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284)
283화 – 204호, 미션의 방 – ‘호텔 시네마’ (7)
– 유송이
위기감을 느낀 순간, 여우 사냥 당시의 ‘사고’가 뇌리를 스쳤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가 내가 있던 방향으로 사격해서 여우 사냥은 개판이 났었지. 돌이켜보면, 극도로 흥분해서 범인을 색출하려 했던 황태자의 분노는 합당했다.
애초에 총이란 무엇인가? 탄환이 없는 빈 총도 사람에게 겨누어선 부정 탄다고 할 정도로 위험한 무기다. 황태자가 암살이니, 반역이니 하는 엄청난 단어를 꺼냈던 이유가 있다.
“누군가 절 노리는군요.”
“예? 예?”
여전히 겔런드는 상황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순간적으로 그를 의심했지만, 곧 의심을 거두었다. 일국의 황태자를 아이 때부터 돌본 사람이 어디 보통 사람일까?
대대로 황가에 충성을 바쳐온 가문 출신이리라. 그런 사람이 난데없이 황태자의 약혼자를 해치는 식의 전개는 ‘개연성’이 너무 없어.
— 덜컹!
“네 이놈! 대체 -”
“끄아아악!”
마부의 비명이 마차 내부까지 들려왔다. 재빨리 시종의 팔을 붙들고 마차를 뛰쳐나오자, 상황이 적나라하게 들어왔다.
“게, 겔런드 경! 아가씨! 총알이 날아왔습니다!”
이미 마부는 죽었고, 마차는 급작스러운 충격으로 바퀴가 부서진 상태였다. 주변을 돌아보자 딱 느껴졌다. 인적이 드문 장소, 오른쪽은 산이요 왼쪽은 바다.
“죽기 딱 좋은 위치네.”
“예?”
순간적으로 다양한 가능성이 머리를 스쳤다. 산이니까 산적? 옆은 바다니까 해적? 적국의 공세? 왕위를 노리는 황태자의 경쟁자?
아니야. 지나치게 다양한 가능성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
이 세계는 현실이 아니라 ‘영화’니까. 지금 시점, 영화의 상영 시간을 고려하면 결말이 머지않았다. 극이 후반에 도달했는데 ‘로판식 서사’에서 벗어난 빌런이 갑자기 등장할 리가 없다.
아까 전 눈빛으로 날 죽이려 들었던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그녀와 나는 결착을 지어야 할 모양이다.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잡아! 도둑고양이는 가능하면 생포해와!”
순간적으로 헛웃음이 나왔다. 누군가를 암살하면서 본인이 현장에 나오는 병신같은 귀족이 세상에 어딨어?
헛웃음과 별개로 상황은 심각했다. 마차가 망가진 데다가 10대 여성에 불과한 나와 노인인 겔런드의 이동 속도로는 추격자들을 결코 따돌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레이디 크로시벨! 이쪽으로 -”
— 탕!
천둥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날 향해 손을 흔들던 호위의 목에 바람구멍이 뚫렸다.
찰나의 순간, 내가 느낀 감정은 분노나 슬픔보다는 ‘황당함’이었다. 아무리 공작 가문이라 해도 황태자의 약혼자를 이렇게 다짜고짜 암살하는 게 말이 돼?
진짜 이 영화 각본 누가 썼냐고! 개연성이 개판이잖아!
…
개연성.
가쁜 숨을 내쉬며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개연성이라. 생각해보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이 영화에서 개연성을 탓하기는 좀 미안하네.
그동안의 전개를 미루어보면 영화 속 무대에 마법이나 초능력 따위는 없다. 황태자를 지키는 기사들조차도 인간을 초월한 움직임 따위는 보여준 적이 없다.
이런 세계에서 난 팔찌를 써서 원하는 일은 다 이루어냈지.
