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191)
190화 – 미로를 위한 기도 (9)
[사용자 : 한가인(지혜)날짜 : 94일 차
현재 위치 : 미로의 지옥
현자의 조언 : 3]
– 한가인
악마 산타의 다섯 번째 주장은 ‘루돌프도 없는 놈이 산타라고 자칭할 수 있냐?’였다.
와! 루돌프까지 온다고? 나는 진작부터 이 흐름을 놓쳤다!
페로라도 데려왔으면 페로가 할아버지의 루돌프라고 우기면 됐을까? 우기는 와중에 페로가 할아버지 머리카락을 뜯어가면 어떡하지? 할아버지가 화가 나서 페로를 후려치면?
…
정신 차리자. 분위기가 미쳐 돌아가니까 나까지 이상한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페로를 데려오지 않은 이상 의미 없는 이야기다. 애초에 ‘송이’가 없는 시점에서 페로를 섬세하게 통제하기도 어렵다.
할아버지가 아무 말이나 일단 던졌다.
“있지. 나도 당연히 루돌프 있다.”
한가인 : 네?
김묵성 : 뭔가 해봐! 당장!
김아리 : 잠깐만 시간 끌어!
아리는 이 와중에 대체 뭘 하려는 거야? 할아버지가 무작정 멘트를 던졌다는 사실을 느낀 걸까? 산타가 비웃기 시작했다.
“호! 이젠 준비된 변명이 다 떨어졌나? 과연, 얼치기가 산타를 사칭 중인데 제대로 된 준비가 되어있을 턱이 있나? 알아두는 게 좋을 것이다. 산타 사칭이 얼마나 큰 죄인지!”
“루돌프 있다니까? 이놈아, 내가 너처럼 요술쟁이가 아니라서 루돌프가 바로 튀어나오지 못할 뿐이다! 설마 산타에게 요술이 필수라고 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래서 대체 어디 있다는 게냐? 내 눈이 침침한 게 아니라면 그 어디에도 네놈의 루돌프는 보이지 않 -”
— 부우웅! 쾅!
산타가 들어온 ‘정문’을 때려 부수며 82년산 포드 그라나다가 학교 내부로 들어왔다. 엄청난 속도로 달려온 포드가 자연스럽게 드리프트를 꺾으며 평화롭게 산타 옆에서 포즈를 잡고 있던 순록을 치어서 날려버렸다.
“끄에에에엑!”
“코메에에엣! 코메엣!”
비명 지르며 날아가는 순록, 그 광경을 보며 절망에 가득한 외침을 토해내는 산타. 대체 누가 악역인지 모르겠다!
이 와중에 아리는 상큼하게 웃었다.
“루돌프 등장!”
이젠 모르겠다.
“이런 개 미친 새끼들을 보았나! 누가 자동차를 루돌프라고 한단 말이냐?”
“야 인마! 자동차가 루돌프 하면 안 될 이유는 또 뭔데?”
“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세상은 날로 발전하고! 중국에서 생산된 도자기가 배 타고 미국까지 오는 시대인데, 너 같은 구세대 산타나 썰매 타고 돌아다니는 거지! 요즘 세상 루돌프는 자동차랑 비행기가 맞아.”
“하! 네 눈엔 겁에 질린 아이들이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지?”
당연한 이야기다. 아까 까지는 그냥 정신 나간 노인들끼리 헛소리하는 느낌이라 낄낄대던 아이들도 정문을 부수며 자동차가 난입한 시점에서 아예 정신이 나가버렸다.
“정말이지 개새끼들! 이 미친놈들과 대화하려고 한 내가 잘못했다! 너희는 살 자격이 없다. 하나하나 머리를 터트려서 죽여주마!”
Jingle bells, jingle bells
Jingle all the way.
“에에엣! 안 되는 거야? 차까지 몰고 왔는데?”
“되겠냐! 이런 미친 무리수가 되겠냐고!”
나도 아리도 그냥 정신이 나간 채 두 번째 시도는 망했구나 싶어 포기하려던 차, 노래가 들려왔다.
“루돌프 사슴 코는~ 매우 반짝이는 코!”
?
경악으로 가득 찬 학교, 미로가 에라 모르겠다 하는 표정으로 손에 무언가 들고 82년산 포드 그라나다를 향해 걸어갔다.
어린아이들부터 교사까지, 호텔파티부터 심지어 산타까지! 장내의 시선이 이젠 대체 또 무슨 정신 나간 일이 일어날 것인가 하는 분위기로 미로에게 쏠렸다.
미로의 손에서 튀어나온 건 크리스마스 케이크 위의 체리였다.
“안개 낀 성탄절 날~ 산타 말하길~ 루돌프 코가 밝으니~ 썰매를 끌어 주렴!”
— 푹!
