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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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대
고지가 멀지 않았지만 그들은 하루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공격대는 격렬한 전투를 치뤘다. 이대로 계속 밀고 내려가면 피로가 클 것이다. 케르시타들이 본거지를 버리고 도망칠 것도 아닌데, 굳이 무리해서 진군할 이유가 없었다.
세현이 보여준 신위는 모두에게 똑똑히 각인됐다. 그들이 아무리 두들겨도 꿈적도 않던 놈을 칼질 한 번으로 두 동강 내버렸으니, 충격을 받지 않은 이가 없었다.
류한의 길드원들은 다시금 길드장의 경이로운 무력을 확인하며 자부심을 고취시켰고, 그에 대해 잘 모르던 이들은 이번에 확실하게 깨달으며 전율했다.
경기도와 강원도를 틀어쥔 지배자의 힘이 어느 정도인가, 모두가 확실하게 알았을 것이다.
딱히 힘을 과시하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상황이 이리 되니 썩 나쁘지 않았다. 세현의 위치는 힘을 과시하면 할수록 좋다. 그의 아래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따라야 할 이유를 보여주는 셈이니까. 또한 혹시 모를 분란의 여지를 잘라버릴 수도 있다.
그는 주둔지를 둘러보며 다양한 방법으로 휴식을 취하는 공격대원들을 살폈다.
어쩌다 세현과 눈이 마주치거나 근처에 오게 되면 그들은 한결같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극도로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전에도 공격대장으로서의 권위가 있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별다른 의미 없이 주둔지 외곽을 돌던 그에게 혜진이 찾아왔다. 박수진을 호위로 둔 채였다.
“뭐해?”
“잡생각. 무슨 일이야?”
혜진은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래도 특별한 용건이 있어서 찾아온 것 같진 않다.
둘은 한동안 별 대화 없이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주둔지 외곽을 돌았다. 그 뒤를 약간 떨어져서 박수진이 따랐다.
이번 토벌작전 동안 박수진과 김유린은 번갈아서 혜진의 호위를 서고 있었다.
“토벌이 끝나면 뭘 할 거야?”
문득 떠오른 것처럼 혜진이 질문을 던졌다.
“대전으로 갈 거야. 거기 있는 성을 먹어야지. 동맹을 맺거나, 질 나쁜 놈들이라면 뺏거나.”
“그 다음은?”
“안정화를 시켜야지. 그게 끝나면 부산으로 진출할 거고.”
“서울 빼고 다 먹을 생각이야?”
“응.”
“왜?”
생각지도 못한 반문이다. 잠시간 눈을 껌뻑거린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글쎄, 일종의 야망이라고 해야할까.”
“처음부터 생각하고 있던 거야?”
“그건 아니야. 길드를 키우면서 욕심이 난 거지.”
혜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질문했다.
“힘들진 않고? 가면 갈수록 할 일이 많아질 텐데.”
“별로 안 그래. 예전엔 이것보다 더 바빴던 적도 있는데 뭘.”
“어쨌든 네가 원해서 하는 일이라 이거지?”
“그렇지. 왜?”
혜진이 어쩐지 맥 빠진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네가 고생하는 것 같아서.”
“고생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어. 봐, 누나.”
그가 주위를 가리켰다.
2000명에 달하는 공격대원들이 그의 명령에 따라 이곳에 왔고, 목숨을 걸고 따른다.
“처음 집을 나섰을 때 우린 고작 둘이었어. 하지만 지금은 이 정도지. 우리가 일궈낸 거야. 앞으로는 더 커질 거고.”
“우리…… 우리라고 말해주니까 왠지 좀 멋쩍네. 내가 그렇게 막 중요한 일을 한 것 같진 않은데.”
“무슨 소리야? 여태까지 누나가 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
굵직한 것을 제외한 세부적인 일들은 전부 혜진이 도맡아 처리하고 있다. 류한에서 세현 다음으로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그리고, 처음부터 시작점이 달랐잖아. 누나가 지금 당장 나만큼 뭔가를 이뤄내려는 건 욕심이지. 나중이면 몰라도.”
지극히 사실적인 말이다. 혜진은 나직하게 웃음을 흘렸다. 예전에도 들었지만, 그래도 꽤 위안이 되는 말이었다.
그녀는 동생에게 짐이 되기 싫었다. 지금까지는 약간 짐 비슷했을지 몰라도, 앞으로는 그렇지 않기 위해 나름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요즘들어 네가 동생처럼 느껴진 적이 별로 없어.”
“……그래? 예전에는?”
“예전엔 동생 같았지. 가끔 쥐어박고 싶을 정도로 얄밉기도 하고, 멍청한 짓만 골라 하는 게 웃기기도 하고. 아, 갑자기 그거 생각난다. 어렸을 때 아이스크림 사오라고 가위바위보 계속 하던거.”
“그거?”
정말로 까마득한 옛날의 일이다. 세현에게는 거진 70년 전의 이야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혜진이 뭘 말하는지 곧장 떠올릴 수 있었다.
