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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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화
평소처럼 점심식사를 마친 후,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서려 할 때였다. 세현의 P97K 무전기에서 여성 길드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 정문입니다. 멀리서 차, 차량들이 보입니다. –
“차량?”
세현이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근무자의 당황스러움이 여기까지 전해지는 듯하다. 이런 시기에 차량이라니?
– 두 대, 세 대…… 총 다섯 대입니다.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
과연, 곧 세현의 귓가로도 희미하게 차량이 내는 엔진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주 오랜만에 듣는 소리다.
“기다려. 갈 테니까.”
그는 곧장 정문으로 향했다.
성벽 안 공터에서 훈련을 진행하던 중이었기에 몇 초 걸리지 않았다.
“저기예요.”
세현이 올라서기 무섭게 근무자가 건너편 먼 곳을 가리켰다. 그러면서 손에 든 망원경을 건넸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세현의 눈동자가 자색으로 물들었다.
군용 트럭이었다. 적재함에 탄 사람들 전부가 군복을 입었고 헬멧과 탄띠, 소총까지 갖춘 완전무장을 했다. 한 대에 대략 12명씩 탔으니 운전석의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총 60명 정도인 셈이다.
쾅-!
그들의 진로를 가로막던 버려진 승용차가 갑작스레 튕겨져 날아갔다. 순간 세현의 눈이 흥미로 물들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승용차가 저절로 튕겨졌다.
“마법인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사이, 마침내 성 근처까지 도착한 차량들이 적당한 장소에서 멈춰 섰다. 이후 시끌벅적한 소리를 내며 하차하기 시작한다.
“아무리 봐도 우리한테 볼 일이 있는 것 같지?”
“그, 그런 것 같습니다.”
“여기에 있다는 건 누구한테 들었을까.”
그렇게 질문하듯 말했지만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류한 길드는 그동안 찾아온 모든 생존자들을 받아준 게 아니다. 몰염치한 행태를 보이는 이들은 바로 내쫓았다. 세현이 수장이라는 걸 알면서도 반말을 하며 기싸움을 하려 들거나,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게 당연하다는 듯 굴었던 이들이다.
쫓겨난 그들이 북쪽의 거대 생존자 무리에 흡수되었다면 충분히 이곳의 정보를 흘렸을 수 있다. 저렇게 중무장한 병력과 트럭들을 운용할 만한 집단은 현재로선 그곳밖에 없었다.
마침내 하차를 마친 그들이 천천히 주위를 살피며 성으로 다가왔다. 성벽 위의 병사들을 보고서도 별달리 동요하지 않는 모습이다. 역시, 이미 알고 온 것이 맞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멈춰 선 무리에서 한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이야기 좀 합시다!”
모습을 드러낸 세현과 근무자를 향한 외침이었다. 세현이 옆의 길드원에게 나직이 말했다.
“혹시라도 전투가 벌어지면 곧바로 몸을 숨겨라. 내가 나오라 할 때까지 함부로 얼굴 내밀지 말고.”
“알겠습니다.”
그렇게 주의를 준 후 곧바로 점프해 뛰어내렸다.
가볍게 착지하는 그를 본 상대가 살짝 놀란다. 하지만 빠르게 표정을 수습하고 그에게 다가왔다.
“여기 대표 좀 불러주시죠. 중요한 이야기가 있으니까.”
“내가 대표입니다.”
“……그래요?”
그는 세현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러더니 성벽 위의 미늘창을 든 병사들을 힐끗 턱으로 가리켰다.
“저것들 정체가 뭡니까?”
존대이긴 하나 은근한 무시가 묻어나온다. 세현이 대표라고 밝혔음에도 마치 아랫사람을 대하는 태도였다.
이것들이 대화를 하자더니 난데없이 상전 노릇을 하려든다.
“남의 집에 왔으면 자기소개부터 해야죠. 제대로 용건도 밝히고.”
“흠.”
그는 다시금 세현을 노골적으로 훑었다. 세현도 마주 상대를 살폈다.
계급은 하사, 명찰에 적힌 이름은 장충석. 하사 주제에 이런 규모의 무리를 이끌고 왔다는 게 약간 의외지만, 능력이 있다고 가정하면 그렇게 이상하지도 않다. 위에서 봤던 차량을 튕겨낸 힘이 이자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름대로 탐색을 마쳤는지 상대, 장충석이 입을 열었다.
“계약을 하러 왔습니다. 그쪽한테도 좋은 계약일 겁니다.”
“뭔데요?”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가 식량과 총기, 탄약을 빌려주겠습니다. 그쪽은 대가로 룬을 주면 됩니다. 달마다 꾸준히, 회색 룬은 최소 500개 이상, 흰색 룬은 200개 이상, 붉은색 룬은 20개 이상으로요. 적당히 섞어서 줘도 괜찮습니다.”
