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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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
눈앞에 뜨는 몇 가지 메시지와 함께 그의 몸에 은은한 빛이 서렸다. 가만히 지켜보던 혜진이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벌써 정했어?”
“응.”
“너무 섣불리 결정한 거 아니야?”
“딱 어울리는 걸 찾았어. 망설일 이유가 없을 정도로.”
그는 혜진에게 잠시 기다리라 말하며 스킬창을 열었다. 거기엔 습득한 직업 스킬과 새로 하나 고를 수 있는 다섯 선택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칼날곡예(passive) : 검을 통한 공격력과 방어력이 대폭 증가한다. 정신계 공격에 대한 저항력이 크게 상승한다. 경갑옷 이상의 몸통 방어구를 착용할 수 없다.]“대폭?”
그렇게 중얼거린 세현이 청월을 빼들었다. 그리고 거실 중앙으로 이동해 시험삼아 가볍게 휘둘렀다.
공기를 베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린다. 그렇게 몇 번 검을 휘둘러보던 그의 표정이 설핏 굳었다.
검 자체에 알 수 없는 힘이 담긴 느낌이다. 그런데 그게 뭔지 정신을 집중하려 하면 아지랑이처럼 사라져버린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사라지는 게 아니라 그의 이목으로 감지할 수 없게 변하는 것 같았다.
몇 번이나 더 검을 휘둘러보단 그가 별안간 테라스로 자리를 옮겼다.
“어디 가?”
“잠깐만.”
시원하게 창문을 열어젖힌 후, 멀리 떨어진 아파트 단지 내의 인조 대리석을 겨냥하고 검을 내밀었다. 동시에 빛이 번쩍인다. 잔상만 간신히 남을 속도로 쏘아진 검기가 목표물을 꿰뚫기까진 찰나였다.
미약한 빛이었으나, 세현의 눈에는 자신이 노렸던 정원석에 구멍이 뚫린 것이 확연히 보였다. 심지어 그 깊이마저도. 그가 입매를 뒤틀어 올렸다.
알 수 없었다.
몇 번 더 해봐도 마찬가지였다. 허공을 벨 때도, 검기를 날릴 때도 그것이 느껴졌다. 대략적으로 원래보다 세 배 정도 강한 힘이 집약되는 게 느껴진다. 스킬의 설명에 따르면 아마 검으로 방어를 할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무력적인 면에서만 보자면 분명 좋은 일이다. 하지만 세현은 마냥 좋아할 수 없었다.
분명 자신의 검에 담긴 힘인데 그게 뭔지, 심지어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도 파악할 수 없었다. 검으로 극에 가깝게 올라섰다고 자부하는 그 자존심에 상처가 났다.
무림에서 최정상에 올라섰던 그조차 파악할 수 없는 힘이, 그것도 바로 자신이 든 검 속에 들어 작용하는데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니?
이런 식이라면 그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 에레도스라는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한다. 혹 이 시스템을 만든 것은 신인가?
잠깐 동안 깊은 고뇌에 빠져들었던 세현은 뒤에서 혜진이 자신을 연달아 부르는 소리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한세현!”
“어, 어? 왜?”
“왜 그래? 뭐 잘못된 거 아니지?”
이상행동을 보이는 동생 때문에 불안해하는 누이, 세현은 그만 웃어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냥…… 이 시스템의 근원이 뭘까 고민하느라고. 문제가 있는 건 아냐.”
그리고 잠깐 침묵하다 말했다.
“누나도 직업 선택해봐.”
이 에레도스라는 시스템을 믿으면, 이것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면 어쩌면 미래에 화가 될지도 모른다. 그럴 가능성은 분명히 있다.
하지만 애초부터 이 시스템이 악의를 품었다면 이런 식으로 사람을 농락할 이유가 없었다. 세현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힘을 직업이란 걸 선택하기 무섭게 즉시 부여해주는 힘이다. 아니, 이걸 힘이라고 불러야 할까?
