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285)
284화 – 204호, 미션의 방 – ‘호텔 시네마’ (8)
– 유송이
에블린과의 마지막 싸움은, 솔직히 그리 박력 있진 않았다.
애초에 내가 진철 오빠처럼 주먹질하며 싸울 것도 아니고, 가인 오빠처럼 다른 사람의 몸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할 것도 아니니까.
마차 여기저기서 갑작스레 나타난 괴물 두꺼비의 환영에 시달리던 에블린은 비명을 지르며 ‘안전한 장소’를 향해 뛰어들었다. 쉽게 말하면 마차 문을 갑자기 열더니 바깥으로 뛰어내렸다는 이야기다.
해안가의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에블린을 보며 공작가의 시종들과 기사들이 기겁하며 내려갔다. 으스러진 팔다리, 흉터 가득한 몸을 보니 살짝 한숨이 나왔다. 차라리 죽는 게 나았을 텐데 어떻게 살았구나.
그건 그렇고 마차가 이렇게 멈춰있어선 곤란하다.
“세드릭 경.”
“뭐냐? 지금 레이디 에블린이 -”
“수도로 출발하시죠. 어차피 거의 다 왔잖아요? 수도의 병원에 데려가면 에블린 양을 살릴 수 있을 테죠. 또, 에블린 양이 마지막에 내렸던 명령을 잊으셨나요?”
“레이디 에블린의 명령?”
“저보고 황궁에 가서 크로시벨 양이 열병에 걸렸다는 말을 전하라 하셨죠.”
세드릭은 내 말에 설득되었는지 주변 사람을 닦달했다. 마차는 이전보다 1.5배는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정확히는 움직였을 것 같아. 마차가 출발하자마자 ‘화면전환’이 일어나며 황궁에 도착했거든.
누구 마차를 탔든지 간에 황궁에 도착했으니 그걸로 됐어.
*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달려오는 조슈아가 보였다. 미소를 띤 채 그의 환영을 받던 중, 문득 세드릭은 뭐 하고 있나 싶어 슬쩍 고개를 돌려보자 이렇게 우스운 광경이 없었다.
조금 전까지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크로시벨이 아닌 ‘엉뚱한 사람’을 보고 당황한 황태자에게 ‘충격적인 진실’을 나와 함께 전할 생각이었겠지?
그런 건 없어. 내가 바로 진짜니까!
“참, 저하.”
“응?”
“여기, 세드릭 경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네요. 황궁에 오던 중에 마차 사고를 당해 큰 봉변을 겪었거든요.”
“뭐?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어머! 안심하세요 저하. 제가 당신의 눈앞에 있잖아요?”
“부, 부끄러운 소리를….”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공작가의 도움을 받았답니다.”
황태자는 에블린의 가문이 날 도왔다는 사실이 미덥지 않은지 의아한 기색이었지만, 곧 세드릭에게 이 도움은 꼭 기억하겠다 말하며 지나쳤다. 넋이 나간 표정의 세드릭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떼지 못했다.
*
고대했던 황제와의 대화는 별 의미 없었다.
애초에 제국의 황제는 시간이 많으면 그게 더 이상한 사람이다. 의례적인 말투로 조슈아에게 이야기 들어왔다, 좋은 관계를 맺길 바란다. 정도가 전부였고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무슨 일을 처리해야 한다며 떠났다.
변수는 다른 곳에 있었다.
“에블린이 크게 다쳐서 수도 병원에 입원했다는군요. 태자, 이 소식은 들었나요?”
“아, 아까 보고는 받은 -”
“그런데 이리도 태연합니까? 어찌 이리도 무정할 수가!”
이거 대체 뭐야? 날 앞에 두고 대놓고 에블린 걱정?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당황하던 차, 예리한 비수가 날아왔다.
“그러고 보니, 크로시벨 양. 에블린과 같은 마차를 탔다면서요?”
“네. 불행한 사고였습-”
“에블린이 갑자기 고함지르며 마차에서 뛰어내렸다는데 신기한 일이군요. 하필 그 시점에, 같은 마차를 타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기사들도 잘 모른다던데.”
“어, 어마마마! 대체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이건 뭐 대놓고 네가 에블린을 해친 게 아니냐는 말투다. 순간적으로 열이 뻗쳐서 눈살을 찌푸릴 뻔했다. 황태자가 옆에서 내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면 말대답 정도는 했을 것 같다.
… 근데 사실 내가 해친 게 맞아서 화가 풀렸어. 생각해보니까 딱히 화낼 이유는 없구나.
