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280)
279화 – 204호, 미션의 방 – ‘호텔 시네마’ (3)
– 엘레나
— 촥!
차가운 물 한 바가지와 함께 흐릿했던 의식이 순식간에 돌아왔다. 몸을 일으키려다가 팔다리가 차가운 철제 수갑으로 결박당한 상태임을 깨달았다.
“… 이따위 상태로 깨어나는 걸 보니까 느낌이 좋지 않네요.”
“하! 내게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좋은 일이 생길 줄 알았어?”
분노에 가득한 익숙한 목소리. 그제야 ‘납치범’의 정체를 알았다. 솔직히 좀…. 당황했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태자 전하.”
“날 황태자라고 생각하긴 하는구나? 이 썅년이!”
“…”
“재밌었냐? 재밌었어? 날…. 날 온 제국의 웃음거리로 만드는 일이 그렇게 재밌었냐고!”
조금 미안해졌다. 눈앞의 멍청이가 아니라 이런 놈과 비교했던 ‘승엽이’에게 하는 말이야.
이후로도 한참 동안, 살면서 그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 없는 욕지거리를 들었다. 솔직히 별 느낌은 없었다.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부모님을 이렇게 한다는 둥 저렇게 한다는 둥 해봐야 감흥은 없으니까.
그보다는 왜 상황이 이 모양 이 꼴이 됐을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어렴풋이 답을 알 것 같았다.
“누구랑 붙어먹었어? 펜들턴이야? 그 mother fucker가 너에게 날 웃음거리로 만드는 계획을 알려줬냐? 네가 침대에서 -”
“그만.”
“무슨 네 맘대로 -”
“이쯤 하자. 여기서 네 입이 더 요란하게 춤추면 이 영화가 19금이 되겠네. 별로 그럴 생각은 없거든.”
“아직도…. 아직도! 나를 우습게 보는구나. 네 주제에! 네 주제에! 좀 예쁘면 다인 줄 알아?”
“오! 방금 그 대사는 괜찮네. ‘이쁘면 다냐!’ 네가 봐도 이쁘긴 하니?”
“이 와중에도 장난을! 좋아, 오늘, 네 표정을 일그러트리고 말겠다.”
부들부들 떠는 황태자가 손짓하자 건너편의 시종이 뜨겁게 달궈진 집게를 들고 다가왔다.
“뽑아!”
“… 태자 저하, 조금만 고정하시지요. 지금 이 정도는 백작가와 연락해서 수습할 수 있으나 -”
“눈알, 뽑으라고!”
“저하…. 이런 짓을 벌이시면 폐하께서도 -”
순간적으로 웃음이 나왔다.
“풋!”
“너….”
“야, 너 진짜 주인공 맞니? 시종도 네 꼬락서니가 얼마나 우스웠으면 이렇게 훈계를 하겠 -”
— 푹! 쨍그랑!
“크허어억!”
“이제, 이제 날 우습게 보는 시종은 없다! 그렇지?”
발작하듯이 부들거리는 황태자를 바라본다.
그의 허리춤에서 뽑힌 칼이 순식간에 시종의 가슴을 헤집었다. 시종이 피거품을 토해내며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너무도 비참하고 고통스러워 보였기 때문일까? 말없이 근처에 늘어서 있던 기사가 다가와 단칼에 시종의 목을 베었다.
“저하.”
“뭐야? 너도 내게 이래라저래라할 생각이냐?”
황태자의 눈은 번들거리는 살기로 가득했다. 어쩌면 첫사랑일지도 모르는 ‘내가’ 자신을 놀림거리로 만들었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가 그의 이성을 하얗게 태워버린 듯했다.
“… 그럴 리가 있습니까? 다만, 무슨 일을 하시든 이젠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뜻을 빨리 행하소서.”
“흥! 좋아. 이 여자의 눈알은 내가 직접 뽑도록 하지.”
그렇게 바닥에 떨어진 쇠집게를 황태자가 집어 들었을 때.
나는 비로소 판이 깨졌음을 받아들였다.
“아아…. 실패네. 어디가 실수였을까요? 역시 여우 사냥인가? 내가 보지 못한 장면이 뭐였는지도 궁금해지네.”
“무슨 개소리를 -”
“넌 이제 뒤졌어.”
— 라아아아!
