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274)
273화 – 고난으로 가득했던 시간.
[사용자 : 한가인(지혜)날짜 : 131일 차
현재 위치 : 계층 1, 105호 – 휴식의 방
현자의 조언 : 3]
– 한가인
— 바사삭!
입 안에서 들려오는 신비로운 소리가 날 행복하게 만들어줬다. 적절하게 구워진 스테이크에서 적절한 마이야르 반응이 일어나 형성된 딱 좋은 식감의 크러스트가 부서지며 나는 소리다. 혀와 이빨이 크러스트의 벽을 넘자 그다음엔 육즙의 바다가 나타났다.
두툼한 소고기의 분홍빛 속살이 잘게 으스러지며 뜨끈한 육즙이 혀를 촉촉이 적셨다. 이렇게 한 점을 정성스레 씹어서 삼킨 후, 잔에 가득한 콜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이 정도 음식이라면, 내 점수는….
‘모르겠어요’가 좋겠다. 종일 먹어봐야 제대로 된 맛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얼굴을 테이블에 처박은 채 스테이크를 썰었다가 돈가스를 삼켰다가 스파게티를 먹으며 무국적 식탁을 한참 동안 비워나갔다.
평소보다 다소 이른 점심시간, 저주의 방 ‘203호’에서 나오자마자 105호로 움직인 채 다 함께 말없이 식사만 하기를 20여 분.
그제야 정신을 차린 동료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어, 엄청 맛있다! 호텔 밥 원래 이렇게까지 맛있었냐?”
“전 살면서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처음 먹는 것 같아요. 아! 눈물 나올 것 같아….”
농담이 아니라 송이는 정말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이거 먹고 뚝!”
옆에서 아리가 흰 밥에 스팸 한 조각, 볶음김치까지 올린 한 숟가락을 건네자 송이는 울면서 그걸 받아먹었다. 우리, 무슨 굶주린 난민이라도 되는 걸까?
물론, 이런 생각을 하는 나 또한 입에 한 점이라도 더 많은 고기를 집어넣기 위해 용쓰다가 옆의 할아버지에게 고기가 도망갈 일은 없으니 천천히 먹으라는 잔소리를 들었다.
조금 전까지 정신없이 불고기를 흡입하던 누나는 이제 정신이 좀 돌아왔는지 점잖은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복도를 걸어갈 때만 해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보자고 했었는데, 막상 음식이 눈앞에 있으니까 다들 이성이 날아갔네!”
“은솔아, 씹고 있는 불고기나 삼키고 말해.”
“그럴 순 없어. 불고기는 쉴새 없이 계속 먹어야 해.”
“아니…. 다들 대체 무슨 일을 겪었길래 이 난리래?”
유일하게 이 분위기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있는 1인, 아리는 걸신들린 사람들 사이에 떨어진 선진국 귀한 집 딸이라도 되는 듯 손을 휘저었다.
“진짜 아리 너도 겪었어야 했는데! 너, 내가 ‘203호’에서 시작하자마자 처음 받은 식사가 뭐였는지 알아?”
“뭐였는데?”
“애벌레! 진짜 일말의 과장도 없어! 애벌레를 나뭇잎에다가 올린 걸 귀한 특식이라고 가져왔다고!”
누나의 말을 들은 할아버지가 코웃음을 쳤다.
“애벌레면 그래도 고기 아니냐? 좋은 대접 받았네. 난 도토리보다도 먹잘 것이 없는 나무 열매 한 줌을 식사랍시고 가져오던데?”
“난 나무껍질하고 개미를 물에 넣어서 끓여주더라…. 그게 그 부족의 전통 영양식이던데.”
듣고 있던 상현 씨도 참기 힘들다는 듯, 한 마디 얹었다.
“그래도 다들 뭔가 드시긴 드셨군요. 제가 있던 부족은 그냥 대책 없이 굶었습니다. 이러다간 서로 잡아먹기라도 할 것 같아서 목숨 걸고 식량부터 구해야 했습니다.”
“잡아먹는다! 그런 무서운 이야기 하시지 마세요…. 전 정말 너무 끔찍한 일을 겪었거든요? 반드시 말씀을 드려야겠네요.”
