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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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
– ……해서, 계속 교착상태입니다. –
태블릿으로 천공성을 통한 실시간 보고를 듣던 세현이 잠시 걸음을 늦췄다.
현재 하드샤는 적을 공격할 수도, 그렇다고 물러날 수도 없다. 유적이었던 요새에 틀어박힌 놈들은 보름이 지나도록 아예 밖으로는 나올 생각을 않는 중이었다.
따지자면 나쁜 상황이 아니었다. 덕분에 서영환은 후방으로 일부 병력을 돌려 후방을 수습하는 중이었으니까.
거인들에게 습격당했던 잔여 생존자들을 끌어모으고 구 미토스 소속이었던 유럽의 잔존세력들과 접선한다. 적들이 얼마나 위험한지 증명해주는 생존자들이 있으니 규합은 수월하게 진척되는 중이었다. 물론 제각각 다른 꿍꿍이를 가진 사람들을 한곳으로 모은다는 게 마냥 쉬울 리 없다.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바로 그 시간을 적들이 만들어주고 있었다.
“켈데브렘……”
정황으로 보아 놈들의 수장은 필시 켈데브렘이 분명하다.
잊혀진 영웅, 남색 등급, 현시점에선 세현이 아니고서야 절대 만만히 볼 수 없는. 적어도 한 개 국가의 전력을 투입해야만 도모해볼 수 있는 괴물.
왜 가만히 있는 걸까?
요새를 소환한 이유는 그곳을 거점으로 삼아야 할 이유가 있다는 뜻일 터, 필시 노리는 바가 있을 텐데 거북이처럼 웅크리고만 있다. 그래서야 이쪽이 점점 더 유리해질 뿐이다. 놈들의 입장에선 제 아무리 튼튼한 요새가 생겼다 한들 이 세상 전체가 적진 한복판 아니던가?
아무리 튼튼한 요새도 두드리고 또 두드리면 결국은 무너지는 법이다. 설령 방어에 자신이 있다 한들 최소한의 공격조차 하지 않는 것은 좀 이상하다.
가정할 수 있는 상황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놈들이 유적에서 시간이 필요한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외부활동을 펼칠 수 없는 내부적 문제가 생겼다는 것.
그리고 또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 놈들은 유적에 들어서기 전까지 피를 빨아먹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급하게 유적으로 향하면서도 근처의 인간들을 꼭 습격했을 정도이니, 아마 꽤 자주 피를 빨아먹어야 하는 듯하다. 그런데 요새가 소환된 후로는 단 한 명도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그에 관련된 대책이 요새에 준비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버티는 게 목적이었나? 무엇을 노리고?
하드샤를 이용해 시간이 날 때마다 공격을 가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내진 못했다. 놈들의 요새는 겉보기에도 튼튼했지만 하드샤의 광선공격을 막아내는 마법적 방어막도 갖고 있었다. 그것 하나만 보더라도 역시 정면으로 쳐들어가는 것은 무리다.
그나마 아크리치가 있으니 최악의 상황은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현재로선 지금처럼 유럽지역 잔존세력들을 규합하고 놈들을 감시하며 말려죽이는 것이 최선이었다.
아무리 수단을 마련해놨어도 영원히 그곳에서만 살 수는 없을 거다.
“마젤란이 따로 말은 없었나?”
– 별다른 조짐은 없답니다. 아직까진 뭔가를 꾸미는 것 같진 않습니다. –
“그 사로잡았다던 놈은?”
보고하던 신소진이 잠시 머뭇거렸다.
– 지극히 흑마법사다운 생체실험이 가해지는 중입니다. –
“무슨 목적으로 생포했는지는 아직도 말 안 하던가?”
– 어제 저녁에 들었습니다. 이곳에 흡혈귀에 대한 이야기가 있지 않느냐 하면서, 어쩌면 그 비슷하면서도 보다 우월한 존재를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 했습니다. 성과가 나오면 인간의 태생적인 약점을 극복할 수 있을 거라는데… 정확한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
“하.”
흡혈귀의 특성으로 인간의 약점을 극복한다? 지극히 아크리치다운 생각이다. 인간이라는 종의 정체성과 약간의 부작용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오로지 힘만을 추구하기 위한 연구.
하지만 중단시킬 생각은 없다. 결과물을 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다.
“문제만 만들지 말라고 해.”
