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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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의 시작
아파트 복도는 조용했다. 복도라고 해봤자 두 가구밖에 없으니 당연하지만 오늘따라 그 적막이 무겁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 무겁던 적막도 계단으로 향하는 철문을 열었을 때 산산조각났다.
키야아아아악…!
아래서부터 섬뜩한 괴성이 아련하게 올라왔다. 눈에 띄게 흠칫한 혜진이 세현에게 바짝 붙었다. 그는 겁에 질린 누이를 토닥여주며 앞장서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진짜로, 내려가는, 거야?”
혜진의 말이 버퍼링 걸린 것처럼 끊긴다. 그녀는 집 현관을 나섰을 때부터 극도로 겁에 질린 상태였다.
왠지 공기가 더 서늘한 것 같고 평범했던 계단은 음산한 기운에 잠긴 듯하다. 게다가 방금 전 들린 괴성은, 딱 공포영화에서 겁도 없이 위험한 곳을 찾아가다 당해버리는 조연이 된 느낌을 선사했다.
그녀는 동생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얼마나 강한지는 정확히 모른다. 세현이 굳이 전부를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럴 필요도, 그렇게까지 힘을 쓸 일도 없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적어도 사람들 눈이 없는 곳에선 거리낄 이유가 없다.
“걱정 마.”
“어떻게 걱정을 안 해! 좀비가 나온다며!”
“쉿! 좀비 듣는다.”
절로 목소리가 높아지려는 혜진을 그 한 방으로 침묵시킨 세현은 계속해서 계단을 내려갔다. 혜진은 불안에 떨면서도 그런 동생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이미 집 밖으로 나온 상황, 살 길은 동생에게 붙는 것뿐이다. 그녀는 동생의 옷자락을 마치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힘껏 부여잡았다.
“이거 들고 있어.”
세현이 뜬금없이 청월의 검집을 그녀에게 건넸다. 얼결에 그것을 받아들자, 손에서부터 따뜻함과 서늘함이 뒤섞인 묘한 감각이 전해졌다. 그녀로선 퍽 신기한 경험이었다.
“어디서 난 거야?”
“이계에서.”
“……이게 청월이라는 검이야?”
“내가 말한 적 있었나?”
“전에 한 번.”
그 순간, 비상계단 전체를 뒤흔드는 괴성이 울렸다.
“캬아아아악-!!”
“엄마야!!”
화들짝 물러서는 혜진의 눈에 끔찍한 몰골의 양복 입은 좀비가 뛰쳐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한순간 빛이 번쩍였다.
달려오던 좀비가 그대로 고꾸라지며 괴성이 쩌렁쩌렁 울리던 계단은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요란스레 엎어진 좀비의 오른쪽 어깨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시끄러운 등장 치고는 허무한 죽음이다.
거짓말처럼 쓰러진 좀비를 보며 혜진은 눈만 깜빡거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세현이 검을 들어 일자로 겨누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다시 놀랐다.
“지금 네가 한 거야?”
“응.”
“……번쩍거리는 것밖에 못 봤는데?”
“나랑 있으면 안전하다니까.”
그렇게 말한 세현이 빙그레 웃었다. 물론 혜진은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가자.”
세현이 다시 앞장선다. 그 뒤를 이전보다는 조금이지만 안정된 상태의 혜진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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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진은 쓰러진 좀비의 옆을 지날 때, 혹시 그게 다시 일어설까 매우 두려워했다. 물론 그런 일은 없었지만.
1층까지 내려가면서 총 세 마리의 좀비를 마주쳤다. 그 중 두 마리는 그들을 인식하기도 전에 오른쪽 어깨가 꿰뚫려 즉사했다.
다행히 이 좀비들은 약점, 기생체가 자리잡는 위치가 모두 같았다. 만약 개체마다 약점의 위치가 달랐다면 매번 좀비를 수십 토막내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세현은 약점의 위치를 너무 맹신하진 않았다. 어떤 좀비는 약점이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항상 신경 썼다.
지금까진 충분히 다시 제압할 여유가 있었기에 약점만을 노렸다. 시체에 익숙치 않을 혜진을 위해서였다.
그렇게, 결국 1층에 도달한 그들은 부서진 아파트 현관의 자동문을 확인했다.
깨진 유리문에 엉겨붙은 살점들과 진득한 느낌의 핏물이 상당히 징그럽다. 오늘 아침 평소처럼 출근하던 이들이 여기서 몇이나 죽었을까?
혜진은 아까부터 말이 없었다.
세현의 옷자락을 붙잡은 채 연신 사방을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보통을 초월한 세현의 청력에 완전히 겁에 질린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소리가 들린다.
“긴장 풀어.”
“어?!”
나름 부드럽게 꺼낸 말인데도 잔뜩 긴장했던 혜진이 화들짝 놀랐다.
“너무 긴장하지 말라고. 사람들이 공포영화 같은 거 왜 무서워하는지 모르겠다면서?”
“사, 상황이 다르잖아. 이건 진짜라고.”
“그냥 VR 영화 관람한다고 생각해. 위험할 일 없으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냐?”
잠깐의 침묵 후, 혜진이 물었다.
“방금 죽인 것들, 사람이었잖아?”
“그렇지.”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변하지…… 너무, 너무 끔찍하잖아. 이거 꿈 아니지?”
“안타깝지만 아니야.”
