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288)
287화 – 204호, 미션의 방 – ‘호텔 시네마’ (10)
– 김상현
거처의 문이 열리며 자그마한 나무 탁자가 들어왔다. 그 위에 올라온 제법 때깔이 고운 식사를 보다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너무 뻔하군.
뻔하다기보단 송이 양이 한번 보여줬기 때문일지도 모르겠군요. 영화 특성상 재미없는 장면은 거침없이 생략하며 진행 중이었는데, 난데없이 식사 장면이 나오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송이 양이 한 번도 나오지 않았던 ‘이동 장면’이 나오자마자 위화감을 느꼈던 것. 이후의 다른 분들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전 지금 제 앞의 식사에 독이 있다는 사실에 돈이라도 걸 수 있습니다.
*
“으음…. 다른 사람은 상현 씨처럼 말하진 말아줘.”
“저놈이 좀 우습게 구는 것과 별개로 충고는 설득력 있으니 다들 기억해두거라. 나오지 않던 장면이 갑자기 나왔다? 그 자체가 위기 신호인 셈이니까.”
송이가 자신 있는 말투로 답했다.
“영화에 재미없는 장면 따위는 없다! 다들 이것만 명심하세요.”
*
의식적인 설명을 마친 후, 바깥의 하인을 불러 식사를 다시 확인하게 했다.
과연, 1분이 채 지나지 않아 바깥이 요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독살 시도 이벤트’를 한번 막아내자 다음 순서는 방벽 순찰과 장수들과의 회의였다.
“내일은 트리란 평야의 -”
“무르타니에의 군세가 언덕을 넘어서 -”
“회전하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
“네 이놈! 성벽을 지킬 생각은 하지 않고 -”
장수들끼리 아주 난리가 났다. 상석에 앉은 늙은 남자, 아마도 총지휘관으로 보이는 사람은 지친 표정을 지었다.
나오는 이야기는 간단했다. 적장 무르타니에가 비겁한 수, 그러니까 탁월한 계책을 짜내서 보급선을 끊어낸 후 본국과의 소통도 막아버린 상태다.
사태가 이러하니 더 악화하기 전에 회전을 벌여 무르타니에와 유목민 군세를 섬멸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물론 성벽을 지키며 본국의 지원을 기다리는 게 합리적이라는 의견도 많았다.
중간중간 주변의 장수들은 내 의견을 물으려는 듯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황상 이 국면에서 내가 입을 열면 회의를 주도할 수 있을 듯하다. 영화 주인공이니만큼 주변의 신뢰가 굳건한 장군이라는 역할이 주어진 상태다.
하지만 난 입을 다물었다. 애초에 전근대 전쟁에 대해 내가 뭘 알겠는가?
현대전이라면 사흘 밤낮이라도 떠들 자신이 있다. 그러나 창칼을 들고 싸우는 전쟁과 현대전은 같은 전쟁이라고 묶이기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내가 침묵하는 사이, 회의는 더 늦어지기 전에 무르타니에와 건곤일척의 승부를 내자는 쪽으로 굳어졌다.
이 결정이 과연 현명할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전근대 전쟁의 전략 전술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며, 이는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다만, ‘회전과 수성전’이라는 선택지 중 저는 회전을 택한 꼴이니, 실패한다면 다른 분들은 수성전을 택해보시는 것도 괜찮을 듯합니다.
상석에 앉은 노인이 탁자를 탁! 하고 치는 순간, 공간이 흔들거리며 다음 장면으로 넘어갔다.
*
정신 차렸을 때, 나는 거대한 덩치의 흑마에 탑승한 채 전장의 한복판에 떨어졌다!
아니, 이 MOTHER FUCKER 같은 전개를 봤나! 진짜 호텔 BUG 새끼들아 이게 맞냐? 전쟁 시작하기 전에 경고까진 아니더라도 마음의 준비는 –
진정하자. 진정하자!
황급히 말고삐를 돌려서 뒤쪽 언덕으로 –
— 휘익!
“크으윽! YOU BASTARD! 애미애비없는 호로 새끼들이 뒤에서 활을 -”
신분이 장군이라 튼튼한 갑옷을 입었는데도 순간적인 통증에 눈물이 날 뻔했다. 심지어 내가 타고 있는 거대한 덩치의 흑마는 본인이 더 흥분해서 되려 달려들 기세였다.
진짜 동물 아니랄까 봐 지능 낮은 새끼 같으니라고! 너 알아서 뒤지든 말든 해라.
애초에 말을 모는 법도 모르는데,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서 적진에 달려들 기세의 말에 타고 있어 봐야 무슨 소용이겠는가? 말에서 내려서 뒤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장군답지 못한 행동’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어차피 이 상황에서 몰 줄도 모르는 말 타고 앞으로 가봐야 개죽음이니 조금이라도 오래 사는 게 낫겠지.
“장군! 우리를 이끄시지 않고 어디로 -”
내가 알겠냐?
정신없이 달려서 언덕 비슷한 장소에 올라가서 숨을 고르며 전장을 돌아봤다. 흔들리는 깃발 속에서 명백히 드러난 전황은 –
모르지 개새끼들아!
