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276)
275화 – 회의 (2)
[사용자 : 한가인(지혜)날짜 : 131일 차
현재 위치 : 계층 1, 복도
현자의 조언 : 3]
– 한가인
203호에 다시 들어갈 때 어떻게 진행해야 할까? 그 이야기가 나오자 할아버지가 즉시 입을 열었다.
“어떻게 모일지부터 말해봐야 하지 않겠냐? 가인아, 이젠 상태창 정상화됐지?”
“정상화됐고 다시 들어가면 시나리오도 나오고 위치정보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래봐야 쉽게 모일 방법은 없어요.”
이 부분만큼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이미 한차례 모이는 과정에서 깨달았으니까.
“우린 최소한 호주 대륙만 한 크기의 땅에 여기저기 떨어진 상태일 겁니다. 위치정보를 본다 해서 쉽게 모일 방법 같은 건 없어요. 순간이동 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나마 다행이라고 하긴 뭐한데, 8명이 전부 다 분산된 느낌은 아니고 대충 두 부족씩은 붙여둔 것 같네요.”
나와 진철 형, 할아버지와 의사 선생님, 은솔 누나와 송이, 승엽이와 엘레나. 이렇게 두 사람씩 자신이 속한 부족의 위치가 붙어있는 상황이다.
“허 참…. 이런 상황에선 네가 위치를 확인해도 엿같이 나오겠구나.”
“‘북서쪽으로 72km 상수리나무 숲 근처’ 이런 식으로 나올 겁니다. 위치를 알아봐야 의미가 없어요.”
진철 형이 끼어들었다.
“불가능한 건 바로 포기합시다. 저번처럼 장기간에 걸쳐 서서히 모여야죠. 또 산맥에 갈 겁니까?”
그 말이 나오자마자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레 아리에게 쏠렸다. 산맥에 또 가겠다면, 가장 큰 위험부담은 역시 아리니까.
축복을 회복한다면 아리와 붙어서 이길 수 있을까?
자신감 있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다시 가면 충분히 이길만하지 않냐? 솔직히 축복이 없으니까 별을 제대로 쓸 수가 없었잖아! 나만 그렇냐? 가인이 너도 ‘화신의 힘’은 아예 시도도 못 했는데 이건 상태창의 보호 없이는 강력한 힘을 쓸 자신이 없었던 것 아니야?”
“어느 정도 영향은 있죠.”
“승엽이도 축복이 없으니 아무것도 못 했고. 엘레나 양도 명경지수가 없으니 고생하지 않았습니까.”
“음…. 고생하긴 했는데, 명경지수가 있었다고 한들 더 강해지진 않았을 것에요. 오히려 평소보다 훨씬 강력한 불길한 상상을 휘두른 느낌이거든요.”
“그렇다고 해도 아리를 상대로 ‘정의’를 쓸 수 있다면 이길 것 같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죠.”
… 내 생각은 전혀 다르다. 의견을 내기 전에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차, 아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선, 난 산맥에서 벌어진 싸움에 관한 기억은 전혀 없어. 하지만 너희에게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말해볼게. 진철이가 지금 한 가지 놓친 것 같은데, 너희는 이미 나 하나를 상대로는 이겼어.”
그렇다.
상대해야 할 적이 아리뿐이라면, 우리는 이미 첫 번째 시도에서 이겼다. 진철 형이 별을 사용해서 아리가 숨어있던 건물을 무너트린 후, 내가 아리를 정지시킨 사이에 할아버지가 공격하는 전술이 유효했기 때문이다.
“다 이긴 승부가 마지막에 왜 뒤집어졌어? 결국 로봇들이 개입했기 때문이잖아?”
로봇 이야기가 나오자 할아버지가 의구심을 표했다.
“사실, 처음엔 도시 내부에선 로봇을 부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산맥 바깥에서 우릴 추격하던 로봇들이 분지 근처로 가니까 싹 사라지더라고. 그런데 아니더라. 마지막 순간에 날 죽인 것도 갑자기 벽에서 튀어나온 로봇이었고, 듣자 하니 승엽이도 로봇에 죽은 상황 아니냐?”
즉, 대적자 아리는 도시 내부에서도 로봇을 부릴 수 있다. 그런데 왜 처음부터 로봇을 내보내지 않았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떠올랐다.
“어쩌면 도시의 파괴를 피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기관총이 아니라 기관포를 쏘던데, 탄환 하나하나가 다 포탄이더군요. 로봇 한기만 날뛰어도 유적이 순식간에 폐허가 될 겁니다.”
의사 선생님은 다른 관점의 견해를 냈다.
“단순히 로봇이 매우 귀한 상태일지도 모르죠. 문명이 멀쩡할 때야 공장에서 찍어낼 수 있는 로봇이 사람보다 흔했겠지만, 문명이 붕괴한 시점에선 수백 수천 년 전에 만들어진 후 더 이상 만들 방법이 없는 로봇의 가치는 엄청나게 높을 겁니다.”
아리는 특이한 의견을 냈다.
