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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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은 남의 땅에서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은 게이트는 삼십여 초 정도가 흐르자 사람 한 명이 몸을 숙이고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커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게이트에서 황금빛과 푸른빛이 뒤섞인 구체 하나가 퐁 튀어나왔다.
그것이 순식간에 형체를 갖추며 허공을 딛은 채 우뚝 섰다.
인간의 이목구비를 가졌으나 남색빛 눈동자는 동공이 세로로 찢어진 파충류의 것이다. 머리 위로 한 쌍의 암적색 뿔이 돋았고 뒤편에는 용족의 날개와 꼬리가 보인다. 허리까지 늘어트린 머리칼은 눈동자의 색과 같은 남색, 몸에 걸친 갑옷은 은빛과 검은빛이 뒤섞인 기묘한 느낌의 금속이다. 손에 든 것은 흡사 유리처럼 보이는 투명한 미늘창이었다.
– 보고가 틀리지 않았군. –
놈은 사방을 가로막은 결계를 힐끗 살핀 후 바로 레야에게 시선을 돌렸다.
– 모든 용족은 성지에 신원을 등록하고 자신의 활동을 주기적으로 보고할 의무가 있다. 너는 대체 뭐지? 어디에서 나타난 용족이냐? 혹 타계에서 태어난 버림받은 용들의 후예인가? –
다소 날카로운 느낌의 목소리가 스러질 때 쯤 레야가 답했다.
– 우주의 모든 용들이 메 헤브아 스툰에서만 태어나는 것도 아닐진데, 버림받은 자들이라니? –
– 틀려. 모든 용족은 성지에서만 태어난다. 네가 그렇지 않았다면 네 선조가 일찍이 버림받은 것이겠지. 범죄를 저질렀거나, 능력이 부족했거나. –
상대는 자신이 메 헤브아 스툰에서 왔음을 숨기지 않았다.
– 어찌됐든 너는 운이 좋다. 뒤늦게나마 우리와 닿게 되었으니, 이쪽에 서라. 내가 네 등록절차를 도와주마. –
– 조건만 맞다면 얼마든지. 하지만 일단, 대체 왜 우리를 다짜고짜 공격했지? –
– 우리? –
남색 눈동자가 레야를 제외한 다른 이들을 훑는다. 안테아, 왕자, 세현, 마지막으로 베이마라.
– 이제 보니 용족이 또 하나 있었군. 네 등록절차 역시 도와주마. 혹 다른 용족이 더 있는가? –
– 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어째서 우리를 공격했지? –
다시금 레야를 쳐다보며 그가 천천히 대답했다.
– 모든 적대적 침습에 대한 최우선 방침은 선제공격이다. 이곳에서 우리의 정령 시스템에 대한 침투시도가 감지되었기에 공격했을 뿐, 특별한 이유는 없다. –
– 정령 시스템? –
– 모르는 것을 보니 딱히 범죄를 의도한 것은 아니겠군. 좋아, 등록 후 네가 받을 재판에서 증인을 서주지. –
– 재판이라고? –
– 그만, 일일이 대답해주다간 끝이 없다. 성지에서 모든 것을 알려줄 테니 일단은 나를 따라와라. –
– ……뜬금없는 재판까지 운운하는 마당에, 내가 왜? 너희가 무슨 권리로 나를 심판하겠다는 거냐? –
– 하하하. –
상대 용족이 어이없다는 듯 짧은 웃음을 흘렸다.
– 그래, 모르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더 이상은 안 돼. 네가 용족인 이상 선택지는 없다. 거부한다면 강제로 데려갈 수밖에. 다시 묻겠다. 이곳에 다른 용족이 얼마나 더 있지? –
– 네 알 바 아니다. 너는 최소한의 설명조차 없이 나를 강제하려 드는군. –
– 어려서 그런지 혈기가 넘치는구나. 일단은, 네 양옆의 그 지저분한 하등종족부터 치우고 봐야겠다. –
그리고 투명한 미늘창을 치켜든 용족이 별안간 사라졌다.
쾅!
– 꺼억…! –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용족이 사라지고, 놈이 세현의 앞에 나타나고, 폭발하듯 뿜어진 자색빛 광휘와 함께 목이 붙잡혀 벽에 처박히는 과정은 가히 찰나.
– 캬아아아악-! –
파츠츠츠측!
사나운 괴성과 함께 제압당한 용족에게서 어마어마한 마력이 뿜어졌다. 하지만 그보다 배는 더 강력한 의형기가 일어나며 그를 가차없이 찍어눌렀다.
격렬한 반항의 와중에도 불구하고, 서늘한 표정으로 얼굴을 가까이 한 세현이 나직하게 경고했다.