“그리고 또, 나중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글쎄. 달려드는데 그냥 당해줄 순 없잖아”
여러모로 머릿속이 복잡한 듯했다.
좀비에 대한 충격, 그리고 혹시나 나중에 상황이 안정됐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문제들을 떠올리는 듯하다.
“그 사람들 혹시 완전히 죽은 게 아니면? 몸은 제멋대로 움직여도 생각은 할 수 있는 거면, 그러면 어떻게 해?”
“어떻게 하긴, 지금이랑 똑같지.”
“……”
“단순하게 생각해.”
“그게 간단히 돼?”
“하다보면 다 돼. 긴장은 좀 풀렸어?”
“어, 어…… 조금.”
별 쓸모 있는 대화는 아니었다. 하지만 혜진의 긴장을 푸는 데는 그럭저럭 도움이 된 듯하다. 완전히 나무토막처럼 굳었던 자세가 많이 풀어졌다. 미친듯이 뛰던 심장도 조금이지만 잠잠해졌다.
“그럼 가자. 다시 말하지만 너무 놀라지 마. VR 영화라도 즐긴다 생각해.”
그렇게 말한 세현이 앞장서서 밖으로 나섰다.
그 뒤로 혜진이 깜짝 놀라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그녀의 마음가짐이 변해서가 아니었다. 좀비들이 멀리서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 픽픽 쓰러졌기 때문이었다. 쓰러지고 나서야 좀비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니 놀랄 일도 별로 없었다.
혜진을 배려하여 원거리 공격으로 좀비들을 처리하던 세현은, 그것들의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 모두 빛이 잘 들지 않는 장소에 숨듯이 자리하고 있었다.
은신해서 사냥감을 사냥하려는 의도인가, 아니면 빛을 쬐는 걸 싫어하는 건가.
만약 후자라면 꽤 쓸 만한 정보였다.
“그거 어떻게 하는 거야?”
그때, 혜진이 궁금증을 드러냈다.
“이거?”
되묻는 세현의 왼손에서 자색빛 기운이 은은히 타올랐다.
“그래, 그거.”
“내공.”
“내공?”
“무협지 본 적 있어?”
혜진이 고개를 저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설명을 시작했다.
“기(氣)라는 건 알지? 세상 천지에 퍼져있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
“알지.”
“그걸 몸에 받아들여 쌓은 게 내공이야. 계속 축적하면 힘도 강해지고, 일정 경지를 넘으면 나처럼 이런 짓도 가능해.”
그렇게 말한 세현이 손가락으로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동시에 빛이 번쩍이고, 그늘에서 슬금슬금 기어나오던 좀비 한 마리가 어깨에 구멍이 뚫려 풀썩 쓰러졌다.
뒤늦게 놀란 혜진이 좀비를 쳐다봤다. 이번에도 쓰러지고 나서야 그 존재를 알아챘다.
“……완전 초능력이네.”
“누나도 배울 수 있어.”
“진짜로?”
“안 그래도 가르쳐줄 생각이야. 그때가서 힘들다고 엄살부리지나 마.”
여태까진 직장을 다니는 혜진이 좀처럼 시간이 나지 않아 적당히 미루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더 미룰 이유가 없다.
기초만 닦아도 이런 좀비 같은 것들은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거다. 많이 몰려들면 위험하겠지만, 한두 마리 정도를 상대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둘은 다시 천천히 움직였다.
세현은 좀비를 발견하는 족족 탄지(彈指)를 쏘아냈다. 한줄기 섬광에 어깨가 꿰뚫리며 쓰러지는 모습이 이제는 너무나 당연했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뭔가에 놀란 세현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폭발하듯 뿜어진 자색빛 검기들이 순식간에 허공을 가른다. 전방의 분수대가 산산조각나며 시끄럽게 우르르 무너져내렸다. 눈 한 번 깜빡일 짧은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뭐, 뭐, 뭐야?”
갑작스런 이변에 놀란 혜진이 말을 더듬었다. 허나 세현은 바로 답하는 대신 전방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괜히 힘자랑을 하려고 분수대를 쪼갠 것이 아니다. 그는 여전히 허공에 검을 뻗은 채로,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그것을 신중히 살폈다.
“이거 안 보여?”
“뭐를? 어디를 말하는 건데?”
“……안 보인다는 거지?”
재차 확인한 세현이 여전히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천천히 메시지를 읽었다.
– 조건을 만족했습니다. –
혹시나 싶어 사방으로 기감을 퍼트린다. 그렇게 탐지할 수 있는 최대의 범위를 모조리 뒤져도 별다른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적어도 누군가의 사술은 아닌 듯하다.
보이는 내용이 적잖이 신경 쓰인다. 그는 몇 번이나 반복해서 그것을 읽었다.
– 시스템 에레도스의 사용자가 되었습니다. 현재 사용할 수 있는 기능은 상태창, 스킬창, 상점입니다. 각 기능은 이름을 말하거나 집중하여 생각하는 것으로 사용 가능합니다. –
– 이제부터 모든 종류의 지성체와 대화할 수 있습니다. –
– 이제부터 몬스터를 사냥하여 화폐 ‘룬’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획득한 룬은 상점에서 관리하며 아이템을 구매하거나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
– 사용자는 직업을 선택해 스킬을 배우고 상태창을 통해 능력치를 올림으로써 더 강해질 수 있습니다. 시스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원한다면 ‘도움말’ 명령어를 사용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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