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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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밤
쌀쌀함이 가시고 한차례 더위가 찾아왔다. 그리고 다시 선선해지며 가을이 왔다.
위대한 자연의 섭리는 그 아래 인간들의 삶이 어떻게 변했든 전혀 개의치 않고 흘렀다.
제대로 차려입지 않으면 꽤 서늘하다고 느낄 어느 밤, 세현은 성벽 위에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전과 비교하면 아주 깨끗해진 하늘이다. 마치 우주를 그대로 내다보는 듯했다. 아마도 세계의 모든 문명이 반년간 멈췄기 때문이 아닐까.
인간에게 에레도스 시스템이란 무슨 의미인가?
그리고 이 행성 지구에게 에레도스 시스템이란 무슨 의미인가.
그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어쩌면 에레도스는 가치 없는 생명체를 치워버리고 한계에 봉착한 행성을 살리는, 그런 우주적 생태계 법칙일지도 모른다.
요컨대 태풍이나 지진 같은 자연재해의 일종이란 뜻이다. 시스템의 특성을 고려하면 조금 어색한 가정이지만, 그렇다고 영 엉터리도 아니었다. 이것이라면 다른 세상들에서도 에레도스가 나타나는 게 대충 설명이 되니까.
우주적 관점에서 볼 때, 그 행성에 살고 있는 생명체들의 재난은 정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무림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아름다운 밤하늘이다. 그것을 실컷 감상하던 세현이 시선을 내려 성벽 아래를 살폈다.
그곳엔 여기저기 불이 들어온 인간의 마을이 펼쳐져 있었다. 불과 몇 달 전 멸망해가던 모습은 이제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서울에서 온 기술자들의 도움을 받아 발전소와 수도시설을 정상화한지 꽤 됐다.
여름이 오기 전에 수도시설을 먼저 정상화했고, 한 달 전에는 발전소까지 정상화했다. 현재 그 시설들은 류한의 산하 조직들이 전담해서 방어하고 관리하는 중이다.
당연하지만 전기와 물이 통하기 시작한 도시는 이제 한층 더 살기 편해졌다.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그럭저럭 살만한 수준이 된 것이다.
영지가 발전한 만큼 류한 길드성도 발전했다. 영지민이 늘어나며 세금으로 걷어지는 길드 포인트도 많아졌다. 그것을 아낌없이 사용했다.
성벽 안쪽은 땅을 억지로 늘려놓은 것처럼 꽤 넓어졌다. 성 내부는 그보다 수십 배 더 넓어졌다. 1층의 홀은 백 명이 한 번에 연회를 벌여도 자리가 남을 정도였다.
2층은 더하다. 이제는 500명에 이르는 길드원 모두가 2인실 숙소를 사용했다. 화장실 겸 샤워실이 따로 달렸음은 물론이다.
3층에는 더 넓어진 상황실과 간부들이 사용할만한 1인실 숙소가 여럿 생겼다. 원래 있던 세현과 혜진의 거처는 새로 생긴 4층으로 옮겨졌다.
지하의 변화도 빼놓을 수 없다. 감옥은 새로 나타난 지하 2층으로 옮겨졌고, 이제 1층은 온전히 훈련장으로만 사용됐다.
환상은 한층 더 정교해졌고 임의로 난이도를 조절할 수도 있었다. 또한 일정 간격으로 구역이 나눠져 서로의 수련에 방해가 될 일도 없어졌다. 범위형 스킬을 실험할 수 있는 공간도 새로 생겼다. 모든 장소가 딱히 부족함 없이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그 외 부가적인 변화를 말해보자면, 1층에 있던 무전기를 3층의 상황실로 옮겼다. 산하 조직이 늘어나며 관리하는 무전기의 수도 같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만큼 근무자의 수도 늘어 이제는 여섯 명의 길드원들이 교대로 근무를 서야만 했다.
하지만 대신 성벽의 근무가 사라졌다. 병영을 몇 단계나 업그레이드하며 병사들이 몰라보게 달라진 덕이다.
가장 큰 변화는 대화가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자율성이 부족하고 그리 똑똑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정문 근무자의 임무를 충분히 대신할 수 있을 정도였다.
수도 300이나 된다. 무장은 단순한 가죽갑옷에서 검은색 철판을 덧댄 것으로 변했고, 미늘창의 형태와 질 역시 달라졌다. 왼쪽 팔에는 조그마한 원형 방패가 달려 방어력이 상승했다.
무엇보다, 붉은색이던 눈동자가 주황색으로 변했다. 그것들 전부가 성을 지키기엔 남는 전력이다. 그래서 150기 정도는 24시간 영토를 돌며 치안을 관리했다.
식당의 자판기에서는 드디어 빵 말고 다른 것이 나오기 시작했다. 땅콩보다 좀 더 고소한 맛이 나는 견과류였는데, 맛은 둘째 치고 영양학적 측면에서 상당한 희소식이었다.
이것들은 의외로 맛이 좋아 길드원들의 간식 역할도 톡톡히 해냈다. 어쩌면 먼 훗날에는 식당의 자판기만으로도 기본적인 식사가 가능해질지 모른다.