“끔찍하다면서 왜 굳이 말해주려는 거야?”
“내가 겪지 않았다면 모르겠지만, 내가 겪은 이상 반드시 다들 알아야 해!”
송이의 어처구니없는 말에 아리가 입을 딱 벌리는 사이, 송이는 역시나 헛웃음이 나오는 스토리를 풀었다.
“엄청나게 거친 짚 위에서 깨어났거든? 처음에 막 깨서 여기가 어딘가하고 주변을 살폈더니, 웬 할아버지가 와서 깨어나신 걸 축하드린다면서 갑자기 뜨끈한 고기를 가져오더라고.”
“고기?”
“처음엔 멋도 모르고 고맙다면서 세입 정도 먹었어. 그런데, 갑자기 바깥에서 페로가 날아와서 접시를 던져버리는 거야. 그 즉시 무언가 싸함을 느꼈지.”
… 그 고기의 정체, 알 것 같았다.
“알고 보니 그 새끼들이 사냥하다가 죽은 전사의 팔목을 내게 구워서 줬어! 그래 놓고는 ‘아직 신선해서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시라’ 하길래 기절할 뻔했다니까?”
이런 느낌.
한참 동안 이런 느낌으로 각자 겪은 ‘내가 더 고생했음’ 대결이 이어졌다. 하도 기상천외한 이야기가 쏟아지는 통에 나는 정작 입을 열 기회가 없었다. 듣다 보니 ‘누린내가 나는 역겨운 고기죽’ 정도면 진수성찬에 가까운 듯해서 딱히 말하기도 힘들었다.
그런 음식을 10일 넘게 처먹은 게 우리다. 심지어 다른 부족민은 훨씬 쓰레기 같은 무언가를 주워 먹고 있으니 누군가에게 따질 수도 없어서 그냥 그렇게 반쯤 토할 것 같은 기분을 끼니때마다 견디며 열흘 넘게 버텼다.
그러다가 눈앞에 놓인 이 진수성찬. 다 같이 정신이 나가버릴 수밖에 없다.
그때쯤, 말없이 돈가스만 다섯 장이나 조지던 승엽이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즉시 주변에 침묵이 감돌기 시작했다.
‘고생 대결’. 아무리 봐도 이 비참한 대결의 예비 우승자가 고개를 드는 이 포스 뭐지?
“스, 승엽이 너는 그러고 보니 어떻게 지냈니? 다들 네 걱정 많이 했어.”
“아주…. 재미난 시간을 보냈죠.”
장내에 침묵이 감돈다.
“지금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딱히 절 존중하는 분위기는 아니더군요. 잘 쳐줘야 주술사를 대하는 분위기? 부족을 이끌어가는 전사 지도자는 따로 있고, 저보고 날씨가 추워지고 있으니 물과 식량이 있는 장소를 점쳐보라고 했어요.”
“점?”
“무슨 아르마딜로 같은 생물을 잡아와서 껍질을 벗기더니, 거기에 제 피를 바른 후에 껍질을 불로 지지더라구요. 그래서 껍질이 쪼개지는 방향을 보고 부족이 이동했어요.”
“대체 무슨…. 무슨 갑골문자냐? 진짜 원시인 이 새끼들은 왜 이렇게 창의력이 풍부해?”
“근데 서너 번 연달아 틀렸죠. 축복이 멀쩡했으면 맞췄으려나? 그것까진 모르겠네요. 여하튼, 틀릴 때마다 점점 제 피를 많이 뽑아서 바르더라고요.”
벌써 이야기가 역겨워지기 시작했다.
“당연히 아무짝에도 쓸모없었죠. 제 피를 한 바가지나 아르마딜로 껍질에 바를 때는 정말 이러다 죽는 거 아닌가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죠.”
“그러고 보니…. 엘레나 말로는 네가 ‘장대’에 매달려 있었다고 하던데.”
“네 번째 ‘점’도 실패했거든요. 사실, 전 그 불탄 아르마딜로 껍질을 보고 그 무식한 사람들이 대체 무슨 표식을 읽어냈는지 아직도 모르겠지만요. 4일 차였나? 5일 차였나? 네 번째 점의 결과는 북서쪽으로 거의 하루를 걸어가야 한다고 나왔어요.”
