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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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태래(否極泰來)
큼직한 살점을 계속해서 뜯기면서, 어쩌면 뼈가 드러날 만한 큰 부상도 감수하며 이데아의 본대는 계속 전진했다. 그 수밖에는 없었다.
어떻게든 버티라는 지휘관들의 외침, 무력하게 죽어가며 분노와 두려움에 울부짖는 전투원들의 단말마, 쉬지않고 번쩍이는 섬광과 폭음, 그에 뒤섞여 사방을 잠식해가는 흙먼지, 살아남으려 전력을 다하는 자들의 악다구니.
지옥 같은 시간을 지나, 마침내 본대가 산 초입에 도달했다.
“죽여!”
“죽여버려!”
엄폐물 하나 없는 평원이 아니다. 드디어 활약할 때를 맞이한 근접 전투원들이 가로막는 나무들을 이리저리 피하거나 불도저처럼 파괴하며 질주했다. 그들이 가진 장비 역시 어디서 부족하단 소릴 들을 일 없는 고급 중의 고급, 제대로 조준되지 못하고 날아드는 탄환이나 마법들 정도는 능히 견뎌낼 수 있었다.
다들 눈이 벌개진 채였다. 자신들이 겪었던 공포와 무력감 만큼 적들을 유린할 생각으로 반 정도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의 바램은 이뤄질 수 없었다.
기이이이잉-!
평지에서 지긋지긋하게 들었던 호버보드의 기동음이 산 정상에서 나타났다. 그들이 다가가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그 소음이 멀어지는 것이 들린다.
“안 돼!!”
상황을 짐작한 누군가의 절규 같은 외침이 울렸다. 그 간절함이 무색하게 적들이 내는 소리는 순식간에 멀어졌고, 그들이 정상에 도착했을 땐 이미 저만치 멀어지는 모습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쏴! 죽여버려!”
누군가 억울함에 그렇게 고함치며 원거리 공격을 가했지만 택도 없었다. 그나마 헐떡이며 뒤늦게 올라온 사격수들이, 그 중에서도 저격총을 든 전투원들이 몇 번 유효타를 가하긴 했지만 확실하게 죽인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어느새 그들의 주변을 돌며 귀찮게 굴던 호버보드 부대도 멀찍이 도망가버린 후.
어찌됐든 적들의 공격을 물리치긴 했지만 이건 이긴 게 아니었다.
상처뿐인 승리?
그렇게 표현하기도 어려울 정도의 참혹함만 남았다. 이런 비슷한 공격을 한두 번만 더 당하면 병력이 얼마나 남든 부대가 통째로 와해되어버릴 판이다.
“지휘관들은 모여라. 지금 한가롭게 구조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산 정상에서 총지휘관이 분노로 이를 갈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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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드의 은빛 동체가 가공할 속도로 하늘을 가로질렀다.
협력자안 검은 로브가 어디에서 통신이 두절됐는지 알지 못해 반나절이 넘도록 가능성 높은 장소를 찾아다니는 중이었다. 고공비행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그의 전신에선 쉬지 않고 마력의 파장이 뿜어져 일대의 지형을 샅샅이 조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지형을 그런 식으로 빠르고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연적으로 마력의 뒤엉킴이 존재하는 곳이나 커다란 장애물이 있는 곳은 일일이 접근하여 확인해야 했는데, 아무래도 찾으려는 대상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으니 어디 하나 함부로 지나칠 수 없었다.
애초부터 검은 로브의 패배를 계산에 두지 않았기에 이런 경우를 대비해놓지도 않았다. 빠르게 찾을 수 있을 리 없다.
다행이라면 탐색의 주체인 아사드의 능력이 결코 부족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온갖 사소한 정보들을 그러모으고 발생 가능한 변수들을 계산해 결론을 도출한다. 그것으로 파악된 예상 전투지점을 뒤져대자, 마침내 수상하기 짝이 없는 거대한 싱크홀을 찾아낼 수 있었다.
결코 자연적인 싱크홀이 아니다. 주변에 녹았다가 굳은 대지의 흔적만 봐도 이것이 거대한 힘의 파동으로 생겼다는 것이 명백했다.
흡사 마리아나 해구를 연상시키는 그 어둠 속으로 아사드가 뛰어들었다. 백색의 동체가 밝은 빛을 내뿜자, 빠르게 하강하는 그를 따라 주변의 광경이 무서울 정도로 스쳐 지나갔다.
콰아아-!
바닥에 닿기 직전 멈춰 선 그의 움직임에 사방으로 후폭풍이 몰아쳤다.
아사드는 자신의 바로 대각선 아래 자리한 연보랏빛 수정체를 보며 침묵했다.
– 왔군. –
수정체 속에서, 검은 로브의 눈동자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멀리서 간신히 이어진 전파처럼 흐릿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린다.
