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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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략
세자리아 마케바는 어느 순간 지독한 통증과 함께 정신을 차렸다.
반사적으로 움직인 손이 철커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어딘가에 걸려 멈춘다.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한 머리로, 그녀는 자신이 류한에 잡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포로가 되었을 때 가장 현명한 행위는 바로 자결이다.
제네바 협약 같은 것도 없는 세상에서 인도적인 대우를 기대하는 것은 너무 순진무구한 생각, 하찮은 희망을 품어봤자 돌아오는 것은 지독한 고문일 확률이 높다. 그녀의 처지를 생각해본다면 더더욱.
해서 예비된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하려던 그녀는 어느 순간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신음성을 흘렸다.
항상 전신을 흐르며 힘을 더해주던 강화제의 느낌이 사라졌다. 어쩐지 탈력감이 지독하더라니, 대체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지 생각하던 그녀는 곧 혼란보다 더한 불안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이유가 어찌됐건 이제 그녀는 마음대로 자살조차 할 수 없게 된 거다.
그렇게 몇 시간이 넘도록, 그녀는 불편하게 의자에 구속된 상태로 두려움 속을 허우적댔다.
적진 한복판의 아무도 없는 어두컴컴한 독방에서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상황, 아무리 굳건한 마음을 지녔어도 불안하지 않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어째서인지 속이 쓰리고 울렁거리면서 목구멍은 병이라도 걸린 듯 부어오른 상태라 구토감이 치밀었다. 공포심과 그 느낌이 결합하자 가만히 앉아 있는 상태에서도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듯했다.
철컥-
그때, 맞은편에 자리하던 문이 묵직한 금속음을 내며 열렸다.
이제부터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신호와 같았지만 세자리아 마케바는 차라리 그게 반가울 지경이었다.
적어도 들어선 것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때까지는 그랬다.
역광 속에서 커다란 거미의 하체를 가진 괴물이 들어선다. 그녀는 전신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소스라쳤다. 평소였다면 이렇게까지 놀라진 않았을 테지만 약해진 몸과 마음은 그녀의 반응을 보다 솔직하게 만들었다.
선명한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거미 괴물이 소리도 없이 순식간에 다가왔다.
세자리아 마케바는 자신의 앞에서 멈춰 선 그것이 여인의 상체를 갖고 있다는 것에 다시금 놀라며 혐오감을 감추지 않았다.
그 적나라한 표정을 목도한 거미 여인, 안테아는 짙은 푸른색 눈을 빛내며 조소를 지어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팔을 뻗어 포로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셀렌느 게브뤼아의 진언으로, 나 마법에 몸을 담았으나 순리를 따르리니, 부정한 것을 이끌어 태양빛 아래로 징치하리라.] “뭐, 잠깐…!”우웨엑!
갑작스레 치솟는 역함과 함께 구토가 쏟아졌다.
노란 위액과 섞여 은빛 반짝이는 액체들이 그녀의 의자 앞 바닥으로 쏟아진다. 반짝이는 은빛 액체들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바닥에서 파문치며 움직였으나, 안테아가 손을 뻗자 오물은 소멸하듯 사라지고 은빛 액체만이 허공에 떠올라 어느새 꺼내든 조그마한 유리병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안 돼.”
그제야 처음 의식을 되찾았을 때 어째서 속이 안 좋고 목구멍이 쓰라렸는지, 언제나 몸속을 도도히 휘돌며 힘을 보태주던 강화제의 느낌이 왜 사라졌는지 깨달았다.
저 정체 모를 마법에 모조리 뱉어내버린 것이다!
– 그리 좌절할 것 없다. 우리가 가진 샘플은 이것만이 아니니까. –
안테아가 부드럽게 말하며 유리병의 뚜껑을 닫아 밀봉했다. 안쪽의 은빛 액체가 저절로 움직이며 흐르는 것을 잠시 살피던 그녀는 곧 눈앞의 포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세자리아 마케바는 그녀를 노려보듯 마주하며 짓씹어 말했다.
“이 괴물……!”
– 내게 괴물이라니, 이게 뭘로 만든 건지는 알고 있니? –
안테아는 다시금 병속에 든 은빛 액체를 바라봤다.
– 그리고, 타계의 괴물을 위해 동족을 버리는 패로 이용하는 너를 보렴. 누가 진짜 괴물일까? –
“무슨 개소린지 모르겠는데.”
– 애써 모르는 척 않아도 된다. 네가 무엇을 섬기고 무엇을 추종하는지 다 알고 있으니. –
세자리아 마케바는 동요를 감추려 노력했다. 허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정말로 상대가 알고 있다는 느낌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 시간도 남는데 한 번 말해보렴. 네가 정말 원하는 게 뭐지? –
“……”
– 아니, 내가 괜한 걸 물었구나. 어차피 뻔한 것을. –
안타깝다는 듯, 그러나 무시함이 뚜렷한 어조로 말하며 뒤돌아 나서려는 그녀를 조용하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붙잡았다.
