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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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원대전
포근한 공기와 부드럽게 내려앉던 햇볕을 기억한다.
정원사의 손길에 아름답게 자라난 꽃과 나무들을, 사랑하는 이와 맞잡은 손에서 전해지던 온기를, 귓가에 와닿던 즐거움 담긴 조곤조곤한 음성을 기억한다. 쪼르르 달려와 폴짝 뛰어 품에 안기던 작은 아들을 기억한다. 함께 훈련하며 호탕하게 웃고 떠들던 친우들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그 어찌 잊을 수 있으랴, 모든 것이 멸망해 사라져 잊혀지는 와중에도 그 자신만은 필사적으로 기억을 그러쥐며 결코 잊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 자신마저 잊혀진 와중에도, 그는 이성을 유지하며 더 없이 길고 길었던 시간을 결국 견뎌냈다. 견뎌내고야 말았다.
처음 계획의 시작을 결심했을 때 드디어 다시 만날 수 있노라 기뻐했으나, 그 재회가 끔찍한 약탈로서 가능하다는 것을, 어쩌면 돌이킬 수 없는 타락의 시작점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조금이나마 망설였다.
그러나 사실 이제와서 망설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오로지 이 순간을 위해서 그 긴 시간을 버텨왔기 때문에.
끄아아아아아아아-!!
전신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켈데브렘은 충혈된 눈으로 쉬지 않고 대검을 휘둘렀다. 전신을 붕괴시키다시피 뿜어지는 막대한 힘이 가공할 속도로 검을 벗어나 일직선으로 공간을 가르고, 그에 걸쳐진 주변의 인간들이 이리저리 절단나며 팔다리가 튀어오르고 핏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그는 이성을 잃은 괴물처럼, 동시에 더 없이 필사적으로 날뛰었다.
인간보다 월등한 신체로 한 달음에 수십 미터를 뛰어넘으며 닥치는대로 주변의 인간들을 베어넘기고 마법으로 숨통을 끊는다. 은빛의 번개폭풍을 두르고 휘몰아치는 듯한 압도적인 광경 뒤로 끔직한 핏빛의 대로가 생겨났다.
“켈데브렘님!”
“제발…! 제발!!”
난데없는 배신, 그 와중에 아직까지 상황파악을 못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짖는 인간들이 있었다. 물론 그런 이들에게도 켈데브렘의 은빛 대검은 가차없이 휘둘러져 그들의 몸을 갈기갈기 찢고 동강냈다. 충격파와 섞여 폭발하듯 뿜어지는 핏물, 그를 뒤집어쓴 근처의 인간들이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비명 같은 고함과 함께 공격을 가한다. 물론 유의미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켈데브렘의 최초 낙하는 명백하게 미토스의 지휘부가 몰려있던 장소였다. 그곳에는 국왕인 크리스토프 발츠도 있었다. 머리를 잃어버린 미토스 측 전투원들은 갑자기 적으로 돌변해버린 켈데브렘을 맞이하고 어찌할 줄 모르며 혼란에 빠졌다.
당황한 건 미토스 뿐만이 아니었다.
전선 뒤편에서 일어나는 일이라지만 애초에 켈데브렘은 너무나 눈에 띄는 존재다. 분명히 적이었던 자가 갑자기 같은 편을 처부수고 있으니 혼란할 수밖에 없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이다니자카스에는 지휘관들이 멀쩡히 살아있다는 점이었다.
“공격! 계속 공격해라!!”
“망설일 필요 없다! 죽여!”
적의 혼란은 곧 기회일지니, 켈데브렘이 미쳐 날뛰기 시작한 건 분명 당황스러운 일이지만 그에 망설일 필요는 없다. 지휘관들이 외침이 이어지자 이다니자카스는 언제 혼란스러워했냐는 듯 더 기세를 높여 공격을 가했다.
전선이 한순간에 밀리기 시작했다.
뒤에서는 무시무시한 학살을 자행하는 켈데브렘이, 앞에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눈에 벌개진 이다니자카스 전투원들이 있다. 밀리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기적이다.
흡사 켈데브렘이 이다니자카스에 넘어가기라도 한 듯했다. 여태까지 미토스가 사용해왔던 전법, 켈데브렘이 적진 깊숙히 파고들어 진형을 무너뜨리면 그를 전면에서 압박해 완전히 붕괴시키는 전술을 역으로 당하고 있는 모습이다.
압도적인 우세였다.
