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281)
280화 – 204호, 미션의 방 – ‘호텔 시네마’ (4)
– 유송이
아름다운 음악과 화려한 춤사위가 가득한 장소, 공작가의 파티.
주변을 살피며 천천히 걸어갔다. 엘레나가 황태자를 발견했던 장소로 시선을 옮기자 어딘가 불평 가득한 표정의 소년이 측근들과 대화 중인 광경이 보였다. 살며시 다가가며 생각한다.
엘레나는 왜 실패했을까?
바깥에 있는 동료들은 개별적인 ‘장면’ 위주로 언급하곤 했다. 파티 때 이런 행동을 했으면 어땠을까? 여우 사냥에선 황태자가 승부 조작을 알아챌 가능성도 고려해야 했다 등의 논의가 그 예시였지.
하지만 나는 보다 근본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어. 다들 듣고 있으시죠?
*
「다들 듣고 있으시죠?」
“송이는 그냥 대놓고 우리에게 말을 거네.”
“뭐, 본인이 실패할 때를 대비해서 의견을 전하는 거겠죠.”
“송이가 실패하면 엄청 큰일 아니야? 그때는 아리 말고 황태자 꼬실 사람이 없잖아!”
“어머, 은솔아. 지금 네 눈앞에 안보이니?”
“…”
“가인이가 에블린 공녀의 몸에 빙의해서 -”
“조, 조용히 좀 해!”
*
더 근본적인 이야기, 다름 아닌 여주인공으로서의 ‘태도’야. 영화에 들어왔던 엘레나는, 단 한 순간도 ‘여주인공’처럼 생각하지 않았어.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던 황태자에 대한 실망감이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이어졌지.
이런 태도는 터지는 시점이 문제일 뿐 언젠가 반드시 사고를 터트리는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어. 그러니 모두가 명심해야 한다고 생각해. 영화에 더 깊이 몰입해야 해. 적어도 들어와 있는 동안만큼은 자신이 영화의 주인공이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했으면 좋겠어.
조금 전, 황태자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이 다가갈 타이밍이다.
“그대는 -”
“저하, 예법을 신경 써주시지요.”
“… 레이디 크로시벨 맞지?”
자신감 없는 태도, 위축된 표정과 미묘한 열등감.
왜 엘레나가 널 좋아하지 않았는지 알 것 같네. 사실 굳이 엘레나가 아니더라도 널 좋아할만한 사람은 많지 않겠구나. 하지만 이 소년은 ‘남 주인공’이지.
그러므로 가슴에 손을 얹고 맹세했다.
내가 온전한 네 편이 되어줄게. 이 세상이 무너지고, 영화가 결말에 도달하는 그 순간까지 – 유송이, 아니 송이 크로시벨은 조슈아 페르손의 편이야.
“저하, 얼마 전에 북방에서 자라난 서러브레드(Thoroughbred) 품종의 말을 선물 받으셨다고 들었답니다.”
“어? 어? 그걸 크로시벨 양이 어떻게 -”
“저하, 모티안을 선물한 분이 어떤 분이신지 잊으셨습니까?”
“아 참! 미안. 크로시벨 백작의 선물은 잘 받았다고 전해줘.”
영화 속엔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이 가까워지기 위한 다양한 장치가 있었다. 그 장치 중 하나가 바로 황태자의 애마 ‘모티안’. 선물한 사람은 다름 아닌 설정상의 내 아버지다.
자연스럽게 황태자의 정면에 앉아서 그의 시야를 가렸다. 베를렌 공작가에서 연 파티의 호화스러운 모습들. 누군가에겐 평생 한 번이라도 보고픈 모습일지 모르나, 이 사람에겐 불쾌한 광경일 뿐.
대화 주제는 어렵지 않게 찾았다. 아버지가 말을 선물했으니, 딸이 그 선물에 관해 이야기를 할 자격 정도는 있는 법이니까. 말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자 황태자는 금방 내게 집중했다.
“모티안이 자꾸 날 떨어트리려고 해! 뭔가 잘못 먹은 게 틀림없다니까?”
“제가 사과드려야 할까요?”
“헛, 그,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야. 귀한 혈통을 이은 말이잖아. 내가 조금 더 신경 써서 길들이면 될 거야.”
