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283)
282화 – 204호, 미션의 방 – ‘호텔 시네마’ (6)
– 유송이
에블린의 말을 듣자 헛웃음이 나왔다. 얘는 지금 ‘누군지도 모르는 듣보잡’이 황태자를 꼬셨다, 뭐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완전 10대 여중생 감성이네. 로판 기준으로도 좀 유치한 전개잖아. 요즘 잘나가는 로판들은 이것보단 빌드업이 훨씬 수준 높다고!
유치한 전개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제 시작이라는 말이 정확했겠네.
— 덥썩!
“음?”
“춤추자.”
“어? 조 -”
미처 대답할 틈도 없었다.
빨갛게 상기된 표정의 소년은 이 악물고 날 끌고 연인들이 춤추는 광장을 향해 움직였다. 뒤편에서 이걸 어쩌나 하는 분위기로 우릴 살피던 위장 호위병들이 다급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갑자기 시작한 댄스!
정신없이 왼쪽으로 두 걸음, 오른쪽으로 두 걸음, 뒤로 한 바퀴 돌았다가 앞으로 한 발자국 하다가 문득, 지금 이 상황이 기가 막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애들 대체 뭐 하는 중이야?
전 남친과 전 여친이 서로 응~ 나 남친/여친 있어! 라고 자랑하는 상황이잖아! 난 그 틈바구니에 낀 ‘현 여친’ 포지션이 된 셈이야. 승엽이 나이 때의 내가 봐도 유치해서 소름이 돋았을 전개다.
“소, 송이! 우리 저쪽으로 가!”
흥분해서 날 이끌고 광장 중앙으로 움직이는 소년을 본다.
최대한 그럴듯하게 춤추려 애쓰는 소년에 발맞추며 회전하던 중, 황태자를 호위하던 사람들이 벌이는 어처구니없는 쇼를 보고 말았다.
황태자가 설령 유치하고 어리숙하게 굴어도 누구인가! 저들에게는 평생의 주군 아니겠어? 바보가 아니고선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 모를 수 없는 법.
주변의 일반인들이 우리에게 손뼉 치도록 강요하는 호위들. 그 눈물겨운 충정을 보다 보니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해서 빵 터지고 말았다.
아아….
하늘을 바라본다. 눈이 시리도록 푸르게 빛나는 별빛이 올올히 박힌 하늘을 보며 이번엔 서로를 의식하며 얼굴을 도화색으로 물든 소년과 소녀를 한 번씩 돌아보았다.
이 전개는 정말이지 여중생이 썼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유치하기 짝이 없었지만 – 그래서 재밌었다.
사실은 그래.
수천만 관객을 자랑하는 세계적인 로맨스 영화들도 그 플롯을 뜯어보면 유치한 내용이 끼어있기 마련이야.
기분이 동했다는 이유로 배 한 척을 구매할 수 있는 부호, 손짓 한 번으로 수천의 사람을 부릴 수 있는 권력자. 이런 사람들이 난데없이 하찮은 신분의 이성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평생 쌓아 올린 모든 것을 던질 것처럼 군다.
이런 일이 현실에 어찌 있을 수 있겠어?
하지만 이런 전개에 전 세계의 관객이 울고 웃어왔다. 물론 영화감독이 탁월한 역량으로 그 ‘유치함’을 최대한 티 안 나게 가리기도 했겠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사람은 원래 나이가 들어도 유치한 법이니까.
우리는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커서는 유치함이라 칭하며 감추어왔을 뿐이야. 그렇기에 모두의 마음속에는 소년이 있고 소녀가 있다. 지금, 내 안의 소녀가 더없이 기뻐함을 느꼈다.
“으으윽….”
이 악무는 소리. 이 우스운 분위기 속에서 세상 진지한 소년을 바라본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에서 감출 수 없는 패배감이 느껴졌다.
