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279)
278화 – 204호, 미션의 방 – ‘호텔 시네마’ (2)
– 엘레나
황태자가 내게 여우 사냥에 대해 알린 후, 서서히 주변 공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미 한번 경험해봤기에 놀라진 않았다. 중간의 ‘노잼 과정’을 생략하고 즉시 여우 사냥으로 넘어가는 것.
그 순간, 갑자기 내 몸이 사라지고 흡사 유령 같은 상태가 되어 어떤 장면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겔리온! 이번 사냥 때는 그냥 아프다고 하면 안 돼?”
“태자 저하. 이미 여러 차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여우 사냥은, 건국 황제께서 직접 언급하신 232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행사로서 제국 귀한 자들 간의 친분을 -”
“에잇! 알았어. 간다니까? 으…. 또 펜들턴 그 자식이 자랑하는 것 생각하니까 짜증이 나!”
“저하, 중요한 것은 잡은 여우의 수가 아니라 -”
“알았다니까!”
좋아. 대충 무슨 느낌인지 알았다. 지금 이 장면은 영화에선 여주인공이 등장하지 않는 장면이다. ‘남주인공’인 황태자의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한 컷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남주인공, 황태자께서는.
병신이다.
*
「병신이다.」
“… 혹시 저 나레이션이 문제가 되는 건 아니겠죠?”
송이의 걱정에 은솔은 큰 한숨을 쉬었다.
“아까부터 그게 걱정이야. 나레이션이 우리에게 들린다는 건, ‘관객’에게 들리는 대사라는 의미잖아!”
*
— 탕!
“오! 펜들턴 경, 정말이지 백발백중이십니다!”
“하하! 조지, 별것 아니야. 여우가 맞춰달라고 나무 앞에 멈춰있는데, 그걸 맞추지 못하는 게 바보 아니겠어? 이럴 때는 2년 전, 북방 전선에 출전했을 때 -”
— 탕!
“…”
“… 저하께서 아직 사격에 익숙하지 않으신 듯합니다.”
여우 사냥은 예상대로 진행되었다. 무려 제국의 북방 전선에서도 활약했다는 거창한 타이틀을 가진 펜들턴 소 공작은 보이는 여우를 족족 백발백중으로 잡아냈다.
반면, 황태자는 여우가 나타나기만 해도 얼굴이 붉어지더니 총알은 죄다 허공을 갈랐다. 보고 있자니 이래서야 황태자가 여우를 잡는 것보다 여우가 황태자를 잡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침착하자. 영화에 이 이벤트가 존재하는 이유를 떠올려야 해.
첫 번째 이벤트, ‘파티’가 존재하는 이유는 황태자가 여주인공에게 사랑에 빠지는 장소다. 그렇다면 두 번째 이벤트의 존재 이유는?
“에잇! 난 이제 들어가겠어!”
“저, 저하! 아직 오전입니다!”
저 초등학생 같은 ‘남주인공’의 기분을 풀어주고 기를 세워주는 것 아닐까? 해피엔딩을 위해선 최소한 남주인공은 행복해져야 할 것 같았다.
“겔리온 경, 잠깐 이쪽으로 와주시겠어요?”
“크로시벨 양? 할 말이 있으신지요?”
“저하께서 그리 즐겁지 않아 보이세요.”
“… 뭐, 세상일이 항상 즐거울 수는 없는 법이지요.”
“그렇다고 해도 주변 사람들이 약간만 ‘도와주면’ 저하께서도 행복해지시지 않을까요?”
“도와준다니요?”
내 작전이 통할 수 있을까? 솔직히 이 자리에 모인 귀족들이 죄다 바보 천치도 아니고, 속인다는 것도 한계가 있을 텐데. 눈치 빠른 똑똑한 사람이면 금세 알아챌 수밖에 없다.
— 탕!
펜들턴이 자신 있게 쏜 총알이 허공을 갈랐다. 티가 날 정도로 아쉽다는 ‘연기’를 하는 펜들턴을 보자 내 계획에 확신이 섰다. 주변 시종들을 부려 ‘수작’을 부렸다.
