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272
272====================
신성제국
그렇게, 제국이 된 류한의 용인 본성 중앙홀에서 연회가 열렸다.
드높은 돔형 천장이 자리한 따스한 느낌의 황색 대리석으로 이뤄진 홀, 단 하나의 이음새도 없는 바닥은 형상이 흐릿하게 비춰보일 정도로 반들반들하다. 벽에는 우아하게 양각된 조각들이 새겨져 있고 넓은 간격을 두며 홀을 떠받치는 기둥들에는 금과 은 등의 귀금속으로 전체를 휘감아 올라가는 문양이 보인다. 곳곳에 자리한 보석들과 마법으로 지지대 없이 천장에 뜬 구형의 크리스탈 샹들리에들이 밝은 빛을 흩뿌렸다.
홀의 정면,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며 자리한 동양적인 느낌의 매화나무 조각에서 연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매일 같이 볼 수 있는 류한 소속원들조차 볼 때마다 감탄하는 세기의 대작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다르바드산 최고급 보석 벨로쥬라로 장인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조각한 매화나무, 그것은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점점 더 윤곽을 갖춰가며 마치 살아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 자체로 아티팩트라 해도 믿을 만큼 비현실적인 예술품 중의 예술품이었다.
이 아름답고 웅장하며 위엄 서린 홀에는 주요인사들만 입장을 허가받았음에도 백에 가까운 인원이 참석하고 있었다.
잔잔히 흐르는 음악을 배경으로 곳곳에 자리한 원형의 테이블에 산해진미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음식들이 세팅되었다. 중앙에는 춤을 출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고 홀의 외곽을 두르며 방음 마법이 걸린 커튼으로 공간을 분리한 휴게실 용도의 공간이 자리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세현은 그곳에서 벌써 한 시간이 넘도록 사절단 대표들의 인사를 받는 중이었다.
굵직한 세력들의 대표뿐 아니라 각 지역의 클랜들에서 보낸 사절단 대표들까지 만나보려니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미국 같은 경우는 도시국가연합이었기에 사절단의 수가 그야말로 엄청났다.
그래도 한 번 정도는 필요한 일이었기에 류한이 제국이 된 이참에 해치워버리고 있었다.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해서 나쁠 것은 조금도 없다. 황제의 얼굴을 각인시키고 위엄을 세우는 것은 얼핏 쓸모없는 절차로 여겨지기 쉬우나 그 차이는 은근히 존재한다.
“워싱턴의 몬타니아 클랜의 대표 존 브룸홀입니다. 류한이 제국으로 발돋움한 것을 경하드립니다.”
“고맙군.”
이제는 몇 번을 반복하는지 모를 형식적인 인사가 오가고, 사절단이 준비해온 선물이 대표 뒤에 있던 수행원에 의해 세현이 앉은 자리의 뒤, 매화나무 조각 앞 빈 공간으로 옮겨졌다. 그곳엔 이미 무시할 수 없는 양의 선물들이 쌓여 있었다.
세현도 선물을 받기만 할 수는 없으니 미리 준비한 각종 고급 아이템들이 담긴 아공간 주머니를 하사의 형식으로 건네주고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앞으로도 세계와 인류의 평화를 위해 좋은 관계를 이어갔으면 좋겠네.”
“물론입니다.”
그렇게 존 브룸홀이라 자신을 밝힌 자가 물러서고 다른 사절단의 대표가 앞으로 나서며 새로이 인사를 올린다.
이 모든 사절단들이 그저 인사나 하자고 찾아온 것은 아닐 것이다. 다들 각자의 목적이 있음이 분명하다.