생산직들이 사용하던 건물도 몇 번이나 변화를 거듭했다. 외형부터가 깔끔한 하얀색 석재로 된 건물로 변했고, 내부의 시설들도 한층 좋아져 작업 효율이 증가했다.
그렇게 시설들의 편의성과 성능이 좋아진 만큼, 길드원들의 실력도 올랐다.
이제 간부들은 혼자서 노란색 괴물을 무리없이 처리할 수 있었다. 초록색 등급도 넷 이상이 협공하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특히 김유린과 박수진의 성장이 눈부셨다. 세현의 집중적인 가르침을 받은 그녀들은 다른 간부들과 이대일로 싸워도 밀리지 않을 정도였다.
일반 전투원의 실력도 상향 평준화가 되었다. 뛰어난 이는 혼자서 주황색 괴물을 상대할 수 있었고, 가장 떨어지는 이도 어찌어찌 시간을 끌며 도움을 기다릴 정도는 되었다. 또한 전단 전체의 작전 수행 능력이 늘어 뭉치면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전투원들의 성장만큼 생산직들의 실력도 많이 늘었다. 이제 그들이 만들어내는 물건은 최소가 뛰어남 등급이다. 산하 조직들에게 보급되는 물건들의 질이 날이 갈수록 좋아지는 중이다.
모든 보급을 끝내고도 꾸준하게 만들어지는 검과 방어구, 장신구, 포션 등은 ‘창고’ 시설에 차곡차곡 쌓아놓는 중이었다. 조만간 성벽 밖에 ‘상점’을 만들어 영지민들에게 판매할 계획이었다.
이제 영지민의 수는 근 2만에 가깝다. 이들도 나름대로 사냥이나 생산을 통해 각종 장비를 수급하긴 하지만, 그래도 류한 길드에서 만들어내는 것과 비교할 수는 없다. 그들에게 상점을 통해 물건을 제공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영지민의 전력은 곧 류한의 전력, 물건을 판매함으로써 얻어지는 이문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동맹 관계인 델비아 길드의 성장도 순조로웠다. 과도기를 거쳐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한 그들은 강원도 전체에 영향력을 뻗고 있었다. 길드성 근처로는 류한과 같이 마을이 만들어지고 있기도 했다.
당연하지만 두 길드 사이의 관계는 매우 좋다. 여담으로, 이에는 벡스들이 많은 기여를 했다. 그녀들은 그저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서로의 관계를 좋게 만드는데 일조했다.
그렇게 세현이 도시를 바라보며 상념을 정리하는 도중이었다.
“어라? 길드장님도 계셨군요.”
문득, 뒤에서 정현욱의 목소리가 들린다. 일찌감치 기척을 감지하고 있던 세현은 가볍게 고개만 끄덕여 화답했다.
정현욱은 세현이 서 있는 근처로 다가와 성벽 가장자리에 털석 걸터앉았다. 그리고 질문을 던졌다.
“기분이 어떠십니까?”
힐끗 시선을 주자, 그는 성을 둘러싼 마을을 살펴보고 있었다.
“직접 만드신 세력이 아닙니까. 무림에서 길드장님이 누리셨던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세계적인 수준일 겁니다.”
“속단은 금물이다. 세상은 넓고 기인이사는 많으니까. 어쩌면 우리처럼 무림에서 온 녀석이 있을지도 모르고.”
“그건 아닐 겁니다. 저번에 말씀드렸다시피 여기 건너오기 전까지 제법 열심히 찾았거든요. 같은 지구에서 온 사람이 있을까 하고요. 그 미국인 친구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습니다.”
중국계 미국인 상인, 그곳에서의 삶에 만족하며 이곳으로 귀환하지 않겠다고 했던 자를 말함이다.
알고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그는 결과적으로 현명한 선택을 했다. 현재 지구는 결코 살기 좋은 세상이 아니었으니까.
잠시의 침묵 후, 정현욱이 다시 질문했다.
“이곳에서도 왕이 되실 겁니까?”
“그래.”
“어디까지 뻗어나가실 겁니까?”
“내가 갈 수 있는 곳까지.”
“……그러다가 세계정복이라도 하시는 거 아닙니까?”
세현이 피식 웃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
“그럼 저는 세계 최고 집단의 전문 보육사가 되겠군요.”
“불만족스럽나?”
“아니요.”
은근하게 던진 질문에 정현욱은 곧장 부정했다.
“저는 지금 이대로도 만족합니다. 정말로요. 새로운 가족이 생겼으니 걔네가 잘 자라는 것만 봐도 충분합니다. 여기에 원래 가족도 함께였으면 좋았겠지만…… 다들 착했으니 분명 천국으로 갔을 겁니다. 거기는 여기보다 편하겠죠.”
“……”
정현욱의 가정사는 이미 들어 알고 있다. 무림에서 넘어왔더니, 이미 에레도스 사태가 터져 가족들이 전부 사망한 상태였다는 이야기.
세현이 넘어온 이유도 가족인 혜진 때문이다.
