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134)
133화 – 107호, 관문의 방 – ‘에스퍼 호의 비밀’ (24)
– 김아리
— 쾅!
바닥이 마치 스프링처럼 튀어나오며 가인이가 벽면을 향해 날아갔다.
나와 송이가 모두 화들짝 놀랐다. 나는 즉시 방아쇠를 당기고, 송이는 다시금 페로에게 지시해서 해리슨에게 달려들게 했다.
— 탕! 탕!
— 끼에엑!
요란한 폭음과 함께 그로테스크의 사람 머리만 한 부리가 해리슨의 남은 살점을 헤집었다.
하지만, 이제 역시 의미가 없었다. 해리슨은 이미 배와 자신을 구분할 수 없게 변한 상태다.
남은 살점 따위는 그저 잔여물에 불과하다.
과연 해리슨은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바닥에서 다시금 살점을 뒤섞어서 얼굴 비슷하게 생긴 끔찍한 형체를 만들어냈다.
배 자체를 부숴야 하는 걸까?
답이 없다. 폭탄을 터트리는 것도 아니고, 권총 따위로는 불가능하다.
페로의 힘으로도 답이 없고, 차진철이 살아와서 별이라도 소환해야 가능할 일이다.
잠시 소강상태가 찾아왔다.
가인이가 일격에 기절한 후, 해리슨은 직접적인 공세를 더 취하지 않았다.
계약을 떠올려보자 이유가 짐작이 가기 시작했다.
“거기, 두 어여쁜 아가씨들. 내 말을 듣지 않으시겠나?”
“가인이를 제물로 바치고 나머지는 에스퍼 호의 선원이 될 생각 없냐고?”
“…”
“맞지?”
“아가씨, 이름이 아리라고 했나? 넌 아까부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하는 것 같군.”
“뻔하잖아? 배와 일체화한 힘이 뭔지는 몰라도 악마가 내린 힘일 테고, 힘을 유지하려면 악마와의 계약도 유지해야겠지. 계약을 유지하려면 제물과 연회를 바쳐야 한다면서?
제물은 가인이를 바친다 쳐도 연회는 당신 혼자서 못하잖아? 다른 선원이나 승객은 싹 배의 가구로 만들어버린 상태네. 최소한 저 꼴로 춤은 못 추겠지.
에스퍼 호엔 선원이 필요해. 영원히 이 배와 함께 대양을 떠돌며 연회를 즐기고 제물을 바칠 선원들이.”
“이것 참, 넌 너무 똑똑하군. 조금 걱정스러운데…. 난 똑똑한 선원은 취향이 아니라서.”
“그래봐야 네겐 대안이 없지. 이 망망대해에서 갑자기 선원을 구할 자신이 있어?”
“나름대로 신경전을 벌이는 살벌한 관계도 재미는 있겠지. 그래서 내 제안받을 생각은 있으신지?”
“내용을 좀 바꾸자. 내가 제물이 될게.”
“히익!”
송이가 놀라서 콧소리를 내고, 순간적으로 배 전체가 떨렸다. 해리슨 나름대로 놀랐다는 표현일까?
“…대관절 무슨 말인가? 어차피 저놈은 이대로 두면 곧 죽는데, 왜 그런 무리수를 두지?”
그 말에 웃음이 나왔다. 왜 곧 죽을 사람을 위해 무리수를 두냐고?
성공만 하면 이 시련을 바로 끝낼 자신이 있으니까!
해리슨은 내 웃음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갑자기 갑자기 어이없는 말을 꺼냈다.
“아하! 설마 했는데 이게 말로만 듣던 순수한 사랑인가? 확실히 아가씨가 제물이 되고, 이 청년이 선원이 된다면 계약의 힘으로 그는 죽더라도 부활하겠지. 본인이 죽더라도 그를 살릴 생각인가? 감동적이네.”
어이가 없어서 그냥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해리슨은 한참 뭔가 고민하는 듯하더니 결정을 내렸다.
“나쁘지 않군. 나쁘지 않아. 아가씨는 아까부터 내 마음을 읽는 듯해서 좀 거슬렸거든. 이 시건방진 놈을 살리는 게 불쾌한 면은 있지만 이놈이 있으면 다른 아가씨들을 통제하는 건 쉬워질 것 같군.”
그 말을 끝으로 배 여기저기서 전선이 살아있는 촉수처럼 움직이며 날 들어 올렸다.
플랜 Z, 이제 시작이구나.
불안한 면이 없지 않아서 마지막까지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두려 했는데, 결국 그 순간이 왔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게. 저 바닥에 접착된 벌레들처럼 아가씨를 고통 줄 생각은 없으니까. 나는 깔끔하게 끝내드리지. 대신 나이와 출신지를 말해라.”
“나이는 몰라. 출신지는 호텔 파이오니어.”
해리슨은 내 대답을 듣고 비웃으며 답했다.
