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170)
169화 – 201호, 저주의 방 – ‘더 큐브’ (18)
– 한가인
— 쨍그랑!
[봉인이 해제되었습니다!]요란한 소리와 함께 정신이 퍼뜩 들었다.
이제, 주인공이 나설 시간이다!
… 분위기 뭐지?
뭐가 뭔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머리를 찌르는 듯한 두통을 느끼며 황급히 상태창을 둘러썼다!
대체 뭔 상황이야?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고, 송이만 내 앞에 있었다.
“송이야? 이게 대체 무슨 -”
“고개 들지 마세요. 상태창으로도 버티기 힘들 테니까. 마지막으로 도와드릴게요.”
그 말과 함께 송이의 팔찌에서 그 어느 때보다 밝은 섬광이 번뜩였다.
송이의 남은 활력 전부를 소진한 강력한 보호가 내게 깃들었다.
이미 이 전에 한번 확인한 송이의 ‘사망 버프’.
송이의 유산, ‘다양한 관점’에 걸린 제약 중 일부는 유산 자체에 걸려있지만, 훨씬 더 많은 제약은 유산 사용으로 인해 부하가 걸리는 송이의 신체 자체에서 비롯된다.
뒤집어서 말하면, 송이는 더 이상의 삶을 포기하면 평소의 한계를 훨씬 넘은 힘을 쓸 수 있었다.
견디기 힘들 정도의 정보가 쏟아진다.
수석연구원이 쌓아 올린 헤아릴 수 없이 방대한 세상의 이면에 관한 지식들!
쪼개질 듯한 두통을 견디며 생각했다.
왜 ‘내’가 이 방의 봉인 대상이 되었을까?
베아트릭스의 본체가 있는 장소는?
수석연구원이 베아트릭스를 통제하던 수단은 대체 뭘까?
이 모든 의문은 사실 한 가지 결론으로 이어졌다.
베아트릭스의 본체는 0차원의 눈이 봉인된 장소에 있다.
그리고, 그 장소에 접근할 수 있는 존재는 나 뿐이다.
베아트릭스 본인조차도 의식을 본체로 옮기는 순간 광기에 휩싸이기 때문에 결코 본체에 다가설 수 없다.
송이의 팔찌를 통한 정신 보호와 상태창을 통한 저항력, 두 가지 보호를 중첩해서 받은 나만이 0차원의 눈의 압박을 견디고 봉인 구역에 진입할 수 있으니까.
유사한 일은 송이의 도움을 받은 아리에게도 가능하지만, 상태창과 달리 피를 소모하는 아리에게는 신체적인 한계가 있었다.
점점 더 많은 기억이 쏟아졌다.
아찔한 기분이 들기 시작할 때쯤, 나는 비로소 이 방의 ‘진짜 해결 방법’을 깨우쳤다.
“이게 대체 무슨! 수석 이 새끼 진짜 인간 맞아?”
‘안타깝게도 나는 호모 사피엔스가 틀림없네.’
“…이런 짓도 가능할 줄은 몰랐군. 네 인격이 다시 조립되기라도 했나?”
‘내 여러 가지 재주 중 하나라고 해두지. 다른 방에서도 조심하는 게 좋을 게야.’
“…”
잠시의 대화만으로 깨달았다.
그는 이 장소가 호텔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수석 연구원만의 특징인가? 아니면 봉인 해제 과정에서 깨어나는 등장인물 모두의 특징인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이제 실체를 이해했나? 자네가 할 자신은 있고?’
머리가 아파져 온다.
나는…. 도저히 수석연구원처럼 할 자신이 없었다.
‘걱정할 필요 없네. 알고 있지 않나? 주도권은 철저하게 자네에게 있으니까. 자네 뜻대로 하다가 도저히 손쓰기 어려운 순간에만 내게 맡기면 될 일 아닌가?’
… 이유야 어찌 됐든, 난 이 방을 해결하고 나가야 한다.
일단은 진행하자.
상태창은 몰라도 송이의 정신 보호는 시간제한이 있다.
진철 형이 부숴버린 부등변다면체의 설비 중앙에서 새하얀 소용돌이와 비슷한 것이 나타났다.
이미 반 이상 망가지긴 했지만, 남은 잔해나 다름없는 설비를 이리저리 건드리면서 ‘통로’를 약간 확장하던 차, 베아트릭스가 나타났다.