“너희가 말하는 싸움 양상을 듣다가 느낀 건데…. 솔직히 ‘내’가 너무 비효율적으로 싸운 것 같아. 어쩌면 너희를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라 모종의 이유로 생포하려 한 게 아닌가 싶어. 만약 작정하고 죽이는 게 목적이었다면, 대체 왜 숫자도 많은 너희를 상대로 몸을 드러낸 채 드잡이질해?”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 같다. 결론은 모두 같다. 대적자는 도시 내부에서도 로봇을 부릴 수 있으며, 그 이유 한가지 만으로도 상대하기가 극히 까다롭다. 이는 축복을 챙겨간다 해도 쉽지 않은 문제다.
축복 정의나 유산 마도서는 로봇 앞에선 무용지물이다. 축복을 회복할 진철 형이 이계의 별을 훨씬 자유롭게 쓰긴 하겠지만, 교전 거리라는 면에서 너무 차이가 나서 역시 쉽지 않다.
“거기에 한 가지 잊지 말아줬으면 해. 축복이 다시 돌아온다는 건, 나도 ‘존재감 없는 소녀’를 쓸 수 있을 가능성이 커.”
바로 눈앞에서 장난치는데도 인지하기 어렵게 했던 존재감 없는 소녀. 이런 능력을 회복한 아리가 작정하고 레이저를 쏴가며 싸우는데 당해낼 수 있을까?
이런 부분들을 고민하다 보니 슬슬 판단이 섰다.
‘산맥’은 마지막 순간, 방을 해결하기 위해 가야 하는 장소가 아닐까? 203호의 첫 번째 시도에서 우린 ‘사전에 거쳐야 하는 과정’을 무시한 채 다짜고짜 최종 보스가 있는 구역으로 이동했기에 실패했을지도 모른다.
바로 이런 판단에 확신을 내리기 위한 적절한 능력을 오랜만에 사용했다.
[조언 : 3 -> 2]‘산맥을 넘으려는 판단에 문제가 있습니까?’
[실패한 선택을 고집하기보다 성과를 거둔 선택에 주목하라.]“잠깐만요!”
잠시 회의를 멈추고 내가 얻은 조언을 전했다. 실패한 선택을 고집하지 말고 성과를 거둔 선택에 주목하라. 이 말의 의미는 비교적 명확했다.
결과만 보자. 산맥으로 이동한 판단은 어떠했는가? 실패다. 결국 가서 살아남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 정보를 많이 얻긴 했으나 이건 ‘탈출에 성공한 선택’이 있었기에 의미가 있는 이야기다.
탈출이라는 성과를 거둔 선택은 은솔 누나와 송이가 고른 선택지였다. 산맥의 반대 방향, 하늘에 존재하는 신적인 생물의 흔적을 쫓는 것!
여기에 생각이 닿자 동료들이 서서히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쪽 선택지에도 어려움은 있었다.
“문제가 있습니다. 하늘의 푸른 생물, 그걸 볼 수 있는 사람이 은솔 양뿐이지 않습니까?”
의사 선생님의 지적에 누나가 답했다.
“굳이 하늘의 생물을 볼 필요 없어. 나도 매번 하늘만 보면서 움직인 게 아니니까. 땅에 있는 그림자를 쫓아가면 그만이야. 다만, 너희 부족의 위치에서 그림자를 쉽게 찾을 수 있을지 그걸 모르겠네.”
할아버지가 바로 받았다.
“그것도 쉬운 문제 아니냐? 그림자가 지나갈 때마다 황무지에 부자연스러울 정도의 풍요로움이 깃든다며?”
“맞아요. 저랑 송이가 열흘간 따라가면서 허허벌판에서 난데없이 열매를 품은 풀숲이 솟아나는 걸 몇 번이나 봤거든요.”
“온 세상이 황량하기 그지없는데 특정 지역만 맛 좋은 나무 열매와 신선한 물이 흐른다면 보나 마나 그놈이 지나간 흔적이겠지. 그 흔적을 따라 이동하다 보면 그림자도 자연스레 보일 것이고.”
다음 회차에선 어떤 식으로 진행할지 정해진 것 같다. 이번엔 산맥은 무시한 채 하늘을 부유하는 신비로운 존재를 따라가기로 했다.
“다음 회차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결국 방호복은 누구에게 있었던 거야?”
아리가 간단히 결론을 내렸다.
“없었던 거지. 승엽이가 방호복인가? 하고 다가가서 발견한 건 방호복이 아니었으니까.”
203호, 첫 번째 시도 때 우린 방호복 없이 들어갔다.
“이상한 일도 아니야. 방호복은 우리 중 그 누구에게도 소유권이 없는 공용 물품이잖아? 그동안은 어떻게 했어? 평소엔 내가 관리하다가 저주의 방에 들어갈 때는 우리 중 누군가가 입었잖아?”
“그랬지.”
“이번엔 아니었어. 나도 그냥 알림을 받고 나온 거라 방호복을 챙겨 나오지 않았으니까 계속 내 방에 있었다고. 그러니까 방호복 없이 시작한 셈이야. 그리고….”