이런 느낌의 대화가 길게 이어졌다. 황제가 있을 때만 해도 어색하게나마 웃으며 날 맞이했던 황후는 황제가 사라지자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그제야 에블린의 설정이 다시금 머리에 떠올랐다. 그녀는 황후의 친척이며 황후의 소개로 황태자와 만났다. 말하자면 황후 픽이라는 의미다.
황후에게 나는 어떻게 보일까? 아껴왔던 예비 며느리와 아들의 관계가 소원해진 틈을 타 치고 들어온 도둑고양이 그 자체다. 심지어 가문도 훨씬 별 볼 일 없고, 에블린을 해친 게 아닌가 의심스러운 사람이기까지 하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알 것 같았다. 이전엔 떠올리지 못했던 생각들, 다양한 가능성이 머리에 떠올랐다. 슬슬 결말로 향하는 마지막 그림, 그 마침표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황제 부부와의 면담이 끝난 후, 황태자는 조금은 미안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 송이. 어마마마가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으셨나 봐.”
“그럴 수 있죠.”
“거, 걱정하지 마! 내가 잘 말씀드릴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요.”
내 태도가 의연하게 느껴졌기 때문일까? 황태자는 기쁘게 웃으며 날 배웅했다.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떠올리는 ‘계획’을 알았다면 이렇게 편히 웃진 못했을 텐데.
*
늦은 시각, 황태자가 마련한 거처를 나서 황후궁을 향했다. 시녀들에게 일러 황후마마와 한번 뵙고 싶다고 하자 가당치도 않다는 반응이 나왔다.
“허! 태자 저하의 연인이시라고 이렇게까지 방자하게 행동하실 줄이야! 마마께서 저잣거리의 평민인 줄 아십니까? 응당 거쳐야 할 절차라는 게 있는 법이며 -”
“그냥 내가 왔다고 마마께 전하기나 하세요. 장담하는데, 일정을 취소해서라도 나와 만나고 싶다 하실 겁니다.”
“대체 무슨 소리를!”
“이봐요. 당신 ‘따위가’ 황후마마의 뜻을 예단할 생각인가요? 내가 무슨 이유로 왔는지도 모르면서?”
시녀들의 날 선 태도를 보아하니 이미 황후가 내 뒷담화를 꽤 한 듯했다. 하지만, 내 말은 설득력 있다고 여겼는지 시녀는 불쾌해하면서도 황후궁으로 돌아갔다.
예상대로 즉시 들어오라는 말이 들려왔다. 혼란스러워하는 시녀들과 달리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너무나 궁금하겠지.
황후로서는 대체 왜 내가 살고 에블린이 빈사 상태에 빠졌는지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 또각!
긴장이 감도는 궁, 그 한복판을 걸어가며 생각했다.
지금부터 내가 만들어내려는 이 결말, 괜찮을까? 보다 ‘안정적이고 평이한 길’이 있음을 안다. 내가 택한 결말은 관점에 따라선 정신 나간 전개로 여겨질 수 있음도 안다.
하지만 근본으로 돌아가자.
애초에 내 목표는 뭐지? 에블린을 쓰러트리는 것? 황후의 반대를 이겨내고 황태자와 결혼하는 것? 조슈아에겐 미안하지만 다 틀렸다.
내 목표는 단순해. 바깥에 있는 ‘평가자’들에게 동그라미 3개를 받아내는 거지. 그들 중 1인, 이형의 존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새로운 시대, 21세기! 이제는 로맨스 영화에서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을 찢어 죽이는 전개도 나올 때가 됐다 이 말입니다! 이거 완전 MZ 아닙니까? 이거 완전 멀티버스 아닌가?’
당신의 기준, 알 것 같아. 익숙하고 편안한 전개는 싫다 이거지?
*
「익숙하고 편안한 전개는 싫다 이거지?」
“헛! 이건 좀 불안한데….”
차진철의 말에 김상현은 즉시 동의했다.
“평가자가 정신이 나간 상인 한 명만 있는 게 아닙니다. 기념품 상점의 아가씨는 상식적인 전개를 선호하는 것 같았는데 말이죠.”
아리는 간단히 답했다.
“둘 다 조용히 해. 여태 보다 느꼈는데 이 장르는 너네보다 송이가 훨씬 잘 아는 것 같으니까.”
두 남자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
근처에 날 제외하면 믿을 수 있는 황후의 사람만 있기 때문일까? 대화의 내용은 아까보다도 훨씬 날이 서 있었다.
“그래, 팔자 한번 고쳐볼 생각에 들뜬 모양이지?”
“…”
“주제 파악도 못 하고 날뛸 때부터 불쾌했는데, 설마하니 이 시간에 날 찾아올 줄은 몰랐구나. 참 운도 좋은 아이로다. 조슈아가 네 뭘 보고 -”
“이 멘트, 너무 상투적이네요.”