피식 웃으며 하늘을 슬쩍 올려다본다.
이미 지평선을 가릴 정도로 광대한 눈이 흡사 태양처럼 세상을 살피는 광경이 보였다.
“가까이 오지 그래?”
“너!”
“너도 제법 하네. 이 정도로 압박이 강해졌는데 대화까지 할 수 있다니. 그래도 이 소용돌이로 다가오면 견딜 수 없나 보지?”
‘잠시 내게 기회를 주지 않겠나.’
마음대로 해라. 어차피 통로가 확장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잠시 후, 내 입이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베아트릭스. 내 가여운 딸아. 내 너에게 감당할 수 있는 일만 저지르라고 하지 않았느냐?”
“아빠! 당신이…. 당신이 아니었다면 나는 진작 바깥세상에 나갈 수 있었어!”
“고작 바깥세상 공기 좀 쐬고 싶어서 이 난리를 일으켰단 말이냐?”
“…”
“아니지, 아니지. 사실 패트릭이 널 그냥 풀어준 것이지. 패트릭, 그 아이는 나름대로 강단이 있었으니까. 넌 내게 고마워해야 하지 않니? 내가 아니었다면 넌 스스로 만들어내는 괴물을 두려워하며 끝없는 밤을 지샜을 거란다.”
“그 점은 아직도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아빠, 가르쳐줄 만큼 가르쳐주셨으니, 이제 적당히 죽고 유산을 물려주시는 게 훌륭한 아빠의 역할 아닐까요? 당신이 부등변다면체만 물려줬다면 난 당신을 진작 찢어 죽였을 텐데!”
“어허! 거참, 부등변다면체는 누구에게 줄 수 있는 게 아니라니까 또 그러는구나. 게다가, 누가 널 이렇게 애미없는 후레자식으로 길렀느냐?”
“미안. 내 엄마는 어릴 때 내 손으로 죽였어.”
“그래서 이렇게 후레자식으로 컸구나. 아빠 노릇을 못 한 내 잘못이다.”
대단히 사이가 좋은 부녀의 만담을 듣고 있다 보니 슬슬 통로가 지나갈 수 있을 만큼 확장됐다.
“안타깝지만 아빠는 먼 곳으로 떠난다. 잘 있으렴.”
베아트릭스는 조금 전까지의 자신감 있는 태도를 완전히 잃은 채 덜덜 떨었다.
“아버지…. 제발 한 번만 -”
소용돌이가 날 집어삼켰다.
*
– 한가인
소용돌이 내부는 실로 이상한 공간이었다.
수없이 많은 책들이 이리저리 열렸다 닫혔다 하며 떠돌았고, 동시에 수없이 많은 디스플레이가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0차원의 눈이 어떤 존재인지 이해했나?’
“글쎄.”
‘그는 위에서 내려온 상위차원의 존재. 만물을 창작물처럼 여기며 끝없이 잔혹한 기록을 새기기를 바란다. 거짓된 조물주라 아니할 수 없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정말 그런 거창한 존재를 네가 이해할 수 있어?”
‘믿어보게. 이 정보는 신뢰할만한 존재에게 기원해서 얻어냈으니까.’
“신뢰할만한 존재?”
‘그는 자신과 접촉하는 필멸자에게 혼란스러운 지식 일부를 주입하지. 이로써 필멸자들은 자신이 하찮은 미물이라고 믿으며 절망 속에서 무너지네.’
…
‘물론 그게 다는 아니야. 위대한 자와 접촉했을 때 필멸자의 정신이 부평초처럼 떠다니는 건 흔한 일이니까. 이는 곧 진동이라.’
“진동?”
‘인간은 단지 걸어갔을 뿐이나, 그 걸음걸음에서 발생하는 진동은 미물들의 세계를 뒤엎고 보보마다 수없이 많은 벌레가 짓밟혀 죽네.’
“당신의 기억을 보고, 당신의 말을 듣다가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어.”
‘말해보게.’
“당신의 말은 장님이 코끼리 만지고 다 이해했다고 말하는 것 같은데? 대체 당신이 무슨 수로 이런 이상한 존재를 이해한다는 거지? 거짓된 조물주?”
‘한 가지 믿음, 한 가지 증거를 말하고 싶군.’