어쨌든 그 세현조차도 어쩌긴 커녕 감도 잡지 못하는 초월적인 무언가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한 무의미하다.
그리고 아이러니하지만, 그가 갈고 닦아온 무인으로서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종사로서의 직감이 이것을 기회라 부르짖고 있었다.
절대적인 무엇이든 혹은 신의 힘이든, 이것은 사람에게 직접 영향을 주지 않고 철저히 도구로서 작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용한다. 세현은 자신의 직감과 판단을 믿기로 했다. 평생을 믿어온 것이다. 이제와서 새삼스레 의심하며 스스로를 불신한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섣불리 결정하지 말고, 나랑 상의를 좀 해보자. 알았지?”
“지는 마음대로 골랐으면서……”
혜진이 투덜거렸다. 그녀는 한참이나 허공에 손을 이리저리 휘적이고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말했다.
“정령사? 이건 어때?”
“다른 건?”
혜진이 직업을 고르는 사이 세현도 나름대로 고민에 빠졌다. 그는 혜진에게 무공을 가르쳐줄 생각이다. 그렇다면 혜진 역시 검귀를 고르는 게 좋지 않을까?
무공이란 건 익히는데 시간이 매우 오래 걸린다. 당장 무림의 저잣거리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삼류무공들도 제대로 익히려면 10년은 걸린다. 수박 겉핥기 식으로 형(形)만을 익혀서는 무공이 아닌 기술에 불과하게 된다.
하지만 이 직업이라는 시스템을 이용한다면?
그 기술 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내공이나 오의 같은 건 천천히 알아가도 된다. 일단 시스템에 의해 무기를 다루는 행동에 보정을 받을 수 있다면, 무공의 형태만 익혀도 제대로 익힌 것만큼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흠……”
그런 세현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혜진은 모든 직업들을 살펴보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음에 드는 거 있어.”
“뭔데?”
“정령사.”
“……다른 건? 전사라든가.”
“잠깐만, 전사?”
혜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허공에 손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런 거 없는데?”
“뭐?”
“전사라는 직업은 없어.”
“전사가 없다고?”
그럴 리가.
“잘 살펴봐.”
“……아무리 봐도 없는데?”
혜진은 세현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처음부터 끝까지 신중하게 직업을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도 그녀는 동생이 말하는 직업을 찾을 수 없었다.
“정말로 없어.”
세현의 조언에 따라 세부직업까지 샅샅이 훑기도 하고, 창을 닫았다가 다시 열어도 전사라는 직업은 없었다.
“그럼 지금 누나 직업창에 있는 것들, 하나하나 말해줘. 일단 특화돼서 세분화되는 직업은 제외하고.”
“알겠어.”
혜진은 차분하게 처음부터 읽어내기 시작했다.
그것을 모두 들어지만 정말 전사라는 직업이 없었다.
세현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솔직히 말해, 그녀는 무공에 재능이 없다.
물론 세상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으니 속단은 금물이겠지만, 어쨌든 그가 보기에 혜진의 신체조건과 성격은 무공에 적합치 않았다. 절세신공을 익혀도 성취가 더딜 것이고 같은 경지의 무인과 붙는다면 힘과 속도에서부터 지고 들어갈 것이다.
혹시 이 시스템은, 개개인의 자질이나 성정까지 파악할 수 있는 걸까? 그래서 각 사용자에게 가장 적합한 직업들만 골라 띄워주는 게 아닐까?
“음……”
절로 고민에 찬 침음이 나온다.
혜진이 불러준 직업들 대부분은 몸을 쓰지 않는, 설혹 몸을 쓰더라도 멀리서 적을 요격하는 형태의 것들이었다. 게다가 아예 전투와는 거리가 먼 직업들도 있다. 연금술사라든가, 마법공학자 같은 것들.
그는 자신이 추측한 것을 숨기지 않고 혜진에게 설명했다.
“일단은 추측일 뿐이야. 어쨌든 전사 직업이 없다면, 뭘 고르지?”
