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118)
117화 – 107호, 관문의 방 – ‘마녀의 숲’ (8)
– 한가인
[사용자 : 한가인(지혜)날짜 : 40일 차
현재 위치 : 계층 1, 107호(관문의 방)
현자의 조언 : 3]
첫 번째 시련 이후, 우리에겐 겨우 1시간의 휴식만 주어졌다.
당연히 가짜들과 극도의 긴장 속에서 싸운 우리에겐 너무나 짧았던 휴식 시간.
기묘하게도 우리는 두 번째 시련 도중에 체력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자정부터 해가 뜨기 직전까지만 사람의 모습을 취할 수 있는 아리마의 특성상, 아침부터 자정까지 우린 뚜렷하게 할 일이 없었다.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밤에는 잘 수 없는 잠도 자면서 체력을 보충하는 시간을 가졌다.
내 몸도 이젠 제법 회복된 느낌이고, 진철 형은 이젠 거의 편안하게 잠이라도 자는 분위기다.
‘시나리오 이해’는 오늘도 아리마가 무언가 깨닫고 있다는 암시를 줬다.
이젠 정말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이 아닐까?
설령 진철 형이 깨어나지 못하더라도 더 이상의 치료는 포기하고 아리마를 죽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료들에게 내 의견을 전했다.
묵성 할아버지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 진철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며 더 기다리자고 한 사람은 가인이 너 아니었나?”
“진철 형의 중요성에 관한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습니다. 다만, 아리마가 여기서 더 강해져서 엘레나가 억제할 수 없게 되면 위험하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네 걱정을 좀 이해하기가 어렵다. 너랑 아리가 즉석에서 지어낸 개소리를 지껄였는데, 그걸 듣고 마녀가 위대한 깨달음을 얻어?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
“내 의견은 어제와 같다. 본래 비전문가는 사기꾼의 그럴듯한 소리와 진짜 전문가의 말을 구분하지 못해. 아리마가 마녀라곤 해도 빙의와 관련된 분야에선 지식이 부족할 테니, 너희의 개소리를 듣고 혼자 멋대로 착각한 것 아니냐?”
“그렇게 생각하기엔 시나리오 이해에서 일종의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 문장은 나도 듣긴 했지만….”
할아버지는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이해가 간다. 진철 형의 치료가 끝나가는 상황이다.
조금만 더 치료하면 우리 중 가장 물리적으로 강한 든든한 동료가 깨어날 텐데, 인제 와서 갑자기 포기하자는 말을 하니 이해하기 어려울 법하다.
조용히 듣고 있던 은솔 누나가 입을 열었다.
“난 가인이 네 말에 동의해. 그리고, 어제부터 들었던 불길한 생각을 말해주고 싶어.”
“불길한 생각이요?”
은솔 누나는 차 한 잔을 들이켠 후 입을 열었다.
“애초에 너희가 ‘개소리’를 했다는 것부터 착각 아닐까?”
“네?”
“가인이 너, 절 다닌 적 있니?”
“전혀 없어요. 아주 어릴 때 교회 잠깐 다니긴 했는데.”
“그러면 제행무상이니, 제법무아니 하는 단어는 대체 어떻게 알았어?”
“어…. 그냥 떠올랐는데. 국사 공부하다가 배웠나?”
“우리 집안은 전부 불교를 믿어. 그래서 말해줄 수 있어.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 열반적정. 불교에선 이를 사법인이라고 하지. 일종의 중심 교리야. 이런 지식이 수능 시험 범위에 있을 리가 없어. 심지어, 어제 너와 아리의 강의는 이 개념들을 제법 그럴듯하게 설명했어. 세부적으로는 다른 부분도 많았지만, 그 다른 부분들조차 아무렇게나 지어낸 게 아니라 다른 관점의 심오한 철학이 깃든 듯했지.”
…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 나와 아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렇게나 지어냈다는 말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심오한 불교 교리와 유사한 지식. 심지어, 넌 이 지식을 어디서 얻었는지도 모르는구나. 난 알 것 같아. 어제 강의한 너와 아리에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지. 너희는 둘 다 마도서를 읽은 적이 있다는 점이야.”