“하나, 이게 내 마지막 자비다. 다시는 까불지 마라.”
– 크…! –
“둘, 너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강요할 수 없다. 원하는 게 있다면 먼저 존중을 보여야지.”
– 감…히! –
“셋, 나는 아직 이 사태를 대화로 해결할 용의가 있다. 하지만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야. 똑똑한 용족이라면 잘 알아들었겠지.”
세현에게 붙잡힌 용족, 그의 눈에 한순간 공포가 서렸다.
마력을 관찰할 수 있는 용안(龍眼)에 세현을 중심으로 피어오르는 말도 안 되는 힘의 결집이 보인다. 사방이 온통 암흑으로 물든 결계 속에서 자색빛으로 물든 두 눈동자만이 뇌리에 새겨지듯 선명하게 들어왔다.
– 안 돼! –
쿠드드득!
생존본능 때문인지 최후의 반항인지, 붙잡혔던 용족의 신체에서 빛이 폭발하듯 뿜어지며 급속도로 변형하기 시작했다.
세현은 망설임 없이 변형하는 용족을 그대로 게이트로 집어던졌다.
아슬아슬하게 걸쳐지듯 넘어가버린 용족의 궤적을 따라, 뒤늦게 공기를 가르는 파공성과 마력의 잔재가 돌풍처럼 일어났다가 잠잠해졌다.
“건방진 놈.”
손을 탁탁 터는 세현을 지켜보던 안테아가 조심스레 말했다.
– 딱 봐도 용족 아닌 자들을 무시하는 기색이 강하던데, 과연 말을 들을까요? –
“안 듣겠지.”
의외로 세현은 단언했다.
“내 생각은 그래. 하지만……용족이라면 다를지도.”
그래서 살려보냈다.
인간과 용족은 명백히 다르다. 하등종족이라는 말로 세현을 깔아뭉개며 가장 먼저 죽이려 들었지만, 사실 말만 따지면 틀린 것도 아니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용족과 비교했을 때 모든 면에서 뒤떨어지는 것이 분명하니까.
그러니까 어쩌면 다를지도 모른다. 메 헤브아 스툰, 용들이 성지라는 곳이 얼마나 큰 힘을 갖고 있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없다. 가능하다면 싸우고 싶지 않은 게 사실이다.
– 폴바르, 아무래도 메 헤브아 스툰에서 정령은 꽤 중요한 요소인 듯하다. 우리가 만들려 했던 정령 인공지능 시스템과 비슷한 것이 이미 구현되어 있을지도 몰라. –
“그래서 그런가?”
그렇다면 레야의 행동을 자신들의 시스템에 대한 침습이라 표현한 것도 이해가 간다. 일종의 해킹시도로 보이지 않았을까.
“그러면, 존재하는 모든 정령들이 용들에게 종속된 건가?”
– 그럴 리는 없어. 당장 이곳의 정령사들이 소환하는 정령들만 봐도 깨끗하니까. 하지만…… –
잠시 생각을 정리한 레야가 말을 이었다.
– 내 지식의 근원이 그곳에서 나왔다면 설명이 돼. –
“여태까지 정령을 한 번도 소환해본 적 없나?”
– 기억에 따르면 가장 최근의 소환이 구백 년 전이야. 그러니까, 내가 수호룡도 아니었던 시절이지. 그때는 분명 괜찮았는데. –
다섯의 고룡이었던 시절을 말함이다.
구백 년이라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납득할 수 있을 만한 긴 시간, 그 사이에 메 헤브아 스툰에서 정령을 사용한 모종의 사회적 시스템 구축을 완료한 모양이다. 아니면 원래부터 있던 시스템에 더 많은 정령을 투입하여 증축했다거나.
– 소환할 수 있는 모든 정령을 종속시킨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
왕자가 레야에게 묻고 레야가 그에 답했다. 베이마라와 안테아 역시 마법이론을 꺼내들며 대체 왜 그 정도 정령이 필요했는지,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추측하기 시작한다. 마법에 대해 잘 모르는 세현인 가만히 침묵하며 그들의 토론을 귀담아 들었다.
하지만 대화는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게이트에서 선명한 스파크와 함께 또 다른 존재가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처음 등장했던 놈과 비슷한 차림새지만 분명한 여성체다. 온몸이 환영처럼 반투명하다는 점이 차이점이라면 차이점, 또한 혼자가 아니라 부하로 보이는 다른 용족들 다섯을 더 대동한 채였다.
여자 용족은 나타나기 무섭게 장내에 자리한 이들 하나하나를 노려보듯 살피더니, 마지막으로 세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힘을 가라앉히지 않아 여전히 자색 눈동자를 띤 그를 보며 적대감을 숨기지 않고 이를 드러낸다.
