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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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
“나보다 강한 존재가 나를 폭행하는 것, 억지로 내 존엄을 짓밟으려는 것, 그 모든 치욕과 분노를 압도해서 짓뭉개는 고통, 반항하면 더 심하게 맞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당해보지 않으면 모르지. 난 누나가 평생 그걸 몰랐으면 해.”
그는 말을 마치고 잠깐 눈을 감았다.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생생하다. 산을 넘기 위해 동행했던 한 낭인이 갑자기 돌변해서 그를 덮쳤다. 놈은 남색가였다. 그래서 현대에서 편하게 살아온 세현에게 꽤 동했던 모양이다.
세현은 당연하게도 저항을 시도했다.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죽을 각오로 저항하려 했다. 그리고 몇 번의 주먹질에 얻어맞은 후 고통에 몸부림치며 겁에 질려 땅을 기었다.
불과 몇 초 전의 비장한 각오를 모조리 휘발시킨 채.
아마 지나가던 어느 협객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는 놈에게 강간당한 후 살해당했을 거다. 다시 떠올려도 손이 미약하게 떨릴 정도로 수치스러운 기억이었다. 평생 잊을 수 없으리라.
단언컨대 그건 이계에서의 가장 비참한 기억 중 하나였다.
세현은 이내 눈을 뜨고 하얗게 질린 누이를 쳐다봤다. 그녀에게 그런 경험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가 먼저 최대한 조심하겠지만, 그녀 스스로도 조심하는 것이 중요하다. 때로는 챙겨줄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남궁설도 그래. 그렇게 당당하고 총기 넘치던 여자가 폭력 앞에서 한없이 무력해졌지. 벼랑 끝까지 몰리면서 저항 한 번을 못했어. 그게 얼마나 끔찍할지 상상이 가?”
“……”
“비슷한 일 겪지 않도록 조심해. 이 세상에 우리 말고는 아무도 완전히 믿으면 안 돼. 당연하지만 같은 여자라도 마찬가지야. 오히려 여자기 때문에 더 위험할 수도 있어.”
세현이 잠시 후 재차 입을 열었다. 그가 하려는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누나는 강해져야 돼. 모욕, 폭행, 약탈, 강간, 살인 같은 건 결국 강자가 약자에게 하는 짓들이야. 세상이 멀쩡하다면 법이 지켜주겠지만, 이제는 아니지. 멀쩡했던 세상에서도 때로는 불합리를 참아야할 때가 있었는데, 이렇게 된 상황에서야.”
두 사람 사이에서 싸움이 벌어졌을 때를 가정해보자. 여기에 더 쉬운 이해를 위해 한쪽은 여자 한쪽은 남자라고 가정하자. 보통 여자는 남자보다 신체적 힘이 약하니까.
그 싸움은 팽팽하게 흘러가기 어렵다.
여자는 설혹 논리로 상대를 박살낼 수 있어도 선뜻 그러지 못한다. 화가 난 남자가 자신에게 손찌검이라도 한다면 대응하기 힘드니까. 꼭 손찌검까지 가지 않더라도, 남자가 화를 내는 것 자체에 위협을 느껴 알게 모르게 주눅들 수도 있다.
물론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르다.
공개적인 장소이고 상대 남자가 상식적일수록 여자는 겁내지 않는다. 세상엔 도덕과 법이라는 게 있고 그것들이 여자를 보호하니까. 반면, 장소가 인적 없고 상대 남자가 물불 안 가리는 무뢰한일수록 여자는 위축된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논리도, 신념도, 가치도, 그것을 관철할 수 있는 힘이 없다면 모두 부질없다.
“무질서 속에서는 힘이 전부야.”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결국 힘이다.
“알겠어.”
혜진의 표정이 처음보다 더 딱딱해졌다.
원인은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 보기에 세상은 격변했다. 앞으로 많은 것이 바뀔 것이고 무엇이 어떻게 바뀔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금 그들의 앞에는 불확실한 미래만이 있었다.
그 속에서 살아가긴 쉽지 않을 것이다. 세현이 하는 말 중 틀린 게 없었다. 끔찍한 꼴을 당하지 않으려면 뭐든지 조심하고 강해야져야만 했다. 딱히 세현이 예를 든 강간 같은 게 아니어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혜진이 각오를 다지는 사이, 세현은 한결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잠깐 쉬자. 그리고 에레도스 시스템이라는 것부터 다시 살펴보자.”
“근데 말이야.”
혜진이 잠깐 머뭇거렸다.
“그 남궁민중이라는 놈은 어떻게 됐어?”
“아.”
세현은 피식 웃었다.
“죽었지.”
세현은 아직도 그 감각을 기억했다.
참으로 오랜 기간 벼렸던 복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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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정했어?”
“아직……”
말을 흐린 세현은 자신의 눈앞에 떠있는 창을 다시금 살폈다.
이 정체불명의 에레도스 시스템을 신용할 수 있는지, 직업이란 것을 선택해도 과연 정말로 안전한지 아무것도 검증되지 않았다. 그래서 먼저 실험해볼 생각이었다.
스스로가 무인이기에 전사에 가장 눈이 갔으나, 의도적으로 다른 직업들부터 살폈다. 일종의 계산적인 행동이었다.
이미 무인으로서 최정상의 자리에 올라섰다 자부하는 그에게 전사 계열 직업을 선택해서 얻을 수 있는 능력이 얼마나 효율이 있을까?
