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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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신
여자를 비명지르게 만든 남자는 한동안을 더 짐승처럼 행동했다.
그렇게 일을 마친 후, 곧장 방 한쪽의 테이블로 이동해 위에 놓인 알약 하나를 침대 쪽으로 던졌다.
“먹어라.”
기진맥진한 여자는 간신히 몸을 움직여 시트 위에 떨어진 약을 집어들었다. 남자는 물도 없이 작은 알약을 힘겹게 삼키는 여자의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욕실로 들어갔다.
약을 주는 이유는 오로지 그를 위함이다. 저런 이름조차 모르는 노예와 같은 여자가 감히 자신의 핏줄을 잉태하게 놔둘 수는 없다.
간단히 몸을 씻고 나왔을 무렵, 여자는 아픈 몸으로도 열심히 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것은 살기 위한 행동이다. ‘포로’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더 이상 잠자리도, 먹을 것도 제공받지 못한 채 이 추운 겨울날 성에서 추방당한다.
그를 당연하다는 듯 쳐다보며 그는 시간을 확인하고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섰다. 그렇게 매무새를 정리하며 같은 층에 자리한 상황실로 들어서자, 그곳에는 이미 사람이 있었다.
“오셨습니까.”
기다리던 타메모토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인사를 받는 남자, 길드장 세키마타 카즈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늦었군. 미안하네. 잠깐 처리할 일이 있어서.”
“아닙니다. 저도 방금 왔습니다.”
그가 자리에 앉은 후 타메모토는 보고를 시작했다.
“포로들 중 197명을 대일에 전달했습니다. 늦어도 하루 정도면 도착할 겁니다.”
“그럼 여기에 몇 명이 남은 거지?”
“187명입니다. 전부 통제가 쉬운 자들만 남겼습니다.”
포로들 전부가 순순히 굴복한 것은 아니다.
자신들의 처지가 노예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들이 미심쩍은 행동을 보이는 것을 감지했다. 포로의 수가 적지 않아 그들의 통제에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던 덕에 알 수 있었다.
일이 벌어지기도 전 주동자로 의심되는 자들을 골라 본보기로 양손의 엄지를 자르고 아킬레스 건을 끊어내는 가혹한 처벌을 가했다. 허나 그럼에도 기가 죽지 않은 놈들이 있었다.
그런 놈들은 전부를 추려 대일 길드로 보내버리라고 지시했다. 그게 어제의 일이다.
“혹시 모르니 남은 놈들도 잘 감시해.”
“물론입니다.”
“대일 길드 쪽에서 다른 말은 없었나?”
“이곳 정벌에 지원을 해주겠다더군요.”
“얼마나?”
“정확한 건 이야기를 해봐야 할 듯합니다.”
이후로도 계속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던 카즈오가 어느 순간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우리가 부산을 쉽게 먹은 거겠지?”
“예. 저번에 보고 드렸던 대로, 두 개 사단 군부대가 서로 싸우다 자멸했다고 합니다. 한쪽의 지휘관이 약간 이상했던 모양입니다.”
“자세하게 알 수는 없나?”
“정확한 사정을 아는 생존자가 없습니다. 혹시나 괴물의 소행인지 우려하시는 거라면, 관련된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건 다행이군.”
그는 다시금 생각을 정리했다.
부산의 최대 세력 둘이서 서로 싸우다 공멸했다. 그들의 전투에 휘말려 죽은 자들도 부지기수라고 했다.
그 틈바구니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자들이 성을 점령하고 바다 길드를 세웠으나, 그들 풍신이 훌륭하게 기습을 성공시켜 이곳의 최종 주인이 된 것이다.
타메모토의 공이 컸다. 철저히 정보를 차단하며 은밀하게 사다리 같은 성벽을 넘을 도구를 모았다. 일부는 직접 제작하거나 본토에서 가져오기도 했다.
바다 길드로서는 설마 후방에서 일본인들이 기습을 가할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새로운 지형이 나타났다는 것 정도는 확인했겠지만, 그게 혼슈의 야마구치 현까지 연결된 육로라는 것은 직접 탐험하지 않고선 알 수 없다.
풍신은 철저하게 준비한 상태로 방심한 상대의 후방을 기습했다. 그것도 상대보다 더 많은 수로 말이다. 당연히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그렇게 부산을 얻었다. 하늘이 그들에게 기회를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적당한 세력을 갖추고도 확장할 곳이 없어 헤매던 그들에게 내려진 선물이다.
“알아보던 건?”
상념에서 빠져나온 카즈오가 다시 물었다.
“예상대로 다른 지역은 쉽지 않을 듯합니다. 특히 대전 지역이 심상치 않습니다.”
“왜?”
“원래 있던 길드를 최근 다른 길드가 밀어낸 듯합니다. 최소 두 개 이상의 성을 가진 세력이 자리를 잡은 셈이죠.”
