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286)
285화 – 204호, 미션의 방 – ‘호텔 시네마’ (9) – 1편 Fin
– 한가인
[사용자 : 한가인(지혜)날짜 : 132일 차
현재 위치 : 계층 2, 204호 – 미션의 방, ‘호텔 시네마’
현자의 조언 : 3]
“…”
“…”
엘레나 편과는 다른 의미의 침묵이 극장을 가득 메웠다. 혼란에 빠진 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리야! 이거 진짜 좋은 결말 맞냐? 요즘 로맨스 영화가 이런 식이야?”
“… 그럴 리가.”
당연히 아니겠지. 승엽이는 반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마지막에 장르가 갑자기 바뀐 것 아니에요? 로맨스가 아니라 스릴러였는데!”
“고, 공포 아니야? 공포!”
스릴러? 공포?
“… 슬슬 엿 같은 소리가 들려올 때가 됐구나.”
“딴따라딴! 따라라따라라 딴!”
할아버지의 말마따나 안내인이 입으로 내는 병신같은 효과음이 들려왔다. 동료들의 표정이 구겨지는 순간, 문득 이 상황이 더없이 중요함을 깨달았다. 저 인간이 뭐라고 말했더라?
‘심사위원을 설득하는 것 또한 여러분의 실력입니다.’
호텔 시네마는 어떤 의미에선 온전한 솔로 플레이가 아니다. 영화의 진행은 내부로 들어간 사람 혼자 해야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낸 결말의 ‘심사’는 바깥에 있는 우리가 개입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송이는 이미 나름대로 결말을 냈다. 이제, 우리가 이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내야 한다!
첫 번째로 나선 심사위원, 상인을 보자 마음이 편해졌다. 후반부 전개가 미쳐 돌아갔으니 이 자의 취향에 딱 맞을 듯했다. 역시나 그는 주저 없이 O를 꺼내 들었다.
“합격! 세상에! 또 합격입니다. 여러분은 정말이지 호텔에서 태어나신 것 아닙니까? 엘레나 양에 이어서 송이 양까지 이렇게 훌륭한 결말이라니요! 크…. 이 줄거리야말로 인간 찬가 그 자체지요.”
… 인간 찬가?
너무 황당했는지 옆에 있던 기념품 소녀가 물었다.
“대체 어디가 인간 찬가야?”
“아니, 영화를 나 혼자 봤습니까? 성실히 노력한 자가 보답을 얻는 것이야말로 인류가 꿈꿔온 유토피아의 한 형태일 것인데!”
“그니깐 여주인공이 ‘성실하게’ 전여친과 시어머니를 자살시키고 그 보답으로 남주인공을 얻어냈다?”
“그렇지요. 바야흐로 21세기, 원하는 것은 실력으로 쟁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제까지 시어머니의 잔소리에 시달릴 셈입니까? 그냥 마차나 테라스에서 슬쩍 미세요. 그래도 기어오르면 와인에 독이라도 타던가.”
“너 요즘 이상한 게임 하는 것 같던데, 혹시 크루세이더 -”
“어험!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맙시다. 내 평가는 합격! 합격입니다. 이거 완전 Young한데? 완전 MZ인데요?”
호텔 직원은 게임도 해? 대체 이 호텔은 없는 게 뭐야?
기념품 소녀는 한없이 피로한 표정을 지으며 X를 꺼냈다.
“하…. 대체 너희는 ‘로맨스’라는 단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어. 그래, 엘레나보다 최소한의 방향성은 맞았다고 쳐줄게. 전 약혼자의 견제, 시어머니와의 심리전. 이런 로판의 주요 소재는 이해한 것 같아.”
역시 이 사람이 문제다! 상인과 달리 ‘상식적인’ 전개를 선호하는 심사위원답게 불평이 가득한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갈등 구조를 두 번 연속 죽여서 해결한다고? 영화 배경 이해 못했어? 하이 파워 세계관이 아니라고! 마법도 초능력도 없는 세계인데, 그냥 다짜고짜 유산의 힘으로 맘에 안 드는 존재를 다 죽이면 해결이야? 그게 대체 무슨 -”
“이의 있습니다!”
