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142)
141화 – 107호, 관문의 방 – ‘퍼펙트 라이프’ (32)
– 한가인
아리가 사진을 보낸 강릉 해안가 인근 카페에서 매일 멍하니 커피를 마신 지도 4일이 흘렀다.
정말 송이가 짠 엘레나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방식이 통할까?
긴가민가했지만, 딱히 다른 방식을 떠올리지도 못했기 때문에 그대로 따랐다.
처음 하루 이틀만 해도 송이와 아리는 뭔가 준비하는 듯했다.
그러나 3일 째부터 둘은 그냥 원래 놀러 왔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바닷가에서 놀기 시작했다.
어이가 없다 싶으면서도, 동시에 이해가 가기도 했다.
이런 위태로운 시련 속에서 넋 놓고 휴식을? 이라고 말하기엔 호텔에 들어온 이후로는 언제나 위기의 연속이고, 매일 매일 고난의 행군이 반복된다.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인 시기에도 사람은 잠을 자고 밥을 먹어야 한다. 물론, 스트레스도 풀어야 한다.
오늘은 위기이므로 휴식을 취해서는 안 된다는 발상은 호텔에선 의미가 없다.
내일도 위기고 모래도 위기일 테니까.
이런저런 상념 속에서 커피를 마시던 중, 마침내 기다리던 사람이 도착했다.
— 딩 동!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자마자 카페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더운 날씨인데 옷으로 꽁꽁 싸매고 얼굴을 마스크로 죄다 감싼 사람이다.
그런데도 전체적인 체형과 흩날리는 금발만으로도 정체를 알아내기에 어려움이 없었다.
어떻게 내 자리로 불러올까? 같은 고민은 불필요했다.
엘레나가 카페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우린 시선을 마주쳤고, 동시에 엘레나의 눈이 커졌다.
엘레나는 어딘가 홀린 사람처럼 멍하니 카페라떼를 한 잔 주문하고 내 앞에 와서 앉았다.
“… 제게 무언가 하실 말씀 있으세요?”
“제가 말하기보다는 엘레나 양이 하고 싶은 말씀을 하시는 쪽이 좋을 것 같네요.”
“역시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옷과 마스크로 다 가렸는데.”
“…”
“가끔 이상한 꿈을 꿨어요. 알 수 없는 사람들과 만나서 괴물로 가득한 이상한 장소를 돌아다니는 꿈. 그 장소는 어딘가의 호텔이라는 사실만 알았죠. 제 말을 이해하시겠어요?”
슬슬 거의 깨어난 것 같다. 공연히 자극하기보다는 스스로 떠올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자는 우리 계획이 적중했다.
“이해하고 있습니다. 더 말씀해 보시죠.”
“예전엔 그냥 막연한 꿈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전 어릴 때부터 오컬트 같은 것에 관심이 많았으니까 그런 부분이 반영된 꿈을 꾸는 줄 알았어요. 그러다가 최근에 믿을 수 없는 경험을 했죠. 하늘에서 내려온 듯한 새와 마법사처럼 느껴지는 여자아이를 봤어요. 그들을 본 이후로 꿈의 내용이 더 명확해졌어요. 꿈에서 그 새와 그 소녀가 나오기 시작했거든요.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당신도 봤어요. 지금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셨지만….”
“이제 거의 기억이 돌아오셨군요.”
“역시 그건 단순한 꿈이 아니었군요? 뭔가요? 설명해주세요.”
으아~! 마지막 시련도 이제 거의 끝났구나. 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 같은 엘레나에게 상세히 설명했다.
우리는 호텔이라는 기묘한 장소에서 형언할 수 없는 이질적인 존재들과 맞서 싸우며 올라가고 있다.
이 장소는 호텔에서 마련한 시련의 장소이며, 엘레나의 소원이 반영된 환상의 세계라는 점도 알렸다.
내 말을 듣던 엘레나의 표정에 허망함이 서렸다.
…
그간 이뤄냈다고 생각했던 연예인으로서의 성공이 전부 환상임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다행히도 내 말을 믿지 못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우리는 말없이 커피를 마시며 바닷가를 내다보았다.
