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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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귀환자
박수진은 일행의 옆쪽에서 따로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 처음으로 정찰을 나가는 그녀에게 세현이 주문한 것이었다.
함께 싸우지 말고 홀로 좀비를 상대해볼 것.
그래서 그녀는 과거의 두려움을 무릎쓰고 일행과 거리를 벌렸다.
“캬아아아악!”
괴성을 지르며 달려오는 좀비는 끔찍했다. 팔다리를 기괴하게 휘두르며, 오직 산 자를 물어뜯기 위해 고개를 앞으로 쭉 내민 채 무작정 달려온다. 썩어 문드러진 얼굴과 기이하게 뒤틀린 손가락이 소름끼쳤다.
지척까지 접근한 좀비가 그녀를 노리고 손을 뻗는다.
저 손아귀에 붙잡혀 죽은 이가 대체 몇이던가, 악몽 속에서 저것은 절대 피할 수 없는 지옥의 손길이었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좀비의 손길은 너무나 느렸다.
이놈이 무언가 이상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저걸 설마 잡으려고 내뻗는 건가 의심이 갈 지경이다. 박수진이 두 걸음 움직였다.
단지 그것뿐인데 좀비가 멍청하게 그녀를 지나쳐 달려가다 고꾸라졌다.
어느새 뽑힌 박수진의 검끝엔 약간의 검붉은 핏물이 묻은 채였다.
“……”
“끼아아아아악!”
그녀가 상념에 젖을 틈은 없었다.
뒤따르던 여성 좀비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반사적으로 상가에서의 끔찍한 일이 떠올랐으나, 그녀의 몸은 충실하게 훈련했던 대로 움직였다.
두 걸음 움직이며 슬쩍 검을 내지른다. 좀비의 손은 허무하게 빗나갔고 그녀의 검은 어렵지 않게 약점을 찔렀다.
“……”
막연히 상상하던 것과 너무나 달랐다.
지하 훈련장에서 환상을 이용할 때는 환상이라서 약한 모양이라 생각했다. 자신의 기억속에 있는 좀비는 결코 이렇게 멍청하지도, 무력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기억이 틀렸던 모양이다.
그때의 자신이 너무 약하고 무력했기에, 그래서 실제보다 훨씬 더 무섭고 강한 모습으로 좀비를 기억하고 있던 듯하다.
멍청하게 선 그녀를 노리고 계속해서 그것들이 달려왔다. 정신을 차린 그녀가 몸을 피하며 검을 휘둘렀다. 그때마다 반드시 한 마리의 좀비가 바닥에 쓰러졌다.
그렇게 스무 마리가 넘는 좀비를 쓰러트렸을 때, 더 이상 그녀를 향해 달려드는 것은 없었다. 근방에 있던 놈들 전부를 그녀 혼자서 처리한 것이다.
갑작스레 전율이 일었다.
부르르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게 힘이구나.
이게 무술이구나.
그간의 훈련으로 획득한 빠른 몸놀림과 강한 힘 같은 건 쓰지도 않았다. 그저 예전의 박수진이 가졌을 법한, 딱 그 정도의 힘과 속도만 사용했다. 거기에 검 한 자루가 더해졌을 뿐이다.
그런데 결과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아직 제대로 배운 것도 아니었다. 스승인 세현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제 엉금엉금 기어다닐 수준이라고 했다.
“하아……”
차오르는 전율에 저절로 입이 벌어지며 달뜬 숨이 내뱉어진다.
무언가를 분출하고 싶다.
더, 더 많이, 더 빠르게, 더 강하게!
박수진이 땅을 박찼다. 일행과 멀어지는 방향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선 이전의 망설임 같은 건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르륵…!”
빛을 피해 건물 사이에 웅크려 있던 한 좀비가 달려드는 박수진을 뒤늦게 눈치채고 멍청히 고개를 든다. 놈이 곧바로 흉성을 보이며 괴성을 터뜨렸지만, 제대로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그녀의 칼날에 어깨를 꿰뚫었다.
“캬아아아!”
“끼아아아악!”
이미 죽어버린 좀비의 포효에 호응하듯 사방에서 괴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뒤이어 이곳저곳에서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놈들에게 박수진이 마주 달려나가며 검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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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르릉-
병사들이 도르레를 돌린다. 천천히 열리는 성문 사이로 정찰 임무를 맡았던 길드원들이 복귀했다.
다들 땀에 젖은 모습이었다. 누군가는 바닥을 굴렀는지 온통 흙투성이기도 했다. 하지만 두려움이나 초조함, 체념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보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요 근래 성 주변을 돌며 보이는 모든 좀비들을 청소했다. 오늘은 일주일 전보다 훨씬 먼 거리를 나가야만 했다. 이런 속도라면 몇 달 후에는 이 근방에서 좀비의 씨가 마를지도 모른다. 이미 지도상에선 성 주변 2km 반경으로는 괴물이 아예 없었다.