양산의 각도를 슬쩍 꺾어 얼굴이 드러나게 한 후, 느긋하게 황태자 쪽으로 이동했다. 어린아이처럼 투정 부리던 황태자가 내 접근을 눈치챘는지 갑자기 얌전해지는 웃기지도 않는 장면이 보였다.
“레이디 크로시벨! 날 보러 왔나요?”
“물론이죠. 저하, 오늘의 사냥은 즐거우신가요?”
“…”
“어머, 아직 여우를 잡지 못하셨나요?”
“나, 날 놀리지 마시오!”
“놀리다니요? 사냥이란 본디 잘 풀릴 때도 있고 막힐 때도 있는 법이랍니다. 오면서 보니까 펜들턴 후작이 세 발 연속으로 나무를 맞추시더군요. 그분의 흐름이 꺾이신 것 같아요.”
“그, 그런가? 그렇다고 해도 -”
“저하, 그러지 마시고 이번엔 북서쪽의 여우를 잡아보시는 건 어떨까요?”
미리 ‘작업’해둔 방향으로 황태자를 끌고 갔다. 곧, 유치하기 짝이 없는 쇼가 시작됐다.
— 탕!
“오오! 전하, 수풀의 여우가 쓰러졌습니다?”
“어? 어?”
— 탕!
“아니, 저건 또 어떻게 맞추셨습니까?”
황태자가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모두가 분주히 움직였다. 누군가는 미리 죽여둔 여우를 은근슬쩍 가져다 두었고, 누군가는 황태자와 같은 타이밍에 방아쇠를 당겨서 여우를 죽였다.
황태자 접대 여우 사냥이 시작된 것이다!
시종들을 부려 이 ‘접대 사냥’을 시작할 때만 해도 걱정스러웠다. 어리숙한 황태자야 속을 수 있겠지. 애초에 본인이 총을 어디에 겨누는지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니 본인이 맞췄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자리에 모인 귀족들이 바보도 아닌데 이런 수작에 속을까? 당연히 속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계획은 오히려 더 성공적으로 풀리기 시작했다. 돌아가는 정황을 본 눈치 빠른 귀족들이 ‘승부 조작’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금 전, 앤티덤 백작가의 장남이라는 청년이 슬쩍 다가오더니 자신이 잡은 여우를 황태자의 전리품 바구니에 밀어 넣었다.
조금 전, 토이부르크 자작이라는 사람이 황태자와 같은 타이밍에 쏴서 황태자가 노린 여우를 맞춘 후, 황태자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건넸다.
펜들턴 후작은 무려 다섯 발 연속 총을 허공으로 쏘기 시작했다.
“으하하하하! 또 잡았다! 또 잡았어!”
“경축드리옵니다!”
황태자의 웃음소리가 사냥터를 가득 메웠다. 영화 시간이 아직도 많이 남은 것 같은데, 남은 시간 내내 저 멍청이의 비위나 맞추고 있을 생각을 하니까 끔찍하네요.
차라리 저 자리에 ‘다른 사람’이 있으면 어땠을까?
요령이 있는 사람이라면 여우야 잘 잡든 못 잡든 귀족들 사이에 끼어서 재밌게 놀고 있었을 것 같다. 설령 자존심이 상했다 해도 본인이 직접 손을 써서 이런저런 일을 벌였겠지.
애초에 이런 귀한 집 자식들의 친목 도모 이벤트에서 여우를 잘 잡는 실력 따위가 그리 중요하겠어? 제국의 왕좌는 총 잘 쏘는 사람이 가져가는 자리가 아니다.
으음….
만약, 황태자가 가인 씨라면, 어떤 ‘개수작’을 부렸을까?
*
“쿨럭!”
너무 갑자기 내 이름이 튀어나오잖아! 당황해서 콜라를 떨어트릴 뻔했다. 심지어 마지막 문장은 뭔데!
건너편의 송이가 정신없이 웃으며 배를 잡았다.
“오빠, 그니까 개수작 좀 그만 부리세요.”
“에, 엘레나는 평소에 내가 하는 일을 뭐라고 생각한 거야?”
