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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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신
대부분의 경계조는 옥상에서 근무를 선다. 그에 김유린은 벌써 세 번째 건물 계단을 오르는 중이었다.
그녀가 하는 임무에서 가장 어려운 과정은 경계조가 있는 건물을 찾아 접근하는 것이었다. 물론 상대적으로 어렵다는 것이지, 장시간의 경계에 지친 말단 길드원들의 눈을 피하는 것쯤은 누워서 떡 먹기다.
그녀를 따르는 다섯 마리의 트윈테일도 워낙 영특해서 들키는 일은 없었다. 사람의 말을 대부분 알아들을 수 있는 녀석들이다. 이런 은엄폐 기동을 따로 훈련시킨 적 없는데도 통제하기가 수월했다.
“어디 보자……”
그녀와 마찬가지로 박수진도 이미 두 개의 경계조를 처리한 후 세 번째 먹잇감을 찾고 있을 것이다.
신소진은 무려 다섯 개의 경계조를 박살냈다. 여왕의 날개 아이템을 통해 날아다니는 그녀이니 얼마 후면 다시금 경계조 하나를 처리했다는 신호가 올 것이다.
그러면 현재까지 그녀들 셋이 처리한 경계조의 수가 무려 아홉이다. 숫자로 따지면 36명인 셈이다. 각각 한 개 조씩 더 처리하면 48명이고, 또 한 개 조씩 처리할 수 있다면 60명이 된다.
“……진짜 할 수 있겠는데?”
세현의 말처럼, 정말로 그들 넷이서 길드 하나를 무너트릴 수 있을 듯하다. 김유린은 새삼 자신과 류한이 가진 힘을 체감하며 작게 전율했다.
상대는 멍청한 괴물도 아니고 허접한 생존자 무리도 아니다. 어떤 수를 썼는진 몰라도 부산의 성을 점령했을 정도로 강한 길드다.
그런 놈들을 고작 넷이서 이렇게까지 흔들 수 있다는 사실이 전율스럽지 않으면 대체 뭐가 전율스러울까.
몇 년이 더 지나면 류한은 정말로 엄청난 힘을 갖게 될 것이다. 그녀는 바로 그런 집단의 핵심 간부이자 최고 권력자의 제자로서 자리하게 된다.
스승인 세현에 대한 생각에 절로 경쾌해지던 그녀의 움직임이 어느 순간, 작게 멈칫거렸다. 기분 좋던 표정에 약간의 수심이 어린다.
조용히 뒤를 따르던 다섯 마리의 트윈테일들이 살며시 다리에 몸을 부볐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몸짓이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는 나직이 말하며 다섯 여우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심경을 어지럽히는 아엘라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10층짜리 건물을 오르는 것은 금방이었다. 옥상의 문으로 다가가자 바깥쪽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바로 안으로 돌입하지 않고 잠시 그 대화를 엿들었다. 운이 좋으면 뜻밖의 정보를 알 수도 있다.
허나 상대는 이번에도 별 영양가 없는 대화만 나누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한 한숨과 함께 창을 고쳐 잡았다. 전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음담패설만 하고 있다.
어떤 포로를 강간했는지, 뭘 어떻게 하면 기분이 좋다느니 하는 이야기였다. 누가 더 포로들을 학대했는지, 누가 더 악랄한지 경쟁이라도 하는 듯하다.
이야기 할 만한 재미있는 일이 그것뿐인 건가? 아니면 일종의 민족성 같은 일본인들의 본성인가?
어쩌면 일본 뿐만이 아닌 인간이라는 종족의 본성일지도 모른다. 아니, 지구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지적 생명체의 본성일지도. 약자를 따돌리고 괴롭히는 모습은 인간이 아닌 동물에게서도 나타난다.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며 신기해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하지만 어쨌든, 눈앞에서 떠드는 대화를 듣고 있자니 열 받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참지 않았다.
쾅!
커다란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두런두런 오가던 대화가 뚝 끊어지며 놀란 남자들이 무기를 집어들었다.
“뭐, 뭐야?”
“여자?”
네 명의 표정이 묘해졌다. 경계 가득하던 표정에선 상대가 한 명이라는 것에, 그리고 나이도 어린 호리호리한 여자라는 것에 방심하는 기색이 역력해졌다.
“어이, 뭐냐? 여긴 왜 올라왔어?”
“근처 사는 생존자인가? 꽤 예쁜데?”
게다가 그 중 한 놈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헤벌쭉한 표정을 짓는다. 오소소 돋아나는 소름과 함께 분노한 김유린이 그 남자를 가리켰다.
“물어!!”
외침과 함께 그녀의 뒤쪽에서 돌풍이 일었다.
얼핏 여우의 형상을 한 다섯의 은빛 돌풍이 가공할 속도로 남자를 덮친다. 기겁해서 다시 무기를 들어올리는 그의 시야에 몇 쌍의 주황색 눈동자가 번쩍이고, 동시에 불에 지진 듯한 통증이 찾아왔다.
“끄아아악!”