“설마하니 그게 마지막 수단인가? 거짓말로 날 속이는 것?”
“…”
“혹시 거짓말이 아니고 진짜 나이를 모르고 출신지도 정확히 몰라서 무슨 호텔이라고밖에 답할 수 없나? 자기 뿌리를 모르는 것은 분명 고통이지. 안타깝네. 하지만 대답하는 본인도 나이와 출신지를 모르니까 제물로 바칠 수 없으리라는 게 아가씨의 마지막 계획이었다면…. 좀 실망스럽군.”
이 선장은 참 말이 많구나. 혼자 지하에 갇혀있으면서 많이 외로웠던 모양이다. 게다가 내가 본인을 속이리라는 확신이 있던 것 같기도 하다.
“…”
“하하! 저 바닥의 벌레들과 내가 똑같다고 생각했다면 실망이다. 네가 속이더라도 난 얼마든지 알아낼 방법이 있다.”
그 말을 끝으로 배 전체에 알 수 없는 문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내 아래에서 검은 손들이 나타났다. 손들은 천천히 전선을 타고 올라와 내 몸을 붙들기 시작했다.
한숨을 쉬면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까부터 두려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송이가 보였다.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엘레나, 발톱으로 부리에 낀 살점을 빼고 있는 페로.
시시각각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가인이까지.
내 앞에 거대한 거울이 나타났다. 내 나이와 출신지를 알아내기 위한 수단인가?
거울은 날 비췄고, 거울 속에 수없이 많은 내가 나타났다.
어딘가의 나는 총탄이 날아다니는 전쟁터에서 벽돌 뒤에 숨은 채 떨고 있었다.
어딘가의 나는 은하수를 넘어 끝없이 달려가는 열차에서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고 있었다.
어딘가의 나는 고함지르는 선사의 인류 사이를 달리며 최초의 씨앗을 찾아 헤맸다.
어딘가의 나는 위치를 알 수 없는 시공의 미아가 된 기이한 별의 풍광 속에 있었다.
어딘가의 나는 끝없이 펼쳐진 보리밭 한가운데서 누군가의 고백을 듣고 있었다.
내 짧지 않은 삶 속에서 있었던 수없이 많은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 정보를 받아들이던 해리슨이 경악을 토해냈다.
“대체! 이게 뭐지? 어떻게 이렇게 이상한…. 시간여행이라도 했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거울은 내 과거를 끝없이 돌아간 끝에 어떤 화려한 호텔에 도착했다.
끝없는 망망대해의 한복판, 아직도 인류에게 미지로 남은 심해의 지면에서 솟아난 호텔.
나는 바다에서 태어났다.
— 철컹!
배 전체를 울리는 진동. 이미 경험해본 섬뜩한 신호!
계약의 시곗바늘이 3을 향해 돌아갔다.
그 순간 해리슨의 얼굴을 구성하던 살점들은 있는 힘껏 일그러지며 비명을 질렀다.
“아니! 아니야! 이건 말도 안 된다! 넌…. 넌 대체 뭐지? 나이는 없고 바다에서 태어났다고? 인어도 아니고 무슨 인간이!”
“내 나이는 나도 궁금했는데.”
고오오오오!
끝없는 깊고 푸른 바다 전체에서 피부로 느껴질 정도의 거대한 소리가 들려온다.
해리슨은 분노에 찬 표정으로 배의 전선을 촉수처럼 뽑아내서 우릴 꿰뚫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계약이 파기되며 그에게 주어진 모든 악의 권능이 소멸하기 시작했다.
전선은 그저 힘없는 노인의 팔처럼 축 늘어지고, 배와 뒤섞인 살점들이 배와 분리되며 떨어져 나갔다.
위에서 떨어지자마자 송이, 엘레나 등이 있는 장소로 움직였다.
그새 페로가 가인이도 물어왔는지 모두 한 장소에 있었다.
송이가 바로 말을 걸어왔다.
“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
“별것 아니야. 마르카스는 지상을 증오해서 지상의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걸 즐긴다길래, 혹시 바다에서 태어난 사람은 제물로 바칠 수 없는 게 아닐까 추측했을 뿐이야. 나이가 모호하다는 점도 조건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했고. 정확히 맞아떨어졌네.”
“그 와중에 그런 생각을 -”
— 쿠궁!
배 전체가 흔들리더니 갑자기 여기저기가 분해되기 시작했다!
“꺄아아악! 이게 무슨 일이죠?”
“아! 설마 했는데! 사람의 살점이 배 여기저기로 스며든 상태에서 살점들이 싹 사라지니까 배가 붕괴하나 봐.”
루우우— 아아아—!
바다에서 세상 전체를 덮을 듯한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마르카스의 노래일까?
일찍이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은 어부나 선원들은 바다의 광포함과 변덕스러움을 두려워하며 잔혹한 여신으로 숭배했다.