아리가 피식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대부분 개수작 맞잖아? 104호에선 뜬금없이 신이 내린 사도 흉내를 냈다며? 그걸 받아주면서 엘레나가 무슨 생각 했을지 궁금하다!”
*
이 정도면 두 번째 이벤트, ‘여우 사냥’도 잘 풀었겠지?
황태자가 입이 찢어질 듯 벌어진 채 전리품 상자에 가득 담긴 여우 시체를 내 앞에 가져왔다. 저 많은 여우 중 정말 황태자가 잡은 여우가 몇 마리나 될지 의문이다.
그때쯤, 다시 주변 공간이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다음 이벤트로 넘어간다는 신호다. 잠시 후, 나는 화려하게 빛나는 제국의 도시를 거닐며 깨어났다.
…
이번엔 좀 당황했다.
파티나 여우 사냥 이벤트 때는 사전에 뭘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이번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주변 무대가 변하며 내가 갑자기 수도 한복판에 떨어졌다. 황급히 근처에 있던 하녀에게 묻자, 지금은 신년맞이 축제가 진행 중이라고 했다. 보아하니 여우 사냥 시점에서 날짜가 꽤 지나간 듯하다.
대체 뭐지?
이건 ‘영화’다. 초반부에 하녀가 내게 ‘파티에 간다’라고 알린 것이나 파티 이벤트가 끝나자마자 황태자가 ‘여우 사냥’을 언급한 것.
따지고 보면 두 멘트 모두 관객을 위한 멘트다. 앞으로의 전개를 예측할 수 있게 도와준 것이다. 지금처럼 아무 맥락도 설명도 없이 무대가 훅 바뀌어버리면, 관객들이 줄거리를 이해할 수가 없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경쾌한 음악 소리 속에서 도시를 거닐다 보니 서서히 상황을 깨닫기 시작했다.
“나만 모르는 장면이 지나갔구나.”
여우 사냥과 신년맞이 축제. 그사이에 어떤 장면이 있었다. 관객들, 바깥에 있을 동료들은 분명 그 장면을 봤다. 하지만, 여주인공인 나에게는 보여주지 않은 것.
서서히 긴장감이 차올랐다. 황태자의 열등감을 드러내는 시종과의 대화 장면은 보여줬으면서, 방금 지나간 장면은 보여주지 않는 이유?
여주인공은 몰라야 하는 장면이라는 의미다. 대체 뭐지?
문득, 날 시중하던 하녀가 자연스럽게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상하게도 주변이 어둡다. 분명히 음악이 가득한 도시를 거닐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당연하다는 듯이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는 어둑한 골목에 도착했다.
어딘가에서 묵직한 발걸음이 들려온다.
— 또각!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긴장감. 다가오는 사람은 한 명인가?
“… 누가 너를 보냈지?”
확 돌아서서 묻자 검은 로브를 두른 남자가 잠시 움찔거렸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
“날 해치려고 몰래 쫓아왔잖아.”
“오, 오해이십니다. 해치다니요?”
“‘거짓말’을 했구나.”
눈가에 서린 빛이 골목을 은은히 채운다. 일순간, 한 호흡의 폭발적인 기세가 몸을 가득 채웠다.
한 번의 호흡, 바닥을 부수며 도약했다.
두 번의 호흡, 당황하며 방어 동작을 취하는 남자의 오른팔을 손날로 내리찍었다.
세 번의 호흡, 균형을 잃고 휘청이는 자의 목을 움켜쥐었다.
“크으읍!”
“누가 보냈어?”
“오, 오해라니까요! 저, 겔리온입니다.”
에? 겔리온? 황태자 시종?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로브를 벗기자 진짜였다! 항상 황태자를 수발하는 시종, 그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 바, 방금 제 뒤를 밟으신 것 아니에요?”
“그야 저하께서 아가씨를 초대했으니까죠! 신년맞이 축제의 의미를 잊으신 겁니까?”
도리어 분통을 터트리는 시종을 보며 크게 당황했다!
시, 실수했어. 생각해보니 이런 축제는 보통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이 로맨틱하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그런 이벤트잖아!