“멍청한 괴물년, 다 알고 있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 아이야, 나를 계속 도발해서 좋을 게 없단다. –
하지만 상황을 정리하곤 이제 반쯤 포기해버린 건지, 세자리아 마케바는 개의치 않는 태도였다.
“너희 제국은 몰락할 거다.”
– 그래? –
“힘대 힘의 대결에서, 그리고 이상과 이상의 대결에서 철저하게 무너질 거다.”
안테아가 나직이 웃으며 다시 그녀에게 몸 돌렸다.
– 재밌는 농담이구나. 너희의 그 몽상이 우릴 무너뜨릴 것이다? –
“황제가 대체 웬 말인가. 여기 사람들은 역사에서 그렇게 흘린 피들을 보고서도 배우는 게 없었나?”
– 그에 대해서라면 너희도 별반 다르지 않을 텐데. –
“하하……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는 체 한 거였구나. 우리는 달라. 다르다고. 우리는 민주주의 체제로 돌아간다. 내가 동족을 버리는 패로 이용했다고? 천만에. 그들이야말로 이 무지몽매한 제국에서 깨어 있는 사람들이었지.”
은근히 격양됨을 내보이는 세자리아 마케바를 보며, 안테아는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정보와 눈앞의 포로가 내뱉는 말에는 상당한 괴리가 있었다.
– 주인님이 허락한 민주주의, 그런 건가? –
“뭐라고?”
안테아는 더 이상의 대화 없이 조소와 함께 뒤로 물러섰다. 방안의 어둠속으로 녹아드는 그녀에게 세자리아 마케바가 무어라 하기도 전, 어느새 그녀의 앞에 다른 누군가가 서 있었다.
혜진에게 주었던 리오론도 왕가의 서클릿까지 잠시 빌려서 온, 다른 이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꿈에서 본 내용까지 함께 알아보기 위해 직접 내려온 세현이었다.
“가볍게 대화부터 시작해볼까.”
평이하지만 어쩐지 섬뜩한 어조였다.
세자리아 마케바는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에 압도됐다. 그래서 안테아에게 했던 것처럼 도발적인 태도를 내보일 수 없이, 그저 아픈 목으로 침만 삼키며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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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리아 마케바가 속한 아프리카를 본거지로 둔 세력, 이들은 예상했던 대로 보라색 등급 괴물을 지배자로 모시고 있었다.
마도공학과 생명연금술 분야에서 놀라운 기술력을 가진 생명체라 부르기 애매한 존재, 놈은 과연 보라색 등급에 걸맞은 기술력을 갖고 있었다. 세현이 처음 만났던 보라색 등급 괴물 악마라든가 이야기로 들었던 다른 존재들과는 다른 방향성으로 한계를 돌파하려는 놈이 분명하다.
놈은 처음 등장했을 때는 보라색 등급은 아니었다고 한다.
남색 등급이었다고 하는데, 인간들의 도움을 받아 시설을 확충하고 연산력을 확보하자 최근에서야 보라색 등급으로 올라섰다. 추측하자면 이제 막 강해졌다기 보다는 원래 가졌던 힘을 회복한 쪽으로 보인다.
어쨌든 놈은 제대로 된 세력조차 없이 괴물들에게 고통받던 아프리카를 구원했다.
인간이 살 땅을 마련하고, 다친 이들을 치료하고, 희망 없던 이들을 끌어모아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들 스물 정도를 추려 역할을 부여하고 임무를 나눴다.
그 한없이 유능하고 이로운 행동을 지켜보며 아프리카인들이 심신양면으로 감화되었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놈에게 충성을 바쳤고 이제는 신으로까지 추종하며 하나의 종교처럼 받들어지고 있다.
정탐을 간 이바노프 일행이 방글라데시 지역에서부터 취합하여 보고했고, 이제는 류한 본토에서도 정치적 선동을 이끌던 세력에게서 취조해낸 내용들에 의하면, 아프리카의 세력은 자신들을 ‘이데아’라 칭하며 그 세력의 핵심 권력이라 할 수 있는 보라색 등급 괴물을 ‘철인왕’이라 부른다.
둘 모두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였던 플라톤에게서 나온 철학적 개념들이다.
