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258
258====================
진화
제작소는 대장간이나 연금술 공방과 비교했을 때 두 배 정도 더 큰 건물이었다. 외견도 그러했지만 특히나 내부로 들어섰을 때 펼쳐지는 광활한 공간은 도저히 이곳이 실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만큼 많은 인원들이 상주하며 각자의 일에 매달리는 곳이기도 했다. 크게는 건물에 들어가는 기둥 같은 것에서부터 작게는 탈것의 나사나 볼트, 또한 첨단기계라 할 수 있는 핸드폰 역시 이곳에서 제작되기도 한다. 모든 핸드폰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곳에서 만들어지는 것들은 일명 ‘왕실 한정판’이라 불리며 아무나 구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국왕님을 뵙습니다!”
이번에는 들어가자마자 그를 발견한 마도공학자 한 명이 인사를 하는 바람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쏠렸다. 그들의 인사를 받아주며 몇 가지 묻고 있으려니, 누가 불러온 건지 수석 마도공학자가 허둥지둥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한 번 둘러보시겠습니까?”
그는 몸소 앞장서서 제작소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초창기와는 많이 달라진 부분도 있어 세현이라고 모든 부분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꽤 유익했다.
평소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안내는 아주 매끄러웠다. 설명이 길어질라치면 세현이 제지하기도 했기에, 제작소 전체를 둘러보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혹 불편한 것이라던가 건의사항이라도 있나?”
“필요할 때마다 생산총괄부장에게 보고하고 있습니다.”
이예슬을 말함이다. 그녀는 생산직들을 대표해 대략적인 계획을 세우거나 그때그때 발생하는 건의사항을 수렴해 총리인 혜진에게 보고하는 일을 한다. 총리가 관리하는 영역과 겹치는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는데, 보다 직접적으로 이들과 연관된 자리였다.
둘러보기도 마쳤겠다, 달리 지시할 일도 없던 세현은 여태까지처럼 그들을 칭찬 격려해준 후 제작소를 나섰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레야의 연구실이었다.
성에 들어서서 층계를 오른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미세하게 느껴지는 마력의 파동이 있었다.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때까진 들리지 않던 은은한 공명음이 귓가를 울렸다.
한때 온전한 레야의 연구소였던 방은 이제 메 헤브아 스툰과 이어지는 관문이 자리하게 됐다.
가장 안전해야 할 성 내부에 타차원과 연결되는 통로가 있다는 것은 조금 찜찜하지만, 세현과 어길 수 없는 계약을 맺은 용군주 아페다가 건너편 땅의 지배자인 만큼 큰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 아, 폴바르. –
한창 받아온 수정구를 통해 용군주와 텍스트를 주고받던 레야가 그를 발견하고 짧게 날개를 펄럭였다.
“연구는 어떻게 되고 있어?”
– 아무 문제도 없다. 이것의 도움이 컸지. –
그렇게 말하며 방금 전까지 들여다보던 농구공만한 크기의 수정구를 툭툭 두들긴다.
용군주 아페다에게서 받아온 물건, 차원을 넘어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강력한 마도구였다. 한계가 있어서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은 문자나 이미지 정도였지만 그 정도만 되어도 레야의 연구를 도와주기엔 충분했다.
모르는 것을 물어보고 정확한 대답을 받을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 그것은 레야가 태어나서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 이 속도대로라면 늦어도 두 달 안에 상용화가 가능할 듯하다. –
“그렇게 빨리?”
– 팔렌니움과 결합하는 것도 생각 중이야. 다만 통제력을 확실하게 확보해야 겠지. 자칫하면 애써 만든 네트워크가 망가질 수 있으니. –
“행여나 서두르진 말도록 해라. 늦어도 확실한 게 제일이야.”
레야는 걱정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 기본적인 규칙 설정만 제대로 해놓으면 걱정할 필요 없다. 연구의 시작부터 계속 점검해왔고 마지막까지도 그렇게 할 거야. 나는 내 창조물이 골칫거리가 되길 바라지 않아. –
“그래. 믿는다.”
달리 더 해줄 말은 없었다. 세현은 연구실 한쪽의 소파에 자리잡으며 앞으로의 류한에 대해 상상했다.
건물과 도로, 식수와 식량 및 에너지, 미래를 위한 인재를 길러내는 교육시설, 다칠고 병든 이들을 치료하는 병원, 외부로부터 그것들을 지키고 내부의 질서를 유지하는 확실한 무력.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소들은 진즉에 모두 갖춰졌다. 이 사회를 좀 더 세밀하고 촘촘하게 할 네트워크와 그것을 관리할 인공지능 개발은 이제 코앞이다.
여기서 더 류한 왕국에 필요한 게 뭘까?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어느새 여기까지 왔다.
당장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내기 보단 일단 가진 것들을 다듬고 정착시켜야겠다. 어쨌거나 세계는 아직 전쟁 중이기도 하고.
