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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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략
덜컹 덜컹 흔들리는 마차 위에서, 흘러가는 정취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세현은 불현듯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꿈이구나.
최근 천계와 마계는 물론 메 헤브아 스툰까지 왔다갔다 하며 대책을 마련하느라 상당히 바빴다. 굳이 잠이 필요한 몸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아주 불필요한 행위도 아닌 바, 기분도 환기할 겸 의자에 몸을 묻고 잠깐의 오수(午睡)에 빠졌던 참이었다.
역시 꿈속이라 그런지 머리회전이 그리 빠르지는 않다. 여기까지 떠올리는데 몇 분이나 되는 시간이 흘렀을 정도.
흘러가는 풍경 속에서 그렇게 눈만 깜빡이며 상황을 정리하고 있으려니, 누군가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 형님, 여기서 좀 쉬다 갈 것 같은데요? –
고개를 돌리니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낡았지만 깨끗한 무복차림에 허리춤엔 투박한 박도를 찬, 나름대로 험악함을 가졌지만 그럼에도 아직 앳된 티를 완전히 벗어내진 못한 낯익은 청년.
그를 보자 세현의 입이 절로 열렸다.
– 이 미련한 것아. –
– 뭐, 뭐요? 갑자기? –
– 내가 그 싸움터엔 가지 말라지 않았느냐. 무림인들 사이에 우리 같은 낭인이 끼어봤자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일 뿐이라고, 그렇게 몇 번이나 말했거늘. –
세현의 그런 구박에도 아우는 잘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게요? 나 안 보는 새에 술이라도 드셨소? –
– ……아니. 그냥 해 본 소리다. –
이것은 자각몽이다.
원한다면 그의 의동생이 이해하게 만들 수도 있을 터, 허나 그렇게 만드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동생의 반응이 아닌 그저 그의 의식이 만들어낸 인위적인 연기에 불과하게 된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세현은 아무 관여도 않고 이 꿈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가만 지켜볼 셈이었다. 사실 오랜만에 무림의 정취를 보고 있자니 우습게도 아련함에 젖어들기도 했다.
그렇게 끔찍하게 굴렀고 줄곧 떠나고 싶었던 장소임에도, 반백 년이 넘도록 살았더니 정이 안 붙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가 타고 움직이던 것은 바로 상단의 마차였다. 그것은 곧 아우가 말했던 대로 천천히 정지했다.
앞쪽에서 상단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짐꾼들에게 쉴 준비를 하라고 이르는 목소리들이었는데, 그러다 문득 그는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벌떡 일어섰다.
– 내가 진즉에 고치자고 했잖아요! –
– 어흠, 크흠. 이 정도도 못 버틸 줄 몰랐지. –
남궁설.
그녀가 있었다.
자신의 삼촌이라는 자와 부서질듯 말듯 하는 마차 바퀴를 살피며 서로 투닥거리고 있었다.
– 한 번 말이라도 걸어보는 게 어떻소? –
그의 옆쪽 마차 아래에 있던 아우가 능글거렸다.
– 그렇게 쳐다보다간 얼굴이 아주 닳겠소. –
– 하하. –
세현은 충격에서 벗어나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려 의동생 앞에 섰다.
– 고맙다. –
– 예? –
– 그리 훌쩍 떠나버려서 미처 말도 못했었지. 외로움에 시달리던 것이 어디 너뿐이었겠느냐. 정말로, 고맙구나. 언제 한 번은 꼭…… 객잔에서 온갖 음식들을 늘어놓고 날이 새도록 함께 퍼마시고 싶었다. 내 고향 이야기도 해주면서. –
그와 이 의동생이 만나게 된 계기는 아주 사소했다. 몇 가지 겹치는 의뢰를 계기로 서로 믿을 만하다는 것을 파악한 후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렇게 시간과 사건이 쌓여 의형제까지 맺을 정도로 서로를 믿게 되었다.
따지자면 무림에서 처음으로 만들었던 신뢰관계였다. 가끔 떠오를 때면 시체를 제대로 수습해주지 못했던 게 항상 마음에 걸렸다.
한없이 평범하고 평범했던, 그렇기에 당시의 세현과 가장 잘 어울렸던 아우는 평소처럼 씩 웃어보였다.
– 나야말로 형님께 고마워 해야지요. –
그리고 뭐라 여운을 남길 새도 없이 남궁설 쪽으로 턱짓 해보인다.
– 안 가보실 거요? 이런 기회 흔치 않은데. –
바퀴를 고쳐주어 점수를 딸 기회를 말하는 건지, 이런 꿈을 꿀 기회를 말하는 건지.
세현은 따지지 않고 그저 웃었다.
– 그럼 가보마. 네 덕에 내가 장가라도 가겠구나. –
낄낄대며 웃는 의동생을 뒤로하고 그는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남궁설에게 도착해 바퀴를 고쳐줬다. 감사를 표하는 그녀와 그녀의 삼촌에게 대충 인사치레를 하는 동안 세현은 꿈에서 깨지 않도록 노력해야 했다.