수 없이 봤던 소설이나 영화의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딱 봐도 일반인이 아닌 주제에 ‘평민’으로 위장해서 늦은 시간까지 데이트를 즐기는 황태자와 연인, 화려하고 아름다운 도시.
해가 질 때쯤, 어딘가 두근거리는 분위기 속에서 속마음을 드러내는 황태자. 딱 이 흐름이잖아!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숙인 채 시종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 방금 장면, 혹시 저하가 보신 건 아니죠?”
“그건 아닙니다. 한데, 아가씨. 방금의 움직임은 대체 무엇입니까? 이 겔리온, 단언컨대 방금의 아가씨가 보이신 움직임은 제국 기사와 같았습니다.”
뭐긴 뭐야. 거짓말 탐지를 써서 거짓말을 찾아냈을 때 주어지는 응징의 힘이지.
숨이 턱 막혔다. 아까 전, 나는 분명 이자의 ‘거짓말’을 탐지했다!
즉시 뒤로 물러서며 거리를 벌리려는 그 순간, 희뿌연 연기가 시야를 가로막았다.
하! 이따위 안개가 정의의 발동을 막을 수는 없지. 축복의 힘이라면 이 하찮은 놈들 따위는 –
… 축복을 쓰는 게 맞나?
순간적으로 너무나 혼란스러워서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지금 내가 들어온 영화는 액션 판타지가 아니라 로맨스 영화이기 때문이다!
로맨스 영화에서 여주인공이 위기에 빠진다면, 바람같이 등장한 왕자님이 구해주는 게 정상적인 진행이다. 여주인공이 난데없이 기적을 휘두르며 암살자를 학살하는 그런 스토리는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어.
여기서 내가 축복으로 암살자를 쓸어버리는 건 스토리를 망치는 행동 아닐까? 이 잠깐의 고민이 내가 반격할 기회를 앗아갔다.
“반드시 사로잡아라! 다치게 하는 자는 팔다리가 성치 못할 것이다! 그리고 무예를 익힌 듯하니 조심하라!”
의식이 흐릿해진다. 어렴풋이 – 누군가의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
“아니, 엘레나는 저런 고민을 왜 하는 거냐? 그냥 정의 썼으면 다 쓸어버리고 끝인데, 저 고민 탓에 망했잖아!”
“저건 엘레나 판단이 맞지 않아? 이제부터 남주인공이 난입해서 구해줘야 하는 것 아니야? 무슨 로맨스영화에서 여주인공이 암살자를 때려죽이냐고! 오히려 그 앞에 시종과 드잡이질한 게 실수 아니야?”
뒤에서 들려오는 묵성과 아리의 대화를 듣던 가인은 혼란에 빠졌다. 로맨스 영화에서 여주인공이 암살자를 무력으로 박살 내는 건 분명 황당한 전개다. 그렇다면 적이 덮치는 상황에서조차 일부러 힘을 아끼다가 잡혀가야 하나?
가인은 급격히 머리가 아파져 옴을 느꼈다.
‘이 미션, 생각보다 개같이 어렵구나!’
스크린에 들어가기라도 할 것처럼 몰입해 있던 송이는 조금 다른 의문을 던졌다.
“마지막에 스쳐 지나간 이미지는 뭐에요? 엘레나가 뭔가를 휙 떠올리는 것 같았는데?”
“너무 빨리 지나가서 모르겠어. 제대로 떠올리기 전에 기절했나 봐.”
물론 그 이미지의 ‘정체’를 깨달은 사람도 있었다. 의자에 기댄 아리는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기분을 느꼈다.
‘… 위기의 순간, 엘레나는 마음속의 진짜 왕자님을 떠올렸구나. 그 왕자님이 자신을 절대 구해줄 수 없는 위치에 있음을 알면서도.’
이상한 기분이 든다. 엘레나가 가인을 의식한다는 점.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구체적인 이미지로 보는 것은 또 다르게 느껴졌다.
‘만약.’
‘만약 내가 저런 상황을 맞닥뜨리면, 나도 누군가를 떠올릴까?’
여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아리는 견디지 못하고 발로 앞 사람을 걷어찼다.
“으악! 갑자기 뭐야?”
“그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