바다의 두려움을 형상화한 듯한 잔혹한 악마는 몸을 뒤틀어서 한순간에 에스퍼 호를 붕괴시켰다.
우리는 정신없이 페로에 매달렸다. 페로는 불평하는 듯하면서도 앵무새의 모습으로 돌아가진 않았다.
오히려 의식을 잃은 두 남녀, 가인이와 엘레나를 본인의 날개와 촉수를 뒤섞은 듯한 팔로 붙들었다. 나는 페로의 목을 붙든 채로 버텼다.
놀랍게도 새 주제에 변신 후엔 하늘을 날 수 없는 페로는 바다에 떠 있을 수는 있었다.
우리는 마치 거대한 오리의 등위에 올라탄 햄스터 같은 느낌으로 그로테스크의 위에서 버텼다.
“제발, 제발 살려줘!”
… 사방에서 비참한 몰골들의 사람이 나타났다.
인간의 형상을 완전히 잃었던 해리슨은 계약의 파기와 동시에 죽은 것 같은데, 배와 어설프게 섞여서 인간의 형상을 유지 중이던 사람들은 저 몰골이 되고도 죽지 않고 헤엄쳐서 우리에게 왔다.
다행히 우리가 나서기도 전에 페로가 하나하나 부리로 도로 바다에 밀어 넣었다.
그 누구보다 죽음을 두려워하며 악마와 손을 잡았던 선원들은 정해진 운명대로 바다의 품으로 돌아갔다.
/참가자 여러분! 네 번째 시련, ‘에스퍼 호의 비밀’의 통과를 축하드립니다./
공간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
– 김아리
익숙한 휴식 공간으로 들어오자마자 나와 송이는 다급히 가인이부터 살폈다.
호흡이 정갈한지, 외상과 내상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봤다.
옆에서 송이가 긴장 가득한 표정으로 내 얼굴만 쳐다봤다.
“오빠는 괜찮아?”
“당장 죽을 정도는 아닌 것 같아. 내버려 두면 확실히 죽겠지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해?”
대답 대신 바로 주사기로 내 피를 뽑았다. 내 행동을 보고 이해한 송이도 바로 수혈을 위해 가인이의 팔을 내 쪽으로 가져왔다.
두 번, 세 번, 연거푸 내 피를 뽑아서 가인이에게 주입했다.
“이러면 가인 오빠가 회복할 수 있을까?”
“이것 만으론 어려워. 내 피에 담긴 회복의 힘은 내가 거의 죽기 직전이 되어야 강해지고, 평소엔 그렇게 강하지 않아.”
말하다가 순간 섬뜩해졌다. 설마 그 말을 듣고 송이가 페로를 부려서 날 빈사로 만들어서 피를 뽑아내진 않겠지?
… 다행히 송이는 전혀 그럴 기미는 없었다. 괜한 의심병이었구나.
호텔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생긴 의심병이 관리국을 경험하며 더 심해졌다. 이젠 불치병이 된 지 오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해?”
“나도 모르지. 다음 시련의 무대에 병원이라도 있으면 살겠지. 아니면 우리끼리 깨야 해.”
다음으론 엘레나를 살폈다.
엘레나 쪽은 가인이와 달리 신체적인 문제는 없어 보였다.
에스퍼 호의 선원들이 엘레나에게 수면제라도 쓴 걸까? 그냥 얌전히 잠들어 있다.
빈사 상태가 된 가인이,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든 엘레나 곁에서 나와 송이는 서로 한숨만 쉬면서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이윽고 길고 길었던 관문의 방의 마지막 시련이 시작됐다.
*
[사용자 : 한가인(지혜)날짜 : 46일 차
현재 위치 : 계층 1, 107호(관문의 방)
현자의 조언 : 0]
– 한가인
— 덜컹! 덜컹!
— 드르륵!
정신이 혼미하다. 무언가에 실려서 다급히 실려 가는 소리가 들린다.
…
아, 내가 실려 가는 중이구나. 그걸 깨닫자 바깥의 소리도 흐릿하게 들려왔다.
병원일까?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내가 실린 들것을 움직이며 정신없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옆에 흐릿하게 보이는 사람은 엄마? 엄마가 대체 이 장소에 어떻게 나타났지?
아무래도 다음 시련으로 넘어온 모양이다.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일까?
이 와중에도 호텔은 착실히 알림을 띄웠다.
어처구니없게도 주변의 소리도, 상황도 모든 게 흐리멍덩하게 보일 정도로 엉망인 몸 상태인데도 호텔의 알림 만큼은 선명하고 명쾌하게 나타났다.
/마지막 시련까지 도달하신 것을 축하 드립니다!
곧 참가자의 유산과 축복이 봉인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마지막 시련에서 유산과 축복 따위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최종시련, ‘퍼펙트 라이프’. 시작합니다./
‘퍼펙트 라이프’
그 단어를 끝으로 내 의식은 까마득하게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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