– 다행히 늦게 않게 찾아왔어. –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 보다시피 봉인당했지. 그 용족의 마법이 생각보다 대단하더군. 결코 남색 등급 정도가 아니었다. –
레야, 류한 제국의 핵심 중 한 명으로 아사드와 검은 로브가 이미 그 존재를 알고 있던 적이다. 남색 등급이라는 것도 확실하게 확인했는데, 검은 로브의 말처럼 이런 봉인을 펼쳐낸 것을 보니 단순한 남색 등급은 아니었다.
아사드는 천천히 검은 로브가 봉인된 수정체에 손을 가져다 댔다. 눈을 감고 파악한 그 구조는 예상을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복잡난해했다.
이것은 작게 압축된 미궁과 같다.
보이는 것은 사람 한 명이 연보랏빛 수정체 속에 꼼짝 못 하고 갇힌 것이지만, 실상은 무한하다 싶을 정도로 넓은 수정벽들의 미로에 떨어진 듯한 상황이다.
이런 상태에서 외부를 감지하고 의지를 전해오는 것이 검은 로브가 얼마나 마법에 조예가 깊은지 알 수 있는 점이었다. 비유하자면 실시간으로 방송되는 수백 수천의 라디오 주파수를 빠르게 바꿔가며 원하는 단어만 이어지도록 조합하는 수준이다.
인간의 인지능력을 한참이나 벗어난 수준이지만, 애초에 마법이란 것이 그렇다.
“자력으로 나올 수 있습니까?”
– 네가 왔는데 내가 왜 그래야 하지? –
“방법을 생각하는 중입니다. 해제하기 쉽지 않겠군요.”
– 내가 명령할 테니 외부에서 조력만 해라. 며칠 정도면 나갈 수 있다. –
“며칠……”
그야말로 금 같은 시간이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검은 로브가 당했다면 혼자서는 자신 역시 당할 수 있다.
아사드는 생각보다 꼬여가는 상황에 어쩌면 첫 단추부터 잘못 꿰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과 싸우면서도 기어코 비행전함을 추락시켜버렸던 아크리치와, 눈앞의 검은 로브를 이렇듯 봉인해버린 자들까지.
검신이 없어도 류한은 결코 만만히 볼 수 있는 세력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아프리카 대륙에서 구원했던 인간들과 같은 종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힘의 차이다.
“고민되는군요.”
– 무엇이? –
“지금이라면 저는 무사히 다른 세계로 도망갈 수 있습니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수정체 봉인을 제외하면 빛 한 점 들어오지 못하는 이곳에 적막이 깔리니, 그야말로 세계의 무덤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 나와의 대화를 잊었나? –
“저는 무엇도 망각하지 않습니다.”
– 그러면, 겁이라도 먹은 건가? –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지금 아사드의 미래엔 성공했을 때의 시나리오와 실패했을 때의 시나리오가 있었다.
몇 번이고 다시 시뮬레이션 해봐도 두 시나리오 모두 실현될 확률이 비슷했다. 어떤 변수가 끼어드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오차범위를 최대한 넓게 설정해도 마찬가지다.
성공한다면 그는 하나의 세계를 온전하게 손에 쥘 수 있다. 시스템으로부터의 추방자 혹은 도망자가 아닌 한 세계의 주인으로서, 끊임없이 발전을 지속하고 힘을 기를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 영원히 도망치며 살아갈 수는 없는 법이니 언젠가는 반드시 이뤄야 할 목표다.
그러나 실패한다면 죽음뿐이다. 파악된 적들의 전력은 충분히 위협적이지만 그와 검은 로브가 힘을 합친다면 제압하지 못할 정도는 아닌 바, 상황이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될 때는 아마도 검신이 귀환한 후일 것이며, 그렇다면 다른 세계로의 도망을 준비할 시간도 없을 확률이 지배적이다.
아사드의 긴 삶에서 몇 번 마주한 적 없는, 계산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중대한 선택의 기로였다.
생각해보면 아무런 주체성 없는 한낱 피조물에 불과했던 그에게 영성이 부여되었던 계기도 이와 비슷했다.
– 네 한계가 그거였군. –
문득, 검은 로브가 그렇게 말해왔다.
– 극복하지 못한다면 영원히 그렇게 있을 뿐이다. –
아크리치도 비슷한 말을 했다.
아사드는 몇 분이 넘도록 침묵에 빠진 채 미동조차 없었다. 한순간에 수만 가지 생각을 할 수 있는 그에게 몇 분의 침묵은 어마어마한 사색의 시간이었다.
“이게 운명이란 것인가……”
계산 같은 것으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기회 앞에서, 그의 영성이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부르짖고 있었다.
아사드는 봉인에 닿아 있던 손으로 마력을 집중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존재 자체를 건 도박에서, 기계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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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버보드를 활용한 유격대는 이데아의 군대를 상대로 엄청난 효과를 거뒀다.
그러나 첫 공격 이후 갈수록 재미를 보기 힘들어졌는데, 적들도 바보가 아니었던 터라 사방에 감시망을 깔아놓고 즉각적으로 대응해오니 아무리 기동성이 좋아도 공격하기 영 부담스러워졌다.
