 주였다. 어쨌든 그녀는 외교사절단의 존재를 알고 온 게 아니다.
이럴 땐 어떻게 하더라?
잠시 아버지의 교육방침을 떠올려봤지만 딱히 해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궁금한 것을 물어봤다.
“무슨 일로 왔어요?”
우리집에 왜 왔니?
굉장히 아이다운 질문이다. 클리포드는 애써 정신을 차리고 정중한 태도로 응대했다. 생각같아서야 너무 귀엽고 예쁘다고 양껏 칭찬해주고 싶었으나, 상대의 나이가 어떻든 신분이 공주라면 함부로 아이취급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국왕님을 뵙고 양 국가의 친교를 다지기 위해 왔습니다.”
“친교? 친구가 되려고요?”
“친구… 바로 그렇습니다.”
“그래요? 잠시 기다려봐요. 내가 아빠 불러줄게요.”
유르미아는 해맑은 미소와 함께 응접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잠시간 실내에 정적이 흐른다.
“……좋은 건가?”
“아마도요. 기다리는 시간이 줄어들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외교관의 말에 카스트로 중위가 대답했다. 그리고 다른 말도 꺼낸다.
“그나저나, 솔직하게 말하는 겁니다만, 너무 귀엽지 않습니까? 저는 처음에 인형이 들어온 줄 알았습니다.”
“……만약 인형이었다면 세계 최고의 장인이 온갖 정성을 들여 빚은 인형이었겠지.”
“저런 딸이 있으면 뭐든지 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동감일세.”
그렇게 잠시 후.
이번에는 노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두 명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이 만나기를 희망하던 류한의 국왕 한세현과 정보부장 이바노프였다.
외교사절단이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서는 가운데, 세현이 그들 중 아는 얼굴인 헤르난데스를 보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이군.”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그럭저럭. 일단 앉지.”
말과 함께 세현이 먼저 자리에 앉자 이바노프가 뒤에 시립한다.
외교사절단 인원들은 정중한 인사 후 조용히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세현이 앉은 자리의 맞은편에는 낮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클리포드와 헤르난데스가 있었다.
유르미아가 불러준 덕인지, 한 나라의 국왕과 대면하는 자리라기엔 상당히 편한 장소와 분위기였다.
“일단 대접이 섭섭하다고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어. 지금 식당에서 만찬을 준비하고 있거든.”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상당히 기대되는군요.”
클리포드가 대답했다.
“그나저나 내 딸이 먼저 들어왔던 모양인데.”
“예. 잠깐 보았지만 공주님이 아주 귀엽고 총명하셨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엄청난 미인이 되실 겁니다.”
뻔한 칭찬이다. 하지만 세현의 입가에는 분명한 미소가 걸렸다. 딱히 악의를 가진 칭찬도 아닌데 기분 나쁘게 받아들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 사이 클리포드는 세현의 뒤에 선 이바노프를 티나지 않게 잠시 살피고선 본론을 꺼냈다.
“이렇게 뵙기를 청한 건 좋은 소식을 알려드리기 위함입니다. 우리 미국이 얼마 전 에레도스 시스템상에서 국가가 되었습니다.”
“아, 그런가? 축하할 일이로군. 그러면 그쪽도 국왕이 있나?”
“미국은 도시국가연합입니다. 21명의 각 주 대표분들께서 국왕님께 전하는 서한이 여기 있습니다.”
뒤에 선 사절단 인원 중 한 명이 아공간 주머니에서 빳빳하고 깔끔한 양식의 봉투에 담긴 서한을 꺼내 클리포드에게 건넸다. 그것을 받은 클리포드가 세현에게 두 손으로 전달한다.
세현은 천천히 봉투를 뜯고 안의 종이를 꺼내 내용을 살폈다.
격식에 맞춰 쓴 글귀로 상당히 길고 정중했다. 요약하자면, 자신들의 탄생을 알림과 함께 과거부터 이어져온 한미동맹을 언급하며 앞으로도 상호 보완적인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세현은 미국이 도시국가연합이라는 형태를 취한 것이 흥미로웠다. 예전에 잠깐 생각했던 대로 에레도스 시스템상의 국가형태는 왕국만 있는 게 아니었다. 상황만 받쳐준다면 민주주의 국가도 탄생할 수 있을지 모른다.
“도시국가연합이라, 상당히 새롭군.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미국의 상황이 어떠한지 알려달라는 말과 같다.
얼추 예상했던 질문이었기에 클리포드는 곧장 준비했던 대답을 꺼내들었다. 너무 숨기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과하게 드러내지도 않는 수준의 대답, 그러면서 전혀 무례한 느낌 없이 은근한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확실히 노련한 외교관이라는 느낌이었다.
화술은 그처럼 직접 외국의 주요 인사를 상대하는 외교관의 기본이자 끝이다. 예전처럼 통역사를 통하지 않게 된 지금은 더더욱.
“저희에겐 낯선 종교인 수호교에 대해서도 상당히 궁금합니다. 괜찮다면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마침내, 클리포드가 그 이야기를 꺼냈다. 류한의 문명에 감탄하면서도 찜찜함을 품게 만들었던 그것.
“수호교에 대한 건 대주교에게 듣도록 해. 만찬장에서 볼 수 있을 거다.”
대주교?
새로운 주요 인물의 존재에 대한 정보를 머릿속에 넣으며 클리포드가 수긍했다.
이왕이면 국왕이자 수호교 신앙의 대상인 그에게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모든 질문에 직접 대답을 들을 수 있으리라곤 애초부터 기대하지 않았다.
그때 세현이 말했다.
“사실, 다른 외교사절단이 먼저 와 있다. 자네들이 만찬장에서 당황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다른 외교사절단 말씀이십니까?”
의도적으로 되물으며 클리포드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반고 왕국의 사람들이겠군요?”
“아니. 구 러시아 사절단이다. 이다니자카스 왕국이라 하지.”
러시아? 이다니자카스?
그들이 먼저 와 있었다고?
러시아와 미국의 관계는 여느 국가관계가 그렇듯 간단하게 정의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안 좋은 쪽이다. 양국은 냉전시대에서부터 소련의 붕괴 이후에도 크고적은 마찰을 빚어왔다.
중국에서 러시아는 가까우면서도 먼 나라다. 국경이 일부 맞닿아있긴 하나 어디까지나 러시아의 극동지방에 국한된 만큼 그곳을 갖고 러시아와 중국이 가깝다고 하긴 애매하다. 해서 미국의 정보력은 아직 러시아에 닿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이 자리에서 이다니자카스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다. 외교관인 클리포드의 책임이 한층 더 무거워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이다니자카스의 외교사절단과도 접촉해 대화를 나눠봐야 했다.
============================ 작품 후기 ============================
공들여 쓴 만큼 부디 재밌게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가시면서 추천 한 방 부탁드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