이유는 너무나 알기 쉬웠다. 흡사 동화 속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펜들턴/에블린에 비해 ‘이쪽’이 밀린다는 심리 아니었을까?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주변엔 수없이 많은 사람이 있었고 그들이 더 환호하는 쪽이 어디인가는 딱 봐도 느껴졌다. 과연, 반대편의 소녀는 승리감을 감추지 않으며 미소를 지었다. 유치하면서도 웃기고, 재미있다. 또, 여러모로 등장인물들이 귀엽기도 하네.
그러니까 이 분위기에 내가 한 손 거들어줄 필요도 있겠지!
“조.”
“저, 저게 진짜 -”
“조!”
“어, 어? 송이야?”
“엘레나가 아니라서 미안해요.”
“응? 갑자기 무슨 -”
“하지만 세상의 주인공은 저들이 아니라 우리죠.”
영화의 주인공은 승리해야 한다. 그 전장이 야만족이 쳐들어오는 북방의 험지가 아니라 전 여친과의 기 싸움이라 할지라도!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윽고, 머나먼 외우주의 초 문명이 창조해낸 기적과 기술의 경계에 선 물건이 ‘승리의 섬광’을 뿜어내며 기적을 일으켰다.
“꺄아아아악!”
갑자기 펜들턴이 미친 사람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흡사 자신의 품에 안겨있던 종달새 같던 소녀가 식인 괴물로 변하기라도 한 것처럼! 에블린을 던지듯 밀쳐낸 그는 허공에 고함을 지르며 주먹을 휘두르다가 뒤늦게 정신 차렸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에블린은 흙밭에 뒹굴며 삽시간에 드레스가 망쳐졌다. 주변 사람들은 모조리 이 자식 미쳤나 하는 표정으로 펜들턴을 쳐다보았다. 에블린의 눈에는 이미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내 옆에는 또 한 명의 미친 사람이 있었다.
“으하하! 아하하하! 쟤 뭐야? 저 자식 미쳤어?”
“저하, 즐거우신가요?”
“어? 아, 아니! 레, 레이디가 흙밭을 뒹굴었는데 재밌을 리가 없지. 나는 단지 저 바보짓에 훈계를 내리고 싶어졌을 뿐이야!”
“그러면 하러 가요.”
“응?”
“훈계. 지금 하러 가죠.”
내친김에 황태자를 이끌었다. 소년 또한 처음엔 당황하더니, 일생일대의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함박웃음을 지으며 본인이 친 대형 사고에 허둥거리는 펜들턴을 향해 움직였다.
“펜들턴 경!”
“… 저, 저하?”
“방금 이 모습은 뭔가? 난데없이 레이디를 흙밭에 내던지다니! 공작께서 보셨으면 경을 치셨을 것이야. 내, 제국의 미래를 이끌 사람으로서 훈계하지 않을 수 없네. 그리고 -”
“저하, 이쪽이요!”
“어? 어?”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본 소년의 눈에 숨길 수 없는 장난기가 깃들었다. 지금,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할지 모르는 소년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레이디 에블린, 내 손을 잡고 일어나시오. 그리고…. 다음번에는 이런 저잣거리에서 춤추는 법 정도는 아는 파트너를 만나시길.”
“너…!”
어머? 어머? 이 눈빛 뭐야?
눈빛에 담은 기세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방금 유송이는 정확히 27번 정도 죽었다. 에블린의 눈에 담긴 살기가 어찌나 살벌했는지 심장이 떨어질 지경이야.
너 혹시 뭔가 느꼈니? 내 옆에서 춤추던 황태자도 ‘팔찌’의 특이성은 눈치채지 못했는데? 이런 건 무슨 ‘여주인공의 대적자’가 가지는 탁월한 직감 비슷한 건가?
왠지 모르게 이 분위기, 나도 기세에서 밀리면 안 될 것 같아서 황태자의 손을 붙잡고 일어서는 소녀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공녀님, 억울하면 여주인공 하세요.”
“뭐? 대체 무슨 -”
“꼬우면 호텔 오르시고. 알겠죠?”
“대, 대체 무슨!”