내용을 간략히 설명하자면, 인간은 권력을 쥐면 반드시 타락할 수밖에 없으므로 인간 이상의 존재, 절대 타락하거나 흔들리지 않는 철학적 존재 일명 철인왕(哲人王)이 사람들을 다스려야 모든 것이 이상적으로 돌아가는 사회 이데아를 구성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확실히 인공지능이라고 이해하면 편할 그 보라색 등급 괴물에게 대입했을 때 상당히 그럴 듯한 이야기가 된다. 놈은 그 진의과 관계없이 그곳의 그 어떤 인간보다 뛰어난 능력으로 인간들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
그렇게 행동으로 증명해가는 이상(理想)을 펼치며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모아 결속시키고, 그것을 확대하며 유지할 무력은 압도적이라 표현해도 과언 아닐 마도공학과 생명연금 기술력으로 확보한다.
따지자면 세현이 직접 만나본, 그리고 이야기로 들었던 모든 보라색 등급 괴물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행보였다.
보라색 등급이 세계급 재앙이라 칭해지는 이유는 놈들의 무력이 강해서만이 아니다. 그것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만의 거대한 세력을 부려 원하는 방향으로의 파괴 혹은 격변을 만들어낸다는 점도 크게 한 몫 한다.
당장 그가 처치했던 악마만 해도 그랬다.
놈이 중국에서 소환된 후 바로 한반도로 내려오지 않았더라면, 당시 류한의 정보력은 그리 뛰어나지 못했으므로 상당히 늦춰진 시기에 놈의 존재를 파악하게 됐을 것이다. 어쩌면 중국 지역이 거의 몰살당한 후에야 알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면 놈이 부리던 그 시체들, 그것들은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거대한 세력으로 화했을 거다.
세현에게 환상으로 보여주었던 것처럼, 크고 강대한 육괴물들과 그와 비슷하게 강력한 최소 파란색 등급의 망령들 수백 이상이 한반도로 해일처럼 밀려들었을지 모른다.
어쩌면 류한은 운이 좋았다.
세현이 예언의 보주를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방글라데시 인근에서 연락이 두절됐던 탐사대의 소식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더라면, 이놈들 이데아의 존재를 파악하는데 보다 오래 걸렸을 것이 분명하니까.
류한은 이제 막 제국으로 발돋움하여 본격적인 내정활동에 치중하고 있었다. 또한 이미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 영향력을 뻗친 상태여서 반쯤 방심한 상태이기도 했다. 중국, 러시아, 유럽, 그리고 바다 건너 위치하는 미국에까지 이목이 닿지 않았던가.
거리와 순서에서 밀려 아직까지 탐사하지 못한 지역은 세네 곳 뿐이었다. 아프리카와 브라질 부근,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 방면과 그린란드 정도.
그 중 가장 거대한 땅이라 할 수 있는 아프리카에서 일찍부터 이 세계의 ‘시련’이 될 보라색 등급 괴물이 태동하고 있었던 거다.
놈은 자신의 그 뛰어난 기술력으로 스스로를 철저히 은폐하며 한 발 먼저 앞서 세계를 탐사했다. 또한 미래의 전쟁을 대비해 접촉하는 모든 세력들에게 최소한의 수작을 부려놓았다. 세자리아 마케바는 놈이 류한에 뿌려놓은 분란의 씨앗이다.
이러한 것들을 모르고 있었다면 상황이 어디까지 악화되었을지 예상하기 어렵다.
놈은 점점 더 많은 땅과 인력을 확보하면서 생선시설을 확충하여 제 세력을 어마어마한 수로 불렸을 것이고, 뿌려진 분란의 씨앗은 논리적 결함 없는 이상론으로 사람들의 정신을 오염시켜 제국에 균열을 일으켰을 거다.
과장된 우려가 아니다. 당장 백동훈의 경우만 보더라도, 놈이 계속해서 그런 식의 강연을 해나갔다면 분명 그에 동조하는 자들이 우후죽순으로 나타났을 테니까.
놈이 말하던 눈덩이와 같다. 그것은 일정 단계에 이르면 쉽사리 진압할 수 없는 하나의 큰 흐름이 되어버린다.
여태까지 세현이 실정(失政)한 적 없던 만큼 눈덩이가 커지는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을 테지만 그렇다고 완벽히 막아낼 수 있지도 않다. 세상 그 어느 훌륭한 집단에서도 계기만 주어진다면 분란은 발생하기 마련, 사람은 제각각 다른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갖고 있으며 또한 생각만큼 현명하지 못하다.
============================ 작품 후기 ============================
오늘 시험치고 간신히 일어나서 썼네요. ㅎㅎ;; 시험 네 번 보는 과목이랑 세 번 보는 과목이 같이 있으니 거의 격주로 시험을 보는 느낌입니다. 그만큼 범위가 좁아서 좋긴 한데 이게 정말 좋은 건지…… 음.
어찌됐든, 이번 편도 부디 재밌게 읽으셨길 바랍니다.
추천도 한 번 꾹! 부탁드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