나는 마도서의 주인으로서 여러 차례 마도서를 읽어봤고, 아리는 공포의 저택의 첫 번째 시도 때 마도서를 펼친 적이 있다.
아리가 불안한 분위기로 입을 열었다.
“설마, 나랑 가인이 본인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마도서의 지식이 스며들었다는 이야긴가요?”
은솔 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렇게 봐. 나야 유산이 없지만, 유산을 얻은 사람들은 다들 말해왔잖아? 유산을 얻으면 관련된 지식이 자연스럽게 머리로 스며들었다고. 그 비슷한 현상이 마도서를 본 너희에게도 일어난 거지. 보통은 주인만 읽을 수 있으니 가인이만 얻어야 했을 지식이지만, 아리 너는 나름의 힘으로 마도서를 읽고도 잠깐은 버텼으니 지식 일부가 스며든 게 아닐까?”
나와 아리는 혼란에 빠졌다.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도서의 지식이 머리 안에 들어왔다고?
아리야 1회성으로 한번 본 것뿐이지만, 난 그 이후로도 지속해서 본 상황.
저 말대로라면 이미 내 머릿속 어딘가엔 마도서에 대한 지식이 책장 하나를 가득 채웠음이 분명하다.
혼란스러운 상황을 묵성 할아버지가 끊었다.
“마도서에 대한 고민은 나중에 해라. 방금 은솔이 이야기를 들으니, 이젠 나도 생각이 바뀌었다. 정말 너희가 마도서의 사악한 지식 일부를 마녀에게 전달했고, 마녀가 그로부터 깨달음을 얻었다면 이건 심각한 상황이다. 엘레나?”
“다음에 마녀가 들어오면 바로 힘을 쓸까요?”
“그게 좋을 것 같다.”
송이가 비슷하면서도 살짝 다른 의견을 냈다.
“오늘까지만 치료받는 게 어때요? 정말 진철 오빠가 곧 일어날 느낌이라 너무 아까워요. 그냥 강의 하지 말고 치료만 부탁해봐요.”
그게 될까?
“마녀는 꽤 계산이 철저하던데, 그렇게 강의 없이 치료만 부탁하면 해 주겠어?”
송이는 미묘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첫날이라면 그랬겠죠. 하지만, 지금이라면….”
“지금?”
“지금이라면 오빠가 오늘은 좀 피곤하다고 하면서 치료만 부탁해도 해줄 거예요.”
무슨 말이지?
의외로 은솔 누나도 동의하는 투로 답했다.
“확실히 내 생각에도 지금이라면 그냥 치료만 부탁해도 한 번 정도는 해줄 것 같다. 그렇게 하자. 오늘 하루 치료만 부탁하고, 치료 끝나고 쓱!”
누나는 ‘쓱’이라는 말과 함께 손으로 쓱싹 하는 손짓을 했고,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 속에서 자정이 다가왔다.
*
– 한가인
아리마가 들어왔다.
“아리마 양. 오늘은 제가 한가지 실례의 말씀을 드려야 할 듯합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강의를 준비할 시간이 하루 정도 필요할 듯합니다. 아무래도 아리마 양의 성취가 워낙 빨라 점점 격이 높은 가르침을 드려야 하다 보니, 하루 잠깐씩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군요.”
“어머! 충분히 이해합니다. 제가 비전을 탐구하는 길을 추종한 이래, 선생님처럼 현명하신 분을 뵌 적이 없습니다. 이토록 고차원적인 지식이라면 분명 선생님께서도 준비하실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다만….”
“동료분 치료는 미룰 수 없는 문제지요. 기꺼이 해드릴 테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렇게 쉬워?
뭔가 입씨름, 신경전을 생각했는데 아리마가 기꺼이 받아줘서 의아했다.
더 신기한 건 이런 흐름을 동료들 여럿은 이미 예상했다는 점이다.
혼자 바보가 된 기분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아리마는 진철 형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벽에 기댄 채 아리마와 주변 사람들을 관찰했다.
…
아리마가 오기 시작한 게 오늘로 다섯 번째인가?
첫날과 정말 많이 달라진 점들이 보였다.