“얕볼 수 없겠군.”
“정찰조가 귀환하면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알 수 있을 겁니다.”
풍신 길드는 대여섯 개의 정찰조를 한반도 안쪽으로 파견했다.
대비하지 못한 상대의 정보를 캐내는 일은 어렵지 않다. 생존자로 위장해서 적당히 살피고 사람들에게 탐문을 하면 되는 일이니까.
그들은 조만간 중요한 정보들을 갖고 돌아올 것이다.
“대전을 점령한 것이 최근이라는 게 그나마 희소식이군.”
타메모토가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들이 부산의 성을 손쉽게 접수한 것은, 여러 사정이 맞물려진 아주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 보통이라면 상대의 성을 빼앗는 공성전은 결코 쉽지 않다.
그 대전의 성을 새로이 차지했다는 길드는 모르긴 몰라도 꽤 많은 전력을 소모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점령지를 안정화시키느라 매우 바쁠 터였다. 여러모로 이쪽에 신경 쓸 여력이 없을 거다.
그렇다면 풍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대의 정보를 일방적으로 수집할 수 있다. 부산 지역의 안정화를 마치는 즉시 진격할 수 있도록, 미리부터 준비를 해야 했다.
이번엔 대일 길드의 힘까지 빌릴 것이다. 자위대가 주축이 된 그들의 전력이 더해지면 사다리 따위가 아닌 전차와 박격포 등으로 공성전을 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 막강한 전력으로 미처 대비하지 못한 상대를 기습한다면, 이곳과 마찬가지로 무력하게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 영광의 과실을 대일 길드와 나눠야 한다는 게 조금 걸리지만, 그래도 과욕을 부리가 실패하는 것보단 나았다. 지금의 그들에게 한 번의 실패는 몰락이나 마찬가지다.
“준비는 언제 끝날 것 같은가?”
“아무리 늦어도 한 달 안이면 될 듯합니다.”
“보름으로 줄일 수는 없겠나?”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잠시의 지체도 없는 시원하고 충직한 대답이다. 자연스레 카즈오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자네만 믿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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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명으로 이뤄진 한 무리의 사람들이 부산에 들어서고 있었다.
언뜻 봐서는 별다를 것 없는 생존자들이지만, 자세히 보면 눈빛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특히 가장 눈길을 끄는 사람은 한 여성이었다. 체격이 어지간한 남자보다 더 크다.
바로 신소진이었다.
그녀는 세현에게 부산 지역을 정찰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단순한 정찰이 아닌 성의 유무를 확인하고 그 성에 주인이 있는지, 그들이 어떤 성향의 집단인지 알아보는 역할도 있다. 또한 상황에 따라 류한의 사절로서 협상 의사를 표현하는 것도 임무에 포함되어 있었다.
쉬울 수도, 어려울 수도 있는 임무다. 그렇기에 전단장인 그녀가 직접 휘하의 소수 정예들을 이끌고 임무에 투입됐다.
“어째 사람이 없습니다.”
계속해서 이동하던 도중, 한 길드원이 조용히 말해왔다. 신소진 역시 주위를 둘러보며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도시의 초입부라지만 사람이 너무 없다.
부산은 대한민국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대도시, 분명 인구가 많아야 할 터인데 아무도 없는 듯한 적막함이 감돈다.
하지만 정말 아무도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좀비 같은 괴물이 보이지 않고, 곳곳에 전투의 흔적이 있으나 시체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이곳이 누군가에 의해 관리가 되는 지역이라는 뜻이다.
“혹시 모르니까, 조심해서 이동하지.”
“예.”
신소진이 앞장서서 움직였다. 이전과는 달리 몸을 숨길 수 있는 엄폐물을 염두에 둔 경로를 따라서였다.
그렇게 이동하는 도중 높은 건물이 나타나면 옥상까지 올라 주위를 확인하기도 했다. 건물 내부에 있을 괴물을 탐사하려는 목적 또한 있었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관리가 되고 있는 구역이다.
계속해서 조심스레 이동하던 신소진 일행은, 잠시 후 멀찍이 떨어진 건물 옥상에서 서성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그리고 신소진의 손짓에 따라 다들 잽싸게 몸을 숨긴다. 그녀 역시 반쯤 부서진 담벼락 뒤로 신속하게 엄폐하며 고개만 슬쩍 내밀었다.
운이 좋았는지, 옥상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총 네 명이었다. 언뜻 봐서는 특이할 것 없는 이들이다. 하지만 저들끼리 잡담을 하면서도 간간이 주위를 둘러보는 모습이 마치 경계를 서는 듯한 느낌이었다.
정말로 경계를 서고 있다고 가정하면, 저들이 자리한 옥상은 도시 안쪽으로 들어가는 주요 길목들을 감시하기에 최적인 곳이다.