–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
마침 목표하던 장소에 거의 도착했다.
태블릿을 허공으로 수납하며 고개를 들자, 눈앞에 커다란 대장간의 문이 있었다.
시설 최고레벨인 70레벨에 도달한 대장간은 들어서는 문부터 범상치 않았다. 천계의 천공성 스탄헤이드와 마계의 천공성 하드샤에 있는 것과는 또 다른 위엄과 멋이 있다.
스르릉-
커다란 문이 손만 대자 수월하게 열렸다. 드러나는 내부 전경은 그야말로 광활했다.
천장까지 이어지는 중앙의 육각뿔 형태의 거대한 화로에서 넘실거리는 청색 불꽃이 보인다. 그 주변에 놓인 견고한 은빛 모루들과, 그 모루들에서 붉게 물든 금속을 두드리는 대장장이들이 있었다. 그들이 밟고 선 상아빛 바닥에는 벽과 천장까지 이어지며 시원하게 뻗어나가는 금빛 문양이 있다. 그것은 천장과 맞닿은 중앙 화로를 감싸듯 거칠지만 격 있는 패턴을 그려내며 다시 아래로 내려왔다.
전체적으로 보는 이를 압도시키는 웅장함이 있었다.
고온의 화염이 중앙 화로를 포함한 사방의 크고 작은 화로들 속에서 넘실거림에도 불구하고 내부 온도는 그리 덥지 않았다. 후끈함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불쾌하거나 땀이 날 정도는 결코 아니다.
땅-! 따앙!
그런 대장간의 가장 중앙, 수석 대장장이를 비롯한 가장 실력 있는 이들 다섯이 세현이 들어온 줄도 모르고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인간 셋에 샬란 둘이었다.
“좀 더!”
땅!
붉게 달아오른 넓적한 무언가를 한 대장장이가 혼신의 힘으로 내리쳤다. 그러나 타격당한 무엇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용의 비늘, 드래곤 스케일.
보통의 것도 아닌 무려 용군주의 것이다.
한 번 가공해보라고 던져준지 하루가 지났는데 아직도 정련법을 찾지 못한 듯하다. 세현도 딱히 방법을 아는 것이 아니기에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페다는 마법으로 가공하면 간단하다고 했지만, 인간이나 샬란 대장장이는 그 정도의 고난이도 마법을 다룰 수 없다.
“연금술사들하고 협력해보지 그래.”
얼마간 지켜보던 그가 말하자, 누군가 싶어 고개를 돌렸던 수석 대장장이의 눈이 커졌다.
“국왕님을 뵙습니다.”
“국왕님을 뵙습니다!”
그제야 세현의 존재를 알게 된 이들이 서둘러 도구를 놓거나 자리에서 일어서며 허리를 숙였다.
작업 중이면 굳이 인사할 필요 없다고 누차 말했음에도 좀처럼 이뤄지질 않는다. 사실, 말한다고 바로바로 되는 일이 아니긴 했다. 자발적으로 예의를 차리는 일을 강제로 금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필요하면 마도공학자나 세공사들도 모아서 의논해봐라.”
“안 그래도 저희들만으론 한계를 느끼던 참입니다. 아무리 달구고 두드려도 꿈적도 않습니다. 이렇게 가볍고 얇은데……”
– 과연 용의 비늘입니다. –
샬란 대장장이조차 반쯤 질린 눈으로, 그러나 반은 경탄스러운 기색으로 용의 비늘을 쳐다봤다.
– 그만큼, 가공에 성공한다면 여태까지의 것과는 비교가 불가능한 무구를 만들 수 있을 겁니다. –
만레벨에 달하는 대장간의 화로에서 극한까지 가열시킨 후 금속을 다루는데 특화된 대장장이들이 혼신의 힘으로 내리쳐도 꿈쩍도 않는 물건이다. 말처럼 제대로 가공만 된다면야 그 성능은 의심할 바가 없을 것이다.
“다방면에서 실험과 연구가 필요합니다. 이것만으로 무구를 만들어도 충분히 좋겠지만, 여러 테스트 결과 유연성이 조금 부족하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유연성이 부족하다고?”