전신이 난도질당한 남자가 처절하게 발버둥치며 피를 뿜었다. 손에 든 검을 제대로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허우적거리다 혈인이 되어 쓰러진다.
다른 셋은 그런 남자를 구원해줄 틈은 없었다. 그럴 틈은 커녕 살아남지도 못했다. 암향표를 펼치며 화살처럼 쏘아진 김유린의 창에서 보랏빛이 번쩍인다. 반사적으로 방패를 들어올렸던 남자는 그 방패째로 관통당해 시체가 됐다.
뒤에 있던 둘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겨눴던 총과 함께 몸통이 조각나고 머리통이 터지며 쓰러졌다. 네 명의 경계조는 무전기를 사용할 틈도 없이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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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무전이 안 되지?”
메이코라는 이름의 여자는 투덜거리며 몇 번이나 다시 통신을 시도했다. 하지만 다른 경계조들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고장난 거 아냐?”
뒤쪽 남자의 말에 그녀가 설핏 인상을 찡그렸다.
정말로 고장난 건가? 아마 그런 것 같다. 어느 한 곳 하고만 무전이 안 되는 것도 아니고, 정기교신 시간인데도 다른 열한 개 조 전부가 침묵하는 상황이었다.
정기교신은 한 시간 간격으로 이뤄진다. 그 짧은 사이에 경계조 전부가 당했다는 가정은 너무 터무니없다.
“왜 고장나고 지랄이야?”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무전기를 내려놨다. 그것이 막 바닥에 닿은 순간이었다.
쾅!
진동과 함께 커다란 폭음이 터진다. 깜짝 놀란 메이코가 반사적으로 무전기를 다시 들어올렸지만, 폭음의 원인은 그 무전기가 아니었다.
“뭐, 뭐, 뭐야?”
메이코의 뒤편에서 하품만 쩍쩍 하던 남자가 놀라 더듬거렸다.
하늘에서 갑작스레 사람이 떨어졌다. 마치 터미네이터처럼, 거미줄 같은 균열의 중앙에서 거구의 여자 한 명이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정면에 있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게 남자가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
귀청을 찢는 폭음과 함께 소리보다 빠르게 움직인 주먹이 그의 머리통을 부순다. 경악한 다른 셋이 제각각 무기를 잡는 사이, 연달아 터진 두 번의 폭음과 함께 가슴팍이 함몰된 시체 두 구가 트럭에 치인 것처럼 허공을 날았다.
“미, 미친!”
메이코는 제 무기인 총을 들어올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어느새 상대가 그녀의 코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싸늘한 눈빛을 마주하자 저절로 다리가 풀린다. 그리고, 주저앉은 그녀의 옆 바닥에 발길질이 작렬했다.
쾅!
“히이이익!”
폭음과 함께 엄청난 양의 균열이 발생했다. 사방으로 튄 파편 중 하나가 그녀의 뺨을 찢으며 지나갔지만, 메이코는 고통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완전히 공포에 질렸다.
“이름.”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렸다. 대답하지 못하면 곧장 자신을 죽여버릴 듯 무표정한 얼굴이 보인다. 그녀는 더듬거리며 필사적으로 대답했다.
“키, 키쿠무라 메이코.”
“나이.”
“스, 스물다섯, 스물다섯 입…”
“현재 임무에 나선 경계조는 총 몇 명이지?”
“저, 저희, 저희까지 그, 그러니까, 12개 조가……”
콰드득!
말을 끝맺지 못한 머리가 180도 돌아갔다. 한 때 메이코라 불리던 시체가 마지막 숨결을 토해내며 차가운 옥상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신소진은 반지를 통해 신호를 보냈다. 그녀가 방금 처리한 경계조가 마지막이었다. 메이코 뿐만이 아닌 다른 놈들도 심문했다. 그때마다 모두 같은 대답을 들었으니, 경계조가 열둘이라는 정보는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잠깐의 간격을 두고 다시금 반지를 통해 다섯 번의 진동을 보냈다.
비행능력을 가진 그녀가 상황을 살피기에 가장 유리하므로 그녀가 임무 종료 신호를 보내기로 사전에 합의했다. 다섯 번의 진동은 이제 외곽의 임시 거점으로 철수하자는 뜻이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옥상을 살핀 후 하늘 높이 떠올랐다.
김유린과 박수진이 거점까지 이동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그 사이 마지막으로 도시 외곽을 돌며 혹시나 놓친 경계조가 있는지 확인할 심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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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정찰을 온 것, 손 안 대고 코까지 풀려던 작전은 성에 들어와 직접 포로들의 상태를 보며 약간 회의적으로 변했다.
일단 생각했던 것보다 포로들의 수가 너무 적었다.
적어도 300명은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감옥을 포함한 성 내부를 한 번 크게 돌아봐도 보이는 수가 너무 적었다. 일일이 세진 않았지만 100명이 간신히 넘는 수준인 듯했다.
게다가 대부분 생산직이거나 보조계열 쪽의 전투력 낮은 이들 뿐이다. 이러면 그가 생각했던 무기들을 지원해줘도 폭동이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할 수 있었다.