“그리고?”
“이와 똑같은 원리가 모래시계에도 적용된 것 같아. 203호 내부에서 모래시계 본 사람 있어?”
“…”
모래시계. 그 빌어먹을 단어가 튀어나오자마자 다들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으아! 다시 생각해도 너무 황당하지 않아요?”
평소엔 얌전한 편인 엘레나도 찌푸린 눈썹을 펴지 않았다.
“이번엔 정말 좀 심했죠. 새벽에 난데없이 강제로 깨워서 부르길래 뭔가 했는데, 알고 보니 함정에 빠트리려고 부른 거잖아요.”
맞다. 혹시 새벽에 부를만한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어 고민해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가 명확하다.
사고가 터지던 전날 저녁, 나는 마도서를 연구하다가 시력에 문제가 생겼다. 호텔 특성상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시력이 회복되었겠지. 그 틈을 노려서 일부러 대응할 수 없게 새벽에 모두를 불러낸 것이다.
“이야기 나온 김에 그놈의 모래시계 한번 살펴보고 옵시다.”
“좋아.”
이런저런 짜증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에 도착하자마자 모두가 입을 꾹 다물었다. 모래시계가 보이기 시작하자 절로 긴장했기 때문이다.
…
…
무슨 방사성 폐기물을 관측하는 것 같다. 다들 테이블 근처로 다가갈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바보같이 모래시계를 구경만 했다.
“에잇! 이 무슨 바보짓이래? 내가 한번 보고 올게!”
자신감 있게 나서는 아리의 어깨를 황급히 잡았다. 짜증 난다고 바로 움직일 상황이 아니다. 저 물건은 시한폭탄보다도 위험하다!
“어허! 진정 좀 해. 조언 바로 쓸 테니까.”
[조언 : 2 -> 1]‘모래시계 관련 주의사항 좀 줘. 좀 속이지 말고 제대로 달라고!’
[예의를 지켜라. 사용법을 터득하기 전에 섣불리 뒤집지 말라. 안전장치가 있다.]‘안전장치?’ 아무래도 내가 가서 봐야 할 모양이다.
“야! 가인 -”
“형, 말 걸지 마세요! 지금 긴장 중이니까.”
“그, 그래.”
천천히, 혹여나 ‘뒤집혔다’라는 판정이 뜰까 주의하며 정말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구조를 살폈다. 불투명한 플라스크 두 개를 붙여놓은 듯한 모양새다. 옆면에 작은 톱니바퀴가 보였다.
이게 안전장치인가? 조심스럽게 톱니바퀴를 돌리자 철컥하는 소리가 들리며 플라스크 내부의 젤리 같은 내용물이 갑자기 굳었다.
“방금 뭐 한 거야? 특이한 소리가 났는데?”
대답 대신 모래시계를 서서히 뒤집었다. 그걸 본 동료들의 안색이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렸다.
“한가인, 이 미친 새끼 대체 무슨 -”
“…”
“…”
“아무 일 없네?”
“형, 갑자기 미친 새끼라뇨.”
“노, 놀라서 그랬지 놀라서.”
이 톱니바퀴를 돌리면 내용물이 돌처럼 굳는다. 이렇게 변하고 나면, 모래시계를 뒤집어도 내용물이 유동하지 않으므로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 듯했다.
생각해보면, 모래시계는 이런 안전장치 없이는 도저히 쓸 수 없는 물건이다. 그냥 들고 다니다가 실수로 넘어질 때마다 초대형 사고가 터진다면 대체 어떻게 쓰겠는가?
아리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좋아 좋아. 이제 사용 방법은 알았네. 평소엔 요 톱니를 돌려서 잠가두고, 쓸 때만 톱니를 풀면 되겠구나. 그런데 어떤 상황에서 써야 하지? 호텔의 시간을 미래로 돌린다? 이게 어떤 의미가 있어?”
“글쎄…. 조언 하나 남았는데 마저 써볼까?”
“용도에 대해선 조금 더 생각해보자. 참, 이건 앞으로 가인이 네가 들고 다녀.”
“쿨럭! 내, 내가?”
“왜 그래? 이런 건 원래 처음 만진 사람이 관리해야지. 게다가 넌 조언이 있잖아. 어쩌면 꼭 필요한 순간에 조언이 알려줄지도 몰라. ‘지금 시계를 돌리세요!’ 같은 느낌?”
“…”
주변을 돌아보자 그 누구도 모래시계에 다가오려는 사람이 없었다. 평소엔 헤라클레스처럼 용기 있게 행동하던 진철 형은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
“좋아! 이제 오늘의 회의도 거의 끝이네. 정보도 모았고, 다음에 203호로 들어가면 뭘 해야 할지도 정했어. 모래시계는…. 뭐, 최소한 안전하게 쓰는 방법은 알았으니 성과인 셈 치자. 이제 마지막 주제, 상현 씨가 꺼낸 주제야. 방을 바꿔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다들 어떻게 생각해?”
“누나 생각은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