“에블린! 바닥에 뒹구는 널 돕자고 말한 건 송이였어.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한참 동안 파들거리던 소녀는, 주변의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입을 열었다.
“… 고마워요.”
그 모기만 한 목소리가 아마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였을 거야.
… 하!
진짜 미쳤다 미쳤어! 다들 제 실력 보셨죠? 시작부터 지금까지, 영화의 흐름을 한 손에 잡고 휘두르는 내 판단력! 단호한 결단력! 황태자의 심리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까지!
크! 너무 완벽해. 나 자신에게 취했다! 지금의 나는 ‘완벽 송이’야.
*
대놓고 바깥의 우리가 들으라고 자랑을 쏟아내는 송이를 보며 모두가 잠시 말문을 잃었다. 입을 반쯤 벌린 누나가 참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쟤…. 영화 분위기에 완전 취했나 봐.”
반면, 아까부터 미친 듯이 낄낄거리던 아리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아하하하! 뭐 어때? 잘하고 있잖아? 완벽 초코 송이 화이팅!”
*
시간을 고려하면 슬슬 이 영화도 후반이다. 에블린과 펜들턴은 진작 사라졌고 신년맞이 축제 이벤트도 끝나가는 느낌이야. 그때쯤, 황태자가 내게 다가왔다.
“저기…. 송이야.”
“조?”
“오늘은 너무 행복했어. 정말이야.”
“그렇게 보이네요.”
“아, 알고 있었겠지만, 사실 모르는 사람이 없긴 하지만, 에, 에블린은….”
“저하와 과거에 좋은 관계였다고 들었어요.”
이 순간, 조슈아 페르손은 황제의 아들이자 제국의 황태자가 아니라 그저 한 명의 소년이었다. 소년의 표정은, 여자친구에게 전 여친 사진을 아직도 핸드폰에 저장해놓고 종종 살펴본다는 사실을 들켰을 때의 그것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아니야! 무슨 소리를? 흐, 흐름이 흐름이라 어쩌다 보니 사귀었을 뿐이라고.”
“흐름이요?”
“에블린은 어마마마의 먼 친척이거든. 그래서 어마마마가 2년쯤 전에 나와 어울리겠다며 소개해주셨어.”
“어울렸나요?”
“아니라고 했잖아! 진짜야. 에블린과 함께 있을 때는 한 번도 편안했던 적이 없어. 항상 나에게 뭔가 눈치만 주려고 했다고. 결국 그것 때문에 헤어졌는데….”
남친이 전 여친과 뭘 하다가 깨졌는가.
솔직히 이 주제에 관심 없는 여고생은 세상에 없다고 장담할 수 있어. 이건 여고생들 사이에서 언급되는 순간 교실 전체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주제라고!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예전에, 두 달 전인가? 모티안을 타려다가 떨어졌어. 그 미친 말이 -”
황태자는 잠시 내 눈치를 보더니 표현을 바꾸었다.
“… 아직 내게 적응하지 못했던 말이, 날 떨어트리니까 주변에서 당황했거든. 그런데 에블린은 날 위로하긴커녕 싸늘한 눈으로 쳐다보기나 했지. 그때 뭐라더라? 승마술을 더 단련하셔야겠다? 너무 화가 나서 다시는 황궁에 오지 말라고 했어.”
그 여자애의 성격 대충 알겠네. 황태자를 진심으로 사랑했다기보다는 자신을 빛내는 가장 귀한 보석 중 하나로 여겼으리라. 그 보석이 추함을 드러내자 분노했을 따름이다.
“그때는 너무 충동적으로 헤어진 것 같아서 후회하곤 했어. 어마마마도 잔소리 많이 하셨거든. 하지만.”
하지만.
그 말과 함께 소년은 순수하게 웃으며 내 쪽을 돌아봤다.
“지금은 그 일이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었다고 생각해. 모티안은 내게 더 나은 사람이 있음을 알려주고 싶어서 떨어트렸을지도 몰라. 그래서 말인데.”
