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278)
277화 – 204호, 미션의 방 – ‘호텔 시네마’ (1)
– 엘레나
기묘하네.
‘황태자 길들이기’에 들어온 후, 수도 없이 느낀 감상이다. 10분쯤 전, 침대에서 깨어난 나는 파티 준비를 위해 화려한 드레스를 입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은 정상적으로 움직였다.
기이한 일은 그다음부터다. 드레스를 입고 저택 바깥을 나설 때만 해도 무슨 마차라도 탈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저택 문 앞을 나서자마자 황궁에 도착한 것이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순간이동에 크게 당황했다. 신비하고 기이한 일이 숨 쉬듯이 매일 일어나는 호텔에서 쌓아온 경험이 아니었다면 비명을 질렀을지도 몰라.
조금 생각해보니 쉽게 이해했다. 지금 이 장소는 현실이 아니라 ‘영화 속’이기 때문이다. 영화란 짧으면 2시간, 길어야 3시간 내외의 짧은 시간 동안 기승전결이 있는 스토리를 전부 담아내야 한다.
여주인공이 드레스를 갈아입는 장면이야 관객들이 보고 싶어 할만한 화려하고 아름다운 장면이니 실시간으로 진행되었다. 반면,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이동하는 장면이나 그 과정에서 엑스트라 하녀와 잡담을 나누는 장면은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으니 생략하고 즉시 황궁으로 이동시킨 것이다.
파티장에 도착하는 순간, 시종의 우렁찬 목소리가 파티장을 울렸다.
“엘레나 크로시벨 양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엘레나 ‘크로시벨’ 이게 내 이름이구나. 기다렸다는 듯이 고풍스러운 옷을 입은 고귀한 태생의 남성 귀족들이 다가와서 춤을 신청하기도 했고, 자기 자랑을 늘어놓기도 했다. 적당히 웃어넘기면서 모두 밀어냈다. 덕분이라고 하긴 애매하지만, 내가 ‘백작의 딸’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황태자는 어디 있지? 내 사냥감! 나와!
*
「내 사냥감! 나와!」
“저거 로맨스 영화에 들어간 히로인 맞아? 멘트가 거의 멧돼지 사냥 중인 사냥꾼인데?”
“나래이션만 없으면 충분히 어울리긴 해요.”
*
황태자를 찾아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근처에 공작새 같은 특이한 복장을 한 귀족들이 잔뜩 모여있었기 때문이다. 건장하고 당당한 체격, 선 굵은 미남이 호탕하게 웃으며 주변에 농담을 던지는 광경이 보였다. 분명 저 사람이 황태자다.
다만, 여기서 살짝 고민이 들었다. 무작정 다가가는 게 맞을까?
연애란 밀고 당기기의 연속인 법. 물고기를 잡을 때, 입에 무작정 미끼를 들이대면 물고기는 오히려 도망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상대가 다가오게끔 유도할 필요가 있다.
창가로 움직인 후, 고개를 들어 조명의 위치를 확인했다. 두 걸음 전진해서 적절한 위치를 잡고, 허리를 편 후 최대한 감정을 담은 표정으로 파티장을 슬며시 돌아보았다.
좀 더 우수에 찬 분위기를 잡아보는 게 좋지 않을까? 사연이 있는 백작가의 따님 같은 느낌의 캐릭터가 좋겠지. 이 부분은 좀 어렵지만 내 느낌대로 가자.
브로치를 풀고 창가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바깥바람이 머리카락에 들이치자 허리까지 내려온 금발이 흩날리듯 나풀거리기 시작했다.
— 또각!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슬쩍 미소가 나왔지만, 돌아서지 않고 기다렸다. 본디 여주인공이란 상대를 애달프게 만드는 존재이지 내가 매달려서는 안 되는 법이니까!
*
화려한 황궁의 한 편, 흔들리는 창가에 기대어 선 엘레나의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꼈다. 황금을 가루로 만들어 허공에 흩뿌리는듯한 고요한 자태가 빛을 발하자, 흡사 세상의 초점이 황궁의 춤추는 사람들로부터 창가로 이동한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영화의 초점이 그쪽으로 이동했다. 동시에 ‘황태자 길들이기 – 엘레나 편’을 감상 중인 관객들 다수가 넋이 나갔다.
“우와….”
“저거 무슨 CG 아니야? 어떻게 머리에서 빛이 나지?”
“가인아, 입에서 침 떨어지겠어.”
“치, 침이라니.”
단체로 스크린에 들어갈 듯한 동료들을 돌아보며 김아리는 내심 쉽지 않다고 여겼다.
‘저걸 어떻게 따라 해?’
따지고 보면 그냥 머리 풀고 창가에 섰을 뿐이다.