천상의 노랫소리가 퍼져나간다. 공간을 비틀며 나타난 ‘천칭’이 단 한 순간, 날 결박했던 수갑을 으스러트렸다. 자유를 얻은 내 몸이 부유하든 허공에 떠올랐다.
“어? 어? 어? 이게 대체 무슨 -”
얼빠진 채로 당황하는 황태자와 달리, 뒤쪽에 도열해있던 기사들은 훨씬 더 유능한 인간들이었다. 누군가는 총을, 누군가는 칼을 뽑아 든 채 황태자 앞에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큰 의미는 없었다.
날 납치해서 고문 살해하려 한 행위, 눈앞에서 시종을 참살한 행위. 이런 짓을 벌이는 자를 무작정 보호하고 지키려 하는 행위. 판결은 전원 사형이다.
— 콰직!
눈앞에서 기사의 몸통이 주먹에 맞은 케이크처럼 으스러졌다.
“저하를 모시고 피해라! 이 악마는 내가 -”
내가? 내가 뭘 어쩐다는 말이었을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통이 세로로 쪼개진 사람이라 무슨 말을 했든 큰 의미는 없었으리라.
시원하다. 아까부터 느꼈던 답답함이 한순간에 청량한 기분으로 대체되었다. 이런 게 요즘 유행하는 ‘사이다’ 정서인가? 의미 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기사들도, 울부짖으며 대소변을 지리기 시작한 황태자도.
더 이상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
…
이제, 한 명 남았다.
“흑, 으허억! 대체…. 대체 뭐지? 넌 뭐야! 인간이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예전에는 정의를 쓰면서 내 행동도 전혀 통제하지 못했고 말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지.
요즈음은 슬슬 알 것 같다. 마음가짐, 통제력.
이런 것이 성장했기 때문이 아닐까? 정의가 나에게 가하는 제약을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자 내가 뭘 할 수 있고, 뭘 할 수 없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예를 들자면 이런 이야기란다.”
“뭐?”
“일단 힘을 쓴 이상, 이 자리에서 너희를 다 죽여야만 해. 이건 정해진 법칙이고, 내가 깨트릴 수 없어. 여기에 더해서 ‘집행’을 멈출 수도 없지. 매 순간, 매초. 나는 집행을 위해 전진해야 해. 그래서 지금도 네게 다가가고 있는 거야.”
“무슨 이야기야…. 무슨 이야기냐고…. 제발, 제발! 난 아트란트 제국의 황태자다! 날 죽이면 -”
“하지만 그 원칙만 지키면 나머지는 그냥 두루뭉술하다고나 할까? 죽이는 순서나 방법은 모두 내 맘이야. 예컨대, 내가 너에게 다가가는 이유는 네 눈알을 뽑을 생각이었기 때문이지.”
손에 쇠집게가 들렸다. 황태자의 울음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
“이거 쉽지 않네. 넌 이런 걸로 사람 눈알을 뽑을 셈이었니? 여우 사냥도 못 하는 애가 참…. 그냥 바로 끝내자. 나도 이제 좀 피곤하네.”
최후의 순간은, 단 한 번의 번쩍임이었다.
그리고….
엔딩 크레딧이 올랐다.
*
“…”
“…”
침묵으로 가득한 극장, 모두가 말문을 잃은 채 스크린을 가득 채운 엔딩 크레딧을 지켜보았다. 결국, 묵직한 목소리가 침묵을 깨트렸다.
“얘들아. 이거…. 좆된 것 맞지?”
“… 묵성아, 승엽이도 있는데 말 좀 가려서 해. 이쁜 말 써.”
“이 상황에서 이쁜 말이 나오냐?”
파국을 직감한 엘레나도 허탈한 표정으로 벽에 기댄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상태로 3분 정도 흘렀을 때, 마침내 ‘황태자 길들이기 – 엘레나 편’이 끝나고 극장에 불이 돌아왔다.
다들 무슨 말을 할 기운도 없어서 멍하니 있던 차,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딴따라딴! 따라라따라라 딴!”
“… 효과음을 왜 니 입으로 내냐?”
“영화 제작에 호텔 경비를 너무 많이 썼기 때문이죠.”
어느새 튀어나온 안내인이 웃기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한 것이다.