내 우렁찬 목소리에 소녀는 눈을 치켜떴다.
“말해봐.”
“평가 기준이 이상합니다. 왜 ‘로맨스’라고 하시죠?”
“뭐?”
“누가 이 영화를 로맨스라고 정해놨습니까? 호텔에선 영화 제목만 알려줬잖아요?”
안내인이 살짝 끼어들었다.
“정확히는, 2편의 경우는 제가 ‘전쟁영화다’ 정도는 말해드렸지요. 1편과 3편에 대해선 말씀드리지 않은 게 맞습니다.”
“그, 그렇죠! 중요한 건 1편의 장르는 정해지지 않았다는 거죠.”
기념품 소녀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그럼 네가 생각하는 장르는 뭔데?”
“… 스릴러? 공포? 화, 황태자의 마음이 약해진 틈을 타 등장한 사악한 존재가 황태자 주변 인물을 죽여가며 그를 사로잡는 영화인 거죠.”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당황하던 차, 아리의 지원 사격이 들어왔다.
“심사위원님! 아까 지적하신 문제가 뭐였죠? 영화의 배경은 초자연적인 힘이 없는 ‘로우 파워 세계관’인데, 이에 맞지 않게 유산의 힘으로 걸림돌을 죄다 죽여버렸으니 에러다. 이것 맞죠?”
“… 맞아.”
“말씀대로 로맨스 영화에서 그런 전개는 좀 에러죠. 남들은 아무도 마법이고 초능력이고 쓸 수 없는데, 여주인공이 갑자기 최면술을 써서 남주인공을 홀리면 이상하잖아요?”
“에? 그건 좀 좋은 전개일지도….”
갑자기 기념품 소녀가 얼굴을 붉혔다. 주변의 모든 사람, 심지어 상인까지도 황당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는 사이에 은솔 누나가 재빨리 메모했다.
“기념품 소녀는 최면 순애를 좋아한다. 메모.”
“아, 아니야!”
아리가 황급히 끼어들었다.
“자, 잠깐! 제 말이나 들어주세요. 로맨스 영화에서 송이의 행동은 ‘밸런스 붕괴’일 수 있죠. 하지만 가인이 말대로 장르가 공포, 스릴러라면 이건 문제가 아니에요.”
다음 말은 내가 받았다.
“심사위원님, 피해자들은 아무 능력이 없는 일반인인데 악령들은 온갖 초자연적인 힘을 부리는 건 공포영화에선 일반적인 전개죠? 스릴러에서도 그렇죠. 많은 스릴러 영화에서 연쇄살인마들은 터미네이터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엄청난 신체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렇다! 황태자 길들이기가 사실 로맨스가 아니라 공포나 스릴러였다면?
송이와 황태자의 구도가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이 아니라 사악한 존재와 피해자의 관계였다면, 송이만 초자연적인 힘을 휘두르는 건 자연스러운 전개다.
… 터무니없는 궤변이었지만, 기념품 소녀에겐 통했다. 그녀의 눈이 빙글빙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짜로 눈동자가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자, 장르가 로맨스가 아니라고? 물론 1편의 장르를 누가 정해준 건 아니지만…. 에잇! 너희, 이상한 소리 하는 것 아니야? 너희 입으로 로맨스라며!”
“영화가 시작하기 전이라 잘 모르고 한 소리죠.”
“내부에 들어간 참가자가 직접 로맨스 영화라는 전제하에 스토리 진행했잖아! 로맨스 영화라면 자연스럽다는 둥 하는 소리를 수없이 들었는데 -”
“나레이션은 평가에 반영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마지막에 본인 입으로 황후에게 로판이라며!”
“착각했나 보죠.”
우기자! 그냥 한없이 우겨! 기념품 소녀, 저 여자애의 표정을 보니까 알 것 같다. 은근히 이런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이는 말에 약하다!