덕분에 집중력을 강제로 흩어놓을 수밖에 없었는데, 반쯤 몽롱해진 상태로 어느새 정신을 차리니 장소가 변해 있었다.
여전히 상단 일행에 속해 있는 것은 맞았지만, 시간은 밤이었고 그와 남궁설만이 모닥불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앉아 음식을 먹고 있었다.
흔한 나뭇가지에 큼지막한 고기들을 꿰어놓은 꼬치구이, 꿈인데도 불구하고 자각몽이었기에 그 맛은 놀라울 정도로 선명했다. 하지만 세현은 그 맛있는 것을 한두 입 먹고 바로 내려놓았다.
건너편의 남궁설이 맛나게 고기를 뜯어먹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고는 베시시 웃는다.
– 벌써 다 먹었어요? –
– 네. –
– 빨리 드시네요. 그럼 저도 여기까지 먹을까요. –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세현에게 그녀는 손에 든 나뭇가지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 저를 사랑하세요? –
세현은 딱히 놀라지 않았다. 원래라면 당연히 나올 수 없는 말이지만 이건 그의 꿈이다. 또한 그래서 아무 위화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 그랬었지요. 정말로. –
명백한 과거형 대답, 남궁설은 웃었다. 티 한 점 느껴지지 않는 미소였다.
– 아직도 후회하세요? –
– 조금은. –
비극을 막을 단서는 분명 있었다. 깊게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때 그의 심장을 비틀어 쥐어짜던 고통은 세월이 흐르며 떠오를 때나 느껴지는 아릿함 정도로 약해졌다.
– 같이 지구로 돌아왔다면 어땠을까, 지금도 가끔 생각하긴 합니다. –
– 그럼 결혼도 했을까요? –
– 아마도요. –
아엘라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남궁설이 곁에 있었다면 그녀의 동침 요청을 받아주는 일은 없었을 거다. 그러면 아마…… 유르미아도 이 세상에 없었을 테고.
그렇기에 지금은 아니다.
애초에 아엘라와 결혼을 결심했을 때부터 그는 더 이상 남궁설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립기는 하지만 그건 분명 사랑이라 할 수 없는 감정이다.
그녀는 이해한다는 듯, 그리고 다행이라는 것처럼 다시 웃었다. 그런 그녀에게 세현은 꼭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 미안합니다. 그때는 내가 너무 약하고, 미숙했어요. –
– 아니요. 당신 잘못이 아닌 걸요. –
– 그래도 복수는 했습니다. –
– 그래요? 어떻게요? –
한동안 그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꿈인 만큼 정확한 시간관념을 측정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상당히 긴 시간이었고 말하는 세현도 듣는 남궁설도 그 내용과 관계없이 한없이 평온한 시간이었다.
– 고마워요. –
결국 그 말을 듣고야 말았다.
이것이 꿈에 불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세현은 가슴속 무언가가 탁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조차 느끼지 못했던 무언가, 미련인지 후회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짐 하나가 해소된 느낌.
불현듯 북받치는 감정에 세현은 눈을 깜빡였다. 그 사이 자리에서 일어선 남궁설이 다가와 그의 손을 감싸쥐듯 잡아왔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도저히 꿈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 보답으로 중요한 걸 알려드릴게요. –
– 중요한 것…? –
– 더는 소중한 사람을 잃지 마세요. 다시 여기 돌아오게 되더라도, 여전히 끈은 이어져 있다는 걸 잊지 마시고요. –
– 뭐라고요? –
– 고마웠어요. 이제와 말하지만, 나도 그 지옥 같은 곳을 벗어나 당신을 만날 때면 즐거웠어요. 마지막에는 순전히 당신을 만나러 외출했거든요. 만약 그때 그냥 말해버렸더라면…… 지금 우리는 조금 달랐을까요? –
그의 손을 감싸쥐었던 남궁설의 손이 떨어졌다.
“자, 잠깐…!”
그건 꿈이 아니라 육성으로 현실에서 흘러나왔다.
세현은 반사적으로 눈앞의 테이블을 내리치려던 것을 멈추었다.
그저 꿈일 뿐이다. 모든 건 그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하지만 아직도 바로 앞에 있던 것처럼 남궁설의 얼굴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약간의 울음 섞인 미소는 후련함과 아쉬움이 뒤섞인, 그런 표정이었다.
세현은 남궁설의 그런 표정을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느냐고, 대체 무슨 의미냐고 묻지 못한 게 너무나 아쉽다.
“……”
솔직히 말하자면 도저히 꿈을 꾼 것 같지 않았다. 그냥 꿈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생생하고 오묘한 기분이다.
바보 같은 짓일지도 모르지만, 그는 남궁설의 마지막 말을 몇 번이나 되뇌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것을 곱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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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진은 눈앞에 둔 건물을 살피며 조용히 검을 뽑아들었다. 그에 곁에 있던 감찰단원들이 유령처럼 소리없이 퍼지며 건물을 사방에서 포위했다.