류한에 대한 간단한 정보수집이라든가, 이곳의 물건을 구해 다른 지역에 팔아 차익을 남기려는 장사라든가, 다른 강력한 클랜들과 연수하여 자신들의 입지를 다지려는 정치적인 목적이라든가, 이 많은 사람들 만큼이나 다양한 목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한 용건들을 세현에게 직접 꺼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황제에게 무언가를 직접 요구한다는 건 그만한 급이 될 때나 가능한 일이니까. 로비를 하든지 해서 권한 있는 누군가와 이야기 할 기회를 만드는 건 순전히 그들의 몫이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인사에도 결국 끝은 있었다.
세현은 마지막 사절단, 반고의 서쪽 끄트머리에 자리한 클랜장의 인사를 받는 것을 마지막으로 이번 연회의 필수적인 행사를 마쳤다.
이곳에서 잘들 쉬다 가라고 말한 후 자리를 뜰 수도 있고, 혹은 옆에 앉은 누이나 부인과 담소를 나누며 조금 더 자리를 지킬 수도 있다. 오늘은 사절단들을 환영하는 축하연일 뿐이고 공식적인 황제 즉위식은 이틀 뒤로 예정되어 있으니 꼭 자리를 지킬 이유는 없었다.
“배고파.”
그때 세현의 결심을 도와주는 혼잣말이 들려왔다. 그의 옆옆 자리, 아엘라의 곁에 지루하게 앉아있던 유르미아가 연회장 곳곳에 차려진 음식들을 차례차례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 밥 먹으러 갈까? –
“저기서 먹으면 안 돼?”
– 손님들 먹으라고 차려둔 음식이잖니. –
황후와 황녀가 그런 자리에 끼어드는 것은 아무래도 어색하다.
그 대화를 들으며 세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움직이자 연회장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의 시선이 쏟아졌다.
황제란 이런 것인가, 잠시 생각하며 그는 가볍게 입을 열었다.
“모쪼록 다들 연회를 즐기도록 하게. 내가 없어야 좀 더 편히 쉴 수 있겠지.”
높지도 않은 평이한 어조의 말이었으나 듣지 못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가족을 데리고 퇴장하는 그를 위해 공간을 터주며 분분히 고개를 숙였다.
커다란 연회장의 문을 나서자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와 음악소리가 점점 희미해진다. 그때쯤 유르미아는 아엘라에게 며칠 전 있었던 친구와의 일을 꺼내들고 있었다.
유르미아는 공주임에도, 이제는 황녀임에도 불구하고 레야가 마련해준 위장 아티팩트 덕분에 평범하게 아카데미를 다니며 친한 친구들이 제법 있었다. 친하지만 때로는 다투기도 하는 지극히 평범한 친구들.
세현은 유르미아가 자신의 신분을 자각하면서도 평범함에 대해 무지하지 않기를 바랐다.
인간의 사회는 하나인 것처럼 보이면서도 각 개인이 태어나고 자라는 환경에 따라 크게 둘 정도로 나눠진다. 다른 한쪽 사회를 경험해보지 못한다면 아무리 지식으로는 알아도 그를 진실로 이해할 수는 없는 법, 추후 그만큼 편향된 시선으로 이런저런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계단으로 향하는 동안, 성의 복도에서 근무를 서고 있던 ‘병사’들이 그들이 지나갈 때마다 가슴에 오른손을 올리며 예를 표했다.
실용성과 멋을 동시에 갖춘 은빛 중갑옷을 입고 미늘창을 든 근위병들이다. 그것들을 보니 이번에 새롭게 바뀐 병사들에 대한 생각이 떠오른다.
병사들이라고 다 같은 것이 아니다. 이제는 창이나 장검 및 방패 등을 다루는 일반병이 있고 원거리 무기인 활을 다루는 궁병이 있으며,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병도 있다. 심지어 그들처럼 갑주로서 살아 움직이는 활갑마(活甲馬)를 탄 기마병도 있다.
“볼 때마다 든든하네.”