이 등신 같은 영화, 애초에 축복과 유산을 가진 우리가 들어온 시점에서 개연성 따위는 국 끓여 먹은 지 오래야. 그러니 누굴 탓할 것 없고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하면 된다.
팔찌의 힘으로 시나리오를 뒤틀어서 원하는 바를 이루면 될 뿐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다양한 관점’은 1-1 구도에선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다. 201호의 베아트릭스처럼 감각을 속이면 눈을 추가로 만들어낸다는 황당한 대응이 가능한 초능력자라면 모를까, 평범한 인간은 결코 저항할 수 없다.
문제는 지금 상황이 1-1이 아니라는 점. 최소 두 자릿수에 달하는 추격자가 우리를 쫓아오고 있다. 내가 속일 수 있는 존재는 한 명뿐인데!
“갤리온, 질문이 하나 있어요.”
“예?”
“제국에 제 얼굴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
“아직도 그년을 잡아 오지 못하는 이유가 뭐죠?”
흡사 밤의 여신과 같은 미모를 자랑하는 소녀의 입에서 어울리지 않는 험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공작가의 가신, 세드릭은 침착하게 공녀를 달랬다.
“레이디 에블린, 진정하시지요. 황태자의 약혼녀는 -”
“아니야! 약혼녀가 아니라고 했잖아!”
“… 레이디 크로시벨은 혼자 있는 게 아닙니다. 황태자는 물론 백작가에서도 호위를 딸려 보냈으니까요. 다행히 인원은 이쪽이 많으니 인내심을 가지시지요.”
“…”
에블린은 천천히 숨을 고르며 상황을 살폈다.
세드릭의 말대로 상황은 그녀의 뜻대로 진행 중이었다. ‘감히’ 황태자를 홀린 자격 없는 자의 무리는 지리멸렬한 채 도주 중이며 공작가의 사병이 사방을 포위한 채 토끼몰이 중이었다. 적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재주가 있는 게 아닌 이상 벗어날 길이 없다.
마침내, 고대하던 소식이 들려왔다.
“아가씨! 레이디 크로시벨을 생포했습니다.”
소식을 들은 에블린이 처음 떠올린 감정은 기쁨보다는 당황스러움이었다. 이렇게 빨리 잡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내 앞으로 데려와요!”
그리고 가문의 병사들이 나풀거리는 옷을 입은 ‘자칭 크로시벨’을 데려왔을 때, 에블린은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
“아니잖아!”
“예?”
“아니라고! 닮긴 했지만 다른 사람이야! 너 누구야?”
“…”
“이 여자는 크로시벨이 아니라고 이…. 이…. 멍청이들아!”
에블린의 분노에 찬 고함이 터져 나오자 주변 사람들의 안색이 죄다 창백해졌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황태자가 직접 보낸 마차, 황태자가 직접 보낸 시종과 함께 있던 여자인데 레이디 크로시벨이 아니라고?
세드릭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에블린의 말을 반박하기도 힘들었다. 레이디 크로시벨이 어떤 존재인가?
평생 백작가 내부에서 곱게 자라다가 처음으로 나간 파티에서 단숨에 황태자를 휘어잡은 신비한 여인이다. 황태자의 연인이 되기 전엔 그녀가 누군지도 아는 사람이 없었고, 연인이 된 후로는 너무나 고귀한 신분이 되었기에 얼굴 한번 보는 게 쉽지 않았다.
즉, 그녀를 직접 만나본 사람은 이 자리에 에블린뿐이다.
“에블린! 그게 정말입니까?”
“정말이지 그러면 아니겠어요? 야! 넌 대체 누구야?”
말없이 무릎 꿇고 있던 소녀가 꺼낸 이야기는 황당함의 극치였다. 본인은 크로시벨의 배다른 여동생이고 진짜 크로시벨은 이틀 전에 독한 열병에 걸려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그, 그러면 넌 대체 왜 마차에 탔지?”
그 답은 지극히 황당했다.