“예. 이것이 깨지거나 부서지는 장면을 상상하기가 어렵긴 하지만…… 만약 이 정도의 강도에 유연성까지 갖출 수 있다면, 그보다 훌륭한 금속은 단언컨대 이 세상이 없을 겁니다. 그것으로 만든 무구는 그야말로 정상급 물품이겠지요.”
그렇게 말하는 수석 대장장이의 눈은 열망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열기에 구릿빛으로 그슬린 각진 근육질 신체에 눈빛마저 그러하니, 흡사 중요한 전투를 앞둔 강인한 고대의 전사를 보는 듯했다.
세현은 그들을 충분히 격려해준 후 열기를 뒤로하며 대장간을 나섰다.
다음으로 가는 곳은 연금술 공방, 대장간과 그리 멀지 않았기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대장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 보였다.
커다란 중앙 홀을 기준으로 사방에 창고나 작은 공방들이 연결된 구조, 중앙 홀에는 각종 마법진이 새겨진 실험대와 테이블들이 늘어섰고 그 위에서 정체 모를 재료 및 액체들이 투명한 수정 용기에 담겨 끓어오르거나 얼려지고 있었다. 한쪽에는 다양한 빛깔의 물약들이 커다란 진열장에 잘 정리되어 있다. 그 각종 기구들로 빼곡한 곳을 연금술사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그리고 대장간과 비슷하게, 홀의 중앙 가장 큰 원형 테이블에서 수석 연금술사를 비롯한 몇 인물들이 아페다에게서 받아온 마법재료와 용액을 신중하게 실험하는 중이었다.
“……역시 이것과도 반응하나? 연소가 격렬한데.”
“그럼 2번하고도 섞어서 해보지요. 반응이 더 커질까요?”
특수하게 제작된 하얀 장갑 낀 손이 계량을 목적으로 한 작은 금속 수저 두 개를 들어 앞에 놓인 나무그릇에 담긴 붉은 가루와 하얀 가루를 세심하게 떠올린다. 그리고 중앙 마법진 위에 놓인 수정 그릇 속 보랏빛 액체에 그것들을 뿌리는 순간, 귀 따가운 폭음이 터졌다.
빵!
“크흠!”
폭발은 아무곳에도 피해를 주지 못했다. 애초에 그런 목적의 마법진이 새겨진 테이블, 다른 누가 만든 것이 아닌 시스템을 통한 70레벨 연금술 공방의 시설이다. 어지간한 폭발로는 흔들림조차 줄 수 없다. 기초적인 실험을 목적으로 했기에 반응을 일으킨 재료가 아주 소량이기도 했다.
“간략하게 몇 가지 조합을 찾아보지요. 잘하면 화염폭풍 물약을 개량할 수도 있겠습니다. 조합표가 어디 있었지?”
세현은 이번에는 말을 걸지 않았다. 연금술의 영역은 그가 끼어들기엔 아는 것이 전혀 없다.
류한이 아직 길드였던 시절, 그가 왕자를 죽이고 병원에서 가져왔던 여러 현대의학 약품들이 실험에 사용되었을 때는 이런저런 첨언을 해준 적도 있었다. 그것은 분명하게 류한의 연금술 수준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같은 연금술사가 아니고선 무엇을 하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애초에 연금술은 아주 복잡하고 세심한 지식과 기술을 요구하는 학문이다. 동시에 다양한 경험이 필요함은 물론이다. 직접 실험해보면서 데이터를 쌓아가는 분야인 만큼, 성과를 이뤄가는 과정에 그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연금술사들이 그를 발견하기 전, 세현은 조용히 공방을 나섰다. 새삼스레 이만큼이나 발전한 류한의 기술력에 절로 마음이 뿌듯해진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머릿속에 떠오른 말을 그냥 중얼거리며 향하는 곳은 제작소다.
금속과 보석, 뼈와 가죽 등의 재료로 각종 장신구를 만들거나 완성된 무구들에 마법을 부여하고 특정한 커스텀 부품을 생산하기도 하는 곳으로, 세공사들과 마도공학자들이 일하는 곳이다. 아직 메 헤브아 스툰에서 얻은 새로운 재료들이 투입되진 않았지만 오랜만에 직접 살펴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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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파트 시작입니다. 기존 파트 소제목 변경을 고려 중입니다. 흠… 차원대전? 더 좋은 소제목이 있을 듯하네요.
부디 재밌게 읽으셨길 바라며 추천 한 번 꾹! 부탁드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