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130)
129화 – 107호, 관문의 방 – ‘에스퍼 호의 비밀’ (20)
[사용자 : 한가인(지혜)날짜 : 46일 차
현재 위치 : 계층 1, 107호(관문의 방)
현자의 조언 : 2]
– 한가인
지금 우리가 시간을 돌아온 상태라는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
한참 동안 상태창에 적힌 ‘과거의 나’가 남긴 글을 정리했다.
현시점에선 알 수 없지만, 이 글을 쓰던 나는 아주 다급한 상황에서 적었던 것 같다.
알아보기 쉽게 적힌 글이 아니라 그냥 내용이 이리 뛰었다 저리 뛰었다 하는 정신없는 정보의 집합체에 가까웠다.
내 설명을 듣던 아리가 한숨을 쉬었다.
“거의 생각의 흐름대로 적은 느낌이네.”
“엄청 급했나 봐. 글씨체도 거의 날아가는 수준이야. 일단 내가 이해한 대로 요약해볼게.
배 어딘가에선 인간을 제물로 쓰는 사악한 의식이 진행 중이고, 묵성 할아버지는 이 장소에 끌려가서 돌아가셨어. 엘레나가 정의를 써서 선원, 승객들을 전부 죽이니까 악마가 시간을 뒤로 돌린 게 현시점이라는 것 같은데?”
“그 의식에는 우리의 나이, 출생지 정보가 필요하고?”
“응. 그리고 의식이 일어나는 장소의 천장엔 시계가 있고, 지금은 1을 향해있대.”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기준은 뭘까?”
“애매하게 써놔서 모르겠네. 이걸 쓰던 나도 확신하지 못한 모양인데?”
한참 듣고 있던 엘레나가 입을 열었다.
“대충의 상황은 알 것 같네요. 일단은 과거의 가인 씨가 남긴 지시대로 행동해봐요. 지시에 따르면 크게 두 가지 일을 하라는 것 같은데?”
“네. 첫째, 저녁의 디너 파티는 적의 역린인 듯하니 한번 망쳐봐라. 승무원이 총을 가지고 있으니 주의해라. 이렇게 적어놨네요.”
“승무원이 총이 있다면서 우리가 어떻게 하라는 거야? 할아버지가 사라지면서 우리도 총이 -”
“총이?”
“있네.”
아리가 당황하며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권총이 왜 아리에게 가 있지?
물론 있어서 다행이다. 계속 말을 이었다.
“둘째, 배 지하엔 지하감옥 비슷한 공간이 있다. 한번 확인해볼 것.”
송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하감옥이라니…. 배에 있을 만한 장소는 아니네요. 애초에 어떻게 갈지도 모르겠고.”
이것 외에도 과거의 내가 생각의 흐름대로 적은 듯한 여러 정보를 전달했다.
짐작은 했지만, 확인 차원에서 엘레나에게 질문했다.
“혹시 지금 정의를 쓸 수 있습니까?”
엘레나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해요. 이런 일이 처음이라 신기한 감각이긴 한데, 증거가 부족하고 이런 문제가 아니라 힘 자체가 말라붙었어요. 평소엔 물통에 물이 가득 차 있었지만, 뚜껑을 열기가 어려운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물통 자체가 비었네요.”
아리가 걱정스러운 분위기로 물었다.
“회복하고 있어? 다시 쓸 수 있다면 언제쯤?”
“회복은 하고 있어요. 하지만 최소 2, 3일은 있어야 할 것 같네요.”
2, 3일은 관문의 방 기준으론 너무 긴 시간이다.
사실상 네 번째 시련에선 정의를 더 쓰지 못할 모양이다.
내가 남긴 메모 중 딱 두 가지 단어만큼은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땡벌’, ‘선배’
대체 이건 뭔 소리야? 모두가 고개만 갸웃거리다가 객실 밖으로 나왔다.
객실 바깥으로 나오자 또 두 가지 변화가 발생했다.
먼저, 페로가 어디선가 날아왔다.
상태창의 메모에 따르면 송이가 임기응변으로 내보냈다던데, 별일 없이 잘 있었나 보다.
페로는 시간 역행의 영향을 받지 않은 걸까?
어쩌면 단순히 배 바깥으로 나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페로와 송이가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하듯이 서로 볼을 비비던 중, 시나리오가 갱신됐다.
내용 대부분은 우리의 현재 상태를 설명하는 평이한 내용이었지만 한 가지 유의미한 내용이 있었다.