잠깐의 대화. 여러 차례 느꼈다. 이 소년은 누군가 자신의 ‘위’에 있다는 느낌을 견디지 못한다. 언제나 자신의 ‘밑’에 있는 사람하고만 마음 편히 대화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엘레나가 이 소년보다 키가 크다는 점 또한 때로는 황태자를 불쾌하게 만든 부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또 한 가지 사실, 황태자는 벌써 날 좋아한다. 솔직히 내가 엘레나만큼 예쁘지는 – 아니, 이딴 생각을 왜 하는 거야!
*
「내가 엘레나만큼 예쁘지는 – 이딴 생각을 왜 하는 거야!」
“…”
“방금 엘레나 어쩌고 하는 문장은 다들 잊도록 해.”
“전 벌써 잊었습니다.”
“잊었다니? 방금 무슨 문장이 지나가긴 했냐?”
*
크흠! 황태자가 날 순식간에 좋아하는 건 자연스러워. 이건 현실이 아니라 ‘로맨스’ 영화니깐!
재벌 집 장남이 평범한 일반인 소녀를 사랑한다.
제국의 황제가 수수한 외모의 시녀를 사랑한다.
북부 대공이나 마탑주가 길에서 만난 평민에게 첫눈에 반한다.
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이런 일이 로맨스 영화에서라면 자연스러운 전개다.
그러니까 황태자를 꼬시기 위해 꼭 엘레나 같은 절세의 미녀가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에블린 공녀의 몸에 빙의한 가인 오빠도 충분히 황태자를 꼬실 수 있을 거야.
이제 대화에 집중하자.
애마 모티안에서 시작한 대화의 물꼬는 자연스레 황태자가 기른다는 매나 앵무새 쪽으로 옮겨갔다. 귀한 집 자제가 사치스러운 취미를 가지는 일은 자연스러운 법. 황태자는 당연하다는 듯 ‘본인 소유 동물원’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레이디 크로시벨.”
“이름을 부르셔도 된다고 말씀드렸지요?”
“레이디 송이? 뭔가 이름이 특이한 것 같아.”
“그러게요. 어머님이 지어주신 이름이랍니다.”
그 어머니가 여기 있는 분은 아니지만.
황태자는 마지막으로 날 ‘여우 사냥’에 초대하겠다며 활짝 웃었다. 당연히 나 또한 활짝 웃으며 수락했고, 그와 동시에 공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엘레나가 실수했던 문제의 그 이벤트다. 어떻게 대처하는 게 좋을까? 영화에 들어오기 직전까지 동료들과 의견을 나눈 결과, 내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
— 탕!
“오! 펜들턴 경, 정말이지 백발백중이십니다!”
“하하! 조지, 별것 아니야. 여우가 맞춰달라고 나무 앞에 멈춰있는데, 그걸 맞추지 못하는 게 바보 아니겠어? 이럴 때는 2년 전, 북방 전선에 출전했을 때 -”
— 탕!
“…”
“… 저하께서 아직 사격에 익숙하지 않으신 듯합니다.”
사냥 이벤트의 초반은 엘레나 때와 똑같았다.
저 눈치 없는 펜들턴이라는 인간은 백발백중의 실력으로 눈에 보이는 여우를 죄다 쓸어 담느라 바빴고, 처음엔 내가 옆에 있어서 기뻐하는 것 같던 황태자는 금세 침울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참 피곤한 사람이다.
… 이런 생각은 그만두자.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 소년의 편에 서기로 마음먹었으니까.
“저하, 우린 저쪽으로 가지 않으실래요?”
“그쪽엔 여우가 별로 없을 텐데?”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본 황태자는 조금 당황하면서도 내 부탁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는…. 죄송합니다. 사실 사냥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답니다.”
“… 나도 그리 좋아하지 않아.”
“어머! 저하께서도 저와 같은 마음이시라니 기뻐요. 이런 사냥, 너무 야만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한순간의 즐거움을 위해 의미도 없이 여우를 이렇게나 죽인다니…. 이해하기 어려워요. 저분, 펜들턴 경은 뭐가 그리 재밌다고 저렇게 웃는 걸까요?”
“페, 펜들턴 경은 다소 폭력적인 성향이 있어. 저, 전쟁터에서도 용병처럼 천박하게 날뛰었다고 하니까. 사실 나도 불필요한 살생은 좋아하지 않아. 사람의 재미를 위해 여우를 무의미하게 죽일 필요가 있겠어?”
