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5
5====================
시스템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게임에서나 볼 법한 메시지다. 상태창이니 스킬창이니, 정말로 이 현실이 게임이라도 된 것처럼 말한다.
“상태창.”
메시지가 알려준 대로, 실험삼아 내뱉은 명령어에 새로운 반투명한 창이 스르륵 나타났다.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지만 별다른 악영향은 없었다.
***********************************
한세현 / 직업 없음 / 인간
레벨: 1
*칭호
없음
*능력치
강인함: 10
민첩성: 10
정신력: 10
마법력: 10
친화력: 10
– 잔여 능력치 점수: 0
*보유 스킬
없음
***********************************
숫자들을 가만히 살피던 그가 왼손을 꽉 쥐며 내공을 끌어올렸다.
힘도, 내공도, 느껴지는 몸의 상태도 전혀 이상이 없다. 오히려 미약하지만 살짝 신력(身力)과 내공이 증가한 것이 느껴진다.
이 상태창의 수치들은 그의 현재 상태를 나타내는 게 아닌 듯했다. 기존의 것에 더해지는 추가적인 보너스 수치라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물론, 그건 지금의 이 상황을 세현이 납득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다.
그는 한참이나 상태창을 쳐다보며 침묵에 빠졌다.
그에 혜진도 덩달아 심각해지며 눈치를 봤다.
그녀가 명백히 누나이건만, 혜진은 동생이 일주일간 실종된 후 돌아왔을 때부터 어쩐지 이전처럼 대하기가 어려웠다.
아마 지금 같은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세현이 원래대로 평범하게 행동하지 않았다면 아예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무슨 일인데?”
“아.”
그 조심스러운 물음을 듣고서야 세현은 정신을 차렸다.
“이상한 일이 벌어져서. 그러니까…… 아니, 일단은 말이야.”
별안간 그는 들고 있던 청월의 손잡이를 혜진 쪽으로 내밀었다.
“……?”
“누나도 좀 잡아봐.”
“뭐, 뭘?”
“좀비.”
“내가 그걸 어떻게 잡아?”
“도와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이건 그냥 잡고 휘두르기만 해도 되는 검이야.”
“어? 어? 잠깐, 잠깐만!”
그는 강제로 청월을 혜진에게 쥐어줬다. 그리고 당황하는 그녀를 끌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향은 처음 목표했던 아파트 단지의 가장 외곽 건물 쪽이다.
세현의 집에서는 그 건물 때문에 시야가 일부 가로막혀 보이지 않았다. 주변엔 이 아파트 단지를 제외하면 별다른 시야를 방해할 장애물이 없으니, 지금 목표한 저 건물 옥상이라면 집에서보다 더 멀리 더 넓은 장소를 살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지금 두 번째 목표가 생겼다. 바로 이 에레도스인지 뭔지의 정체를 파악하는 일, 어쩌면 좀비가 등장한 것이 이 괴상한 것 때문일지도 모른다. 일종의 직감이었다.
혜진에게느 불행하게도, 둘은 얼마 지나지 않아 좀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기 있다.”
세현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리던 혜진이 침을 삼켰다.
“진짜야?”
“진짜야. 가서 그냥 휘둘러.”
“그러다가 저게 날 공격하면?”
“걱정하지 말고. 아, 잠깐만.”
그렇게 말한 세현이 구석에 웅크리듯 숨은 좀비를 향해 손을 뻗었다. 동시에 섬광이 쏘아졌다.
하지만 좀비는 이전처럼 어깨가 꿰뚫려 쓰러지지 않았다. 그저 나무토막처럼 몸이 뻣뻣하게 굳었을 뿐이다.
“되네?”
“뭐라고?”
“아니, 어쨌든 저놈은 이제 안 움직일 거야. 마비된 거니까 안심하고 가서 오른쪽 어깨를 찔러. 휘두르면 피가 튈지도 모르니까 조심하고.”
“진짜로? 저, 정말 나보고 죽이라고?”
둘은 그대로 한동안 옥신각신했다.
죽어도 못하겠다는 혜진을 설득하긴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결국 해낼 수 있었다.