첫날 아리마를 죽이고 싶어 하던 송이는 페로와 함께 아리마와 놀고 있었다.
페로가 아리마의 말 한두 마디를 따라 한다거나, 부리로 아리마의 뺨을 비비자 아리마는 마치 평범한 소녀처럼 웃었다.
승엽이도 자연스럽게 카드를 던지며 장난을 쳤고, 은솔 누나는 옆에서 아리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묵성 할아버지나 아리도 진철 형의 치료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곤 했다.
첫날과 같은 긴장감을 유지하는 건 나나 엘레나 정도밖에 보이지 않았다.
우리의 긴장이 풀린 만큼이나 아리마의 긴장도 풀렸음이 느껴졌다.
예컨대, 첫날 이후로 아리마는 더 이상 호위를 데려오지 않았다.
괴물로 변해 우리를 제압할 자신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우리가 자신을 해칠지 모른다는 걱정을 멈춘 것 같다.
또, 우리 앞에서 노예의 피부를 뜯어내며 우리가 두려워하는 장면을 즐기던 마녀는 이제 없다.
아리마는 치료 도중에 피가 튀고 잔혹하겠다 싶으면 우리보고 미리 돌아서라고 경고하곤 했다.
… 어째서 이렇게 빠르게 바뀐 걸까?
짐작은 간다.
아리마는 며칠째 진철 형을 치료하는 상황이다.
동료를 치료하는 사람에게 계속 적대감을 가지긴 쉽지 않다.
마법 연구를 위해 노예를 죽인 것? 지금도 노예를 희생해서 진철 형을 치료 중이다.
그 잔혹한 치료를 우리 스스로 요청한 시점에서 더 이상 욕하기도 힘들어졌다.
악인인 것과 별개로 외모는 솔직히 예쁘기도 하다.
그래서 확신이 섰다.
우리 머릿속에서 저 여자에 대한 ‘세탁기’가 더 돌아가기 전에 죽여야지.
역시 오늘 죽이는 게 맞다. 애초에 죽이는 것이 시련 통과의 조건인 것 같다.
이런저런 생각 중, 아리마가 말했다.
“이제 치료 막바지인데, 지금부터는 조금 잔혹해요. 다들 저택에서 나가시는 게 어떨까요?”
아리마가 ‘잔혹하다’라고 하면, 보통 사람은 맨정신으로 볼 수 없는 장면이라는 이야기다.
2시간 정도 흘렀을까? 평소보다도 굉장히 오랫동안 무언가를 하는 듯했다.
“들어오세요!”
들어가면서 엘레나에게 살짝 손짓했다. 엘레나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진철 형만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끝을 내자.
들어가자마자 진철 형에게 다가갔다.
고른 숨결. 얕은 기침 소리.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확인을 통해 확실히 형의 회복이 거의 끝났음을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물었다.
“이제 곧 깨어날 것 같습니까?”
“늦어도 2, 3시간 내로는 깨어납니다.”
치료가 끝나서일까? 아리마는 어딘가 감상적인 표정을 지었다.
이제 슬슬 엘레나에게 –
“선생님.”
“네?”
“꼭 드릴 말씀이 있는데, 괜찮으신가요?”
“하시지요.”
“둘이서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잠깐이면 충분하답니다.”
… 순간 당황했다. 대화창이 울렸다.
김묵성 : 지랄 말고 죽여라. 엘레나!
엘레나 : 거짓말은 아니에요. 정말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김아리 : 무언가 비밀이 나올지도 몰라. 거짓말이 아니라고 하니, 우리가 숨어서 지켜보자.
결국 나가서 잠깐 대화하기로 했다. 불안한 면도 없지 않았지만, 정의를 쓰는 즉시 하늘을 날아서 엄청난 속도로 이동할 수 있는 엘레나가 숨어서 지켜본다니 믿어보기로 했다.
아리마의 입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이야기가 나올 느낌이다.
— 탁!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결국 아리마의 제안대로 둘이서 대화하려고 나왔다.
어차피 죽일 텐데 대화할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뭔가 또 숨겨진 사실이 드러나는 게 아닌가 궁금하기도 했다.
“할 말이 있으신지요.”