“그래서 그놈들이 하루를 꼬박 걸어간 거냐?”
“네. 하루를 꼬박 걸어간 결과, 물 한 방울 없는 황무지가 나왔고, 그쯤 되자 한없이 지친 부족민 일부가 쓰러져서 죽기 시작했죠.”
“… 설마.”
“그때, ‘초원을 달리는 늑대’라는 이름의 전사 지도자가 선언하더군요. 신인의 타락과 아둔함, 탐욕스러움과 어리석음에 선조께서 진노하셨다. 그 분노를 신인의 피를 통해서 달래드릴 수밖에 없다.”
“…”
“장대에 매달려 있다 보니 밑에 불을 붙이겠다고 전사들이 어디론가 사라졌어요. 요 부분이 웃긴 포인트인데, 워낙 황량한 황무지라 불피울 불쏘시개도 찾기 힘들어서 불피우기까지 굉장히 오래 걸렸어요.”
물론 아무도 웃지 않았다. 승엽이는 갑자기 탁자에서 벌컥 일어섰다.
“바로 그 순간! 하늘에서 천사가 날아와서 사악한 부족민을 전부 쓸어버리고 절 구해줬다 이 말이죠. 물론, 그 천사는 정신이 좀 이상하긴 했지만요!”
“… 나중에 그 이야기는 엘레나에게 꼭 해줘. 분명 큰 도움이 될 테니까.”
“네. 근데 엘레나 누나는 밥 안 먹는데요?”
승엽이를 능가하는 정신적 충격을 받은 우리의 동료, 엘레나 이야기가 나오자 다들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는데….
산맥에서 불길한 상상을 한계까지 끌어 쓴 후, 광기의 원인이 사라지자 서서히 정신을 차렸던 엘레나는 정신을 놓았던 시기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솔직히 무척 다행이라 봤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을 일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203호’ 바깥으로 나오자 모두의 축복이 회복되었고, 명경지수는 그런 편리한 망각조차도 치유하기 시작했다. 엘레나의 정신이 ‘진짜로’ 정상화되는 과정에서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학살을 깨닫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잠부터 자겠다며 침실로 들어갔다.
어떻게 위로해줘야 할지 모르겠다.
조금 비윤리적인 생각일지도 모르겠는데, 그냥 크게 신경 쓰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저주의 방에서 탈출한 시점에서 그녀가 했던 악행 역시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다. 다시 들어가면 죽은 사람들도 다시 살아나 있을 테니까.
또, 엄밀히 따지면 우리의 최종 목표인 ‘방의 해결’을 하고 나면 NPC들은 전부 사라진다. 그런 맥락을 고려할 때, NPC들의 목숨이 진짜 인간의 목숨과 동등하다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건 결국 내 생각이고 엘레나가 극복할 문제다.
결국 점심 식사가 다 끝날 때까지 우리는 방의 해결에 관한 진지한 이야기는 시작도 하지 못했다.
*
혼자 복도를 거닐며 곰곰이 생각했다. 우선, 탈출 후 확인한 방의 번호는 다름 아닌 203호였다. 우연이라면 참 공교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파티는 크게 두 부류로 쪼개진 채 진행했다.
나와 진철 형, 의사 선생님과 묵성 할아버지, 엘레나와 승엽이는 중도에 합류해서 산맥으로 향한 ‘산맥 파’였고, 은솔 누나와 송이는 난데없이 하늘의 기이한 생물이 남기는 자취를 발견한 후 그 생물의 그림자를 쫓았다고 한다. 편의상 ‘그림자 파’라고 하자.
이 중, 탈출에 성공한 건 ‘그림자 파’였다. 그림자를 쫓아서 10일 정도 이동하자 갑자기 탈출이 뜨면서 바깥으로 나왔다고 한다.
황당하게도 탈출에 성공한 사람들은 본인들이 대체 ‘무엇으로부터’ ‘왜’ 탈출했는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난데없이 탈출이 떴다고만 했다.