처음 류한 길드를 만든 건 반 이상이 그녀를 위해서였다. 이제는 조금 달라졌지만, 원래의 이유가 퇴색한 건 아니다. 거기서 더 나아간 것이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힘이다.
무림에서 힘이 없어서 겪었던 온갖 굴욕과 절망들이 떠오른다. 눈을 감으면 보다 생생히 떠올릴 수 있었다. 그는 더 이상 같은 경험을 하기 싫었다. 혜진에게도 그런 경험을 겪게 하고 싶지 않다.
거기에 이제는 권력과 명예를 원했다. 이왕 힘을 거머쥐기로 결심한 것,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기로 했다. 혼자서 누리기 위함이 아니다. 가족과 함께 누리기 위함이다.
자신의 앞에서 만인이 고개를 숙이는 장면을 볼 때의 느낌, 그것은 직접 겪지 않고서는 절대 알 수 없다.
세현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정현욱도 가족과의 추억에 빠졌는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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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진은 자신의 방에서 창문으로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
벽에 기대어 창밖을 보기 시작한지 한참이나 지났다. 그 상태로 그녀는 미동조차 없었다. 숨소리만 아니었다면 죽었다고 해도 믿었을 것이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아름다운 별무리가 보인다. 너무 선명해서 얼핏 지구의 대기가 사라져버린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녀는 조용한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딱히 밤하늘이 아름다워서 구경하던 게 아니었다. 괴로운 생각이 떠올라 잠을 이룰 수가 없었을 뿐이다.
가끔, 오늘처럼 예전의 괴로운 기억이 떠오르는 날이 있다. 좀비들에게 쫓기면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하루를 살던 때의 기억이다. 이럴 때 잠을 자면 십중팔구 악몽을 꾼다. 차라리 안 자는 게 더 나았다.
하지만 깨어 있다고 평온한 것도 아니다. 기억이란 놈은 외면하려 할수록 더 진득하게 달라붙으니까.
그때의 그녀는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비참한 노예였다.
처음 그녀를 겁탈한 건 엽총 사내였다. 그녀는 아직도 그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하는 게 없으면 몸이라도 대라며 번들거리는 눈으로 쳐다보던 남자와, 또한 다른 사내들의 질척한 기대감 섞인 시선들을.
자신도 싸우겠다고 말하는 순간 주먹이 날아왔다. 복부를 제대로 얻어맞아 쓰러진 그녀의 위로 조롱섞인 목소리가 떨어졌다.
이까짓 것도 막지 못하면서 대체 어떻게 싸울 거냐고, 발목이나 잡지 않으면 다행이니 얌전하게 시키는 일이나 하라고.
그리고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본능적으로 저항하자 다시금 주먹과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그녀는 그 폭력과 두려움에 굴복했다.
하지만 만약,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저항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죽었을까? 아니면 근성이라도 인정받아 싸울 수 있게 됐을까.
그놈들의 인성을 생각하면 아마도 버려졌거나 맞아죽었을 확률이 높다. 그런데, 도무지 그 만약에 대한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사내들의 헐떡거리는 숨소리와, 자신의 몸을 더듬던 소름끼치는 손길, 그리고 고통.
이후 자리를 바꿔 다시 달려드는 사내. 엽총 사내를 거쳐 쇠뇌 사내가, 그리고 간간이 좋은 아이디어를 내던 노인이, 싸우다 좀비에게 죽었던 이름 모를 사내가, 그리고 또 다른 사내가, 그리고 나머지 사내들이.
– 너 진짜 맛있다. –
흠칫 놀란 그녀가 눈을 떴다.
평온한 숙소의 모습이 보였다. 섬뜩할 정도로 선명했던 목소리의 주인공은 어디에도 없다.
찝찝한 느낌에 손으로 이마를 훑자 식은땀이 느껴진다. 잠시간 그 손을 바라보던 박수진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깨끗하고 아름다운 밤하늘이 보인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그녀는, 불현듯 느껴지는 비릿한 피맛에 정신을 차렸다.
손가락으로 입술을 훑자 붉은 피가 흥건하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박수진이 마침내 기대어 있던 벽에서 몸을 떼고 움직였다. 샤워실을 향해서였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서진 않았다. 불과 몇 시간 전에도 씻었다. 다시 씻어도, 아무리 씻어도, 그녀가 정말로 씻고 싶은 과거는 지워지지 않는다.
곧장 침대로 움직여 머리맡에 놓았던 검을 잡아든 그녀가 방을 나섰다.
이럴 때마다 항상 그랬듯, 지하 훈련장에서 날이 밝을 때까지 검을 휘두를 생각이었다.
============================ 작품 후기 ============================
원래는 오늘도 쉬려고 공지까지 올렸습니다.
글이 넘나넘나 안 써져서 그랬습니다.ㅠㅠ 이 한 편을 퇴고하는데 15시간이나 걸렸다는 걸 믿으시겠습니까? 심지어 이 후기를 쓰는데도 지금 몇 번이나 고쳤습니다. 머리가 안 돌아간다는 느낌이 아주 생생합니다!
힘들게 쓴 만큼 재밌게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_-ㅋㅋ
추천도 잊지말고 꾹!! 부탁드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