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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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제국
“이게 뭔가요?”
천공성 스탄헤이드의 상층 복도 중앙에서, 이바노프가 의아한 기색으로 안테아가 내미는 옷가지를 받아들었다.
딱 봐도 보통 고급스러운 것이 아닌 은빛을 띠는 평상복으로, 자세히 본 것은 아니지만 심플하여 무난하게 입을 수 있는 편한 옷이었다. 겉에 입기보단 안에 입는 것이 어울릴, 실내복으로도 손색이 없을.
– 레뷸라로 짠 옷이에요. 제 거미줄요. –
“제게 주시는 겁니까?”
– 선물이에요. –
이바노프는 그제야 이해하고선 자신의 손에 들린 상하의 일체를 다시금 살폈다.
알고 살피니 확실히 보통의 옷이라고는 말하지 못할 느낌이 전해진다. 단순히 느낌만이 아니라 시스템 설명이 떠오르기도 했다.
“감사합니다. 혹 손수 만드신 겁니까?”
– 네. 재봉사들에게 맡겨도 되었겠지만, 첫 선물이라 직접 만들었어요. –
안테아, 하체는 거미이나 상체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띈 데뷰미아르 종족. 도자기처럼 하얗고 부드러운 피부와 금발이 인상적인 미녀였다. 또한 외견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녀는 모두가 느낄 수 있는 품위와 오랜 세월 수행한 듯한 경건함이 있었다.
마법사이자 자연을 중시하는 드루이드, 또한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가며 얻은 정신적인 수행, 거기에 지구로 넘어와서도 그녀는 스스로를 갈고 닦기를 멈추지 않았다.
점점 짙어져서 이제는 거의 남색에 가까워진 눈으로 안테아가 웃었다.
– 개인적으로는 미안하게 생각해요. 사실 이바노프 씨가 마지막이거든요. –
“미안하시다니요. 귀한 옷인데 받은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잘 입겠습니다.”
서로 정중히 인사한 후, 조용히 멀어져가는 안테아를 보던 이바노프가 손에 든 레뷸라 의복을 자신의 아공간 주머니로 수납했다. 예상치 못한 선물에 썩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는 다시 냉철함을 되찾고 원래의 목적지로 걸음을 재촉했다. 원래부터 중요한 보고사항이 있어 총리 혜진을 찾아가던 중이었다.
몇 분 후, 목표한 집무실 앞에 도착한 그가 정중히 노크했다. 안에서 들려오는 허락을 확인한 후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곳에는 혜진 뿐만이 아닌 다른 네 명의 사내가 더 있다.
이바노프도 익히 아는 자들이었다. 클랜 협회장 손호은을 비롯한 협회의 주요 간부들.
“그러면, 이야기는 일단 여기까지 하지요.”
“알겠습니다.”
손호은이 가장 먼저 일어서 혜진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다른 이들 역시 같은 예를 취한 후, 최대한 소리내지 않으며 방을 나섰다.
황제의 누이이자 제국의 전권을 틀어쥔 총리와의 면담, 비록 핸드폰과 차량 등의 각종 주요한 기술력 전수라는 긍정적인 의도에서의 만남이었지만 마냥 좋은 소리만 있었던 건 아닌 듯하다. 이바노프를 지나쳐 방을 나선 그들 중 하나가 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는 모습이 보인다.
탁-
그들이 나선 문을 닫으며 혜진에게 고개를 숙여보인 이바노프가 말했다.
“보고드릴 사안이 있어 왔습니다. 방글라데시 지역으로 갔던 반고 왕국 정찰대가 모두 실종됐습니다.”
“실종…? 방글라데시면 인도 쪽인가요?”
“예. 저희 정보부 요원 둘도 같이 실종됐습니다. 어중간한 이유로 연락이 두절될 요원들이 아닙니다.”
“음.”
혜진의 표정도 같이 진지해졌다.
“남색 등급 괴물이라도 있는 걸까요?”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해서, 하늘의 눈 사용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눈, 이전에도 사용하던 명칭이지만, 이제는 류한이 제국이 된 후 이바노프의 주관 하에 제국의 기술력이 모아져 만들어진 정찰용 무인기를 뜻한다.
소형 특수 팔렌니움을 내장하였기에 아무런 연료보급 없이 365일 비행이 가능하며, 성층권의 마력대류를 통해 날씨만 화창하다면 지구 반대편에서도 조종할 수 있으며 그게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정령 인공지능으로 어느 정도의 자율적인 판단과 비행이 가능하다. 역시 마도공학 기술력이 집중된 카메라가 달려 직접 눈으로 살피는 것만큼의 정보를 수집할 수도 있다.