여태 조용하던 혜진이 그리 말했다. 그녀도 지나갈 때마다 예를 표하는 병사들을 보며 관련된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류한이 처음 시작했을 당시, 혜진은 얼마 없던 길드 포인트로 가장 먼저 병영을 업그레이드 한 바 있다. 그녀의 판단 우선순위에서 무력에 대한 부분이 상당히 앞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제 류한이 영지에서 왕국을 넘어 제국이 된 순간에서도, 새로운 시스템으로 할 수 있는 다양한 일 중 그녀가 가장 먼저 손을 댄 건 바로 병영, 병사들에 관한 부분이었다. 병과가 다양해지고 수가 불어난 것은 모두 그녀의 덕이다.
“이제 치안력 확보에는 문제 없겠네.”
“겨우 그 정도 감상?”
확실히 너무 단편적이고 박한 평가다.
“여기에 삼 만이야. 다른 성에선 일 만이지만, 어쨌든 이 병사들이 누구의 명령만 따르는지 생각하면 이건 세현아 네가 가장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힘이야.”
“나도 알아.”
오로지 황제의 명령만을 최우선하며 그 어떤 이견이나 분란도 없이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병사들.
모두가 균일한 노란색 등급의 무력을 갖췄고, 그런 병사들을 이끄는 삼백의 백인장(百人長)들은 초록색 등급이다. 또한 그 백인장들을 백씩 이끄는 만인장(萬人長) 셋은 무려 파란색 등급이다. 만인장들은 네다섯 가지의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활갑마를 부리고 각종 마법까지 사용하는 진짜배기 전투자원이다.
천계의 천공성 스탄헤이드에도 파란색 등급 장군이 셋.
마계 천공성 하드샤에는 파란색 등급 죽음의 기사가 셋.
이제 류한의 수도인 용인 본성에 만인장 셋.
다른 이들을 제외하고서도 파란색 등급이 무려 아홉이다. 어중간하게 강한 것이 아닌 진짜 파란색 등급에 걸맞은 존재들이자 100% 신뢰할 수 있는 전력이다. 이 정도면 설령 그의 휘하에서 누군가 반란을 일으켜도 직접 움직일 것도 없이 제압할 수 있을 정도.
지배자의 권위는 그가 부릴 수 있는 확실한 힘에서 나온다.
세현 자신부터가 신이기에 사실 힘 방면에서 꿇릴 일은 없지만, 이 전력들은 다양한 방면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투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황권이 몇 단계는 더 굳건해졌다고 볼 수 있었다. 그야말로 만약의 만약조차 허용치 않는 절대권력을 확립한 셈이다.
중요하면서도 잡담이기도 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넷은 최상층에 위치한 황제의 방에 도착했다.
마침 연회장에서 세현을 수행하던 다른 인원에게 언질을 들은 요리사들이 복도 반대편에서 음식들이 올려진 카트를 밀고 오고 있었다. 음식이야 미리 만들어져 있었으니 그저 접시에 담아 가져오기만 하면 되었을 테지만, 그래도 썩 신속한 운반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세현의 방에서 오랜만에 가족끼리의 단란한 식사시간이 펼쳐졌다.
음식은 한식과 양식이 뒤섞인 퓨전 형식, 물론 번거롭지 않게 한상에 전부 차려졌다. 가짓수도 적절했고 맛은 누가 보증할 필요도 없이 훌륭했다.
“아빠.”
“응?”
식사의 마무리 단계에서 입가심용 음료를 마시던 무렵, 유르미아가 말해왔다.
“나는 커서 뭐가 되야 해?”
“아빠 자리를 물려받아야지.”
“황제?”
“그래, 황제.”
아마도 여황제(女皇帝)라 불리게 될 것이다. 굳이 앞에 ‘여’자가 붙는 이유를 묻는다면, 그만큼 인류 역사에서 여성으로서 황제가 된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라 답하겠다.