잠시 침묵하던 아리마는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릴 적 부모님이 자신을 팔았던 이야기, 사악한 마법사가 자신을 샀고, 자신을 비롯한 아이들을 조수 겸 실험 재료로 썼던 이야기. 여러 행운과 사연이 겹쳐 마법사를 죽이고 그 연구성과 등을 강탈한 이야기 등.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부른 걸까?
“힘든 시간을 보내셨군요.”
“제가 선생님의 동료분을 치료하면서 제일 부러웠던 게 무엇인지 아시나요?”
“무엇입니까?”
“선생님의 제자분들은 선생님과 사이가 정말 좋더군요. 사제관계라기보다는 마치 친구 관계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서로 존중하고 사랑함이 느껴지고.”
그야 사제관계가 아니니까 그렇지.
“그렇습니까?”
“절 샀던 마법사도 그런 사람이었다면! 저도 조금은 다르게 살았을까요? 스승을 진정으로 존중하고, 서로 진리에 관해 탐구하며 밤새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모르지. 나도 그런 삶 살아본 적이 없어.
“그럴 수도 있겠죠.”
“저도 선생님을 모시고 싶답니다. 당신의 지혜를 배우고, 제 부족한 지식도 알려드리고 싶어요.”
“…”
주변이 침묵으로 가득 찼다. 이 마녀는 날 따라가고 싶다고 말하고 싶던 걸까?
사실 아까부터 마녀를 언제 죽여야 잘 죽였다고 소문이 날지 고민했던지라 조금 미안해졌다.
… 눈알 장아찌. 인육 소시지.
생각해보니 별로 미안할 건 없네.
슬슬 대화가 끝날 듯해서, 며칠 동안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최근의 가르침에서 뭔가 깨달음을 얻으셨습니까? 심상치 않은 성취가 있으셨던 듯한데?”
그 질문을 기다린 걸까? 마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물론이에요. 제가 지난 몇 년간 연구한 것보다 선생님께 3, 4일간 배워서 깨달은 바가 훨씬 큽니다. 제법무아! 사람의 정신이란 곧 허상. 마치 흐르는 물결과도 같은 것. 자아에 불변이란 없으며, 끝없이 변하고 흐르는 유동성의 집합체에 불과한데, 저는 왜 실체도 없는 것에 무의미하게 집착해왔을까요?”
나도 모르죠. 대체 내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이런 소리를 하는 건지도 모르겠는데.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이제 전 불변하는 정신에 집착을 버렸답니다. 기억과 자아의 연속성 따위는 무의미한 것. 구태여 집착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새롭게 태어날 준비는 거의 끝났습니다.”
혼자 대체 무슨 소리야? 내가 뭘 짐작해? 새롭게 태어나?
“다만 한가지 미련은 남았어요. 이런 점도 제가 선생님에 비해 크게 부족하기 때문이겠죠. 조금 여자로서도 살아보고 싶었거든요.”
아리마는 내 앞에서 어딘가 수줍게 웃었다.
? 이 분위기 뭔가 이상 –
…
부드럽고 따뜻하다.
순식간에 아리마가 내게 다가오더니, 무언가 부드러운 것이 내 입술에 닿았다.
난 그야말로 넋이 나가버렸다.
호텔에서 처음으로 경험한 키스에선 박하 향과 장미 향을 섞은 듯한 향기가 느껴졌다.
“아, 아, 아리마 양?”
아리마는 다소곳한 표정으로 웃었다.
“죄송해요. 제가 만나본 가장 멋진 분에게 키스 한번은 하고 끝내야 미련이 없을 것 같아서.”
이젠 진짜 못 참겠다! 아까부터 무슨 소리냐고!
“대체 아까부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새롭게 태어난다는 둥, 미련을 버린다는 둥, 대체 무슨 말을 -”
아리마는 대답하지 않고 살짝 웃더니 오른손을 자기 머리에 대고 이해할 수 없는 힘을 사용했다.
내 앞에서 아리마의 머리가 순식간에 녹았다.
10초 전, 내게 향기로운 키스를 남긴 아가씨는 목 없는 시체가 되어 내 앞에 나뒹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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