그리고 언제까지나 왕국의 발전 원동력을 레야에게만 맡겨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 현재 베이마라가 책임지고 운영하고 있는 학교들을 좀 더 확장할 필요도 있을 듯했다. 인재의 육성은 아무리 전시상황이라 해도 결코 소홀할 수 없었다.
“순탄하군.”
그야말로 순탄하다. 몇 가지 운이 겹치기도 했지만, 초반부터 서두르지 않고 기초를 차근차근 닦아온 덕이 컸다.
무림에서의 경험이 아니었더라면 같은 무력을 갖췄다 해도 이 정도까지 해내진 못했을 터였다.
@
까드득-
문득 들려온 날카로운 소리에 거인이 힘겹게 눈을 떴다. 초점이 잡히지 않는 파란색 눈동자가 어두운 실내를 어지럽게 훑는다.
– 목…… –
“목?”
– 목이 말라……! –
차륵!
사지를 구속하던 두터운 쇠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거의 반쯤 해부되다시피 한 참혹한 신체상태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힘, 그러나 몸을 구속한 것이 보통 쇠사슬이 아니었기에 그것은 발버둥조차 되지 못했다.
그 해부당한 개구리 같은 모습을 바로 옆에서 바라보는 이는 바로 서승태였다.
설령 노련한 각성자라 해도 차마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을 참혹한 모습, 그러나 서승태는 놀라울 정도로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익숙해져서가 아니었다. 그는 머릿속에 울리는 아크리치의 말을 따라 끔찍한 생체실험을 처음 진행해보면서도 지금과 똑같았다. 그런 서승태의 모습에 아크리치가 더 없이 만족했다는 것은 여담.
타고난 흑마법사인 그는 손질한 도구를 제자리에 놓고 마지막 점검을 시작했다.
– 거기, 그래. 문제 없군. 밑에도 한 번 확인해라. –
머릿속에서 마젤란의 흥분에 찬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온다. 지옥에서 기어올라온 악마가 속삭이듯 끔찍한 느낌이었으나, 그 역시 서승태는 아무런 감흥 없이 받아냈다.
오히려 그 와중 피실험체의 몸과 그 주변을 둘러싸고 만들어진 마법진에 집중하기까지 했다.
“이 부분에서 약화, 이 부분에서 착취, 오류는 없군요.”
– 그래. 무엇이 둘을 엮는지 알겠느냐? –
“도도의 액상을 첨가해 새긴 교차선의 끌 문양. 정통식이 아닌 변환식으로. 이유는 양옆에 자리한 마력의 흐름에서 튀지 않기 위해.”
– 굴곡이 생기면 내구가 약해진다. 피실험체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으니 부담은 최대한 줄이는 게 낫겠지. 훨씬 더 고통스럽겠지만, 여태까지의 자료를 보면 충분히 견딜 수 있을 거다. 흐흐흘. –
그동안 수없이 많은 실험을 했다. 대상의 생물학적 구조와 특성을 완벽하게 파헤치기 위해서였다.
셀 수 없이 많은 생체실험을 해봤던 마젤란은 이 방면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장인 중의 장인이었고, 덕분에 실험체가 단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만족스러운 데이터를 뽑아낼 수 있었다.
그것을 기반으로 여러 재료들이 만들어졌고, 이제는 마침내 실험체의 생명을 거두며 마지막 재료를 추출할 차례였다.
– 라티마시여…… –
타오르는 듯한 갈증을 느끼면서도 거인이 습관적으로 중얼거렸다.
– 시작해라. –
처형의 시작을 알리는 목소리, 그와 함께 서승태가 정해진 자리에 위치해 마력을 끌어올렸다. 은은하게 뿜어진 흑마력이 바닥과 구속틀, 그 틀에 대자로 묶인 거인의 몸체에 번져나가며 음울한 빛을 뿜기 시작했다.
흐리디 흐리던 거인의 눈동자가 한순간 크게 치떠졌다. 동공이 축소되고 경련이 시작됨과 동시에, 지옥에 떨어진 자가 내지를 법한 끔찍한 비명성이 실내를 쩌렁쩌렁 울렸다.
– 끄아아아아…! 아악-!! –
쾅! 콰드득!
마법으로 수차례 강화된 사슬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거세게 요동친다. 거의 꼼짝도 못하는 자세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거칠게 몸부림친다는 게 믿겨지지 않을 만큼, 그렇기에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시각적으로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 모골이 송연해지는 실험이자 해부이자 의식은 장장 삼십여 분에 걸쳐 이어졌다.
