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243)
242화 – 202호, 저주의 방 – ‘인어공주’ (20)
– 엘레나
“엘레나, 괜찮아요?”
문득 정신이 들었다. 눈앞에는 그리운 사람이 앉아있었다.
“아. 수호 씨…. 갑자기 머리가 좀 아팠네요.”
“또 그놈의 악몽 때문입니까?”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여기는 어디지…? 식당이구나. 아주 고급스럽고 VVIP 급 고객을 상대로만 영업하는 특별한 식당이라는 정보가 떠올랐다. 우아한 분위기 속에서 아름다운 선율이 들려왔다.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들의 상태도 정갈했다.
“몸 관리 잘하셔야 합니다. 섬에서 큰일을 하실 분이잖아요?”
“큰일은 제 언니가 하고 있죠.”
“지금이야 그렇지만 앞으로도 그럴지는 알 수 없는 노릇 아닙니까? 태종 이방원도 장남은 아니었지만 -”
“이쯤 해요. 진짜 재미없으니까.”
이 남자 특유의 끔찍한 개그 센스가 또 나왔네. 이 사람은 나랑 세레나데 언니가 무슨 정치적 경쟁자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지금은 조선시대가 아니다.
오늘은 조금 더 강하게 말해야겠다.
“진짜 방금 같은 개소리 들을 때마다 뺨 한번 후려치고 나가고 싶어요.”
“… 죄송합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말주변이 없다는 소릴 종종 듣긴 했는데.”
“수호 씨는 말주변이 없는 게 문제가 아니라 본인이 개그를 잘한다고 착각 중인 게 문제죠.”
“이 독설도 오랜만에 들으니 정말 정겹군요.”
“정겨워지라고 한 소리는 아닌데요.”
“죄송합니다. 안타깝지만, 이런 대화도 오늘이 마지막일 것 같습니다.”
“네?”
또 무슨 이야기일까? 이상한 농담을 –
“엘레나, 죄송하지만 시간이 많지 않아서 추억에 잠길 틈이 없군요. 정신을 차려주시겠습니까?”
“…”
“침착하게 조금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나 떠올려보시죠.”
오늘 있었던 일?
장기간 약에 취해있던 병원에서 깨어났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날 데리고 호텔 동료들은 –
호텔 동료.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쨍그랑!
놀라서 화들짝 일어서자 접시나 포크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동시에, 주변 공간이 무너지더니 어딘가 고풍스러운 카페가 나타났다.
“하하! 이 장소도 꽤 그립군요.”
“대체…. 대체 무슨 상황이지!”
“별것 아닙니다. 엘레나 양은 관리국에 의해 기절 당한 상태고, 전 죽기 직전에 태고의 문자의 힘을 빌려 엘레나 양께 메시지를 전하는 중이죠.”
“죽기 직전?”
“죄송합니다. 저는 곧 죽습니다. 이것만큼은 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상대가 워낙 준비를 잘 해왔네요.”
그 말을 끝으로 이수호는 어딘가 허무한 표정을 지었다.
기이하게도 내 마음 어딘가에서 격렬한 슬픔이 몰려옴을 느꼈다. 이 감정은 ‘해신의 둘째 딸’이 느끼는 감정일까? 그녀 입장에선 연인이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선언한 상황이니 마음이 크게 흔들리겠지.
테이블 위의 얼음물을 들이키며 냉정을 되찾았다. 어차피 ‘내’ 입장에선 202호 내의 NPC나 다름없는 사람이다.
“할 말이 있나요? 마지막 인사만 하려고 온 건 아니죠?”
“물론 아닙니다. 잠시 제 말을 들어주세요. 모든 문제는 21년 전, 전대 심해의 성녀 이멜다의 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해신의 딸은 어떤 존재인가?
정치적으로는 해신 섬의 지도자라고 볼 수 있다. 육지의 문물을 받아들이며 해신 섬 또한 대한민국 내부로 편입된 상태고 심해의 성녀 또한 공식적으로는 ‘도지사’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는 시대니까.
생물학적으로, 혹은 초자연적인 맥락에서 해신의 딸은 어인족이라는 집단이 ‘사람’으로 남아있게 만든다. 해신의 딸이 아니라면 어인은 자연스럽게 육지에서 살 수 없는 몸이 되어 바다의 물고기로 변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인들이 해신의 딸에게 무슨 ‘저항’이라는걸 할 수 있을까?
도지사라는 직함은 민주주의를 흉내 내기 위해 가져다 붙인 명칭에 불과하며 해신의 딸, 그들 중에서도 가장 위에 있는 심해의 성녀는 사실상 해신 섬의 여왕이다.
또한 해신 섬에서 가장 불행한 이들이기도 하다.