“한 가지 믿음, 한 가지 증거?”
‘이 우주에 진실로 조물주가 있다면, 결코 세상에 고통만이 있기를 바라지는 않겠지. 그렇기에, 저토록 잔혹한 기록을 새기는 자가 진실된 조물주일 수는 없다는 믿음일세.’
“나는 오히려 호텔 밖의 ‘진짜 당신’이 세상을 구하는 데 썼다는 방법을 알고 나니까, 조물주가 돌아버린 존재는 맞는 것 같은데.”
‘단지 내 부족함의 소산일 뿐…. 그대는 더 나은 방법을 떠올릴 수 있나?’
…
‘패트릭도 같은 이유로 날 배신했고, 그러면서도 자네들이 쳐들어오자 다시금 포기하고 내게 모든 걸 맡겼네. 내 방법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다른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지. 애초에, 내가 없는 사이 패트릭도 똑같은 방법을 쓰면서 봉인을 유지했네.’
“그래, 믿음은 그렇다 치고 증거는 뭐야?”
‘증거는 아주 단순하고 명쾌하지. 우린 지금 다 함께 호텔에 갇히지 않았나?’
???
‘상위차원에서 내려온 전지전능한 조물주가 대체 왜 호텔 방에 갇혀있겠나. 애초에 그런 존재가 아니니까 갇힌 것이지.’
그 말에는 설득당하고 말았다.
…
위험하다.
201호의 설정과 별개로 ‘봉인’이라는 시스템에 대해 점점 이해하기 시작했다.
봉인이 해제됨과 동시에 시나리오의 주요 인물이 내 안에서 깨어난다.
여기까지는 괜찮고, 오히려 강력한 조언자가 주어진다는 면에서 봉인 해제의 혜택이라 할만하다.
주도권은 철저하게 호텔 참가자에게 있으니까.
문제는 지금처럼 시나리오상 캐릭터의 사고방식에 설득당해 동화되는 경우!
방금, 나는 수석연구원이 펼친 논리에 설득되었다.
동시에 나와 그가 조금은 섞였음을 깨달았다.
2층과 1층은 정말로 다르다.
무언가, 방의 목적 자체가 다른 것 같다.
*
‘오랜만이야! 수조 안에 너무 오래 있던 것 아니야? 너 없이도 재밌던데?’
*
하염없이 펼쳐진 책과 디스플레이들을 헤치며 나아갈 때마다 머리를 찌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제는 시간이 많지 않다. 상태창이야 시간제한이 있는 건 아니지만, 송이의 보호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괜찮네. 베아트릭스의 본체가 있는 장소까진 거의 다 왔으니까. 이제, 그 아이가 태어난 본분을 다할 때지.”
…
“그나저나…. 자네는 어느 정도 상황을 이해했으니 하는 말인데, ‘봉인’이라는 표현이 실로 우습지 않나? 인간 주제에 저런 존재를 봉인한다니! 차라리 태양을 자네 집 냉장고에 넣는 게 더 쉽지 않겠나?”
…
“내가 한 일이라곤 단지 저 존재가 원하는 잔혹한 ‘극장’을 제공했을 뿐이네. 약간의 희생이 있었으되, 인류는 평온을 얻었네. 내가 아니었다면 0차원의 눈은 별 전체를 자신의 극장으로 삼았겠지.”
‘악마의 입에 인간을 밥으로 던져주는 짓이 네가 말하는 극장이냐?’
“꽤 피곤한 작업이었지. 제법 오랜 세월, 우리는 부등변다변체 내부에 만든 큐브에 사람을 데려다가 죽여야 했으니까. 이 모든 일을 수작업으로 하는 건 제법 힘든 일이었네. 더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었고.”
‘…’
“모든 자극은 때가 되면 질리기 마련. 잔혹한 신도 점차 지루해함이 느껴지더군. 무언가…. 다른 ‘배우’가 필요했어. 질리지 않는 재미를 보장해주는 무언가가 필요했지.”
‘그게 베아트릭스였나?’
“그래, 그래. 바로 저 앞에 있군. 저 아이야말로 진정 인류를 위한 선물이 아니겠나?”
나는 누구일까.
어느 시점부터 입을 여는 게 나인지, 수석연구원인지 알 수 없다.