“……”
“계속 이렇게 세워둘 겁니까? 좀 앉아서 이야기하죠. 자세한 건 아직 꺼내지도 않았습니다.”
태도나 내용은 둘째 치고, 룬을 요구한다는 것이 꽤 신기하다.
각성자끼리는 룬을 거래하는 것이 가능하다. 세현은 그럴 일이 없었기에 별 신경 써본 적 없는데, 상대 집단은 본격적으로 룬을 거래할 정도로 각성자가 많은 모양이었다.
생각해보면 충분히 그럴 만도 하다.
집단의 덩치가 크면 내부에서 화폐의 흐름이 생기는 건 자연스러운 일, 그들이 군인들을 중심으로 뭉쳤다지만 모두가 하나인 것은 아닐 것이다. 서로간의 교류에 있어 기존의 돈을 대체할 무언가가 필요했을지 모른다.
거기서 룬은 쓸모없어진 원화를 대체할 아주 좋은 화폐다.
“식량은 얼마나 줄 수 있습니까?”
세현이 물었다.
총기나 탄약은 필요없다. 하지만 식량은 필요하다. 그에겐 회색 룬이나 빨간색 룬이 아주 많았다. 마구 쓸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상대가 얼마 만큼의 식량과 바꿔줄 수 있는지 한 번 들어볼 요량이었다.
헌데 돌아온 대답이 예상을 빗나갔다.
“식량에 대한 대가는 룬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곳 주변의 탐색권입니다. 자유롭게 활동하고 괴물을 사냥할 권리, 그리고 주인 없는 물자를 가져갈 권리. 그쪽한테도 꼭 나쁜 이야긴 아닐 겁니다. 힘들게 얻어야 할 식량을 저희한테서 손쉽게 얻는 셈이니까.”
“쯧.”
세현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거절하죠.”
“……예?”
“계약 안 합니다.”
이곳 주변은 단순한 땅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현재로선 류한 길드가 자원을 얻는 공간이고, 앞으로는 덩치를 불려나갈 장소다.
그런 곳에 남들이 마음대로 들락거리며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리를 넘겨줄 수는 없었다. 지금은 단순한 탐색권이라 불리지만, 나중엔 그것이 영토권이 되어버릴 테니까.
“잘 가세요. 여기서 재워줄 수 없으니,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가는 게 좋을 겁니다.”
“아니, 식량과 총을 주겠다는데 거절한다고요?”
장충석이 당황했다.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대한민국은 총기소유가 불법인 국가다. 총은 규모 있는 경찰서 혹은 군부대에서나 볼 수 있는 물건이고, 따라서 쉽게 얻을 수 없다. 이런 시국이라면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귀중할 수밖에.
식량도 그렇다. 먹을 것을 찾기 위해 주변을 탐색하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위험한 활동이다. 그 위험을 대신 짊어져 주겠다면, 설령 약간의 손해를 보더라도 거절할 사람은 몇 없을 터였다.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경우라면 말이다.
“우리도 있습니다.”
“……뭘 말하는 겁니까? 설마 총? 그런 소린 못 들었는데?”
“당연히 못 들었겠죠. 소문낸 적도 없는데.”
세현이 피식 웃었다.
왜 이런 계약을 하자고 왔는지 대충 짐작이 간다.
이들은 대기업이 운영하던 수 개의 커다란 식량창고를 갖고 있다. 그곳엔 엄청난 양의 음식이 있겠지만, 그것들 중 일부는 유통기한이 길지 않을 거다. 길어야 몇 개월이면 부패할 음식들이 분명히 있다.
당연히 바보가 아니라면 그런 것들부터 먼저 소모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한계가 있다. 식단과 영양의 밸런스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인데, 예를 들어, 진공포장 육류의 유통기한이 다른 음식보다 짧다고 삼시세끼를 그것만 먹을 수는 없다.
어차피 버릴 음식이라면 다르게 활용하는 것이 현명하다. 바로 이렇게, 주변의 생존자 무리에 뿌리는 거다.
그냥 인심 좋게 뿌리는 게 아니다. 대가로 탐색권이라는 권리를 받는다. 그러면 모든 영역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명분을 갖게 된다. 거기서 얻게 되는 물자도 빼놓을 수 없다. 즉, 어차피 먹지 못할 음식으로 명분과 함께 자원까지 획득할 수 있다.
제대로 무장하지 못한 생존자 무리가 주변을 뒤졌으면 얼마나 꼼꼼하게 뒤졌겠는가? 아마 식량도 본전 이상으로 뽑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유통기한이 긴 것들로만.
물론 탐색활동이라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 역시 성장을 위한 밑거름이라 생각하면 절대 손해가 아니다. 오히려 지금의 이 시국을 제로섬게임(zero-sum game)으로 생각했다면 괴물 역시 일종의 자원이다.