오히려 마법사와 같은 직업을 선택할 수 있다면 생각지도 못한 시너지 효과를 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각 직업에는 패시브 스킬이란 것이 있었다. 전사의 경우 검과 같은 무기를 사용하는 행동에 큰 도움이 되는 스킬이 생길 것이 뻔한 바, 안 그래도 검으로 천하를 호령했던 세현에게 그런 스킬까지 더해진다면 그야말로 호랑이 등에 날개를 단 격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고 느끼는 그의 경지를 끌어올릴 실마리가 되어줄 수도 있다.
강력한 검술을 다방면으로 보조해줄 수 있는 새로운 능력을 얻을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가진 검술을 보다 강하게 하는 한 우물을 팔 것인가?
쉽사리 선택할 수 없는 문제다. 허나 의외로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힘, 경험, 깨달음을 믿었다. 그에 대한 믿음은 누가 뭐라해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확고부동하다.
만류귀종(萬流歸宗), 모든 것은 결국 끝에서 하나가 된다. 만약 그가 검으로 궁극에 이르른다면 마법을 배우지 않아도 그와 비슷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세현이 이곳으로 돌아와서 이계를 추억하기 위해 각종 무협지들을 읽으며 가장 황당했던 설정이 있다.
바로 만류귀종에 대한 것인데, 주인공이 마법과 무공을 함께 익히며 만류귀종이니 뭐니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경지를 돌파하는 장면이 있었다.
그는 그 장면에서 한참을 배를 잡고 웃었다.
만류귀종은 결코 그런 뜻이 아니다.
마법과 검을 하나의 산을 오르는 길이라고 생각해보자. 마법의 길로 산을 오르든 검의 길로 산을 오르든, 결국 정상에 서는 것은 같다. 그게 바로 만류귀종이다. 결코 마법과 검의 길을 동시에 오른다고 더 빨리 오를 수 있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더 느리다. 검의 길과 마법의 길, 둘 중 하나의 길만 걸어도 정상까지 가기가 힘들거늘 하나의 산을 제각각 다른 두 방향에서 오르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겠는가?
“정했어.”
세현은 잠시나마 이종의 힘에 혹했던 자신을 나무라며 다른 모든 직업들을 과감히 배제했다.
그는 무인이면서 동시에 검사다. 뭘 모르는 혹자들의 말처럼 검(劍)이 만병지왕(萬兵之王)이라서가 아니라, 그저 처음 잡은 무기가 검이었기에 편하고 익숙해서일 뿐이었다.
[전사 : 전사는 강인함과 민첩성을 바탕으로 다양한 병기를 사용하는 근접 전투 직업이다. 경갑옷부터 중갑옷까지 모든 종류의 보호구를 착용할 수 있으며 방패나 총, 활, 석궁 등을 보조무기로 사용할 수 있다.]전사 직업의 설명을 읽어보던 그는 직업 아이콘의 오른쪽에 자리한 큼지막한 화살표를 눌렀다. 전사 직업에서 갈라져 특화되는 직업들을 보여주는 버튼이었다.
[검투사 : 검투사는 검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무기를 사용하며, 중갑옷 이상의 방어구를 입을 수 없지만 경갑옷의 활용에 익숙하여 성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다. 방어와 공격 모두 뛰어나지만 대규모 전장보다는 소규모 접전에서 더 뛰어나다.] [기사 : 기사는 중갑옷과 방패를 사용하며 공격보단 방어에 강한 면모를 보인다. 지략적인 측면에 결코 소홀하지 않아 부하를 통솔하는 것에 능숙하여 관련된 이득을 얻는다.] [광전사 : 광전사는 분노를 억누르지 않고 오히려 부추겨 전투에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주로 파괴력 높은 중병기를 사용한다. 상처를 입을수록 강해지며 공포에 둔감하다. 이들의 전투는 매우 거칠어 때로는 주변의 적들을 공포에 질리게 만든다. 방어보단 공격이 더 적성에 맞다.] [검귀 : 검에 살고 검에 죽는다. 검귀는 몸통을 보호하는 어떤 종류의 갑옷도 착용할 수 없지만, 공격적인 면에서 그에 상응하는 큰 이득을 얻는다. 항상 마음을 칼처럼 가다듬어 정신적 공격에 대한 저항력이 특히 뛰어나다.] [마검사 : 마검사는 마법을 사용하는 검사로, 중갑옷 이상의 방어구를 입을 수 없다. 그들의 마법은 보통의 마법사와는 아주 다르며 매우 치밀하다. 철저하게 설계한 상황에서 극한의 활약을 펼쳐보일 수 있다.]전사에서 뻗어나가는 특화 직업들은 모두 다섯 개, 그 다섯 직업들의 설명을 하나하나 읽어본 세현은 주저없이 검귀를 선택할 수 있었다.
무림의 고수인 그는 살아생전 갑옷 같은 거추장스러운 물건을 걸쳐본 적 없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생각이었다.
검귀라는 직업은 어차피 입지도 않을 방어구를 포기함으로써 검의 사용에 큰 혜택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거기에 정신적 공격에 대한 저항력이 높다고 하니, 그 효능을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어도 좋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 검귀 직업을 선택하시겠습니까? 한 번 선택한 직업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변경할 수 없습니다. –
마지막으로 확인창이 뜬다. 세현은 망설이지 않고 결정을 내렸다. 두 번 세 번 고심해도 그의 결정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 검귀로 전직하였습니다. –
– 직업 스킬 ‘칼날곡예’를 배웠습니다. –
– 새로운 스킬을 배울 수 있습니다. 스킬창에서 확인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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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재밌게 읽으셨길 바랍니다. 추천 한 방 꾹! 부탁드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