여전히 어버버한 상태의 혜진이 느릿느릿 좀비에게 다가간다. 검을 앞세운 채 언제라도 도망쳐버릴 것처럼 엉덩이를 뒤로 쭉 뺀 자세, 참 볼품없고 우스꽝스런 모습이다.
허나 세현은 비웃음 대신 그녀를 도와주기로 했다. 저 상태라면 보나마자 찌르지도 못할 것이다.
“도와줄게. 잘 봐.”
그렇게 말하며 혜진의 손과 검 손잡이를 함께 잡는다. 그 상태로 좀비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혜진은 어어어, 하며 힘없이 끌려갔다.
마침내 좀비와 두세 걸음 거리까지 오게 되자, 그 끔찍한 외관을 가까이서 보게 된 혜진이 진저리쳤다. 세현은 그런 누이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고 바로 자세를 잡아줬다.
“이렇게, 발은 여기로, 상체는 곧게.”
“야, 야, 잠깐, 잠깐만!”
“도와준다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푹!
혜진은 검을 통해 전해지는 기묘한 감각에 몸을 떨었다. 칼날이 인간의 몸통을 관통하는 느낌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선명했다.
어깨의 약점이 찔린 좀비는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축 늘어졌다. 검을 뒤로 빼내자 풀썩 힘없이 넘어간다.
“으으……”
생전 처음 사람의 몸을 찌르게 된 혜진이 앓는 소리를 냈다.
“괜찮아?”
“……아니. 전혀 안 괜찮아. 토할 것 같아.”
“엄살은.”
의외로 혜진은 빨리 정신을 차렸다. 그 모습을 보던 세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반복하면 돼.”
“근데 왜 갑자기 나한테 시키는 건데?”
“다 이유가 있어.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겪는 게 빠를 거야. 일단은 묻지 말고 하자는 대로 해줘.”
“……으으, 알았어.”
진지하게 말하는 세현에게 하기 싫다고 뻗댈 수는 없었다. 그녀는 어중간하게 잡고 있던 청월을 고쳐 잡으며 어쩔 수 없이 의지를 다졌다.
동생이 자신에게 쓸모없는 일을 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누나로써 약한 모습, 끌려다니는 모습만 보여주긴 싫었다. 일종의 오기라도 해도 좋다.
그 후, 둘은 당장 목표했던 외곽의 아파트 동으로 향하지 않고 주변을 돌았다. 그러면서 숨은 좀비들을 사냥했다.
하지만 혜진은 좀처럼 각성하지 못했다.
혹시 방법에 문제가 있는 건가, 아니면 개개인마다 각성에 필요한 숫자가 다른 건가.
슬슬 고민에 빠져들 무렵, 막 몸이 굳은 좀비를 혼자서 검으로 찌르던 혜진이 별안간 깜짝 놀라 뒷걸음쳤다.
“뭐, 뭐야 이거?”
“왜 그래?”
“이거…? 지금, 그러니까……”
“눈 앞에 뭐가 보이지?”
“그래! 네가 말한 게 이거였어?”
“맞아.”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세현은 그대로 현재까지 알아낸 ‘에레도스 시스템’의 내용을 설명했다. 그리고 그녀가 마저 메시지를 읽고 기본적인 기능을 시험해보는 동안 생각에 빠졌다.
그의 누나도 각성을 했다.
자신이 미친 게 아니라는 뜻이다. 동시에 자신만 특별한 것도 아니라는 뜻이었다.
“직업 선택이라든가, 그런 것도 되던데 일단 나중에 하자.”
“그래 뭐…… 난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그냥 다 꿈인 것 같아.”
혜진이 그리 말하며 허공에 손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자신의 눈 앞에 나타난 창들을 지우는 듯하다.
잠시 후, 둘은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야말로 원래의 목적을 위해서였다.
@
“뭐가 좀 보여?”
“잘 보여.”
시계가 꽤 맑다. 하지만 보이는 광경은 별로 희망적이지 않았다.
길거리 곳곳에서 좀비들이 언뜻언뜻 보인다. 반면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곳곳에 흩뿌려진 핏자국을 보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뻔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로서도 간신히 볼 수 있는 아주 먼 곳, 그곳엔 총과 같은 군용 장비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시체는 보이지 않았지만 신체의 일부로 짐작되는 파편들은 보였다. 그리고 주변 콘크리트 바닥에 거대한 발자국들이 찍혀 있었다.