– 보라색 눈동자…… 네 정체가 무어냐? 인간인가? 겉모습은 인간인데, 하지만 대체 어떻게? –
“인간에 대해 잘 아나?”
– 알다마다. 통제 없이 놔두면 스스로의 파멸조차 알아채지 못하고 오로지 탐욕만을 보며 달려가는 어리석은 것들 아닌가. 실로 지성체라 부르기에도 부끄러운 것들이다. 헌데 네가 정말로 그 인간이라고? –
“인간 맞다. 알았으면 이제 그만 물어보고, 내 경고에 대한 답은 가져왔겠지?”
– 경고? 그래, 가져왔다. –
반투명한 용족 여성의 몸 뒤편에서 일전에 남자 용족이 보여주었던 것보다 배는 더 거대한 마력의 파동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커다란 음성이 마법결계 내부를 천둥처럼 울렸다.
– 심판관으로서 알린다! 너희는 우리의 행정 시스템을 침투하려 시도했으며, 정당한 대응을 위해 나선 기동대를 무참히 살해했다. 또한 뒤이어 파견된 조사대장을 겁박하고 강제했노라. 이는 우리 메 헤브아 스툰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 아닐 수 없는 바, 전쟁을 피하고 싶다면 이곳의 수장은 당장 소환에 응하여 적법한 심판을 받으라! –
강렬한 힘이 담긴 선언에 주위를 차단하던 마법결계가 미약하나마 진동할 정도였다.
“……혹시나가 역시나로군. 우리 입장에서 생각해본 적은 없나? 그저 정령을 소환해서 가벼운 실험을 하려 했을 뿐인데, 난데없이 게이트를 열고 뛰쳐나와 공격해오는 놈들을 어떻게 했어야 한다는 거지? 얌전히 당해줬어야 하는 건가?”
– 항변은 법정에서 해라. 응하지 않는다면 재판 없는 즉결처분 뿐이다. –
세현이 큭큭대며 웃었다.
“너희도 인간과 똑같아. 용족도 별 것 없군.”
– 뭐라고? –
심각한 모욕이라도 당한 마냥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지는 여성 용족, 자칭 심판관이라는 자를 향해 세현이 마저 말했다.
“왜 너희의 기준과 법을 강요하는 거지? 정령이 누구의 것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으며, 그게 너희의 것이라고는 누가 정해줬나? 그런 사정을 모르지 않을 터인데도 이리 나오는 걸 보면 애초부터 우릴 동등하게 대해줄 생각이 없다는 뜻이겠지. 그 오만과 편협함이 인간과 다를 게 없구나.”
– 감히! –
콰드드드드득-!
분노한 심판관의 뒤편에서 휘몰아치는 마력의 해일이 순식간에 하나의 마법진을 이뤘다.
레야와 안테아, 베이마라와 왕자가 반사적으로 대응마법을 짜내는 순간, 세현이 그들 앞으로 나서며 손을 들어 제지시켰다.
그 사이 마법은 완성되어 무시무시한 파공성을 동반한 채 쏘아졌다.
이 방은 물론 마법결계를 꿰뚫고 성 전체를 부숴버릴 수 있는 충분한 힘이 담긴 구형의 투사체, 과연 강대한 마법이라 할 만했으나 그것이 노리는 상대가 다름 아닌 세현이다.
“네 집에 돌려주마.”
냉소와 함께 휘둘러진 손에 무시무시한 기세로 날아들던 마법이 거짓말처럼 방향을 바꿔 게이트를 향해 쏘아졌다.
애초부터 가공할 속도였기에 시전자인 심판관조차 무엇을 어찌할 새 없이 마법은 게이트 너머로 사라졌다.
– 뭐, 뭣…?! –
꼭 싸워야 한다면 전장은 남의 땅으로 삼아야 하는 법.
세현이 한순간 땅을 박차고 돌진했다.
상대가 그것을 인지했을 땐 이미 코앞까지 다가온 손이 안면을 뒤덮고 있었다. 동시에 공간을 절단하는 몇 줄기 자색 선들이 심판관을 제외한 다른 용족들을 두 조각내버렸다.
반투명한 육신은 모든 종류의 물리적 타격을 무효화시키는 영체화 마법, 그러나 세현의 ‘베겠다’는 의지 앞에서 마법은 강제로 파훼되고 육신은 청월의 칼날을 버텨내지 못했다.
비명을 내지르며 발작적으로 반격에 나서는 여성 용족 심판관과 함께 세현이 거침없이 붉은빛 게이트를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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얍!
퇴고가 끝나지 않았지만 일단 올리겠습니다.
부디 재밌게 읽으셨길 바라며 추천 꾹! 부탁드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