얼마나 많은 풍신의 전력이 성 밖으로 나가느냐에 따라 점령까진 성공할 수도 있다. 허나 이변을 눈치채고 다시 성으로 돌아오는 그들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이제 선택지는 두 가지다.
계획을 부분적으로 포기하고 그냥 일격을 먹이는 것에 만족하거나, 아니면 좀 더 많은 지원으로 확실하게 포로들이 성을 점령하고 유지할 수 있게 해주거나.
세현은 섣불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계속해서 포로들의 상태를 살폈다.
다들 심신이 피폐해진 모습이다. 들었던 정보보다 더 심한 대우를 받는 모양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수준이다.
언뜻 보면 대부분의 포로들이 마음까지 꺾인 듯했다. 하지만 세현은 그들의 눈빛 깊숙한 곳에서 아직까지 꺼지지 않은 분노의 잔재를 발견했다.
이들이 이런 대우를 받기 시작한지는 길어야 몇 달 안 됐을 것이다. 겉으로 표출되는 독기를 꺾기엔 몰라도, 마음 깊숙한 곳까지 굴복시키기엔 부족한 시간이다.
현대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 고등 교육을 받으며 단단한 자아를 획득한 사람들이다. 정말로 극단적인 처지에 놓이지 않는 이상 쉽게 노예가 되진 않는다.
요컨대 불씨만 있으면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화약들이란 뜻이었다. 풍신으로서는 충분히 통제할 자신이 있으니 이런 식으로 포로들을 다뤘던 것이겠지만.
어떻게 할까. 귀찮은데 그냥 직접 쓸어버릴까.
하지만 그러면 이곳에 힘의 공백이 생긴다. 나중에 류한이 진출했을 때 전혀 새로운 세력과 협상해야 될 수도 있었다. 또한 그들이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세력이라면 동맹을 맺기도 애매해진다. 지금보다 더 골치 아파질 수도 있다는 소리다.
약간의 타격만 준 채 시간을 끄는 작전은 썩 내키지 않았다.
지금 풍신을 몰아내지 않는다면 추후 공격대를 꾸려 길드전을 벌어야만 한다. 수하들에게 좋은 경험을 시켜줄 수는 있겠지만, 그만큼 오래 걸리고 번거롭다. 또한 이기고 난 후도 문제다. 세 개의 성을 직접 관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인력부터가 부족하니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최상의 시나리오는 한 가지 뿐이었다. 이곳의 포로들을 지원해 성을 탈환하고 지키게 만드는 것.
자립에 결정적인 도움을 받은 이들은 류한의 세력이 될 수밖에 없다. 적을 처리함과 동시에 귀찮은 일은 스스로 처리하는, 그리면서 필요한 때 언제든지 동원할 수 있는 산하 길드가 생기는 것이다.
세현은 반쯤 마음을 굳히며 마지막 남은 3층으로 향했다.
다행히 3층에는 아무도 없었다. 덕분에 편하게 길드장 숙소로 들어선 그는 불을 키는 대신 눈에 내공을 집중시켜 시야를 밝혔다. 평범하던 밤색 눈동자가 선명한 자색빛으로 물든다.
이곳에 특별한 것은 없었다. 방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누운 여자를 제외하면.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 바로 짐작이 간다. 몰골을 보면 퐁신 길드장의 성벽까지 알 수 있었다.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정보를 알게 되니 절로 기분이 나빠진다.
스륵-
그는 일부로 옷자락을 스쳐 인기척을 냈다. 깨어난 여자는 방 가운데에 조용히 선 그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아…!”
놀란 여자가 약간 휘청이면서도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세현이 전혀 예상치 못한 행동을 했다.
그에게 간절한 목소리로 부탁을 한 것이다.
“복수를 하게 해주세요.”
“복수?”
여자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그가 누구인지 알고 대뜸 복수를 하게 해달라는 건지. 허나 그녀는 더 없이 진지하게 보였다. 딱히 미친 것 같지도 않다.
“저를, 우리를 이렇게 만든 놈들을 벌할 수 있는 힘을 주세요.”
떨리는 목소리에서 은연히 그를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눈은 똑바로 맞춰왔다.
곧 여자는 고개를 숙이며 바닥을 엉금엉금 기었다. 그렇게 세현의 발치까지 다가오더니, 흡사 신을 경배하는 것처럼 엎드려 조아렸다.
“뭐든지 하겠습니다. 뭐든지 드리겠습니다.”
정적이 흘렀다.
여자가 그를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는지, 왜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다짜고짜 도움을 요청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세현의 입가가 미약하게 올라갔다. 반쯤 굳혔던 마음이 완전하게 한쪽으로 쏠린다.
“그래. 힘을 주마.”
그녀의 몸이 떨리는 것을 보며, 그는 머릿속으로 다시금 계획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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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넘나 아파서, 퇴고를 미처 다 하지 못했습니다. 거슬리는 부분은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__) 저는 얼른 자러 가야겠습니다……
오늘도 재밌게 읽으셨길 바랍니다. 추천!! 부탁드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