“수고했다.”
미리 마중 나와 기다리던 세현이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상태를 살폈다.
당연하게도 죽거나 다친 인원은 없었다.
“점심때까지 씻고 쉬어라. 그리고 공지할 게 있으니, 1시 30분에 다시 여기로 모이도록.”
“예!”
군기 잡힌 대답이 돌아온다. 세현은 고개를 끄덕인 후 연금술 연구실 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그가 멀어졌을 때, 한 여성 길드원이 조그맣게 드립을 쳤다.
“길드장님, 침대 위에선 어떨까?”
“……이년이 뜬금없이 뭐라는 거야? 미쳤어?”
누군가의 헛웃음과 함께 타박이 돌아온다.
하지만 그렇게 타박을 한 이도 잠시 후 주변의 여자들과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워낙 뜬금없고 어이없는 소리라 헛웃음을 흘렸는데, 그게 또 생각할수록 점점 웃긴 것이다.
남자 길드원들은 그저 못들은 척하며 성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쾅!
갑작스런 커다란 소음에 웃음소리가 뚝 끊어졌다. 앞서 가던 남자 길드원들도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상급자를 두고 농담하는 거 아니지. 그렇지?”
김유린이었다.
창대로 바닥을 찍어 단숨에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든 그녀는, 입은 웃지만 눈은 그렇지 않은 싸늘한 미소로 키득거리던 길드원들 하나하나와 눈을 맞췄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녀의 심기가 매우 불편하다는 것을 알아챈 이들이 급히 고개를 숙인다. 김유린은 흥, 하는 짧은 소리를 내고는 얼어붙은 그들을 지나쳐 성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김인환은 모든 상황을 지켜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 있는 여자들 중 대부분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착취당했던 적 있다. 그런데도 이런 농담을 꺼낼 수 있다는 건 그 상처가 상당히 치유되었음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없는데서는 나랏님도 욕한다는데, 이 정도 쯤이야.
그가 별 말 없이 성으로 들어가자 다른 이들이 한결 안심했다.
세현의 제자들 중 길드원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이가 바로 김인환이다. 일단 연륜도 있거니와 매사 신중한 모습에서 상급자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권태수 역시 길드원이 어렵게 느끼는 이 중 한 명이었다. 게다가 그는 이전에 중사 계급의 군인이었다. 이런 계급제 조직에서의 경험이 많고 적응력이 남달라 이미 자리를 확고하게 잡은 상태였다.
여성 길드원 중에선 신소진이 가장 인정받고 있었다. 운동을 했기 때문인지 다소 엄격한 분위기에도 잘 적응했고, 무엇보다 가진 바 무력이 상당했다. 무투가라는 직업과 권투선수였던 그녀의 실력이 더해지니 상승효과가 대단했다.
그녀는 각성하기 전부터 좀비 한 마리 정도는 떡이 될 정도로 두들겨 팰 수 있는 사람이었다. 각성을 하고 좀비의 약점을 파악한 후에는 훨씬 쉬웠다. 게다가 세현의 가르침까지 받은 지금은 좀비 정도는 한 손으로도 처리할 수 있었다.
잠깐의 소요가 가라앉고 길드원 모두가 성으로 들어갔다.
휴식이 주어졌으니 이걸 어찌 활용할지는 개인의 몫이다.
그렇게 잠시 후.
세현이 말했던 시간이 되자 모든 전투원들이 성벽 안 공터에 모였다. 이제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오와 열을 맞춰 정렬하는 게 당연해졌다.
일 분 정도 지나 등장한 세현이 그들의 앞에 섰다. 그리고 간단하게 인원체크를 한 후 입을 열었다.
“길드 체제를 개편할 거다. 독립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전투단을 세 개 만들 건데, 따라서 지금의 계급에 변동이 있을 거다. 김인환, 권태수, 신소진, 앞으로 나와라.”
지목된 세 명이 앞으로 나섰다.
“이 세 명이 각 전투단의 단장이다. 당분간 편의상 1전단, 2전단, 3전단으로 부를 거고, 지금부터 호명하는 사람은 김인환의 1전단에 속할 사람들이니 그 뒤에 줄 서도록.”
이후 세현은 태블릿을 손에 들고 한 명 한 명씩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총 31명이었다.
비슷한 방식으로 권태수와 신소진의 전투단 인원들도 각각 30명씩 배정했다.
근접 전투원과 원거리 전투원, 치유계 등의 보조 전투원을 직업까지 고려해서 고르게 뿌렸다. 결과적으로 나눠진 각 전투단의 구성과 전력은 거진 비슷했다.
“각 전단(戰團)의 전단장 아래로는 부관, 1급 전투원, 2급 전투원, 3급 전투원 순으로 계급을 나눌 거다. 그리고 그 계급을 정하는 전권을 전단장에게 줄 생각이다. 내게는 결정해서 보고만 해라. 그대로 처리해줄 테니까.”