정말로 별 것 아닌 사소한 일상, 하지만 어째서인지 가슴 한켠에 소중한 추억으로 자리잡은 기억이었다.
“결국 내가 갔지. 가위바위보는 다 이겼는데. 다시 생각하니 억울하네.”
“억울하다니? 그럼 야밤에 누님이 집을 나가야겠어?”
세현이 피식 웃었다. 혜진도 뒤따라 키득거렸다.
“아직도 옛날이 그리워?”
세현의 그 질문에, 혜진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여전히 아름다운 밤하늘이다.
“가끔. 그래도 요즘은 이런 삶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예전보다 더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느낌이라서.”
“다행이네.”
“세상이 안 변했으면 난 아직도 회사나 다니고 있었겠지. 너는 학교에 복학했거나, 아니면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었을 테고.”
“그랬겠지. 음…… 그것도 썩 나쁜 삶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
평생을 그렇게 평범하게 살다가 죽었을지라도, 무림에서 얻은 경험과 힘을 그저 추억으로 묻어두고 살아야 했을지라도, 그는 아마 만족했을 것이다.
“지금의 너한텐 그런 게 별로 안 어울려.”
“그래?”
“응. 그래.”
그러더니, 혜진이 뜬금없이 팔을 벌린다.
“한 번 안아보자.”
“뭐라고?”
“빨리.”
잠시 헛웃음을 흘린 세현은 그의 누이를 마주안으며 등을 토닥였다.
혜진도 마찬가지로, 자신보다 훨씬 큰 덩치를 가진 동생의 등을 토닥였다.
갑자기 왜 이런 귀여운 짓을 할까.
짚이는 점이 없진 않다.
아마 외로워서일 수도 있다. 완전히 달라진 삶에 아직 덜 적응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가족인 세현과 보내는 시간이 예전만 못해져서일 수도 있다.
아니면 단순히 가을을 타는 걸지도.
“남자친구라도 만들어보지 그래?”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가을 타는 거 아냐?”
포옹을 풀어내며 혜진이 짧게 웃었다.
“그럴지도. 근데 애인 만드는 건 너 때문에 힘들어.”
“으응? 나 때문이라니?”
“나한테 대시하는 남자가 없잖아. 그냥 지나가기만 해도 다들 고개를 숙이면서 어려워하는 게 빤히 보이는데, 대체 누구랑 사귀라고?”
“그럼 먼저 마음에 드는 남자를 고르면 되잖아. 당장 우리 길드에도 잘생긴 애들 많지 않아?”
“야, 너 같으면 그게 끌리겠냐? 아니…… 됐다. 내가 너랑 무슨 얘기를 하냐.”
혜진이 혀를 찼다.
그러면서 한심하다는 듯 그를 쳐다보는데, 꽤 오랜만에 받아보는 종류의 시선이라 살짝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녀는 이후로도 별 중요치 않은 잡다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세현도 오랜만에 갖는 누이와의 잡담에 평온한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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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르시타의 본진은 그다지 멀지 않았다. 세종시를 지나 대전으로 가는 길목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예상대로 그곳은 필드형 던전이었다. 뚜렷한 경계를 이루며 검게 물든 대지가 펼쳐져 있었다.
공격대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조심스레 안으로 진입했다.
헌데, 예상했던 것만큼의 격렬한 공세가 없었다.
적지 않은 수의 케르시타들이 그들을 노리고 달려들긴 했다. 대부분이 주황색이나 노란색 눈동자를 가진 강한 놈들이었다.
하지만 수가 너무 적었다. 놈들은 접근하지도 못하고 공격대의 화력에 줄줄이 녹아내렸다.
아무래도 세종시에서 부딪혔던 세이라크 무리가 놈들의 마지막 전력이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섣불리 중심으로 접근하지 않고 외곽을 빙글빙글 돌며 착실하게 케르시타들을 처리했다. 어차피 전부 잡아야 할 놈들이다. 후방에 위협을 남겨두고 섣불리 안으로 진입할 이유가 없었다.
토벌은 두 시간에 걸쳐 차근차근 확실하게 이뤄졌다.
그리고 마침내, 공격대는 중앙의 거대한 구체를 마주하고 멈춰 섰다.
“거미줄 같은 건가?”
재질을 알 수 없는 은회색 실 같은 것으로 이뤄진 구조물이었다. 또한 크기가 상당했다. 내부의 구조도 그리 단순하진 않을 듯하다.
한쪽에 입구로 보이는 것이 있었지만, 공격대 전체가 들어가기엔 너무 비좁았다.
결국 세현은 결정을 내렸다.
“나하고 부길드장, 김인환, 김유린, 박수진, 권태수, 윤하늘, 아엘라가 함께 간다. 나머지는 대기하도록.”
“알겠습니다.”
그렇게 8명의 인원이 세현과 김인환을 선두로 안에 진입했다.