허나 마냥 좋아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서영환과 정현욱, 그리고 그 둘을 위시로 켈데브렘을 막는 임무를 가진 이들은 극도로 긴장한 채 켈데브렘을 주시하고 있었다.
갑자기 미쳐버린 것처럼 행동하는 놈의 힘이 가히 끔찍하다. 지금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적들 사이에서 학살을 일으키고 있으나, 만약 방향을 틀어 이곳으로 날아든다면 막을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5중대 대기! 대기해라!”
“7중대는 빠져라! 7중대 물러서!”
영민하게도 제라르 드파르디외의 명령이 떨어졌다.
혹시 모를 켈데브렘의 난입을 방지하기 위해, 꽤 많은 전력이 무너지는 미토스를 공격하는 대신 제 자리에 멈추거나 뒤로 물러서서 전력을 보존했다.
“대공님…!”
그 사이 뭔가를 눈치 챈 카이마스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영환을 불렀다. 서영환 역시 설명을 듣기도 전 켈데브렘이 휩쓸고 지나간 곳에서 벌어지는 이변을 포착하고 눈에 힘을 줬다.
켈데브렘이 학살하고 지나간 자리로, 근처의 모든 피들이 중력을 거스르듯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급격하게 가속하여 위로 치솟았다.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번개처럼, 그러나 중구난방이 아닌 특정한 지점으로 은빛에 휩싸인 채 쏘아진 핏물들이 모여든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형체를 이루며 뭉쳐들기 시작한 구체가 얼추 백 이상!
“후퇴해야겠습니다.”
“제가 알리고 오지요.”
정현욱이 전령을 자처하며 곧장 땅을 박찼다. 빠르게 멀어지는 그를 일별한 서영환은 주시하던 켈데브렘이 아닌 미토스의 진형을 빠르게 살폈다.
켈데브렘이 직접 학살하고 지나간 곳 외에서도 어쩐 일인지 전신에서 은빛을 뿜어대며 쓰러져 죽는 이들이 간간이 포착됐다. 일단 그 존재를 알고 나니 그렇게 차례차례 쓰러지는 이들의 수가 결코 적지 않다.
아니, 적지 않은 수준이 아니었다. 왜 이제서야 알았는지 의아할 정도로 많은 수다.
“문신……?”
불현듯, 그의 머릿속에 켈데브렘이 미토스에 전수했다는 마법이 떠올랐다.
언어로서 이뤄진 주문의 형식으로 발동하는 마법도 있으나 몸에 새겨 상시적으로 발동하는 마법도 있다고 했다. 켈데브렘이 저렇게 배신한 지금, 그 몸에 새겨진 것에 다른 숨겨진 기능이 있었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여태 찜찜했던 상대의 본 목적이 이제야 드러나려 하고 있었다.
정현욱이 제라르에게 의사를 전달한 건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후퇴 소리와 함께 추격을 물러나는 이다니자카스 군이 보였다. 미토스를 확실하게 짓밟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음에도 망설임 없이 철수를 명령할 정도로 전장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여전히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는 미토스 측 생존자들과 물러서는 이다니자카스 인원들까지, 새로운 위협이 발생했음을 느끼며 벌어지는 이상현상을 주시했다.
거기에는 전장의 모두가 눈으로 보면서도 알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정말로 실력 뛰어난 마법사나 혹은 흑마법사가 아니고선 볼 수 없는 흐름, 사방으로 미친듯이 휘몰아치는 힘의 격류에 정령사조차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거대한 영혼의 흐름이다.
그간 전투에서 무수히 죽어왔던 인간들의 영혼이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동시에, 수많은 학살로 쌓여왔던 핏물들이 계속해서 허공에 떠올라 본격적으로 크기를 키워가는 백여 개의 은빛 구체로 정신없이 빨려들어가는 중이었다.
이곳은 수 만이 넘는 목숨이 스러져간 치열한 전쟁터.
켈데브렘이 준비했던 계획을 실현하기에 더 이상 이상적일 수 없는 거대한 제물이자 제단이었다.
뿌드드득-!
가장 먼저 생성되었던 한 구체의 모양이 빠르게 이지러졌다.
완성된 것은 두 팔과 다리를 갖추고 위쪽에 이목구비의 형상을 띈 머리가 달린 형상, 인간과 유사하나 그 크기는 훨씬 더 커 켈데브렘과 같은 모습이다.
그것은 전신을 부르르 떨어대다 땅에 내려서며 눈을 떴다. 짙은 한 쌍의 푸른빛이 드러남과 동시에, 다른 구체들도 기다렸다는 듯 형체를 변화시키며 땅으로 내려서기 시작했다.