저렇게 자국이 찍힐 정도면 대체 얼마나 무거운 놈일까.
발자국의 크기로만 추정하면 어지간한 건물보다 큰 덩치를 가졌을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금은 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저거 보여?”
“뭔데?”
혜진은 세현이 가리킨 방향을 쳐다보며 잔뜩 눈을 찌푸렸다. 물론 그녀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럼 저거는?”
“멀어서 안 보여. 뭘 말하는 건데 그래?”
“군인들이 죽은 것 같아서. 혹시 보이나 하고.”
그녀가 침묵에 빠졌다.
군인들까지 당했다니 가슴에서 뭔가가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그녀는 이런 초현실적 재난이 일어날 것이라 생각해본 적 없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한 느낌이었다.
세현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평범한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 막강한 힘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전능한 것은 아니다. 사회가 무너진다면 급변하는 환경에 휩쓸릴 수밖에 없다.
이럴 때일수록 뭔가를 선택하는 것에 신중해야만 했다. 그때, 혜진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일단 시스템이라는 것부터 살펴보자.”
“……그래.”
합리적인 제안이다. 어차피 알 수 없는 것을 고민할 바에야, 이미 눈앞에 나타난 정체 모를 시스템부터 연구하는 것이 현명하다.
둘은 도움말을 켜고 내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꼼꼼하게, 가끔 명령어를 실험해보며 시스템의 모든 기능을 하나하나 점검해갔다. 그러던 중 파티에 대한 내용을 발견한 세현이 해당 명령어를 시험해봤다.
– 파티에 초대할 대상과 손을 잡으십시오. –
“누나, 손.”
세현이 그렇게 말하며 한창 바쁜 혜진에게 손을 내민다. 혜진은 세현과 그가 뻗은 손을 번갈아 쳐다보며 잠깐 피식 웃었다.
뭘 떠올린 건지 알 것 같았다. 예전에 가끔 그녀와 이런 식으로 장난을 친 적 있었다.
“손?”
“실험할 게 있어서 그래.”
혜진이 얌전히 손을 얹자, 둘의 머릿속에 같은 메시지가 울렸다.
– 파티가 결성되었습니다. –
– 사냥으로 얻는 경험치가 20% 감소하지만, 기여도에 따라 공유되어 분배됩니다. –
– 사냥으로 얻는 룬이 20% 감소하지만, 기여도에 따라 공유되어 분배됩니다. –
“진짜 게임 속 파티네.”
혜진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한때 잠깐 RPG를 즐긴 적 있다. 자연히 이 에레도스 시스템이 게임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밖에 없다.
파티를 맺은 후 다시 에레도스 시스템 연구에 빠져들 때였다.
크와아아악……!
멀리서부터 육중한 괴성이 아스라히 들려왔다. 흠칫 놀란 혜진이 고개를 번쩍 들고 사방을 살폈다. 세현은 살피던 시스템 창을 모두 닫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무 놀라지 마.”
“뭐?”
“뭔가가 이쪽으로 오고 있으니까, 놀라지 말라고.”
그는 말과 함께 한쪽 하늘을 가리켰다. 그곳으로 시선을 돌린 혜진은 허공에 찍힌 까만 점 하나를 발견하고 잔뜩 눈가를 찌푸렸다.
당연하지만 그건 점이 아니었다. 점점 더 커지고 있었으니까.
마침내 어렴풋이 드러나는 형체는 흡사 익룡과 비슷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도, 도망가야 되는 거 아냐?”
“이미 우리를 봤어. 자기 먹잇감으로 점찍었겠지. 도망쳐도 쫓아올 걸?”
혜진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반대로, 세현은 천천히 허리춤에서 청월을 뽑아들었다.
“마침 잘 됐네. 이참에 잘 봐둬. 내가 어떤 힘을 갖고 있는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 작품 후기 ============================
부디 재밌게 읽으셨길 바랍니다. 추천도 꾹! 눌러주세요. (__)
다음 편도 잠시 후 업로드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