모든 해신의 딸은 그 운명을 각성한 시점에서 한 가지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자신은 남은 평생 매일 밤 감당할 수 없는 잔혹한 정신의 고문에 시달리게 되리라는 암울한 미래를 말이다. 피할 방법은 없으며, 견디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고통 속에서 해신의 딸은 40이 넘을 때까지 살아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대부분 중간에 정신을 놓고 병원에 수용되거나 자살하니까.
바로 이 점이 세레나데가 고작 20대 후반이라는 터무니없이 어린 나이에 해신 섬의 권좌에 오른 비결이다. 생물학적으로 어인족의 목줄을 틀어쥔 해신의 딸만이 권좌에 오를 수 있고, 해신의 딸은 결코 장생할 수 없으니 20대 후반으로도 충분하다.
21년 전, 심해의 성녀 이멜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비참한 운명에 절망했다. 그때, 육지에서 구원이 찾아왔다. 그리고 어인족이 탄생한 이래 가장 큰 죄악이 저질러졌다.
*
“… 이렇게 된 겁니다. 이해하셨습니까? 이 장소에선 시간의 흐름이 다르니 잘 고민하시고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물어보시지요.”
이해했다. 그리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었으니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전달받은 내용보다는 다른 포인트에 있었다.
“나는 당신이 무슨 생각인지가 궁금하네요. 그리고 내가 뭘 해주길 바라죠?”
이수호는 대답 대신 씩 웃었다. 웃음과 함께 그의 신체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반신을 뒤덮었던 비늘이 다음엔 전신을 덮고, 그다음엔 형상 자체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이것으로 충분한 대답을 얻었다.
… 심해의 성자로 각성한 후, 그는 너무나 오래된 기억에 접촉한 끝에 사람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지금 그는 인간 이수호의 기억을 어렴풋이 취한 ‘루다흐’일 뿐. 그는 나에게 동족의 복수를 요청했다.
잠에서 깨었다. 3일의 시간이 흘렀다.
*
“엘레나, 긴장하지 말고 천천히 하려무나. 힘을 써야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힘을 빼야 해. 다시 한번 시범을 보여줄까?”
“… 아닙니다.”
“그러지 말고. 내 손을 잘 보렴.”
내 앞의 수조를 손대는 이멜다의 손은 무척이나 고왔다. 그녀의 손에서 마치 심장을 울리는 듯한 기묘한 파동이 잔잔히 울려 퍼졌다.
“봤니?”
“… 이렇게 하면 될까요?”
“오호라! 아까보다 조금 더 괜찮구나. 이렇게 하면 된단다.”
며칠 전, 이수호와의 마지막 대화 중 그는 관리국이 나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 장담했다. 오히려 어떻게든 포섭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리라고 예측했는데, 그 생각은 정확했다.
굳이 따지면 정체불명의 연구소에 납치당한 상황이지만 나에 대한 대접은 대단히 정중했고 직원부터 연구원까지 그 누구도 가볍게 대하지 않았다.
오전의 ‘루다흐 관리’ 업무가 끝난 후, 잠시 휴게실에 앉았다.
과거 해신의 딸에게 주어진 비참한 운명에 절망한 이멜다는 관리국과 거래하며 어인족이 품은 모든 비밀을 넘겼다. 이 과정에서 인간을 어인으로 만드는 ‘루다흐’라는 초자연적인 생물의 존재를 깨달은 관리국은 여기서 엄청난 영감을 얻었다.
사람의 나이나 성별, 신체의 강약을 가리지 않고 물고기로 변이시킬 수 있는 그야말로 무한한 가능성! 사람을 물고기로 바꿀 수도 있는데 질병 ‘따위’를 고치지 못할 리 있을까?
이게 다가 아니다. 인간의 신체가 가질 수밖에 없는 태생적인 연약함을 극복할 수는 없을까? 조금 더 빠르고 강해질 수는 없을까? 기억력과 사고의 속도를 약간만 개선한다면 얼마나 많은 진보를 이룰 수 있겠는가!
이 감동적인 ‘도약’을 위해 한 가지 필수적인 존재가 있었다. 바로 루다흐와 교감하며 성장의 속도나 변이의 방향을 통제할 수 있는 ‘여왕 루다흐’의 숙주인 해신의 딸이다.
물론, 박 부장의 표현을 빌린다면 우주 개척과 비견될만한 이 위대한 도약에는 몇 가지 장애물이 있었다.
첫 번째 장애물은 당연하게도 루다흐의 신, 카다루다흐였다. 관리국, 그중에서도 통제 계파가 생각하기에 인류의 위대한 도약을 위해 루다흐를 실험하는 과정에서 ‘신비한 달팽이 몇 마리’가 죽는 일 따위는 큰 문제는 아니다. 물론 해신의 생각은 조금 다를 수 있으리라 박 부장도 인정했다.