좀비는 현재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결코 무한하진 않다. 누군가 먼저 모조리 잡아버린다면, 다른 이들은 더 이상 좀비를 죽일 수 없다. 성장의 발판을 잃는 것이다.
총기의 경우도 비슷하다.
이들이 정말로 한 개 대대를 싹 털었다면 총기와 탄약을 엄청나게 많이 갖고 있을 거다. 그러면 남는 총을 주변의 생존자 무리에게 빌려주면 된다. 그 대가로 룬을 받고, 동시에 탄약을 무기로 주도권을 잡아 마음껏 휘두를 수도 있다.
총이라는 위력적인 무기를 유출한다는 위험은 있다. 하지만 그들의 전력이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또한 탄약을 공급하는 것이 바로 그들이었다. 주는 대로 받아서 쓰는 이들이 저들보다 월등히 덩치가 큰 공급자를 거스를 수는 없다.
누구 머리에서 나왔는진 몰라도 아주 효과적인 계획이었다.
어차피 사용하지 못할 잉여 물자를 통해 이 지역의 패자가 된다. 이후 시간이 흘러 집단 간의 완전한 주종관계가 형성되면, 그때는 명실상부한 지배자로 거듭날 수 있다. 자신들이 가진 물자를 제대로 활용하는 계획이다.
속셈이 빤히 보이긴 하지만 알면서도 당할 정도로 유혹적이다. 평범한 생존자 무리라면 당하면서도 괜찮다 생각했을 거다. 어쨌든 생존은 보장되니까.
물론 류한 길드는 그렇지 않다.
“우린 관심 없습니다.”
세현의 뜻이 확고하다는 것을 깨달은 장충석이 표정을 굳혔다.
“정말 계약을 안 하겠다고요?”
“안 합니다.”
“후회할 텐데?”
“……후회?”
“이건 단순한 계약이 아닙니다. 서로 돕고 살자는 평화의 제스쳐지. 계약을 받아들이면 그쪽이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가 도와주러 올 수도 있어요. 앞으로 사이가 더 좋아지면 혹시 압니까? 하나로 합칠 수 있을지. 아무래도 뭉치는 게 더 안전하잖습니까.”
세현이 다시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하아.”
장충석이 안절부절못했다.
이런 경우는 예상치 못했을 거다. 그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럼 이렇게 하죠.”
그러더니 다시 이야기를 해온다.
“식량이나 탄약만 지원하겠습니다. 대가로 이곳의 탐색권만 주면 됩니다.”
“탄약도 별 필요 없습니다만.”
넉넉하진 않아도 당장 사용할 정도는 있다. 게다가 총을 사용할 때 꼭 탄약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사격수 직업은 마력탄환 스킬을 통해 총알 없이 사격할 수 있다. 그 투사체의 속도가 느리긴 하지만, 레벨이 오르고 다른 스킬을 배우면 또 모를 일이었다.
“그럼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겁니까? 정말로?”
“식량이 필요하긴 한데, 그렇다고 우리 영역의 권리까지 포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영역이라니요? 탐색권을 달라고 해서 정말로 그쪽이 여길 점령이라도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겁니까?”
“그럼, 아닌가요?”
상대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이봐요, 여긴 원래 대한민국의 영토입니다. 누구도 정당하게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고요. 우리가 탐색권을 달라고 하는 건 예의상 양해를 구하는 쪽에 가깝습니다. 아무런 말도 없이 주변을 들쑤시고 다니다간 자칫 마찰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괴물하고도 싸우기 바쁜 마당에 사람끼리 싸워서야 되겠습니까?”
“대한민국? 그거 이미 망한 거 아니었습니까?”
“아닙니다. 서울 수도방위사령부에 아직 대규모 병력과 대통령을 포함한 중요 인사들이 전부 살아있습니다.”
처음 듣는 소리다. 믿을 수 없다.
백 번 양보해서 그게 사실이라 해도, 별 상관 없다.
“그 사람들 대체 뭐한답니까? 국민들이 전부 죽어나가고 있는 판에?”
“북쪽에서 내려오는 괴물들을 막는 중입니다. 엄청난 놈들이 많다더군요. 어쨌든, 그러니까 당장 구조대가 오지 않는다고 나라가 무너진 게 아니라는 겁니다.”
세현은 낮게 웃었다.
“아니요, 무너졌습니다. 국가를 구성하는 기본 3요소가 뭔지 압니까? 영토와 국민, 그리고 주권이에요. 지금의 대한민국이 영토와 국민을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까? 대체 어디에?”
세현이 주위를 둘러봤다.
거기엔 잔뜩 무너지고 망가진 건물들과 도로만 있다. 좀비들의 시체도 드문드문 보인다. 한 때 대한민국의 국민이었을 시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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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시커먼 놈들 같으니……
재밌게 읽으셨길 바라며, 추천 꾹 부탁드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