내가 그의 말에 설득당할수록 점점 두 사람의 구분이 의미 없어짐을 느낀다.
마침내, 베아트릭스의 본체가 나타났다.
…
내 앞에 나타난 것은 불투명한 시험관과….
그 안에 떠 있는 인간의 두뇌였다.
“잔혹하다 생각지 말게. 감각기관도 없고, 의식은 다른 곳에 있으니까 이 장소에서도 버틸 수 있는 게야. 이 아이도 제법 버티는 힘이 있긴 하지만 우리만큼은 아니거든.”
수석연구원의 손에서 불길하게 빛나는 다면체가 나타났다.
“자네는 이 둥둥 뇌를 부수면 해결이라고 생각하나?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따지고 보면 호텔은 언제나 ‘저주의 근원’을 해결하길 바랐네. 대적자를 죽여야 한다느니, 죄수를 어째야 한다느니. 이런 건 전부 자네들이 추측해서 만든 가설 아닌가?”
‘무슨 말이지?’
“베아트릭스의 뇌를 부숴봐야 뭐가 달라지냐는 이야기지. 0차원의 눈이 실시간으로 세상을 집어삼킬 텐데. 결국 자네는 결단을 내려야 해. 물론…. 아까부터 이야기했지? 결코 자네에게 강요할 생각은 없다고. 애초에 그럴 수도 없어. 주도권은 항상 자네에게 있었으니까.”
수석연구원이 내게 세상을 구할 더 나은 방법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그 대답을 떠올리지 못했다.
“고민이 많군. 대체 무엇이 자네를 그리 혼란스럽게 하는가? 따지고 보면 201호는 전부 호텔이 만든 가짜 세계일 따름. NPC들을 악마 밥으로 주는 게 대수인가? 따지고 보면 자네들도 필요에 따라 수 없이 해왔던 일과 유사하지 않은가?”
어째서일까.
수석연구원의 말대로, 우리는 이미 필요에 따라 방 내부의 인간을 필요에 따라 죽여가며 진행해왔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이렇게 내 머리가 혼란스러운가?
…
나는 그 답을 알고 있다. 수석연구원의 기억이 내 안에서 깨어나고서야 받아들였다.
오늘에 와서야 201호에서 벌어진 일이 현실에서도 있었던 일임을 진심으로 체감했다.
인류가, 그 전에 ‘내’가 이런 희생을 바탕으로 살아왔음을 깨닫고야 말았다….
모르겠다. 정말로, 더 나은 방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바깥에서 나는 무엇이었을까? 고작해야 수능시험 공부나 하던 학생이었지.
지금, 201호에서 주어진 문제는 마치 100점 만점에 합격선은 30점인 시험문제 같았다.
합격 자체는 어렵지 않다. 30점만 넘으면 방에서 나갈 수도 있고, 유산을 챙겨갈 수도 있다.
그러나.
‘출제자’는 뭔가 훨씬 더 고차원적인 답을 원하는 것 같다.
어쩌면 출제자 본인도 모를 답.
결국 내가 더 나은 답을 찾는 걸 포기했을 때, 나는 더 이상 내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손에 들린 다면체에서 음산한 광채가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내 입에선 사악한 제의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바치나이다! 바치나이다! 위대한 눈이시여, 내 당신에게 억겁 속에서 고통을 노래하는 극장을 바치나이다. 여기 당신을 위한 불멸의 염소가 있나이다. 영원히 재생하는 세흐림니르가 있나이다!”
거대한 시선이 다시금 나를 주시함을 느낀다.
머나먼 어딘가, 걸어서는 접근할 수 없는 위상에 다시금 ‘큐브’가 나타났다.
큐브의 중앙에 베아트릭스의 뇌가 이동했다.
공포와 고통 속에서 비명 지르는 베아트릭스는 다시금 큐브에 괴물을 가득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이제, 이 극장은 결코 문 닫지 않으리라.
베아트릭스는 북유럽 신화에서 끝없이 재생하며 안줏거리가 되었다는 돼지처럼 영원히 괴물을 만들어내고, 관리국은 하염없이 인간을 들이붓겠지.
잔혹한 신이 영원히 지구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있도록.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별의 희생을 피하기 위한 산 제물들의 비명이 내 귓가를 송곳처럼 후볐다.
천지 사방에서 잔혹한 신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손가락’이 내려왔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