두 번째 장애물은 사람들의 한심한 편견이다. 위대한 도약을 위해 몸에 비늘이 돋아나거나 밤마다 ‘약간의 고통’을 겪거나 정체 모를 심해의 신과 정신이 연결되는 정도의 일은 별것 아닌 사소한 이슈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사소한 이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계획은 완성되기 전까지 철저한 보안이 지켜질 필요가 있다.
…
“아, 다시 생각해도 얘네 진짜 미친 새끼들이네.”
“네?”
“아니에요. 일 보시죠.”
“그…. 저는 엘레나 님의 시중을 들기 위한 직원이라서요.”
“시중? 감시가 아니고?”
“죄송합니다.”
애먼 연구소 직원을 괴롭혀봐야 의미 없어. 그보다 현실적인 생각을 해보자. 몇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첫 번째, 왜 탈출이나 해결이 뜨지 않는 걸까? 관리국이 품은 원대한 이상은 그렇다 치고 저주의 근원은 해신이 아니었나?
이유야 어찌 됐든 관리국이 이수호를 제때 제거해서 해신의 강림은 멈춘 상태다. 그 결과 나는 불쌍한 바다 달팽이들이 관리국 연구소에서 종일 고문당하는 광경을 구경하는 신세가 되긴 했지만, 이게 세상을 위협할 대재앙은 아니잖아?
대체 왜 탈출도 해결도 뜨지 않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두 번째, 이제부터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연구소 작살내고 도망가기?
솔직히 탈출을 원한다면 진작 나갈 수 있었다. 관리국에서 알고 있는 내 능력은 불길한 상상뿐이기 때문이다. 시나리오적으로 불길한 상상은 ‘해신의 딸로서 각성한 능력’이라 관리국에서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의’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하는 티가 났다. 과거라면 헷갈렸겠지만, 불과 얼마 전에 ‘정의’를 너무나 잘 알고 카운터치려했던 104호의 죄수와 한바탕하고 온지라 구분할 수 있다.
예컨대 지금 이 연구소엔 얼마 전 호텔 파티를 사격해서 죽인 군인들이 다수 보였다. 그 군인들 하나하나가 나로선 ‘트리거’다. 만약 관리국이 정의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정의의 트리거가 될만한 군인은 싹 빼고 내 주변을 미성년자로 채우는 식으로 대응했겠지?
그렇지만 나가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연구소를 나간다고 뜰 탈출이면 지금 이미 떴어야 하는 것 아닐까. 점점 머리가 아파져 왔다. 우선은 연구소에 조금 더 머물면서 많은 정보를 알아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 번째, 살아있는 동료가 있을까?
호텔 파티의 ‘처형’에 가담한 군인에게 물어보자 별 일 아니라는듯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다 죽었다고 말해줬다. 사실, 이들이 생각하기에 난 해신의 딸이고 호텔 파티는 관리국 요원이다. 따라서 내가 그들의 죽음에 무슨 복수심이나 분노를 느끼리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넌지시 승엽이나 페로에 대해서도 물었다. 보아하니 승엽이는 미리 빠져나가서 ‘프로젝트’에 대한 진실을 모르니 숙청 대상이 아닌 것 같고, 현장에 있던 앵무새는 어느샌가 사라졌다고 한다.
“엘레나, ‘편안한 잠’을 마시는 걸 잊었구나.”
“이멜다, 고마워요.”
이멜다가 내미는 자그마한 컵에 담긴 약을 쭉 들이켰다. 이 약을 마시기 시작한 이후로 악몽을 꾸지 않았다.
약을 주며 내 손을 따뜻하게 붙잡는 이멜다를 보며 새삼스레 느꼈다. 정체성이 인간보다 루다흐에 가까워졌던 이수호는 이멜다를 천고의 마녀라고 말했지.
내가 느끼기에 이멜다는 그냥 인간이었다. 매일 밤 반복된 잔혹한 정신적 고문이 끝나길 바라는 동기는 충분히 이해가 갔다. 고문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비한 바다 달팽이’를 관리국에 연구 소재로 팔아넘긴 행위도 글쎄, 사실 인간은 원래 다른 생물을 희생시키면서 살아간다.
심지어 자신이 겪은 고통을 똑같이 겪어온 다른 해신의 딸, 즉 나나 세레나데에게 강렬한 동질감까지 느끼고 있었다.
다시 말해 이 여자만 남으면 충분히 내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을 것 같다. 문제는 연구소의 실질적인 지휘자라고 할 수 있는 박진성 부장이다. 그 사람만 어떻게 처리하면 이 연구소를 내 마음대로 휘젓고 다닐 수 있을 것 같은데….
다음 날, 박진성이 황당한 이유로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