전장 사방에서 빨려드는 보이지 않는 영혼들과 핏물, 그리고 켈데브렘에게서 흘러나오는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이 흡사 땅에 놓인 빛의 우산처럼 사방을 덮으며 그것들을 완성시켰다.
– 우우으……! –
더 없이 신성한 느낌의 은빛을 휘감고, 그러나 더 없이 사악한 핏빛 마력을 흘리며 그것들이 사방을 훑었다.
“주, 죽어라 이 괴물아!”
간신히 목숨을 건졌던 한 미토스의 생존자가, 내려선 은빛 괴존재와 눈이 마주치곤 반사적으로 공격을 쏘아냈다.
손에서 생성된 번개가 빠지직 소리를 터뜨리며 쏘아진다. 나름대로 힘을 모으고 있었던 듯 제법 강력한 일격, 그러나 휘둘러진 은빛 손과 부딪히자 허무할 정도로 쉽사리 튕겨진다. 튕겨난 마법은 시전자의 머리를 터뜨려버린 후 땅에 내리꽂혀 폭발했다.
마법사를 죽인 은빛의 거인이 시체를 집어든다. 터져 그을린 목의 단면으로 입을 가져가더니, 거기에 이빨을 박아넣고는 게걸스럽게 피를 빨아댔다.
순식간에 시체가 미이라처럼 말라붙는 것과 함께 온통 은빛 일색이던 몸에는 색채가 어렸다.
비슷한 일이 사방에서 벌어졌다.
전설 속의 뱀파이어처럼, 그러나 어울리지 않는 신성한 은빛 광휘를 두른 그것들이 살아남은 인간들을 학살하며 게걸스레 피를 탐했다. 그럴 수록 몸에 색채가 돌아오고 단순한 빛덩이에서 점차 육신을 갖춘 생명체로 화해간다.
– 크… 허억! –
그 사이, 모든 마법적 과정을 마친 켈데브렘이 고통에 겨운 숨을 토해내며 비틀거렸다.
대검을 지팡이삼아 간신히 쓰러지는 것을 면했으나 누가 봐도 극도로 지친 모습, 그는 하나 둘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쳐다보는 정체 모를 은빛 인영들에게 이다니자카스 쪽을 가리켰다.
– 왕의 그릇이… 저기 있다! –
학살에 여넘이 없던 백이 넘는 은빛 거인들의 고개가 일제히 이다니자카스 쪽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켈데브렘의 대검이 가리킨 서영환이 있는 곳으로.
“……하.”
먼 거리였으나 그것들은 분명 서영환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건 아무리 봐도 무리다.
“후퇴!”
그가 외침과 동시에 몸 돌려 달렸다.
동시에, 전장 전체를 떨어 울리는 괴성들이 터져나오며 백이 넘는 은빛 괴존재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후퇴! 후퇴!!”
“무조건 후퇴!!”
기겁한 이다니자카스 지휘관들이 목이 터져라 외치며 저도 꽁지가 빠져라 도망쳤다. 수도를 등지고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배수진을 쳤으나, 상대가 백에 가까운 파란색 등급 괴물들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수도는 포기한다!”
제라르 역시 통신기에 그리 명령하며 허겁지겁 달렸다. 배수진을 쳤다고는 하나 만약을 대비했던 만큼, 수도는 언제든지 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오로지 살기 위한 도주가 시작됐다.
무서운 속도로 그를 추격해 따라잡은 은빛 존재들이 뒤쳐진 이들부터 잡아 죽이며 피를 빨아대기 시작했다. 서영환을 노리던 것들 역시 눈앞에서 벌어지는 살육의 잔치에 정신이 팔린 듯, 이내 추격을 그만두고는 근처의 사람들을 학살하며 피를 탐했다.
그것을 가장 뒤편에서 바라보던 켈데브렘이, 다시 무어라 외치려다가 이내 정신없이 피를 빨아대는 동족들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는 거의 망가진 몸을 추스르며 무겁게 눈을 감았다.
부디 이것이 옳은 길이기를.
============================ 작품 후기 ============================
전편 후기에서 언급했듯 켈데브렘의 숨은 의도가 드러났습니다. 걔가 괜히 싸움을 질질 끌었던 게 아니었죠. 백이 넘는 파란색 등급에 밸붕이라 느끼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보셨다시피 정상적이진 않습니다.
부디 재밌게 읽으셨길 바라며, 추천 한 번 꾹! 부탁드립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