본인의 비주얼이 되니까 그 정도만으로 로맨스 영화의 한 장면에 어울리는 화보 같은 장면이 나왔을 뿐, 다른 사람이 흉내 내기 쉽지 않다. 만일 엘레나가 실패해서 다른 사람이 들어간다 해도 저런 방식은 무리다.
“다른 사람도 따라 할 수 있는 방식을 엘레나가 보여줬으면 좋겠는데.”
아니면, 엘레나 본인이 한 번에 성공하던가!
*
“레이디 크로시벨, 혹시 무슨 고민이 있으십니까?”
뒤로 돌아서자 아까 봤던 당당한 체격의 미남자가 나타났다. 예상대로네. 그 후로는 간단히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고, 와인도 한잔 씩 마신 후 연회장의 중앙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 저 펜들턴, 한평생 장님으로 살아왔음을 알았습니다.”
“어머!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크로시벨 양의 이런 귀한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제 눈이 일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멘트는 솔직히 좀 그래. 하지만 잘생긴 황태자니까 봐줄게.
“창가를 오랜 시간 바라보시던데, 무슨 고민이 있으신가요?”
널 어떻게 해야 한방에 반하게 만들지 고민했어.
“점점 날씨가 추워지더군요. 들으셨겠지만, 아버님이 제국 북서부의 일을 처리하기 위해 떠나셨는데 얼마나 고생 중이실까 생각하니 가슴이 무거워졌답니다.”
아빠(?)가 북서부로 떠난 건 맞겠지? 아까 옷 갈아입다가 들은 설정인데 정확할지 모르겠다.
“하하! 이토록 아름다운 따님이 자나 깨나 본인을 걱정 중이라는 사실을 크로시벨 백작께서 꼭 명심하셔야 할 텐데요! 저 펜들턴, 오다가다 백작님을 뵈곤 했습니다. 기회가 되면 꼭 전해드리지요.”
백작‘님’? 저 ‘펜들턴’?
“그…. 혹시 펜들턴 소 공작이신가요?”
“네? 하하! 설마하니 절 알아보시지 못하신 건 아니겠지요? 크로시벨 양, 이렇게 농담이 많은 분이신 줄 몰랐군요.”
*
「이 자식 황태자 아니잖아! 누가 이렇게 황태자처럼 생기래!」
분노에 찬 엘레나의 나래이션을 들은 관객들은 곧 뒷목을 잡고 말았다.
“으아…. 대화 시작할 때부터 ‘펜들턴’이라고 했잖아요! 황태자는 ‘페르손’이고! 이름과 성 모두 초반에 메이드가 말했었는데!”
답답해하는 가인을 보며 송이는 조심스럽게 엘레나를 변호했다.
“오빠, 솔직히 저 상황은 엘레나가 착각할만해요. 오빠가 로맨스 영화나 소설을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건데, 보통 황태자는 제일 잘생겼단 말이에요. 저도 조금 전까지 소공작이 당연히 황태자인 줄 착각하고 있었어요.”
“아니, 황제 아들이니까 황태자지 잘생겨서 황태자인 게 아닌데 무슨 상관이야?”
“가인이 넌 모르는 소리 좀 하지 마. 남주인공에 황태자면 최고 미남인 게 상식이라고! 저 영화의 배역 선정이 이상한 거야.”
뒤에서 은솔까지 잔소리하자 가인은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거 내가 잘못한 건가?’
*
진정하자! 침착 침착! 아직 늦지 않았어. 연회는 많이 남았다고!
이 쓸데없이 황태자처럼 생긴 소 공작을 밀쳐내고 나자 뒤늦게 연회장 한편에 측근들과 함께 앉아있는 ‘진짜 황태자’, 조슈아 페르손을 찾아낼 수 있었다. 황태자를 찾아내는 순간, 내가 느꼈던 감정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호텔이 함정을 팠다!
아니, 로맨스 영화의 남주인공 하면 보통 떠오르는 연령대가 있잖아 연령대가! 20대 중반, 늦어도 30대 초반 정도가 상식 아니야?
승엽이 나이대 꼬마를 가져다 놓으면 나보고 어쩌라고!
순간적으로 속에서 화가 치밀었지만,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자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호텔이 더 악랄하게 나왔다면 60대 할아버지를 ‘황태자’라고 데려다 놨을 수도 있다. 현실에서 어떤 나라의 황태자는 70살이 넘어서 왕위를 이어받았으니까.
위치 선정을 바로잡은 후, 황태자가 볼 수 있는 적절한 위치에서 아까 했던 ‘쇼’를 반복했다. 이번엔 무슨 핑계가 좋을까? 어머님이 기침이 많아지신 것에 대해 걱정하는 효녀?