단순히 그들만이 아니다. 최대한 은밀하게 기습하려 약간 거리를 두긴 했지만, 이 근처는 이미 병사들로 물 샐 틈 없이 포위한 후다. 설령 여기서 놓치더라도 목표물이 무사히 도망치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는다.
스륵-
옷자락 스치는 소리만을 내며 그녀가 건물 입구로 다가갔다. 예상대로 굳게 잠겨있었으나 그녀의 검 바람 정령의 숨결은 잠금쇠 부위를 두부처럼 잘라내며 무리없이 문을 개방했다.
달칵-
열리는 문과 함께 들리는 미약한 기계음, 동시에 그녀의 전신을 감싸는 은빛 마력의 폭풍이 생성된 직후 빛이 터져나왔다.
함께 돌입할 준비를 하던 감찰단원 둘이 폭발에 휩쓸려 튕겨났다. 시커멓게 뿜어지는 연기 사이로 새빨간 화염이 송곳니를 드러내고, 그제야 고막을 터뜨릴 듯한 굉음이 모두에게 인식되며 사방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 위력적인 폭발의 중앙에서 박수진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은 모습으로 저벅저벅 안으로 들어섰다. 봉인된 재앙, 이아노소그로 생성된 마력의 회오리는 여전히 건재한 채로 그녀를 보호하고 있었다.
“쏴!”
드르르르르르르르륵-!
누군가의 외침에 따라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기묘한 총기들이 불을 뿜는다. 동시에 반사된 탄환들이 사격을 가하던 다섯 남자들의 전신을 무자비하게 박살냈다.
한바탕 은빛 유성우들이 지나간 그곳에는 더 이상 사람이라 할 수 없는 육편조각들만이 즐비했다. 모조리 반사되긴 했지만 그만큼 어마어마한 연사력의 총이었다는 뜻.
박수진은 잠시 그 총기들을 살핀 후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쾅!
반쯤 올라갔을 무렵, 벽을 뚫고 나온 손이 그녀의 목덜미 부근을 틀어쥐고 밀어붙였다.
완전히 몸을 드러낸 것은 호리호리한 체구의 노년 남자, 허나 박수진은 어느 순간 밀려나던 것을 멈추고 역으로 그 손아귀를 틀어쥐었다.
까드드득!
“으으윽…!”
‘강화된’ 팔을 통째로 찌그러트리는 엄청난 괴력에 경악한 노인이 즉시 발차기를 날렸다. 그를 마주하는 것은 화산의 절기 난화불혈수(蘭花拂穴手), 귀신처럼 흘려진 발차기가 엉뚱한 곳을 때리고 그 사이 뻗어진 검은 붙잡혀 반쯤 망가진 노인의 팔을 절단내며 추가로 빛을 뿌린다.
자색빛 검기들이 계단을 통째로 박살내며 주저앉혔다. 그 파괴와 흙먼지를 뚫고 튀어나온 노인은 어울리지 않는 유연한 덤블링으로 거리를 벌리며 멀쩡한 손으로 무언가를 뿌렸다.
다섯 개의 검은 암기가 벌떼 같은 소리를 동반하며 제각각 다른 방향으로 흙먼지 속을 향해 날아간다. 그리고 더 빠른 속도로 은빛 유성들이 튀어나와 쏘아졌다.
“헉!”
모골이 송연해지는 파공음의 은빛 유성들을 피해내자, 여전히 멀쩡한 신색의 박수진이 걸어나와 검을 치켜들었다.
그녀가 움직이고 노인의 눈이 검의 궤적을 쫓는다. 몸놀림은 따라가지 못하면서도 눈으로는 완벽하게 궤적을 쫓는 모습이 명백히 비정상(非正常), 그러나 결국 반응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도 없다.
게다가 궤적은 노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배는 더 빠르게 도달했다. 심지어 빠르기만 한 게 아니라 중간에 변화하며 모든 대응책을 무위로 만들었다.
손과 옆구리를 내주려던 공격에 팔과 다리가 잘리고 피가 뿜어진다.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르며 나뒹구는 노인의 앞에 다시 유령처럼 도달한 박수진이 검을 겨눴다.
동공을 파고들 것처럼 바로 앞에서 멈춘 칼끝이 은은한 공명음을 흩뿌린다. 날에 실린 자색빛 검기에 주변의 공간이 전부 장악당한 것처럼 색을 잃는다.
“세자리아 마케바.”
이름이 불린 것에 동요를 감추지 못하는 노인을 확인한 박수진이 곧장 발을 움직였다. 명치 부근 혈도를 걷어차인 노인은 숨도 쉬지 못하고 꺽꺽대다 천천히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잠시 후, 분명히 동양계 노년 남자로 보이던 상대의 전신에서 빛의 껍질이 벗겨지듯 여리여리한 체형의 흑인 여성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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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가 퇴고 한 번 더 들어갑니다.
부디 재밌게 읽으셨길 바라며 추천 한 번 꾹! 부탁드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