내부는 예상대로 그리 단순한 구조가 아니었다. 미로처럼 얽힌 통로들과 똑같은 모양의 방들이 연속으로 펼쳐지며 방금 왔던 길조차 헷갈리게 만든다.
하지만 길을 잃는 일은 없었다. 세현도 그렇지만, 종족이 달라서인지 아엘라의 방향감각이 아주 비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복잡하기 짝이 없는 공간을 샅샅이 훑던 일행은 마침내 부화장으로 추측되는 방에 들어섰다.
이미 케르시타 놈들의 부화장이 무엇인지 알고 있던 세현과 혜진, 김인환과 김유린은 충격이 덜했다. 하지만 박수진과 권태수, 윤하늘과 아엘라는 전혀 아니었다.
그들은 처음으로 보는 케르시타 부화장의 실체를 목격하고 완전히 경악했다. 델비아의 길드장인 윤하늘은 버티지 못하고 한차례 토악질을 했다.
벽에 매달려 이지를 잃어버린 채로, 단순한 산란 도구가 되어버린 여자들의 수가 기백을 넘었다. 지금도 실시간으로 괴물을 출산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예전에 세현이 봤던 부화장의 여인들은 그래도 신음성이라도 냈다. 하지만 이곳의 여자들은 이미 완전히 영혼이 떠나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배가 격렬하게 꿈틀거리며 질구를 찢을 듯 커다란 덩어리가 튀어나오는데도 그저 흔들거리만 할 뿐, 아무런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다. 출산 이후 근처의 벽에서 자라난 촉수들이 재차 몸을 파고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단순히 호흡이 이어지고 심장이 뛰고 있을 뿐, 이미 시체와 다를 게 없다. 이렇게까지 망가졌는데도 숨이 붙어 있을 수 있는 건 분명 케르시타들의 수작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눈 감아라.”
세현의 나직한 목소리에 다들 눈을 감았다.
이후 섬뜩한 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자색빛 검기다발이 만개하는 꽃처럼 뿜어져 부화장 전체를 한순간에 쓸어버렸다.
곳곳에서 일어난 꺼지지 않는 화염이 이미 회생 불가능한 여성들과 막 태어나 버둥거리던 케르시타의 유충들을 모조리 불살랐다.
일행은 심신을 추스르고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처음의 부화장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들은 이 은빛 구형 구조물의 안쪽으로 향하며 몇 차례나 더 끔찍한 부화장을 마주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 와중 기이한 점은, 이 부화장의 중요성이 대단할 텐데도 그들을 가로막는 어떤 케르시타도 없었다는 것이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일행이 마침내 구체의 중앙에 도달했다. 하지만 이전처럼 섣불리 진입하진 않았다. 안쪽에서 풍겨오는 기운이 심상치 않다.
“조심해라. 내가 명령하면 곧바로 퇴각할 준비 하고.”
한차례 주의를 준 세현이 앞장서서 모퉁이를 돌아 진입했다.
들어선 중심은 완벽한 구형을 이룬 공간이었다. 이 구조물의 모습과 꼭 닮았다. 입구는 그 구형 공간의 중앙 벽에 뚫려 있었는데, 발판처럼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은회색 거미줄 같은 실들이 아니었다면 아래로 떨어져야만 했을 것이다.
그 발판의 중앙에서 한 존재가 무언가를 우적우적 씹어먹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선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얼핏 인간의 형상을 닮은 존재였다.
그러나 전신이 검은빛 외골격에 감싸였고 등에는 네 쌍의 투명한 날개가 달렸다. 이마에 돋아난 뿔과 두껍게 마디가 진 딱딱한 머리카락들이 기이하다. 꼬리뼈 부근에서부터 벌을 닮은 배가 달렸고 그 끝에는 날카로운 침이 보인다.
– 여왕님을…… 위해…… –
콰직!
초록색 겹눈을 가졌던 한 케르시타의 머리가 여왕이라 불린 존재의 입 속으로 사라졌다. 인간을 닮은 입으로 농구공만한 크기의 머리통을 순식간에 먹어치운 여왕이 한차례 몸을 떨었다.
이후 선명한 남색빛 눈동자가 일행을 직시했다.
– 내 제국을 위기에 빠트린 인간이 바로 너구나. –
여왕은 곧장 세현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오만하게 느껴지던 그녀의 표정이 점점 변했다.
인간을 닮은 얼굴이었기에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세현이 숱하게 보아왔던 표정이다.
그가 입가 한쪽을 비틀어 올렸다. 반대로, 여왕의 표정은 한층 더 경직됐다. 그녀가 겪는 감정의 동요가 여지없이 전해졌다.
– 믿을 수 없어…… 인간이, 인간이 맞나? –
“어떻게 알았지?”
세현에게 있어 기세를 완벽히 감추는 반박귀진 정도는 기본이다.
그는 지금 스스로의 힘을 전혀 내보이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케르시타 여왕은 그가 얼마나 강한지 눈치챈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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