체리가 아리의 코에 꽂혔다.
“이제 루돌프 맞죠? 코가 밝아졌잖아요?”
변화가 시작되었다.
We wish you a merry Christmas
We wish you a merry Christmas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보내길 바라요
그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캐럴이 한국어로 바뀐다. 처음 학교에 도착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 단 한 순간도 멈춘 적 없던 마법의 캐럴이 그 힘을 잃기 시작했다.
아리의 경악한 외침이 들려왔다.
“이, 이게 통했어? 내 코에 체리만 붙이면 루돌프야?”
산타의 몸이 모래처럼 무너지기 시작했다. 한없이 지친 듯한 말이 들려왔다.
“내가…. 처음에 이 학교에 도착했을 때부터 어딘가 공기가 좋지 않다고 생각했지…. 설마하니 어린아이부터 늙은이까지 싹 미친놈들만 있는 학교일 줄이야….”
아니 미친 건 사실이지만 아동 학살 산타가 할 소리 맞냐?
딱 한 명, 기쁨과 흥분으로 가득 찬 사람이 있었다.
“봐, 봤어? 봤어? 내가 체리 붙이니까 산타가 죽기 시작했어! 와! 나 진짜 똑똑한가 봐? 그렇지?”
“… 그래. 방금은 진짜 놀랐다.”
“아하하하! 내가 바로 천재 중의 천재다! 이제 나 퇴마사 이런 일 하면 될까? 너무 재밌을 것 같아!”
이미 하고 있으셨죠. 그것도 엄청나게 베테랑.
“다들 박수! 박수 안 쳐?”
— 짝! 짝! 짝!
모두가 영혼이 나간 표정으로 미로를 향해 박수치기 시작했다. 미로는 볼이 빨개질 정도로 상기된 채 케이크의 체리를 싹 뜯어다가 주변 사람들의 코에 붙이기 시작했다.
나 – 미로의 말에 따르면 루돌프 4호 – 는 간신히 정신 줄을 붙들고 산타를 살폈고, 현자 타임이라도 온 것처럼 허탈해하는 말을 하던 산타는 조그마한 인형 하나만 남기고 사라졌다.
어느샌가 마법의 힘이 사라진 캐럴,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즐거워서 웃고 떠드는 아이들, 그 사이에서 행복에 가득 차서 승리의 포효를 내지르는 소녀까지.
어찌 됐든 해피엔딩이다!
서서히 공간이 무너져간다. 악몽으로 가득했던 미로의 지옥이 시공의 저편으로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미로의 포효를 보며 혼자 감동한 눈빛으로 뭉클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아리와 달리, 나와 할아버지는 진짜 한없이 지친 표정을 지었다.
“… 수고하셨습니다.”
“너도 욕봤다.”
“순발력 좋으시네요. 설마하니 산타의 개소리를 이렇게 잘 받아치실 줄이야.”
끝나가는 분위기 속에서 서로 수고했다며 휴식을 기다리던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췄다.
흩날리는 눈발, 이제는 한국어로 들리는 캐럴, 혼란 속에서 뒷수습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넋이 나간 교사들, 뭐가 뭔지는 몰라도 너무나 재밌어하는 아이들. 그 모든 소리가 멎고, 무너져가던 공간도 붕괴를 멈췄다.
이게 뭔가 싶어 나와 할아버지, 아리가 서로를 돌아보기 시작했을 때, 익숙하면서도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정말로 날 구하러 왔구나.”
어딘가 아련한 분위기. 아리의 눈이 충격으로 커지기도 잠시, 미로는 자연스럽게 다가와서 아리를 껴안았다.
“엄, 엄마? 지금 날 알아보는 거야?”
“아무렴. 오히려 호텔의 장난질로 여태 알아보지 못했던 지금까지가 이상하지. 우린 이렇게나 닮았는걸?”
이상하다.
“엄마….”
이상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미로가 ‘엄마처럼’ 행동하자 요동치는 감정의 격류를 감당하지 못하고 눈물 흘리는 아리와 달리, 나와 할아버지는 충격으로 눈을 부릅떴다.
“잠깐! 당신은 지금 ‘제정신’인가?”
그제야 이변을 눈치챈 아리가 화들짝 놀라며 물러섰다. 호텔의 미로는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리를 만들어내며 지성을 잃은 상태!
아까 전까지야 시기상으로 오래전 미로의 어린 시절이던 시점이었고, 아리를 만들기 전이었으므로 정신이 멀쩡한 게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의 미로는 ‘어린 미로’와도 또 달랐다.
어린 미로도 아니고 아리를 만들면서 지성을 잃은 미로도 아니다. 미로가 이 장소에서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어딘가 아련한 미소를 지었다.
“우스운 일이네. 딸이 제정신인 엄마를 보면서 놀라다니.”