다만 이제 겨우 다섯 대가 만들어졌고 어마어마한 제작비용은 물론 포획되었을 경우 기술 유출을 우려할 만큼 전략적 가치가 상당했기에, 아직은 그에 대한 대비가 되어있지 않아 본격적으로 운용하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날씨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반고 왕국에도 가벼이 넘기지 말고 다시금 조사단을 파견하라고 말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대사관에는 제가 말하지요.”
“감사합니다.”
총리가 직접 연락하면 그만큼 반고 측에서도 즉각적이고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류한이 하늘에서 대략적인 정보를 얻어내면 그것을 바탕으로 반고의 요원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정찰을 시도할 것이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네요.”
남색 등급이라면, 분명 위험한 존재라지만 이미 두 번이나 토벌한 경험이 있기에 아주 심각한 일까진 아니다. 그러나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녀가 착용한 리오론도 왕가의 서클렛에는 약간의 예지 비슷한 기능이 있다. 덕분에 그녀는 가끔이지만 사소한 일에도 이런저런 예감을 느낀 적 있었다.
바로 지금 그 예감이 느껴졌다. 별로 좋지 않은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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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파된 천공성 스탄헤이드가 비명 같은 소리를 내며 천천히 추락한다.
마계의 천공성 하드샤는 이미 도시를 파괴하며 땅에 처박힌지 오래다.
사방에서 시커먼 연기들이 치솟았다. 하늘에는 정체불명의 타원형 금속체들이 익룡의 포효 같은 소리를 동반하며 날아다니고, 그보다 더 위에는 거대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우주적 느낌의 비행선이 마치 괴수의 눈 같은 푸른빛 포구를 겨눈 채 웅웅거리는 소리를 사방으로 흩뿌리는 중이다.
지상에는 불타는 도시 외곽에서부터 적들이 끊임없이 들어서고 있었다. 삼할 정도는 인간이고 삼할은 괴물이며 삼할은 기계로 보이는 것들이, 저들의 성가(聖歌)를 부르짖으며 제국의 땅을 짓밟고 행진했다.
세현은 그 말도 안 되는 참상의 위에서 아연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뭔……”
우우웅-
순간, 하늘을 정신없이 날아다니던 타원형 금속체 하나가 그의 앞에서 멈춰 섰다.
기묘한 생김새다. 타원형의 금속체가 곤충의 겹눈처럼 보이는 렌즈를 세현의 얼굴에 겨누고 아무런 동작도 없이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며 떠 있다. 그 바로 밑에는 뭔가를 발사하는 것이 분명한 동그란 구멍이 보이고 몸체의 양 옆에는 마치 스케이트의 날처럼 생긴 예리한 칼날이 돋았다.
팟-!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고개를 젖힌 세현의 바로 옆을 광선이 스친다. 어느새 뽑힌 청월이 놈을 반으로 가르며 지나가자, 그것이 절반으로 쪼개져 안쪽 가득한 마법진과 기계부품들을 내보이며 추락했다.
우우웅-
우웅-
그때 사방을 정신없이 날아다니던 비행체들이 거의 동시에 그를 향해 몸을 틀었다.
세현은 그것들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이곳에 자리했을 때부터 뻗어진 기감이 도시 전체를 뒤덮으며 샅샅이 살피고 있었기에, 별 위협도 되지 않는 것들에게 집중할 여력이 없었다.
단지 정리할 필요는 있다. 재차 휘둘러진 검에 찰나간, 모든 이들이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는 자색빛 광휘가 폭발하며 거대한 꽃이 만개했다.
수도 없이 뿜어진 검기다발들이 마찬가지로 수도 없이 많던 비행체들을 일거에 동강내 요격했다.
제각각 힘을 잃고 떨어지거나 폭발하며 불꽃과 연기를 피워올리는 그것들이 마치 불꽃축제처럼 하늘 전체를 빛과 열기로 화려하게 물들였다.
그러나 세현의 표정에선 통쾌함이나 기쁨, 혹은 전투의 흥분 같은 것이 일체 없었다.
그가 찾는 기척이 없다.
분명히 도시 전체를 살폈다. 벌써 두 번째, 이제 세 번째로, 무너진 건물의 틈새는 물론이고 격전의 흔적으로 지하에 생겨나버린 구덩이들까지 샅샅이 훑었으나 아무곳에도 없다.
혜진의 기척이 없다. 아엘라도, 유르미아도. 다른 이들 모두.