분위기를 읽은 아리 또한 궤변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이해 못하시겠어요? 영화 장르는 공포 스릴러라니까 그러네! 본인 입으로 로판이라 했다? 원래 공포영화에 나오는 귀신이나 괴물은 보통 정신이 이상하잖아! 장르를 로판이라 착각한 광기의 살인마가 황태자 주변의 모든 인물을 도살하는 시나리오! 이걸 왜 받아들이지 못해! 당신 그거 편견이야!”
“이, 이거 맞아? 아무리 생각해도 너희 지금 날 속이는 것 아니야?”
“에잇! 솔직히 장르가 무슨 상관이래? 재밌으면 그만이지! 야 너!”
아리가 이젠 숫제 반말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가슴에 손 얹고 말해! 재미있었어, 재미없었어? 솔직히 재밌었다? 인정? 내가 또 명대사 해줘야 해?”
즉시 의자에서 일어선 아리는 어딘가 아련한 표정으로 ‘명대사’를 말했다.
“아드님은 제가 자아알 보살필게요. 아자!”
“풋!”
웃었다! 방금 웃었어!
혼돈으로 가득한 극장,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한 기념품 소녀는 조용히 X자 패널을 뒤집었다.
“합격. 합격이라고 칠게. 이상하게 완전히 당한 기분이지만.”
두 명의 심사위원에게 연달아 합격을 받아냈다. 기다렸다는 듯, 안내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참가자분들이 제법 수완이 있으시군요? 훌륭합니다! 말씀드렸듯이 심사위원을 설득하는 과정 또한 여러분의 실력이니까요. 세분의 심사위원 중 두 명이 이미 합격을 선언하셨으니 통과 확정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세 번째 평가, 확인은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마지막 심사위원, 레고 장인은 일말의 주저 없이 X를 들었다.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앞선 두 심사위원, 상인과 기념품 소녀는 이미 여러 차례 의견을 밝혀왔기에 대충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는지 안다. 상인은 개성 있고 독특한 결말을 선호하며 기념품 소녀는 장르에 걸맞은 상식적인 전개를 바란다.
하지만 레고 장인의 기준은 대체 뭘까? 아리가 조심스럽게 내 귀에 대고 말했다.
“이번엔 앞의 두 심사위원을 모두 통과해서 문제없었지만, 저게 나중에 복병이 될 것 같아.”
“레고?”
“응. 기준을 모르니 뭘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도 모르겠네. ”
“흐음…. 그냥 앞의 두 명을 설득하는 걸 목표로 해야 하지 않을까?”
*
첫 번째 영화가 진짜로 끝났다. 스크린이 갑자기 세로로 갈라지며 내부에서 송이와 엘레나가 튀어나왔다.
잠시 당황하던 엘레나는 곧, 송이가 해결했음을 알고 활짝 웃으며 송이를 껴안았다.
“고마워!”
송이는 어딘가 자랑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우리에게 걸어왔다.
“다들 봤죠? 제가 로판식 전개를 워낙 잘 알아서 -”
아직 뒤에 심사위원이 있다! 아리가 황급히 다가가서 답했다.
“공포영화 잘 봤어.”
“어?”
“황태자 주변 인물을 죽여가며 그의 정신을 무너트리는 전개! 훌륭했어!”
“뭐?”
“에잇! 안내인! 첫 편 끝났는데 잠깐 밖으로 나갈 수 있어요?”
“물론입니다. 다음 편을 진행하시고 싶을 때 돌아와 주세요.”
“일단 나가자. 참고로 넌 공포영화의 악역이었으니까 그런 줄 알아.”
“어어?”
확실히 미션의 방이라 저주의 방과는 여러모로 다르다. 영화 한 편을 확실히 끝냈다면 밖으로 나올 수 있는 모양이다.
내일은 어떻게 해야 할까? 영화 한 편 더? 아니면 다시 203호? 조언은 또 어디에 쓰지? 동료들과 이야기해봐야겠다.
“갑자기 왜 내가 공포영화의 악역이었다는 거야?”
… 송이는 혼자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막연한 생각인데, 우리는 남은 영화의 장르 또한 기괴하게 비틀어버릴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