길드원의 계급을 조정하는 권한은 세현과 혜진에게만 있다. 하급자는 상급자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할 수 없는 시스템적 제한이 있을 정도로 중요한 권한이었다. 조금 번거로워도 직접 처리하는 게 마땅하다.
“오늘부터 내일까지 다른 활동 없이 각 전단을 추스르는 일에 주력해라. 혹시나 전단 소속을 바꾸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다른 전단의 비슷한 클래스를 가진 사람과 서로 합의해서 각자의 전단장에게 보고하도록. 단장들은 그거 정리해서 나한테 가져오고.”
갑작스러운 개편이었지만, 다른 이들도 슬슬 개편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세 개의 독립적인 전투단을 만들어 운용한다는 건 모두에게 꽤 괜찮게 느껴졌다. 적어도 지금처럼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보단 더 효율적일 것이다.
“이후에는 다른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소속을 바꿔주지 않을 테니 유의하고, 혹시 궁금한 점이나 다른 건의사항 같은 게 있으면 손 들어봐.”
기다렸다는 듯 김유린이 번쩍 손들었다. 박수진도 늦게나마 손을 들었다. 그녀 둘은 어느 전단에도 속하지 못하고 외톨이처럼 뒤쪽에 떨어져 있었다.
“사부님, 저는요?”
김유린이었다. 세현이 그녀와 박수진을 보며 말했다.
“너희 둘도 전단장이다.”
“네? 그런데 저희한텐 아무도 없는데요?”
“일단은 단독으로 놔둘 거다. 당분간 집중적으로 가르칠 생각이라서.”
“허걱.”
김유린이 놀랐다. 그러면서 집중적으로 가르친다는 말에 싱글벙글하는 기색이다.
박수진은 좀처럼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이었지만, 어쨌든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그녀는 세현의 제자임에도 불구하고 여태껏 김인환이나 김유린 같은 이들보다 계급이 낮았다. 이번에 파격적으로 승진한 셈이다.
“그럼 지금부터 내부정리 시작해. 일단 소속을 바꾸고 싶은 사람부터 추려내는 게 좋을 거다.”
분명히 그러고 싶어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친한 사람과 떨어져서일 수도 있고, 아니면 불편한 사람과 같은 전단이 되어서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이런 요구사항들을 한차례 모아 처리해주는 편이 조직 전체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었다.
전단장이 된 김인환과 권태수, 신소진이 각자의 인원들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슬슬 소란스러워지는 모습이 예상대로 빨리 끝나진 않을 듯하다.
세현은 김유린과 박수진에게 고개를 돌렸다.
“너희 둘은 음…… 오늘은 그냥 쉬어라.”
“예?”
“내가 갔다 올 곳이 좀 있어서.”
“그럼 같이 가요!”
김유린이었다. 잠깐 고민하던 세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면서 실전이라도 경험시키는 게 낫겠다. 박수진 너도 같이 가자.”
“예, 사부님.”
“이제 언니라고 부르면 되겠네요?”
김유린이 슬쩍 박수진의 옆구리를 찌른다. 박수진은 그저 설핏 웃었다. 기존엔 김유린이 그녀보다 계급이 높았다.
“바로 출발할 생각인데, 혹시 챙길 거 있으면 지금 가져와라. 화장실도 미리 들르고.”
“예, 잠시만요!”
“저도 그럼 갔다 오겠습니다.”
둘이 함께 성으로 들어갔다. 그를 잠깐 지켜보던 세현은 지도창을 불러내어 목적지까지의 거리와 시간을 가늠했다.
북쪽의 생존자 무리에 들를 생각이었다. 이미 무전으로 연락도 했다.
사격수 직업을 위한 K-3와 같은 좀 더 강한 개인화기가 목적이었다. 룬이나 숲에서 얻은 아이템으로 거래를 한다면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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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암.”
정문 경계를 서던 한 병사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그에 전염된 옆의 부사수도 같이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한다. 어쩌다 힐끗 그것을 본 사수가 질책했다.
“야 이 새끼야, 입에 파리 들어간다.”
“……파리라도 좀 보였으면 좋겠다. 어떻게 세상이 이 지랄 나도 정문근무는 지겹냐.”
어쩌다 보니 같은 계급인 병장끼리 근무를 서게 됐다. 그래서 군기가 아주 개판이었다.
물론 겉보기만 그랬다. 그들의 눈은 전방과 좌우를 살피는데 조금도 소홀하지 않았다. 이런 세상에서 지금껏 살아남은 이들이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경계의 중요성을 모를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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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한 편입니다…… 좀 많이 바빴습니다. ㅠㅠ
재밌게 읽으셨길 바라며, 추천 꾹 부탁드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