어찌됐든, 유르미아는 벡스 종족인 만큼 인간보다 성장이 빠르다. 이제 다섯 살도 채 안 되었으나 어지간한 인간 아이의 열 살 정도는 되어 보이는 그녀는 신체보다 더욱 빠르게 성장한 정신으로 나름의 고민에 빠졌다.
황제라는 이름의 무게를 정확힌 모르지만 결코 가볍지는 않으리라 짐작 중이었다. 최고의 자리라면서 좋아하기 이전에 부담감이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아엘라가 그런 딸의 심정을 짐작이라도 한 듯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 부담스러워서 그래? –
“음……”
– 걱정이 너무 이르지 않니? 설마 네가 준비되기도 전에 떠밀기라도 할까봐? –
“나 이대로 학교 다녀도 될까?”
평범함이 무엇인지 체감하고 깨닫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 평범함을 느끼느라 정작 중요한 미래를 대비하지 못한다면 본말전도(本末顚倒)다.
“아빠가 몇 살까지 살 것 같아?”
그때 세현이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고민하던 유르미아가 세현과 아엘라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조심스레 대답했다.
“한 백 년은 더…?”
“그보다 더 오래 살거야. 그러면, 내가 앞으로 몇 년이나 더 황제 노릇을 할까?”
적어도 오십 년은 넘을 거다. 그를 떠올리고서야 유르미아가 마음을 놓았다.
“아빠가 오늘 연회장에서 인사 받는 것 보고 겁이라도 났어?”
웃음을 삼키며 하는 말에 유르미아는 의외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사람들이 아빠를 전부 어떤 눈으로 쳐다봤는데?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을지 모르겠어서…… 그렇게 되지 못하면 나라가 흔들릴지도 모르잖아. 그러면 전쟁이 날 수도 있고. 나 때문에.”
혜진이 벌써부터 책임감을 느끼는 유르미아를 대견하다는 듯 쳐다보는 사이, 아엘라는 웃기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었고 세현 역시 부인을 따라서 웃었다.
“내가 평소에 뭐라고 했지?”
“평소에?”
“어린이는?”
“…어린이답게?”
“그래. 그런 고민은 네가 성인이 되면 시작해도 늦지 않아. 지금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추억부터 쌓으렴. 내가 왜 황제가 되었는데?”
그가 왜 세력을 만들고 지배를 시작했는지 생각해보면, 시작은 오로지 혜진 때문이었고 이제는 그 범위가 가족을 넘어 주변까지 확대되는 중이었다. 결코 그 자신만을 위해서라거나 가족에게 부담감 따위를 느끼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세현은 그러면서 여전히 꽤 신선하고 어색하다는 생각을 했다.
가족은 그렇다 쳐도, 다른 주변인들까지 생각하며 챙기려는 모습은 언제 봐도 낯설다. 그 스스로 생각하기에 그는 위선자나 다름없는 노회한 무림인이었다. 목적을 위해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위선적인 인물.
그러나 인간적인 애정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필요하다면 단칼에 베어낼 수 있다 해서 그것이 소중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무림에서와는 확실히 달랐다.
그곳에서 세현은 장문인까지 되었으나 여전히 이방인이었다. 항상 지구로 돌아갈 생각을 염두에 두었기에, 그리고 아픈 경험을 겪기도 했기에 누군가에게 제대로 정을 주지 못했다. 그러한 시도는 되레 역풍을 불러와 심하게 마음고생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곳에선 아니었다.
그는 명실상부한 이 세계의 구성원으로서 살아있었다.
============================ 작품 후기 ============================
쉬어가는 타임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결코 쉽게 쓴 것은 아닙니다… 생색을 좀 내면 추천수가 더 늘어날까요?ㅋㅋ
부디 재밌게 읽으셨길 바라며. 언제나처럼 추천 한 번 꾹! 부탁드립니다. (__)
p.s 전편 코멘트에 제가 대학생이냐고 물으신 분이 계셔서, 네! 대학생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다시피 집안에 일이 있었던 터라 휴학을 풀로 땡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