어쩌면 이곳을 지배하는 세력의 사람들일지 모른다.
“일단 접촉해보지. 혹시나 전투가 일어나면 망설이지 말아라.”
그렇게 주의를 준 신소진이 엄폐물을 벗어나 대로로 나섰다. 그 뒤를 아홉 명의 전단원들이 따른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옥상의 사람들에게 발각됐다. 잠깐 소요가 이는 듯하더니 한 명이 그들에게 총을 겨누며 크게 소리친다.
“정지!”
신소진은 순순히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크게 말했다.
“쏘지 마십시오. 괴물이 아니니까.”
“기다려! 사람이 내려갈 테니.”
옥상에서 두 명이 모습을 감췄다. 남은 두 명은 여전히 그들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다.
잠시 후, 아래로 내려온 두 명이 신소진 일행에게 다가왔다.
“너, 어디서 왔지?”
그 질문을 들은 신소진의 한쪽 눈썹이 미약하게 꿈틀거렸다. 반말을 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어쩐지 그들의 말투에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대전에서 왔습니다만.”
“대전?”
그녀의 대답을 들은 남자 둘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들은 최근 대전에서 온 사람들을 경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 이유 역시 알고 있다.
“대전에서 여긴 왜?”
“부산에 가족이 있거든요.”
그럴 듯한 핑계를 대던 신소진은 방금 느낀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이들의 입모양과 들리는 소리가 일치되지 않았다. 괴물의 언어가 번역될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지만, 분명히 시스템에 의해 통역이 되고 있다.
언어가 다르다는 뜻이다.
그녀가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어보려는 찰나, 그들을 앞에 두고 서로 알 수 없는 수신호를 주고받던 남자 둘이 별안간 무기를 꺼내들었다. 검과 전투망치가 신소진을 겨눈다. 옥상의 남자 둘은 아까부터 겨누던 총을 좀 더 확실하게 조준했다.
“손 머리에 얹고 꿇어.”
“뭐라고?”
“가족을 만나러 왔다고 했지? 부산에 들어가려면 우리 통제를 따라라.”
그들은 대전에서 왔다는 사람들을 순순히 통과시킬 수 없었다. 다행히 이들 중 총을 든 사람은 보이지 않으니, 제압은 어렵지 않을 듯하다.
물론 그건 남자들만의 생각이었다. 신소진은 옥상에서 총을 겨눈 이들을 힐끗 살피며 눈앞의 둘에게 물었다.
“어느 나라 사람이야?”
“꿇으란 말 못 들었어!?”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부산이 당신들 영역이라도 되나?”
“당연히 우리 영역이지.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꿇어, 이 춍 새끼들아!”
고함과 동시에 발길질이 날아든다. 그 순간, 신소진의 주먹이 뻗어졌다.
쾅!
도저히 사람이 맞았다고는 믿을 수 없는 소리가 터진다. 검을 들었던 남자가 트럭에 치인 것처럼 튕겨나갔다. 전투망치를 든 남자 역시 순식간에 날아든 주먹에 턱을 얻어맞고 눈이 풀리며 풀썩 쓰러졌다.
[빛이여! 우리를 수호하소서!] 타앙!타타타탕!
신속하게 펼쳐진 신성술사의 주문이 날아드는 총알들을 가로막는다. 보호막 위로 불꽃이 튀는 모습을 보던 신소진은 대략적인 거리를 가늠하며 한순간 땅을 박찼다.
환상처럼, 그녀의 등 뒤에서 네 쌍의 남색빛 날개가 나타난다. 동시에 폭음이 터졌다. 찰나지간 옥상까지 날아든 그녀의 발차기가 왼쪽 편에 있던 남자의 안면을 무자비하게 가격했다.
허무한 소리와 함께 머리가 수박처럼 박살나며 뒤쪽으로 피와 각종 허연색 파편이 비산한다. 오른쪽에 있던 남자가 충격적인 광경에 눈을 부릅뜨는 순간, 다시금 가공할 속도로 주먹이 날아들었다.
인간의 신체로는 감당할 수 없는 힘이 광대를 가격한다. 으스러지는 것을 넘어 완전히 부서져버린 머리통의 잔해가 옥상 바닥에 재차 흩뿌려졌다. 그 위로 고깃덩이가 된 시체가 아무렇게나 쓰러져 나뒹군다.
아래의 두 놈은 사정을 봐서 죽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놈들은 총을 격발했으니, 살려둘 이유가 없었다.
“일본인들인가.”
춍이라는 단어는 일본인들이 한국인을 비하할 때 쓰는 표현이다. 선수생활을 하던 시절 몇 번 들어본 적 있어서 알고 있는 모욕이었다.
아래의 두 놈들을 깨워 심문하면 최소한의 정보는 얻을 수 있을 듯하다. 어째서 이들이 부산에서 경계를 서고 있었는지, 반드시 알아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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