황태자는 물론 황후와 황제까지 있는 자리에 전염병에 걸린 사람을 보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약혼을 미룰 수밖에 없는데, 마차에 아무도 타지 않으면 외부에서 크로시벨의 변고를 알아챌까 두려웠기에 외형이 닮은 배다른 여동생을 태웠다는 이야기다.
당연히 황태자를 속일 수야 없겠지만, 황태자 또한 연인의 상황이 외부에 드러나길 바라지 않을 테니 그 부분을 말해 ‘연기’에 협조해 달라고 요청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세드릭이 한탄하며 중얼거렸다.
“결국 진짜 크로시벨은 백작가에서 나온 적도 없군요!”
그 시각, 에블린은 다른 방향으로 머리를 굴렸다.
“세드릭, 이 상황은 우리에게 나쁘지만은 않아.”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여자애를 황궁으로 데려가자.”
잠시 눈이 커졌던 세드릭은 곧 그 의미를 깨달았다!
“크로시벨이 열병에 걸렸다고 알리실 생각입니까?”
“맞아! 역병에 걸려 오늘내일하는 사람이 황태자의 약혼녀? 말이나 되는 이야기야? 태자 저하에게까지 그 역병을 옮기면 어쩔 셈이지? 혹은, 미래에 낳을 황태손에게까지 역병이 옮는다면!”
일리 있는 견해다. 더 안전한 선택이기도 하다. 사실, 세드릭이 생각하기에 오늘의 계획은 위험부담이 너무나 컸다. 다짜고짜 황태자의 약혼녀를 죽이겠다니? 진짜 미친 계획이 아닌가?
그에 비해 약혼녀가 전염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일은 훨씬 적은 위험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겠지.
*
– 유송이
“얘, 너는 약속한 대로 말하면 된단다. 알겠지?”
“알겠습니다.”
“명심하렴. 이 모든 일은 누군가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함이 아니라 제국의 미래를 위함이란다. 역병에 걸린 사람을 어찌 저하의 옆에 세울 수 있겠어? 그리고 – 음?”
즉시 몸을 움츠렸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에블린은 곧 의심을 풀고 헛소리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급박한 상황에서 세웠던 계획. 솔직히 별것 아니야.
카메라도 인터넷도 없는 세상인데 황태자의 약혼녀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에블린 말고는 내 얼굴을 모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대로 에블린의 눈을 속이자 나머지 사람들 또한 내가 즉석에서 지어낸 허술한 거짓말에 속아 날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다. 여기까진 좋았는데….
설마 에블린이 날 본인 마차에 태울 줄이야!
이 순간만큼은 정말로 섬뜩했다. 팔찌의 환영은 제한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 103호에서 다양한 관점을 얻었던 당시엔 고작 10분이었지. 그 후로 시간이 흐르며 점차 늘어나긴 했지만, 그래봐야 20분을 넘지 못한다.
당연히 에블린에게 걸린 환영은 진즉 풀렸고, 지금 에블린은 단순히 첫인상으로 인한 착각과 최대한 몸을 움츠리고 고개를 바닥에 박은 내 연기 때문에 착각 중일 뿐이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내 앞의 저능아같은 여자애가 평생 해본 적도 없음이 분명한 제국의 미래에 대한 걱정을 늘어놓는 사이, 나는 제발 이놈의 팔찌의 힘이 회복되는 그 순간만을 기다렸다!
다행히 영화 특유의 ‘노잼 장면 생략’ 덕분에 기다림의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다.
“하! 지금이네!”
“저하께서는 – 응?”
움츠렸던 몸을 펴고 바닥에 박을 듯 숙이고 있던 머리를 세웠다. 얘가 갑자기 왜 이러나 하는 눈으로 날 관찰하던 에블린은 순간 자기 눈을 의심하는 듯했다.
“대체 무슨 -”
“멍청아, 아직도 날 못 알아보겠어?”
팔찌에서 일어난 섬광이 마차를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