“… 처음 뵙습니다. 어머니.”
“이리 오렴.”
“…”
“오지 않을 거니?”
아리가 결국 거부하지 못하고 다가갔다. 미로는 양손으로 아리의 얼굴을 붙잡더니, 무언가 관찰하듯이 한참 살폈다.
“아직 ‘거울의 방’을 찾아내지 못했구나. 그렇지?”
“네.”
“찾게 되면 조심하렴. 네 생각보다 매우 위험한 장소란다.”
“잠깐! 좀 자세히 좀 말해봐요. 뭐가 어떻게 위험하다는 이야깁니까?”
“가인아, 조금 전에 ‘See you later! Everything will be fine’ 했던 건 좀 멋있었어.”
“… 첫 번째 시도 때 일도 기억하시는군요.”
“네게 존댓말 들으니까 어색하네. 한국어에서 내가 싫어하는 점 중 하나지. 거울의 방에 대해선 자세히 말해주기 힘들어. 너희가 아직 거울의 방을 찾아내지 못했으니까. 내가 해 줄 수 있는 충고라면.”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미로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그곳에서 많은 목적을 이루고자 했지만, 그 대가로 모든 것을 잃었다.”
“예?”
미로는 거울의 방에 대해 더 대답하는 대신 주제를 돌렸다.
“아아…. 호텔에서 다시금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될 줄이야! 정말이지 몰랐어.”
“그건 모를 일입니다.”
“호! 그렇네. 티켓을 쓸지 말지는 결국 너희 손에 달린 문제니까. 하지만 너희는 결국 나와 다시 만나게 될 거야.”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십니까?”
미로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살짝 웃었다. 자신감의 근거가 있는 걸까?
“우리의 축복은 이유 없이 주어지지 않아. 그 정도는 이미 알지?”
“잘 맞는 사람에게 주어지죠. 사실, 전 제가 골랐다고 생각하지만요.”
“나는 ‘정의’를 얻었어. 이게 무슨 의미일까?”
“…”
“나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도 제법 들었겠지. 부정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단언할 수 있다.”
“무슨 말씀 – ”
“나는 언제나 세상을 구하고자 했다. 설령 내 손에 피를 묻히는 한이 있더라도!”
미로의 눈동자에서 설명할 수 없는 불길이 피어올랐다. 아까의 아련한 미소에 이어서 지금은 열정이 느껴지는 불꽃 같은 눈동자.
이제야 마음 깊이 받아들였다.
이 사람은 아리가 아는 유아 퇴행했던 소녀와도 다르고, 이 지옥에서 우리와 여태까지 함께했던 순수한 소녀와도 다르다. 가늠할 수 없는 시간, 지구에서 이해할 수 없는 지옥들을 무수히 헤쳐나오며 심연과도 같은 정신을 형성해낸 사람이 내 앞에 있었다.
축복은 적절한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한다. 이는 이미 ‘행운의 후원자’가 알려준 사실이다.
지난 몇 달간 느낀 바에 따르면, 정의의 현 주인인 엘레나의 정의란 곧 ‘법’과 유사하다. 그렇다면, 정신이 멀쩡하던 미로의 정의는 무엇이었을까?
미로가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피를 묻혀야만 했다면, 대체 세상에는 무슨 일이 생겼는가.
정지했던 세계가 다시 무너지기 시작한다. 미로는 그 사이에서 멍하니 주변을 돌아보았다.
“고마워.”
“네?”
“고통. 비극. 트라우마. 이런 것들이 반복되다 보면 익숙해진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지. 아무리 고통스러운 기억이라도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다 보면 어느새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지리라 착각했어.”
“…”
“아니더라. 크리스마스 날, 내가 사랑했던 친구들과 선생님이 전부 죽었어. 오직 나만이 시체들 사이에서 숨어있다가 관리국에 의해 구출되었지.”
“끔찍한 일을 겪으셨네요.”
“이미 오래전 과거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지옥’에 떨어지고 나서야 깨달았어. 나는 단 한 번도 그 고통을 이겨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단지 망각의 저편에 묻어둔 채 억지로 잊었다고 믿었을 뿐이지. 이 지옥은 결코 시간이 지난다 해서 익숙해질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어….”
“… 고생하셨습니다.”
“고마워. 이건 진심이야. 그리고, 훗날 나를 부활시키게 되면 그때 난 예전에 가지고 있던 유산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거야.”
“그런 일이 생긴다고 듣긴 했습니다.”
“혹시 그때 내 정신이 멀쩡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말하는 거야. 내가 뭘 골라야 할지 고민하면 무조건 말해줘. ‘시계’를 고르라고.”
‘시계’.
마지막 순간, 미로는 아리를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사랑해!”
그리고 지옥이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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