두 번째 ‘낚시’가 성공하기까진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또 뒤에서 또각거리는 발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승엽이보다 한두 살 많아 보이는 꼬마가 다가왔다.
“레, 레이디 크, 크로시벨! 무슨 고민 있으세요? 오, 오늘 저 페르손이 -”
“한평생 장님으로 살아왔음을 알았다?”
“딸꾹!”
이 멘트는 누가 유행시킨 거야?
“풋! 죄송해요. 오늘, 이 비슷한 말을 연달아 듣다 보니….”
“그, 그런가요?”
처음엔 좀 부끄러워하는 것 같던 소년은 곧 자연스럽게 다양한 이야기를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최근에 선물 받은 요트에 관한 이야기, 자꾸 자신을 떨어트리려 하는 애마에 관한 이야기, ‘소공작 주제에’ 자신보다 훨씬 파티에서 인기가 많은 펜들턴에 대한 미묘한 질투심까지.
한참 듣다 보니 이놈의 황태자가 어떤 유형의 캐릭터인지 깨달았다.
*
「좋은 집에서 태어난 왕족 승엽이네. 공략은 쉽겠다. 제국의 미래가 걱정스럽네.」
“에, 엘레나 누나! 방금 그건 대체 무슨 말이죠!”
“아하하하하하하!”
— 콰당!
아리가 너무 크게 웃다가 의자에서 미끄러지는 걸 본 은솔은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엘레나의 분석에는 완벽히 동의했다. 예쁜 여자 앞에선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는 데다가 황태자면서도 연회의 주도권을 잡지 못할 정도로 기가 약한 성격, 여기에 더해 감추지 못하는 미묘한 열등감까지.
솔직히 승엽이랑 좀 닮긴 했어.
“어, 어리고 귀엽다는 의미야, 승엽아.”
“‘공략은 쉽겠다’라고 했는데요? 제국의 미래가 걱정스럽다고 했는데요?”
은솔은 송이가 무의미한 위로를 하기보단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
대화의 주제가 갈수록 산으로 갔다.
아마도 이 어린 황태자는 내게 최대한 ‘있어 보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듯했다. 어울리지도 않게 수도권의 난방 대책에 대해 떠들다가 혼자 말문이 막혀서 끙끙거리는 걸 보다가 생각했다.
잊지 말자! 난 이 영화의 여주인공이니까 얘를 도와줘야 하는 거잖아?
“저하께서 수도의 시민들에 대해 생각하는 그 마음, 다른 사람들도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황제라 해도 겨울은 막을 수 없으나, 만백성을 아끼는 따뜻한 마음이 하늘에 닿는다면 분명 신께서도 감동하시겠지요.”
“그, 그렇죠!”
이런 느낌. 어찌 됐든 순탄하게 진행 중인 듯하다. 나이 차가 있어서 걱정스럽긴 했지만, 다행히 어린 황태자는 누가 봐도 나에게 푹 빠진 태도를 보였다.
정황상 ‘공작가의 파티’는 여주인공이 황태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벤트인 것 같고, 여기까진 성공이다. 다음 이벤트는….
“참, 엘레나 양!”
“태자 전하, 레이디께서 이름을 부르는 걸 허락하셨는지요? 예법상 크로시벨 양이라 부르셔야겠지요?”
“… 크, 크로시벨 양!”
그 잠깐 사이에 옆의 시종에게 혼나는 황태자를 보고 있노라니 내가 다 불쌍해져서 약간 도와주기로 했다.
“어머, 제가 조금 전에 이름을 부르셔도 된다고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예?”
“불러주시겠어요?”
“그렇죠! 엘레나 양! 다음 주에 신년 맞이 여우 사냥을 하는 것 아시죠?”
다음 이벤트는 ‘여우 사냥’인 듯하다. 그나저나, 내 말 한마디에 바로 의기양양해진 어리숙한 황태자를 보고 있으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어차피 영화긴 하지만 이놈의 제국, 다음 대에서 끝장이네.
*
“승엽아, 통치 좀 잘하라고 했잖아! 이대로라면 다음 대에서 끝난다잖아!”
“… 괜찮아요. 전 황태자가 아니니까.”
아리의 놀림을 들으며 고개를 푹 숙인 승엽이를 보며 웃음을 참기 힘들어 같이 낄낄거리던 가인은 문득, 깨달았다.
‘이거 웃을 때가 아니잖아!’
지금 엘레나는 자기 생각이 나레이션으로 노출 중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조금 전엔 승엽이를 떠올렸지만, 그다음 차례는 누구지? 만일 나에 관한 생각을 떠올린다면….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그 시각, 건너편에 앉아있던 송이의 머리는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호텔에서 만든 시나리오가 이렇게 순탄할 리가 없어! 분명히 빌런이 나올 때가 됐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