“뭐?”
“제 생각은 좀 달라요. 절 만난 건 태자 저하 입장에서 운이 좋은 일이죠. 최소한 정상적인 사랑에 빠지시긴 했잖아요?”
“무슨 건방진 소리를 하지?”
“다른 사람이면 어땠으려나? 어떤 분은 이미 황태자를 저울로 때려죽였죠. 어떤 분은 심지어 남자인데 빙의할 생각이고.”
“대체…. 무슨 황당무계한 소리를 지껄이는지 모르겠다. 이럴수록 네 천박함과 부족함만 뼈저리게 느껴질 뿐이구나.”
“아무렴 예비 며느리에게 살인 교사하는 시어머니만 하겠어요?”
황후가 흠칫 놀라며 물러섰다. 그 행동이 부끄러웠기 때문인지 황후는 눈에 살기를 담은 채 다시 한 걸음 내게 다가왔다.
“무슨 소리냐! 너! 이 말을 책임질 수 있다고 생각해?”
“생각해보면 좀 뻔하잖아요. 크로시벨 가에 태자 저하의 마차가 도착하는 시기, 나름대로 기밀 아닌가요? 이런 걸 아무리 공작가라 해도 그리 쉽게 알 수 있나? 뭐, 여기까진 대단한 가문이니까 어떻게 알았다 쳐요.”
“당장 그 입 다물어!”
“마마, 조금만 더 들어보셔요. 여기까진 그럴 수도 있는데, 에블린이 황후 마마께서 고른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죠.”
“그따위가 무슨 증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사실 가장 중요한 근거는 따로 있어요. ‘장르’의 특성이라고나 할까?”
“뭐?”
“크! 예비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기 싸움! 이 미친 전개를 빼먹으면 섭섭하죠. 로판에서 이게 빠진다고? 아니지~! 이건 있어야지. 역시나 이 세상에도 있었네요.”
처음으로 황후는 화를 내는 것도 잊은 채 정말로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난 네가 정말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구나. 술이라도 마셨느냐? 여봐라!”
“마지막. 황후마마, 우리 사이에 증거는 무슨 증거에요? 죄송한데 저한테 그런 건 필요 없어요. 마침 이 장소는 4층이네요.”
이젠 내가 완전히 미친 사람이라 여기는지 손짓으로 사람을 부르는 황후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직접 ‘목격자’를 불러주시니 더욱 좋네요. 좋은 밤 되세요. ‘어머님’.”
다음 장면은 달려오던 시녀와 기사들로서는 평생 잊지 못할 광경이리라.
황후는 난데없이 흔들리는 황후궁과 사방에서 타오르는 불길에 경악하며 정신없이 도주한 끝에 4층 테라스에서 맨몸으로 뛰어내리고 말았다. 이윽고 황후궁 전체에 통곡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전여친을 베고 시어머니를 쓰러트린 지금, 이 세계에 날 막아설 수 있는 존재는 그 누구도 없다.
*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 검은 상복을 입은 채 움직이는 관을 바라보았다. 내가 만들긴 했지만, 이런 분위기에서 결말이 올 줄은 몰랐는데.
졸지에 전 여친에 이어 어머니의 급작스러운 죽음이라는 비보를 들은 황태자는 정말로 어린 소년이 되어 울고 또 울었다. 아무래도 위로해줄 타이밍이다 싶어 다가가서 그의 손을 꽉 붙잡았다.
“소, 송이야. 흐으으윽! 대체, 왜 이런 일이 갑자기!”
… 헛! 방금은 진짜 말문이 턱 막혔어. 하마터면 ‘네 엄마를 죽여서 미안해’라고 말할 뻔!
진정하자 유송이! 진정 진정!
“저하, 이럴 때일수록 저하께서 굳건히 버티셔야 합니다. 사람은 언젠가 죽기 마련이니까요.”
네 어머니는 어차피 때 되면 죽었을 거야. 나는 단지 ‘살짝’ 빨리 보내드렸을 뿐이지.
“저, 송이 크로시벨이 당신의 힘이 되어드리겠어요.”
눈이 팅팅 부은 소년의 시선이 내게 향하는 그 순간 – 내 본능이 말했다. 지금이 이 영화의 결말이라고! 뭔가 임팩트 있는 말 한마디는 해줘야 하지 않을까?
최대한 아련한 태도로 황후의 관을 바라보며 이 영화의 끝을 장식할 ‘아름다운 문장’을 남겼다.
“‘어머님’. 가시는 길 편안하시길 빕니다. 아드님은 제가 자아알 보살피겠습니다! 아자!”
그리고….
엔딩 크레딧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