바깥에선 엘레나가 ‘마녀’라고 칭한 아리가 송이 입에 모래를 들이붓다가 송이에게 차여서 뒤로 넘어지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페로는 해안가의 포장마차에서 닭꼬치를 훔쳐먹다가 포장마차 주인에게 쫓기고 있었다.
… 쟤네 대체 뭐함? 왜 나만 일함?
“참 활기차게 놀고 있네요.”
“그러게요. 하는 짓을 보고 있으니까 진짜 딱 중학생 같고, 닭둘기 그 자체네.”
엘레나의 반응은 나와는 달랐다. 어딘가 아련한 표정으로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잠시 제 말을 들어주시겠어요?”
“아까부터 듣고 있잖아요? 세상에 엘레나의 말을 듣기 싫어하는 남자는 없을걸요?”
엘레나도 피식 웃은 후, 제법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부모님은 제가 어릴 때만 해도 굉장히 성공한 분들이셨어요. 그때만 해도 여름마다 부모님과 함께 교외의 별장에 가던 기억이 생생하답니다.”
그 말과 함께 시작된 엘레나의 이야기는 예전부터 어렴풋이 들어왔던 이야기들이었다.
엘레나가 어릴 때만 해도 공직사회에서 출세 가도를 달리셨던 엘레나의 아버지.
가정은 화목했고, 부유했다. 그때만 해도 엘레나의 세계엔 한점 불행도 없었다.
어느 날부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시작됐다.
갑자기 아버지는 직장을 잃었고, 별장도 집도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문제는 직장과 재산을 잃은 것조차 시작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매일 수상쩍은 사람들이 엘레나 아버지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엘레나의 아버지가 기자들과 만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점점 더 이해하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마침내 엘레나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감옥에 들어가고, 병원에 실려 가기 시작했을 때, 긴 망명이 시작됐다.
딱히 무슨 말을 덧붙일 게 없어서 말없이 들었다. 솔직히 뉴스에서나 보던 이야기다.
러시아에서 반은 차르가 됐다는 그 독재자가 반대파를 숙청한다는 뉴스야 하루가 멀다고 나왔지만, 그 실제 사례를 눈앞에서 보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막연히 때가 되면 좋아질 것이다? 거짓말이다.
그 독재자는 아직도 팔팔하고, 자국 내에선 지지율도 엄청나다고 들었다.
엘레나가 한참 동안 이야기하는 사이, 수영복을 입은 채 위에 얇은 옷을 걸친 송이와 아리가 몰래 들어왔다. 둘은 나와 엘레나가 대화하는 광경을 보더니 조용히 우리 반대편 칸에서 숨죽이고 앉았다.
… 쟤네는 진짜 뭐 하는 걸까? 저런다고 숨어지나? 애초에 들어오자마자 엘레나가 이미 움찔거렸다.
두 사람 덕택에 엘레나의 입도 잠시 닫혔다.
“재밌는 애들이죠?”
“그러게요. 저도 저런 시기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저런 시기요?”
“제가 그…. ‘호텔’? 호텔 바깥으로 나가서 진짜 세상으로 돌아가면, 전 아마도 배우의 꿈에 도전하겠죠. 제가 최선을 다하고, 운이 따른다면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을 만큼 크게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분명히 성공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 말은 진짜다. 엘레나의 연기력은 단편적으로만 경험하긴 했지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이 엄청난 외모! 배우의 세계에선 최고의 무기가 아닌가?
실패하면 그게 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엘레나 자신도 알고 있겠지. 모른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엘레나의 표정은 그다지 밝아지지 않았다.
“제가 미래에 아무리 성공한다 해도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일도 있죠.”
“예?”
“그저 도망 다니고, 숨어다니며 잃어버린 시간. 가인 씨는 어떤가요? 아까 잠시 말씀하시기로는 고등학생이라고 하셨죠?”
“입학 전에 잡혀 오긴 했지만, 합격은 했으니까 반은 대학생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아마 꽤 즐거운 10대 시절을 보내셨을 것 같아요. 친구도 많이 사귀시고, 추억도 많이 쌓으시고.”
“한국에서 중고등학생들 사는 게 그렇게 재밌지는 않아요. 막상 제 머릿속엔 입시 공부하던 기억만 잔뜩 남아있는데.”