다만, 탈출이 떴다는 시기와 ‘산맥 파’가 산맥에서 광선을 쏘는 아리와 만난 후 몰살당한 시기가 비슷하다. 우연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우리가 산맥에서 벌인 일이 물경 수십km 바깥에서 산맥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던 그림자 파가 탈출하는 데 영향을 끼쳤음이 분명하다. 물론, 대체 무슨 영향을 줬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
— 툭!
“혼자 골똘히 고민 중이시군요.”
“아, 선생님?”
“뒤에서 불렀는데 대답이 없어서 실례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나저나 일이 쉽지 않군요. 저녁에 다시 한번 회의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중간중간 다른 사람들의 정보도 모아봤는데, 이렇게까지 뭐가 뭔지 모르는 일은 드물다 싶습니다.”
“그러게요….”
“대적자는 누구일까요? 도시에서 나타난 아리 양일까요? 하지만, 이건 의미 없죠. 아리 양을 조종하는 존재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고 있으니까요. 죄수까지야 원래 몰라도 깰 때가 있으니 그렇다 칩시다. 203호, 그 방을 위협하는 저주는 대체 뭡니까?”
“모르겠네요.”
“물론, 알아낸 정보도 상당합니다. 산맥 너머엔 멸망한 고대 문명의 유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죠. 그 장소에 사악한 존재에게 몸을 빼앗긴 아리 양이 있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또, 승엽 군이 마지막에 신기한 걸 본 모양이더군요.”
신기한 것?
“이따가 이야기해봅시다. 다만, 한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미리 알려드리려고 왔습니다.”
“의견이요?”
어딘가 지친 표정을 짓던 선생님이 한숨을 쉬었다.
“우리, 다음 방부터 갑시다.”
“…”
“203호는 내가 겪은 첫 번째 호텔까지 합쳐서 봐도 터무니없을 정도로 힘든 방입니다.”
“힘들다라….”
“203호가 다른 방보다 특별히 위험한가? 그렇진 않습니다. 위험성으로 따지면 들어가서 하루 만에 파국이 찾아오던 202호나 죄수가 우릴 잡아먹으려고 날뛰는 104호가 훨씬 심했지요. 그에 비하면 203호는 일단 시간상으로 무척 여유롭습니다. 203호에서 머무른 시간이 열흘이 넘는데 우리는 세상을 위협하는 저주가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이게 무슨 의미겠습니까?”
“‘저주’가 덮치기까지 남은 시간이 열흘 이상이라는 의미겠죠.”
“시간상으로는 그 어떤 방보다도 여유로운 방이 아닌가 합니다. 하지만, ‘힘들다’라는 면에선 그 반대입니다. 정신적인 면에선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동료와 강제로 찢어놨다는 점만으로도 지옥입니다.”
203호에서 호텔 파티 전원은 서로 다른 장소에서 외롭게 싸워나가야 한다.
“물리적인 면은 굳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되겠지요? 자동차가 없다, 에어컨이 없다, 하는 배부른 소리는 치워둡시다. 203호는 그 이전에 일단 사람이 먹을 음식부터가 없습니다. 물은 죄다 구정물뿐이죠.”
“참 말하면 말할수록 끔찍하네요.”
“그래서 저녁 회의 시간에 건의할 생각입니다. 우리, 다음 방부터 가봅시다.”
“…”
“영원히 203호를 버리자는 게 아닙니다. 심신의 고통이 좀 덜한 장소부터 해결하면서 서로 회복도 하고 힘도 쌓은 후에 다시 돌아옵시다. 정신의학의 전문가로서 말하건대, 우리 중에서도 상태가 특히 좋지 않은 승엽 군이나 엘레나 양은 한동안 ‘203’이라는 숫자만 봐도 덜덜 떨 겁니다.”
머리가 또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다음 방으로 간다고 한들 편함이 있을까?
하지만, 203호가 도가 지나치게 힘든 것도 사실이다. 저주의 방끼리 비교해도 동료를 싹 갈라놓은 원시시대라는 극한의 환경은 203호에서 처음 경험했으니까. 한번 모두와 이야기해봐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