지속적인 고통을 겪는 피실험체, 거인은 이미 눈의 실핏줄이 모두 터져 피눈물을 흘리는 중이었고 해부당한 전신 곳곳에서도 피를 쏟아내며 실시간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서승태 역시 멀쩡하진 못했다. 상대의 마지막 발악을 온전히 감당해내며, 물론 이 순간을 위해 끊임없이 고문하고 해부하며 정신과 몸을 모두 약화시켜왔지만 그럼에도 힘든 반동을 버티면서 머릿속으로는 쉬지 않고 다음 마력의 움직임을 계산해갔다.
– 정신 똑바로 차려라! 막판에 일을 망칠 셈이냐! –
조금만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마젤란이 호통치며 미약한 개입으로 거들었다. 덕분에 온전한 서승태의 능력으로는 아마도 발동시키지 못했을 마법이 온전하게 완성되며 어두운 빛을 뿜었다.
역설적 표현이지만 문자 그대로 어두운 빛이었다.
그것이 거인의 몸 가슴팍에서 치솟아 나오자 안 그래도 어두웠던 실험실이 더 어둡게 물들었다. 그 어둠의 정중앙에서 희끗하게 번쩍이며 모습을 드러내는 핏빛 광채가 서승태의 고동색 눈동자를 비치자, 안쪽에서 타오르는 보랏빛 아크리치의 존재가 엿보였다.
– 크흐흐흐…! –
그 자체로 공포를 느끼게 할 만한 사악한 광소가 흐른다. 어둠빛과 핏빛이 뒤섞인 아몬드 형태의 결정체가 마침내 온전히 뽑혀나와 단단하게 굳어지고, 이제까지 죽지도 못하고 강제로 고통스런 삶을 연명하던 거인의 숨이 마침내 끊어졌다.
뿌드드득……
신경을 긁는 소음을 내며 시체가 순식간에 말라 비틀어진다. 그러다 이내 회색으로 물들며 모두 타버린 재처럼 부스스 흘러내렸다. 건드리면 틀림없이 모두 부서져버릴 흉물이 되어버린 시체 아래에서, 마지막까지 마법을 실행해낸 마법진의 빛이 점점 흐려지다 조용히 꺼졌다.
스스스슷-
진득한 어둠이 흐르며 서승태의 정신을 건드렸다.
무언가 속삭이는 것 같기도, 동시에 아주 먼 곳에서 비명을 지르는 것 같기도 했다. 흑마법, 그 중에서도 사령술의 극의를 다해 빚어낸 마법으로 태어난 ‘진화의 정수’가 불길하고 또 불길한 오오라를 풍기며 서승태의 손아귀로 천천히 날아들었다.
– 아쉽도다. 다른 진화의 정수가 하나 더 있었더라면 보다 더 완벽하게 만들 수 있었을 터이거늘! –
아크리치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게 불완전하다는 겁니까?”
– 아니, 보다 완벽하게라고 말했지 않느냐. 만약 군집체 특성을 가진 진화의 정수라도 있었다면…… 세계를 지배하는 것 역시 가능했을 터인데. 이 어찌 아쉽지 않을 수 있으랴. –
만약 세현이 들었더라면 케르시타 여왕에게서 얻은 진화의 정수를 떠올릴 만한 말이었다.
하지만 물론 지금의 상태로도 마젤란이 만들어낸 정수는 완벽했다.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적대적인 리치의 라이프-베슬을 강제로 뽑아내 다른 언데드를 부활시켰던 전적이 있는 그다. 이렇게 충분한 연구와 준비를 거친 끝에 만들어낸 물건이 결코 불완전할 리 없었다.
– 먹어라. –
아크리치가 속삭였다.
심신 양면으로 잔뜩 지쳐버린, 그래서 미약하게 떨리는 손아귀 안에서 여전히 불길함의 끝을 달리는 듯한 모습을 가진 ‘진화의 정수’를 가만 지켜보던 서승태가 말했다.
“거부하면 어떻게 됩니까?”
– 거부하면? 물론 아무 일도 안 일어나겠지. 내가 나의 소중한 계약자에게 무슨 해코지라도 하겠느냐? 하지만, 이것을 거절할 이유가 있을까? –
네가 상상만 하던 강력한 힘을 거머쥘 수 있는데? 오랜 시간도, 뼈를 깎는 연마도 없이 그저 섭취하는 것만으로.
– 나와 함께 한 네가 제일 잘 알 것이다. –
크흐흐흐.
아크리치의 웃음소리가 아니었다.
서승태가 얼핏 그와 닮은 웃음을 흘리며 손에 든 정수를 거침없이 입으로 가져갔다.
============================ 작품 후기 ============================
추석 잘 보내셨는지요? 저는 몇 년 만에 시골 내려갔다 오느라 고생은 좀 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갔다오니 아버지도 좋아하시고 꽤 즐겁고 보람찼습니다.
내일 한 편 더 올릴 예정입니다. 부디 재밌게 읽으셨길 바라며 추천 한 번 꾹! 부탁드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