천천히 추락하는 스탄헤이드를 시야에 둔 그가 움직였다. 잔상조차 남기지 않고 쏘아진 신형이 이미 기계와 기괴한 외형의 괴물들에 점령된 천공성 내부에 착지했다.
자색빛이 공간을 자르고 그를 돌아보던 모든 적들이 일거에 양단되며 쓰러진다. 몇 폭발하며 불길과 연기를 피워올리는 놈을 지나쳐 성의 입구를 지나치자, 미약한 달칵 거리는 소리와 함께 섬광이 터졌다.
내성 입구가 반파될 정도의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에 휘말려 이미 시체가 됐던 천군과 류한 전투원들의 잔해가 숯덩이로 화해 사방으로 아무렇게나 흩뿌려졌다.
그 지옥불 같은 화염을 뚫고 세현은 악귀 같은 표정으로 층계를 올랐다.
층 하나를 오를 때마다 함정이 발동하고 공격이 날아들었다. 이미 아군이라고는 한 명도 찾아볼 수 없는 적지를 지나, 마침내 최상층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낯익은 시체가 보였다.
얼굴이 반쯤 함몰되고 전신의 반이 그슬렸지만 알아볼 수밖에 없다.
“정현욱……”
일그러진 표정에서 얼마나 고통스럽게 죽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최후의 선천진기(先天眞氣)까지 불태운 듯 그나마 남은 피부가 쭈글쭈글했다.
그를 지나치자 김유린의 시체가 보인다. 조각나버린, 아마도 트윈테일들이라 짐작되는 피묻은 하얀 털이 자라난 육편들 사이에서, 두 팔이 잘리고 목이 반쯤 찢어진 채 벽에 기대어 주저앉은 김유린의 시체가 공허한 눈으로 그를 쳐다본다.
그들이 최후까지 지키려던 존재는 뒤에 있었다.
세현이 동요를 애써 내리누르며 걸음을 옮겼다. 아엘라의 시체, 그 앞에 쓰러진 유르미아의 시체. 격렬하게 저항했음을 증명하듯 난자된 몸과 멀쩡하지 못한 사지가 그의 가슴을 세차게 후벼팠다.
익숙하면서도 절대 익숙해질 수 없는 상실감이 그를 덮친다.
동시에 치솟는 분노를 차가운 이성으로 간신히 식히며 뒤돌자, 그곳엔 이 난장판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하얀 로브 차림새의 인영이 있었다.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이 보랏빛 눈동자를 빛내며 말한다. 자연스러운 한국어였다.
“당신의 패배입니다.”
“내 누이는?”
“제 경고를 무시하셨더군요.”
“내 누이는?”
“……무사합니다. 당신이 죽는다면.”
놈이 뻗어낸 손에 빛이 아른거리며 둘의 사이에서 영상이 떠올랐다.
그것에서 흘러나오는 음성과 움직임을 보는 세현이 눈을 깜빡였다.
한 번, 그리고 두 번, 그리고 세 번.
“……”
그가 서 있는 곳은 언제나처럼 평화로운, 결코 난장판이 될 일 없는 그의 집무실이다.
손에 쥐어진, 금속의 띠들이 기하학적 모양을 이루며 회전하던 구슬이 제 출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가루로 부서져 흘러내리고 있었다.
[예언의 보주(희귀함): 미래의 가장 강렬한 순간을 일부 보여준다고 알려진 보주. 사실여부는 알 수 없다. 사용 후 파괴된다.]아주 예전, 류한이 제대로 기틀조차 닦지 못했을 때, 나중에 여유가 되면 한 번 사용해보리라 생각했던 물건이다. 병원에서 왕자를 죽이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로 기억한다.
황제가 된 세현은 고작 초록색 룬 하나를 아낄 이유가 없었다.
신에 이른 경지와 마력에 대한 이해로 본래라면 볼 수 없던 보다 구체적이고 확실한 미래를 엿봤다. 또한 심핀관에게서 흡수한 마법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면 이 정도까지 구체적으로 볼 수는 없었을 거다.
같은 미래를 엿볼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 그것이 바로 예언의 가장 기본적인 인과.
그렇기에 거짓이 아닌 그 무엇보다 확실한 예언.
까드드득-
이미 가루가 되어버린 예언의 보주를 악쥐는 손에서 자색 의형기가 어른거린다.
대체 어떻게?
왜 그 지경까지 치닫는단 말인가?
그렇게 되기까지 자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한동안 자신의 마음을 가라앉히는 일에 집중해야 했다.
이해되지 못할 구석이 너무나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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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재밌게 읽으셨길 바라며, 추천 한 번 꾹! 부탁드립니다. (__)
내일도 연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