“말하세요.”
“오늘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아버님께 널 정식으로 소개해 드리고 싶어. 고, 공식적인 자리에서.”
로판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그렇다!
‘청혼 이벤트’
부끄러워하는 소년의 얼굴에 축제의 열기가 깃들었다. 이 순간만큼은, 황태자가 조금 ‘남주인공’같다고 느꼈다. 이게 영화가 아니었다면, 현실이었다면 약간은 두근거렸을지도 모르겠네.
황태자가 조금만 더 잘생기고 용감하고 똑똑했으면 분위기가 더 살았을 텐데 그게 아니라 좀 아쉽긴 해.
*
“어머! 어머! 어머! 요즘 애들은 하여튼! 무슨 저런 부끄러운 말을 이렇게 쉽게 해!”
“… 아리 너, 방금 말은 진짜 좀 그래. 그리고 송이는 말을 한 게 아니라 생각만 한 거야.”
“에잇! 은솔아, 저게 무슨 평범한 생각이야? 우리에게 말을 한 거랑 똑같지!”
옆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진짜 할아버지’가 고함을 터트렸다.
“요즘 애들은 하여간! 보는 눈도 좀 생각해달란 말이다!”
가인은 조금 다른 견해를 내비쳤다.
“아니…. 다들 되게 로맨틱하게 느끼신 것 같은데, 마지막이 완전 확 깨지 않았어요? 니가 조금만 더 잘생기고 용감하고 똑똑했으면 좋았다? 이 정도면 사실상 너 말고 다른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수준인데.”
옆에서 진철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찌 됐든 이거 깨는 흐름이지? 승엽이 넌 입에 흐르는 침 좀 닦아라. 아주 스크린에 들어가겠네.”
*
— 덜컹!
“으읏!”
“레이디! 괜찮으십니까? 네 이놈! 말을 조심해서 몰라고 하지 않았느냐!”
정신 차렸을 때, 나는 마차에 탄 채 이동 중이었다. 상황은 쉽게 이해했다. 오늘이 바로 황태자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날 약혼자라 소개하는 날이다.
드디어 이 영화의 결말이 보인다!
당연히 이 유송이님이 만들어낸 해피엔딩이지! 마음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숨기기 힘들었다. 크! 송이 너, 너무 똑똑한 거 아니야? 엘레나도 실패한 일인데 이렇게 멋들어지게 성공한다고?
나 자신의 완벽함에 취했어. 오늘은 솔직히 그래도 될 거야.
마차 의자에 기댄 채 혼자 실실거리다 보니 건너편에 앉아있던 노인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레이디께서 이리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니 저 또한 행복해지는군요.”
날 데려오라고 황태자가 보낸 시종, 겔리온이다.
그는 내가 황태자의 청혼 때문에 기뻐하는 중이라 착각한 듯했다. 완전한 착각은 또 아니지. 그 청혼이 해피엔딩의 필수요소일 테니까.
“감사합니다.”
갑자기 노인의 눈이 촉촉이 적셔졌다.
“저는…. 저하께서 갓난아이일 때부터 모셨습니다. 부끄럽게도 때로는 제 손자를 보는 듯한 감정을 느끼곤 합니다.”
“겔리온 경….”
“잘 부탁드립니다. 레이디께서는 -”
문득,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빛나는 ‘완벽 송이’의 예리한 직감이 번뜩였다.
지금 ‘마차 타고 이동하는 씬’이 진행 중인 이유가 대체 뭐지? 그동안 이 영화에서 ‘이동 과정’ 따위가 상세히 나온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어?
파티장, 여우 사냥터, 황태자의 동물원에 신년맞이 축제까지 – 단 한 번도 어딘가 움직이는 장면 따위가 나온 적이 없다!
왜냐하면, 제한된 상영 시간에서 이동 과정 따위의 ‘노잼 씬’을 넣을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현재 진행 중인 ‘마차 타고 이동하는 과정’의 정체는.
‘재미있는 장면’이다.
— 덜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