살짝, 무릎 한쪽을 바닥에 꿇은 채 손을 내밀었다. 근처를 지나가던 여우가 잠시 빙글빙글 돌더니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내 손으로 다가오는 여우, 신비로운 분위기. 황태자를 따라다니던 시종들이나 호위 무사들도 순간 말문을 잃은 채 날 바라보는 것이 느껴진다. 황태자도 멍하니 입을 벌렸다.
“어떻게 한 거야…?”
“글쎄요?”
*
「글쎄요?」
“아니, 진짜 어떻게 한 거야? 친화를 썼냐?”
“형, 송이는 팔찌를 가져갔으니까 축복은 없어요.”
“그렇네.”
“사실 축복을 가져갔어도 여우 상대로는 의미 없어. ‘혼돈체’에게 통하는 힘이잖아. 뻔한 수작인데 왜 못 알아보는 거야?”
어처구니없어하는 아리의 말에 주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쏠렸다. 본인 말고 다른 사람은 정말 그 ‘수작’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에 아리는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팔찌 번쩍이는 거 못 봤어? 여우가 움직이면서 움찔거리는 건? 송이 본인에게 오는 좁은 길만 보이게 했겠지.”
가인은 조금 다른 부분이 황당하다고 생각했다.
“황태자 저 새끼, 분명히 엘레나랑 같이 있을 때 여우 시체를 전리품 상자에 터질 듯이 담아서 웃던 게 생생한데 뭐가 어째? ‘불필요한 살생은 좋아하지 않아?’ 저 새끼 사람 맞냐?”
*
온 세상이 불타오르는 환영 속에서 단 하나의 생로(生路)인 나에게 다가온 여우는 혹여나 불바다에 떨어지기라도 할까 봐 덜덜 떨며 내 몸을 올라탔다. 물론, 주변 사람들은 이 모든 광경을 더없이 신비롭게 여기는 듯했다.
바로 그 순간, 내가 계산하지 못한 변수가 생겨났다.
— 탕!
여우가 잠시 바닥에 내려앉는 그 순간, 누군가 방아쇠를 당겨 여우를 사살한 것이다!
“꺄아아악!”
이 순간만큼은 연기가 아니라 정말 놀라서 주저앉은 채 비명 질렀다. 그리고 이 비명이 오늘의 화룡점정이었다.
“누구냐! 이, 이 개새끼가!”
“저하, 말을 조심해서 -”
“닥쳐라! 한 마디라도 더 지껄이면 네 눈깔을 뽑아버릴 줄 알아라! 방금, 이쪽으로 총 쏜 미친 새끼 당장 쳐 나와! 루퍼트!”
“저하, 말씀하시지요.”
“내가, 송이가 있는 방향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이건 사실상 암살 시도 아닌가?”
“바닥에 있는 여우를 쏜 것이 아닌지….”
“빗나갔으면? 빗나갔으면 내가 맞았을 수도 있잖아!”
“당장 찾아내겠습니다.”
얼굴이 새빨개진 채 어마어마한 분노를 토해내는 황태자의 기세가 순식간에 사냥터를 휩쓸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영화의 배경은 신분제 국가 아니던가? 결국, 황태자가 독하게 마음먹으면 ‘일개’ 귀족들이 버텨낼 재간이 없다.
순식간에 의심이 가는 귀족 자제들 다수가 끌려와서 난 아니다, 저놈이다, 아니다 저놈이다 하며 책임을 떠넘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혼란으로 가득한 사냥터. 넋 나간 듯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나에게….
황태자가 다가왔다.
“거, 걱정하지 마. 오늘의 사고는 내가 분명히 벌할 테니까! 다, 다치진 않았지?”
이 흐름은 나쁘지 않네. 슬며시 웃음이 나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그럼요.”
처음으로 눈앞의 소년이 ‘남 주인공’이 되었다.
“그…. 레이디 송이 양.”
“말씀하세요.”
“오, 오늘 여우 사냥은 완전히 망했잖아. 그게 좀 아쉬워서…. 다음 주쯤, 시간 내서 내 동물원을 구경하러 오지 않을래?”
이 흐름은 엘레나 때는 없던 전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