“자! 참가자 여러분, 이제 영화에 대한 ‘평가’의 시간이 필요하겠죠? 물론 이번의 ‘독특한’ 시나리오는 누가 봐도 좋은 점수를 받기는 어려워 보입니다만, 절차라는 게 있으니까요. 호텔이 자랑하는 명품 심사위원분들! 나와주세요!”
심사위원도 있어?
“딴따라 -”
“좀 닥쳐!”
영화관의 문이 열리더니 세 사람이 들어왔다. 어느새 스크린 앞에 생겨난 의자에 앉은 3명의 심사위원.
세 명 다 익숙한 얼굴이다.
“상인 너 이런 것도 하니?”
“하하하! 은솔 양, 요전에 구매하신 눈은 잘 쓰고 계십니까?”
“잘 쓰고 있어. 너 진짜 온갖 일 다 하는구나? 월급은 제대로 받고 있어?”
“하…. 알아주시는 분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일인 다역도 웬만큼 해야지, 무슨 영화 평가까지 시키는 걸까요? 호텔이 이래서 답이 없는 겁니다.”
“나중에 밖에 나가면 내 밑에서 일하든지 해. 난 일도 훨씬 덜 시키고 월급은 제대로 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상인은 은솔 누나와 완전히 친해진 것 같다. 그 옆의 사람도 익숙했다.
“오랜만에 보네요.”
“가인 군 안녕!”
호텔 지하, 등산 당시 봤던 기념품 상점의 NPC다. 이번엔 머리 스타일을 바꿔서 만두 마리를 한 채 나타났다.
“상인에 만두 소녀에 -”
“그냥 기념품 소녀라고 해줘.”
“기념품 소녀까진 알겠는데, 저건 또 뭡니까? 저거, 말도 할 수 있어요?”
세 번째 심사위원, 2층에 있던 레고 신비의 장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안내인은 별일 아니라는 듯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말은 할 수 없어도 평가는 할 수 있답니다. 이제 슬슬 시작할까요? 심사위원분들이 잡담은 많이 나누셨어도 평가는 철저히 내리리라 믿습니다!”
첫 번째로 나선 것은 상인이었다. 이젠 감출 생각도 없는지, 인간이 아닌 이형의 육신을 대놓고 드러내며 입을 세로로 찢은 상인은 촉수를 휘둘러 허리춤에서 O 패널을 꺼냈다.
“합격!”
“뭐?”
“으잉?”
우리가 더 놀랐다.
“합격! 내 점수는 합격입니다! 호텔에 100년 넘게 일하며 이런 독창적인 시나리오, 본 적이 없습니다. 요즘이 어떤 시대입니까? 바야흐로 여권 신장, 걸크러쉬가 대세 아닙니까? 남주인공을 으스러트리는 것보다 확실한 걸크러쉬가 있겠어요?”
모두가, 심지어 안내인조차 잠시 말문을 잃었다.
“새로운 시대, 21세기! 이제는 로맨스 영화에서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을 찢어 죽이는 전개도 나올 때가 됐다 이 말입니다! 이거 완전 MZ 아닙니까? 이거 완전 멀티버스 아닌가?”
“아 제발 좀 닥쳐!”
옆자리의 기념품 소녀가 짜증을 내며 X 패널을 들었다.
“이 새끼의 말은 무시하세요. 너 MZ랑 멀티버스 뜻은 알아?”
“알지. MZ는 ‘망한 전개’ 줄임말 아닌가?”
“아…. 난 언제까지 호텔에 붙잡혀서 이런 놈이랑 일해야 하는 걸까…. 여하튼, 솔직히 이런 병신같은 결말은 처음 봤으니 실패! 무조건 실패야. 게다가 중간중간 나레이션은 뭔데? 아니,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을 초반부터 개무시했잖아!”
그 부분만큼은 나름대로 할 말이 있어서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저…. 제 의견 내도 되나요?”
“한가인 참가자, 물론입니다! 참가자분들도 이견이 있으시면 적극적으로 내시지요. 심사위원을 설득하는 것 또한 여러분의 실력입니다.”
“아니, 나레이션은 좀 봐주세요. 애초에 속마음을 마구잡이로 드러내는 영화가 어딨어요? 명작영화들도 배우의 마음을 그대로 내보냈다면 황당한 경우가 적지 않을걸요?”
은솔 누나가 내 항의를 즉시 받았다.