“어, 글쎄……”
“그 신성술사라는 직업은 어땠더라?”
“다시 읽어줄까?”
혜진이 직업의 설명을 소리내어 읽었다.
“신성술사, 자신의 마법력을 매개체로 천계의 힘을 이끌어내 사용한다. 어느 정도 전투가 가능하며, 상처를 치유하거나 대상을 보조 및 보호하고 질병과 해로운 마법, 저주 등을 파훼하는데 능하다. 직접적인 전투보다는 지원가로서 뛰어난 면모를 보인다. 온라인 게임의 사제 같은 거겠지?”
“설명만 보면 그러네. 누나 생각은 어때?”
혜진이 잠깐 고민하다 말했다.
“나쁘지 않을 듯한데? 힐러는 게임에서도 그렇지만 현실에선 더 중요한 직업이 될 수 있을 테니까.”
맞는 말이다. 전투력은 딸릴지 몰라도 효용성 면에서 따져보면 혜진이 처음 마음에 들어했던 정령사보다 훨씬 위일 것이다.
“신성술사에서 특화되는 직업은 있어?”
“읽어줄게.”
혜진이 다시 허공에 손을 움직였다.
[광휘술사 : 광휘술사는 신성술 중 치료와 보조, 보호 쪽으로 특화된 이들이다. 공격적인 능력이 거의 없어 전투시 혼자서는 굉장히 무력하지만, 도와줄 아군이 있다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심판자 : 심판자는 신성술 중 공격 쪽으로 특화된 이들이다. 근접전에 취약한 면모를 보이나 안전이 확보된다면 매우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좁은 지역 또는 특정한 대상을 공격하는 것에 뛰어나다.] [신성 소환사 : 신성 소환사는 천계의 존재들을 계약을 통해 소환하여 다룬다. 통제에 실패할 경우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하는 다른 소환계열과 달리 위험부담이 매우 적으나, 계약의 난이도가 높고 친밀감 형성에 어려움을 겪는다. 계약한 소환수의 종류와 수만큼 다양한 상황에서 유연한 대처가 가능하다.]“이게 끝이야.”
전사와 달리 세 종류 뿐인 듯하다.
“만약 거기서 고른다면 뭐가 좋겠어?”
“글쎄…… 그냥 신성술사?”
“광휘술사는?”
“공격능력이 거의 없다잖아.”
“그만큼의 이득이 있을 거야.”
당장 그가 선택한 검귀 직업만 해도 그렇다.
갑옷을 착용할 수 없는 대신 공격력 측면에서 보정된다. 광휘술사의 경우도 그러지 말란 법 없었다. 세현이 대략 느낀 것처럼 세 배가 아니라 두 배만 되어도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가 혜진을 계속해서 지켜줄 생각인 이상, 차라리 확실한 보조계열 쪽으로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라면 전사 직업을 선택하게 해주고 스스로 몸을 지킬 힘을 마련해주고 싶었지만, 애매하게 그게 불가능해졌으니 아예 확실하게 보조 쪽으로 가고, 그가 훨씬 더 주의해서 붙어다니면 될 듯했다.
혜진도 약간 고민하는 눈치였다. 세현은 이미 초인적인 힘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그런 동생을 보조하는 쪽으로 가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지 않을까. 그녀가 전투직업을 골라봤자 활약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어떻게 하지?”
“일단, 다른 직업 중에서는 끌리는 거 없어?”
“응…… 신성술사보다 좋아보이는 건 없는데. 처음엔 정령사가 끌렸는데, 다시 보니 그리 안 끌리네.”
함께 고민하던 세현이 말했다.
“직업은 잠깐만 있다가 선택하자. 그 전에 해볼 게 있어.”
“해볼 거?”
“벌모세수라고, 혹시 알아?”
“그게 뭔데?”
세현이 웃으며 대답했다.
“일종의 체질 개선 요법이랄까, 아주 좋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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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재밌게 읽으셨길 바랍니다. 추천 꾹! 부탁드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