에스퍼 호의 선원과 승객들이 ‘계약의 시계’의 바늘이 움직이자 두려움에 빠졌다는 것.
객실 바깥으로 나와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선원과 승객들은 우리를 신경 쓰지도 못한 채 자기들끼리 삼삼오오 모여서 극도로 불안한 표정으로 이런저런 대화를 하느라 바빴다.
자기들끼리 대화하다가도 틈틈이 우리에게 디너 파티에 꼭 오라는 이야기는 했지만, 그 이상으로 우리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는 듯했다.
그 광경을 관찰하던 아리가 낙관적인 견해를 꺼냈다.
“이 상황, 나쁘지 않네. 정보의 비대칭이 발생한 느낌이야.”
송이가 질문했다.
“정보의 비대칭?”
“시간 역행 이전의 기억을 유지하지 못한 건 모두가 마찬가지야. 하지만 우리는 가인이 상태창 덕에 제법 많은 정보를 얻고 돌아왔잖아? 반면에 저 사람들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어. 그냥 ‘계약의 시계’의 바늘이 움직인 것만 알고 있을 뿐이지.”
듣다 보니 새삼 궁금해졌다.
“그 계약의 시계의 바늘이 움직인 이유가 뭘까? 과거의 나도 애매하게 써놨던데.”
“정확히 뭐라고 적었다고 했지?”
“/시계의 숫자 = 시간 역행 횟수?/ 이렇게 적어두고 시간 역행 횟수 위에 두 줄 그었어.”
“뭐라는 거야? 시간 역행 횟수가 맞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좀 이해할 수 있게 적으면 안 돼?”
“그걸 지금의 내게 따지면 어떡하냐. 아마 적을 때의 나도 확신이 없었던 모양인데?”
엘레나가 끼어들었다.
“자~ 우리 다음 계획에 집중해요. 디너 파티까지 반나절은 남았으니까 그 전에 배 지하에 가봐야죠.”
한참 동안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무력의 부족이다.
정의도 소진된 지금, 우리는 더 이상 에스퍼 호의 승무원들과 정면으로 싸울 힘이 없었다.
무언가 숨겨진 배 지하라면 분명 순찰하는 승무원도 있을 텐데….
고민하다가 조언을 한번 써봤다. 모호한 답변이 나올 것 같긴 하지만 그런 답변조차 필요했다.
“아, 또 뭐야 대체….”
아리가 물었다.
“뭐라고 나왔는데?”
“그냥 ‘성동격서’ 네 글자 딱 주는데?”
송이가 질문했다.
“사자성어인가요? 무슨 뜻이에요?”
“‘동쪽에서 소리를 내고 서쪽에서 습격한다’였나? 대충 다른 장소에서 주의를 끌고 목표하는 장소를 공격한다는 뜻일걸.”
엘레나가 무릎을 ‘탁’ 쳤다.
“조언의 뜻을 알 것 같아요!”
*
– 엘레나
살짝 빙그르르 돌며 내 모습을 살폈다.
바깥에서는 한 번도 입어본 적 없는 화려한 이브닝드레스는 자주색과 은색이 섞여서 밤하늘의 은하수를 수놓은 듯했고, 드레스 위에 걸친 숄은 하얗고 보드라운 털로 뒤덮여서 겨울 산의 토끼를 연상시켰다.
무엇보다도 내용물이 나!
아, 이런 건 좀 부끄럽네. 그래도 이 정도면 모두의 시선을 끌 만하다.
이번 계획에서 내 역할은 ‘어그로’니까 이 정도 화려함은 필요하지.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있다.
이 모습을 봐줬으면 하는 사람들은 이미 극도로 긴장한 상태로 지하로 출발한 지 오래였다.
아까 전, 내가 꾸미던 도중에도 동료들은 지하 탐사 계획을 세우느라 정신이 없었고,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솔직히 조금은 섭섭했다.
마지막으로 화려함의 꽃을 장식할 캔들 라이터를 드레스 안쪽에 숨겼다.
아직 디너 파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남은 상태.
하지만 이미 파티를 위한 복장을 한 채로 선박을 거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파티장 근처로 가자 사람들이 자연스레 내 주변에 몰려들었다.
“오오! 제 눈이 멀 것 같습니다. 하늘의 별이 떨어진 겁니까? 레이디께서는 -”
이런 멘트. 좀 아니지 않나요? 너무 올드해.
그래도 반응해줘야지.
“전 엘레나 이바노프라고 해요.”