“맞아! 예를 들어 타이타닉. 후반부에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차가운 물 속에서 여주인공과 작별하는 장면, 다들 알지? 그 장면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진짜 속마음’은 어땠을까? ‘춥다! 춥다! 추워 죽겠으니까 이놈의 촬영 빨리 좀 끝나라! 아까 NG 낸 새끼 누구야?’ 이런 식 아니었을까?”
기념품 상점의 소녀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대답했다.
“좋아! 틀린 말은 아니니까 나레이션은 이제부터 평가에 반영하진 않겠어요. 근데, 그걸 빼도 결말은 개판이야. 엘레나가 황태자를 저울로 터트려 죽였는데? 이거 반박할 사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두 번째 평가는 X로 정해졌다. 마지막 레고는 아예 입을 열지도 않고 X만 들어 올리며 엘레나의 첫 번째 시도가 실패로 끝났음이 확정되었다.
*
잠시 모두가, 정확히는 엘레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영화관 밖으로 나왔다. 의사 선생님이 침묵을 깨트렸다.
“엘레나 양을 구출해와야 하니 곧 다시 들어가야겠군요. 왜 망했는지부터 분석해봅시다.”
“여우 사냥.”
“여우 사냥.”
순식간에 모두가 같은 단어를 말했다. 엘레나의 시도가 실패한 원인, 후반부에 황태자가 미쳐 날뛴 이유.
… 그 답을 ‘우리’는 보고 말았다.내부에서 진행 중이던 엘레나는 몰랐던 것 같지만, 바깥에 있던 우리는 명확히 봤기 때문이다.
은솔 누나가 한숨을 푹 쉬었다.
“여우 사냥, 그게 너무 망했어…. 황태자 입장에서 생각해 봐. 사냥 당일엔 기뻤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결국 진실을 알게 됐잖아.”
그렇다. 여우 사냥과 신년맞이 축제 사이엔 몇몇 짓궂은 귀족들이 황태자에게 ‘진실’을 알리는 장면이 있었다. 정황상 엘레나는 그 장면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진철 형도 아쉽다는 듯 입을 열었다.
“솔직히 황태자 심리가 일부 이해는 가더라. 매년 열리는 사냥 대회, 그때마다 총을 잘 쏘지 못해서 망신당했다고 생각했는데, 생전 처음으로 쏘는 족족 여우가 쓰러지니 얼마나 기뻤겠냐? 그런데 나중에 진실을 알았어. 전부 조작이었다는 거지.”
송이도 끼었다.
“사실, 조작이었다는 점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어요. 그 조작을 귀족들은 그 자리에서 다 알았다는 거죠. 이 모든 것을 깨달은 황태자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귀족들이 단체로 자신을 농락하고 놀려먹었다고 생각했겠죠? 그 충격만으로도 멘탈이 박살 났는데, 심지어 그 모든 일을 꾸민 게 ‘첫사랑’ 엘레나였다는 사실을 깨닫자….”
그다음은 내가 받았다.
“미쳐버렸구나. 가뜩이나 그릇이 콩알만 한 녀석인데 이런 일을 당하자 아예 돌아버렸어.”
아리가 피곤해하며 정리했다.
“자, 자. 이제 다음 사람은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하자. 누가 들어갈래? 가인이?”
“으악! 야, 난 남자잖아!”
“무슨 상관이래? 파티장에 있던 에블린 공녀인가? 꽤 예쁘던데 그 여자애 몸에 빙의하던가. 이번엔 우리도 보고 있으니까 가슴 만지지는 말고.”
갑작스러운 공격에 숨도 쉬지 못하고 당황했다! 주변에선 아리를 막아주긴커녕 낄낄거리느라 바빴다.
“아하하하! 아리도 참, 가인 오빠가 놀라잖아.”
“그럼 송이 네가?”
“쿨럭! 으, 은솔 언니도 여자니까 -”
“어머, 송이야. 나이대를 생각해줘. 난 황태자보다 15살은 많은데 되겠니?”
“그럼 아리 네가 들어가!”
“영화 제목, 못 봤어? 마지막에 공포영화 있더라. 딱 봐도 난 그쪽이 맞아. 너, 나만큼 살면서 괴물 많이 봤어?”
서서히 송이 쪽으로 시선이 모여든다. 송이는 결국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자신이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그…. 다들 귀마개 끼시면 안 돼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