“최소한 자기 발전을 위해 투자한 시간 아닌가요? 저처럼 피난 다니면서 장롱 속에서 숨죽이고 반나절을 보낸다던가, 부모님이 평소보다 늦게 오실 때마다 혹시 돌아가신 게 아닐지 두려워하며 시간을 보내신 건 아니죠?”
이상하다.
뭔가 이상하다. 이게 아닌데?
엘레나의 목소리에서 감정이 더욱 들끓기 시작하는 게 느껴졌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건너편의 송이와 아리도 당황하며 우리 쪽을 돌아봤다.
아리는 열심히 손짓으로 ‘뭔가 해봐!’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아니 나보고 어쩌라고? 엘레나가 혼자 이야기하다가 혼자 터널에 들어갔는데?
“저도 알아요. 제 나이가 대단히 많은 것도 아니고, 젊은 시절 내내 고생하며 보낸 나이 든 분들이 들으면 겨우 20대에 무슨 소리냐? 하실지도 모르죠. 하지만 무슨 상관이에요? 제게는 인생의 절반이 넘는 시간을 도망 다니며 허비했다는 절망이 마음속에 가득한데!”
“저기…. 엘레나? 조금 진정하시고 일단 -”
엘레나는 더 이상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왜 내 인생은 이런 식일까? 나도 행복하게 살고 싶었어. 아리처럼! 송이처럼! 여름엔 바닷가에도 가보고 싶었어. 겨울엔 스키도 타보고 싶었어. 주말엔 가족들과 영화도 보고, 강아지나 고양이도 길러보고 싶었어. 학교 다니면서 어릴 때부터 친한 친구들도 잔뜩 만들어보고 싶었어. 엄마 친구 아들, 아빠 친구 딸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었어!
당신은 한 달 동안 국경을 다섯 번 넘어본 적 있어? 차 한잔 마실 때마다 겁에 질려본 적 있어? 길에서 우연히 모자를 쓴 남자를 만났는데, 잠시 후 생각해보니 그 남자가 두 달 전 국경을 넘기 전에도 길가에서 봤던 사람이라는 걸 알고 소름이 돋아본 적 있어? 아버지의 인생을 망치고, 나를 하염없이 도망 다니게 만든 사람이 승승장구하면서 나라를 살린 지도자라고 뉴스에 나오는 장면을 본 기분은 어떨지 생각해본 적 있어?”
당황한 아리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그!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은데, 나도 그렇게 행복한 10대를 보낸 건 아니고 -”
“아니 멍청아! 좀 설득이 될만한 말을 해보라고!”
“엘, 엘레나 언니? 진정해보세요. 수영이나 스키는 호텔에서도 할 수 있거든요?”
“넌 그걸 위로라고 하냐?”
“그럼 오빠도 아무 말이나 해봐요!”
“에, 그 독재자는 결국 때가 되면 총 맞아 죽지 않을까요?”
“와! 참 위로된다! 이러면서 우리에게 잔소리했어!”
엘레나는 잠시 우리끼리 떠드는 광경을 어딘가 아련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
방금,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 느껴졌다.
엘레나가 우리에게서 멀어진다.
분명 내 앞에 있는 엘레나가 마치 신기루처럼 흐릿해지고, 잡을 수 없는 장소로 떠나는 감각을 느꼈다.
비슷한 감각을 느낀 아리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엘레나가 세상에 다시 한번 소원을 빌었다.
세상이 엘레나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
– 한가인
그야말로 온 세상이 뒤흔들리는 엄청난 충격 속에서 해일에 떠밀려 가는 사람처럼 어찌할 바 모르고 휘말렸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후에야 깨달았다.
말 그대로 ‘천지창조’가 다시 한번 일어났음을!
멍하니 주변을 돌아보았다. 걸려있는 간판 하나 하나부터 전부 이국적인 풍광.
주변에는 바쁘게 달려가며 새하얀 건물로 들어가는 이국적인 외모의 아이들.
… 주변 애들의 외모를 보고 설마 하는 생각이 들어서 길가에 주차된 차의 사이드미러에 나 자신을 비춘 후에야 깨달았다.
엘레나의 소원에 의해 두 번째로 창조된 세계.
나는 10대 초반의 나이로 돌아갔다.
앞쪽에는 태양을 담아낸 듯한 빛나는 웃음을 짓는 황금빛 소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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