“하하하! 레이디 엘레나. 전 스티븐슨이라고 합니다. 저에게 레이디를 에스코트할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이번 멘트는 좀 심했다. 100년 묵은 멘트 아니야?
그래도 팔을 내민 채로 스티븐슨이라는 남자와 함께 파티장 근처로 움직였다.
스티븐슨을 부러워하는 티를 역력히 내는 남자들 여럿이 주변에 나타난 걸 보니 제법 웃기긴 했다.
파티장으로 들어서려 하자 승무원이 나타났다.
“아직 디너 파티 시간이 아닙니다.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시간은 저도 알고 있어요. 다만, 파티장 내부가 그렇게 화려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한번 구경하는 것도 안 될까요?”
나름대로 간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승무원에겐 통하지 않았다.
“레이디. 죄송합니다. 아직 준비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저녁쯤에는 -”
“정말 안될까요?”
지금 난 한 마리의 사슴이 되어 눈망울을 촉촉이 물들인 채 승무원을 바라보았다.
승무원은 당황해서 뒤로 물러서면서 또 ‘안된다’라고 말하려 했다.
이 남자 독한데? 하지만 내겐 다른 길이 있지!
스티븐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파티장을 미리 한번 보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가요? 어째서 객실 밖으론 발 한번 뗄 수 없게 하는지 모르겠답니다. 역시 객실로 돌아가야 할까요?”
말하면서도 이상하네. 승무원은 나보고 객실로 돌아가라는 소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하지만 옆의 남자에겐 그 말로 충분했다.
“자네! 당장 비키지 못하겠나? 그냥 한번 구경하는 것 가지고 왜 이렇게 요란을 떠는지 모르겠군. 비켜!”
역시 통했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 난 영혼을 담아 꾸몄다.
이 배의 선원과 승객은 결코 평범한 집단이 아니고, 겉으로 보이는 모습 이상의 내밀하고 사악한 관계가 있는 상황이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꾸며서 나름대로 0.7 천사는 되었다고 생각하며 나왔고, 나오자마자 수많은 사람이 내 주변에 몰려들었다.
그중에서 다른 남자들을 제치고 자신 있게 앞으로 나와서 내게 말을 건 남자.
분명히 이 사악한 집단 내부에서 나름대로 높은 서열을 가졌겠지?
짐작대로 스티븐슨이 한마디 하자, 선원은 나를 대할 때와 달리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물러섰다.
파티장 내부는 이미 화려했다.
아직 파티 시간이 되지 않아 사람은 몇 없었다.
나와 함께 들어온 스티븐슨이 한참 자기 사업이 어쩌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대충 10분 정도 비위를 맞춰주며 디너 파티때도 부탁드린다며 그의 기분을 띄워준 후, 잠시 주변을 혼자 감상하고 싶다고 하자 그는 떠나갔다.
아마 자기 혼자서는 무슨 밀당을 하고 있다고 생각 중이려나?
아무래도 좋다. 이제부터 성동격서니까!
성동격서.
한국에 살게 된 지 제법 오래되긴 했는데, 여전히 이 이상한 한자 단어들엔 익숙해지지 않네.
애초에 한국은 왜 이런 이상한 중국 말을 쓰는 거야?
동쪽에서 소리를 내고 서쪽에서 덮친다?
그러면 그냥 줄여서 동악서펀이 좋지 않을까?
동쪽에서 악! 서쪽에서 펀치!
이런 느낌으로 아무 생각이나 하면서 라이터를 꺼냈다.
이제 동쪽에서 소리를 낼 시간이다.
*
– 한가인
계단 근처에서 서성이던 중, 요란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불이야!”
“파티장에 불이 났습니다!”
과거의 내가 남긴 충고. ‘파티는 저들의 역린이다.’
과연,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엘레나가 파티장에 불을 붙이자 배 전체가 시끄러워지더니 승무원이고 승객이고 할 것 없이 죄다 파티장으로 달려갔다.
송이가 걱정스러운 투로 말했다.
“엘레나 언니는 괜찮을까요?”
“별걱정 하지 않아도 될 거야.”
정말로 별 걱정하지 않았다. 이미 도플갱어 열차에서 엘레나의 소름 돋는 연기력을 경험했다. 설령 붙잡히더라도 그냥 눈물 한번 흘리면서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하면 대충 봐주지 않을까?
위험한 건 엘레나보다는 우리겠지.
셋이서 서로를 한 번씩 돌아본 후, 계단을 통해 에스퍼 호의 지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