“시간은 충분히 끌었네요.”
하지만 혜진은 신경 쓰지 않았다. 유격대를 보낸 목적은 적들의 정비를 방해하고 진군 속도를 늦추기 위함이었을 뿐, 오히려 기대하지도 않던 큰 피해를 입힌 것이 예상 외의 소득이었으니까.
4만 정도로 추정되던 적이 무려 3만 가까이로 줄었다. 천여 명 간신히 넘는 유격대가 한 명당 열 명씩 죽인 셈이니, 가히 어마어마한 전공이다. 여기서 뭔가를 더 바라는 게 욕심이었다.
“이제…… 결전의 시간입니다.”
유격대는 어제부터 운용하지 않았다.
아사드의 소재가 파악됐던 곳, 즉 검은 로브를 봉인했던 장소를 감시하던 하늘의 눈 몇 기가 파괴된 것을 확인한 즉시 철수시켰다.
직접 확인하진 못했지만 지난 며칠 잠잠하다가 갑작스레 감시기가 파괴된 것은 한 가지 의미뿐이었다.
몇 시간 전 모든 준비는 끝났다.
전투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모두 부산으로 피난시켰고, 용인에 남은 것은 기준 이상의 힘과 싸울 의지를 갖춘 자들 뿐이다. 황실 소속의 병력도 있고 이곳을 본거지로 삼는 클랜들도 있으며 리빙 아머 병사들도 있다.
반나절 전부터 도시는 평소의 활기찬 소란스러움과는 전혀 다른 적막에 잠겨있었다.
폭풍전야(暴風前夜).
어쩌면 제국의 운명을 결정지을지도 모를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혜진은 자리에서 일어서 스탄헤이드 내성을 벗어났다. 그 뒤를 따르는 류한의 최고위 간부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굳은 채였다.
문을 나서자 어느 때보다 푸르게 느껴지는 하늘이 있었다. 그 아래 고요와 긴장에 잠긴 도시가 있다.
상대는 보라색 등급의 세계급 재앙 둘.
그 둘을 보조하는 만만찮은 전력의 3만 군대.
마음 같아서야 무조건 싸움을 회피하며 세현이 돌아올 때까지 버티고 싶지만, 한반도는 그렇게 도망치며 시간을 끌기엔 너무 좁다. 다른 사람들을 포기해버린다면 또 몰라도 그것은 최악의 상황에서나 해야 할 일이다.
제국은 발목을 잡는 족쇄가 아니라 누구와도 맞서 싸울 수 있는 최고의 방패다. 이것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벗어던지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선택.
보라색 등급 둘을 상대로 버티며 최소한 그들의 군대라도 모두 섬멸해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서라도 선택할 수 있는 전략의 수가 많아진다.
– 온다. –
“옵니다.”
정령 인공지능에 직접 접속할 수 있는 레야, 그리고 하늘의 눈 시스템과 연동된 기기를 들고 있던 서영환이 동시에 말했다.
한 명 한 명씩, 누가 말하지 않아도 서쪽 방향으로 시선을 던지기 시작했다.
“전투 준비!”
“서쪽이다! 공격에 대비하라!”
혜진을 대리해 전투의 지휘를 맡은 김인환과 서영환의 목소리가 모두의 귀에 달린 통신기를 통해 울렸다.
그렇게 몇 초가 흘렀다.
이제 점으로 모습을 드러내던 적들에게서 눈을 찌르는 듯한 빛무리가 번쩍였다.
도저히 막을 수 없을 것 같은 기세의 보라색 등급의 마법 공격, 그를 보기 무섭게 대비하고 있던 레야가 힘을 끌어모았다.
마법사는 준비를 갖출수록 능력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도시에 있는 수천 이상의 팔렌니움에서 뿜어진 마력이, 곳곳에 혈맥처럼 깔린 마법진을 타고 어마어마한 속도로 천공성 스탄헤이드를 향해 모여들었다.
그 중심에서 마력의 화신처럼 빛을 뿜어내는 레야가 허공에 몇 미터 이상 떠오른다. 그 상태로 뻗어낸 손을 따라 푸른빛의 반투명한 보호막이 도시 전체를 뒤덮는 우산처럼 선명하게 펼쳐졌다.
태양이 청빛의 방벽을 가격했다.
천지가 뒤흔들리는 굉음과 함께, 푸른빛 하늘을 온통 주홍빛으로 물들이는 화염의 바다가 휘몰아쳤다.
그 말도 안 되는 창세신화 같은 재앙의 아래에서, 조금도 기죽지 않은 이데아의 군대가 함성을 지르며 돌격을 시작했다. 류한의 병력들이 정신을 차리고는 원거리 공격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대전쟁, 어쩌면 역사에 다시 없을 전투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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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현이 차원이동 당한 후, 여기까지 오는데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분량이 세 배나 늘어난 상태라면 믿으시겠습니까. 결코 의도해서가 아닙니다……ㅠㅠ
부디 재밌게 읽으셨길 바라며, 추천 한 번 꾹! 부탁드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