평생 이런 병신같은 구식 전쟁을 해본 적이 없는데 훑어본다고 알겠냐! 그냥 먼지 그득한 풍경과 온 세상에 가득한 비명, 사방에서 들려오는 쇳소리와 비릿한 피 냄새. 이게 끝이다.
*
“사, 상현 씨?”
거대한 스크린에서 쉴 새 없이 튀어나오는 흥분한 목소리와 욕설에 모두가 말문을 잃었다. 간신히 정신 차린 아리가 입을 열었다.
“진정해. 우리에겐 나레이션이지만 들어간 사람으로선 그냥 ‘생각’일 뿐이야. 상황이 혼란스럽고, 전쟁터라서 본인도 생각까지는 통제가 어려운 모양이네.”
“유 바스타드, 애 -, 으흠. 부모님 없는 자식들이라는 이야기는 목소리로 나왔던데요?”
“…”
묵성은 별것 아니라는 태도를 보였다.
“뭐, 전쟁터 아니냐? 그 상황에서 흥분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지.”
*
달리고 또 달렸다.
조금 전, 발밑에서 물컹한 젤리 같은 것이 밟혔지만 확인하지 않기로 했다. 조금 전, 질척한 액체가 뺨에 튀었지만, 굳이 닦아내지 않았다.
… 정신이 나갈 것 같다. 이렇게 도망 다니기만 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결국 근처의 나무에 기대서서 다시 뒤로 돌았다. 아까 전엔 알 수 없었던 전황, 이제는 안다. 나만 아는 게 아니라 주변의 하급 병졸들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터다.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 없는 단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방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이 들려왔다. 동쪽, 서쪽, 북쪽. 죄다 이상한 뿔피리를 부는 적군뿐이다. 성벽 바깥으로 내려온 것이 실수였을까? 이제 와선 알 수 없다.
거대한 그림자가 보인다. 그는 흡사 곡식을 수확하는 농부처럼 셀 수 없이 많은 병사를 도살하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두르카이의 대장군, 무르타니에. 그가 탑승한 말에 10개가 넘는 머리가 대롱대롱 달려있었다. 개중 몇 개는 알아볼 수 있었다. 아까 전, 회의에 참석했던 장군들의 머리다.
내 목을 베러 왔구나. 아무리 말에서 내려 도망을 다녔다 한들, 내가 범상치 않은 신분임을 모를 수가 없다. 입고 있는 갑옷부터가 병졸과 다르니까.
심호흡하며 내가 가진 능력을 되새겼다. 의술? 지금 상황에선 쓸모없다. 사격술? 우주비행사의 능력? 더 쓸모없다.
… 헛웃음이 나왔다. 평생 많은 능력을 단련했다 여겼는데, 지금 상황에서 유용한 능력은 단 한 개도 없구나.
“끄아아악!”
비명이 들려온다. 이젠 더 이상 도주하지 않기로 했다. 동료들을 위해서라도 최소한 적장이 어떻게 싸우는지는 보고 죽어야 하지 않을까?
정신을 집중해서 관찰한 무르타니에의 전투력은 그냥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선을 그리며 회전하는 무르타니에의 창에서 검푸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가 창으로 허공을 찌르자, 검푸른 기운이 허공을 꿰뚫으며 병사들을 갈아버렸다.
무슨 제다이야? 포스의 힘?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가벼운 기합과 함께 그의 창이 지면을 찌르자, 일순간 일대의 지면이 흔들리며 수백의 병사들이 균형을 잃고 휘청였다.
“타아앗!”
무르타니에의 입에서 천지를 뒤흔드는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균형을 잃고 휘청이던 병사들은 귀에서 피를 흘리며 널브러지기 시작했다.
이래서 졌구나! 이래서 졌어! 저런 놈이 전근대 전쟁터에서 날뛰는데, 제국이고 자시고 어떻게 이긴단 말인가!
“지루하구나. 진천에는 이 무르타니에의 창을 받아낼 자가 없느냐? 고작 이런 힘으로 제국을 논하고 방벽을 논했느냐?”
웃기지도 않은 도발인데 걸려든 장군이 있었다. 사실, 이대로라면 패전이니 무엇이라도 해야 할 시점이긴 했다.
용맹하게 고함지르며 달려든 장군은 물 한 모금 마실 시간도 버티지 못한 채 딱 두 번의 찌르기에 온몸이 토막이 나고 말았다. 드릴처럼 회전하는 창이 일격에 말을 터트리고, 이격에 장군의 갑옷부터 몸통까지 으스러트린 것이다.
…
죄송합니다. 추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솔직히 이 정도로 막 나가는 영화일 줄은 몰랐거든요.
두 번째 영화, 방벽의 수호자는 황태자 길들이기와 양상이 좀 다르네요. 그냥 힘. 힘입니다. 아까 회전이나 수성전이냐가 중요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죠?
다시 생각해보니 별 의미 없습니다. 저런 괴물에게 성벽 뒤에 숨는다 한들 의미 있겠습니까? 창으로 성벽을 쪼개서라도 들어올 놈입니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고르더라도 무르타니에와 충돌하게 될 겁니다.
저놈을 이길 수 있는 분이 들어오셔야 합니다.
“형편없군. 너 따위가 장군이란 말이냐? 진천 제국이 무너질 날이 머지않았구나. 본좌의 창이 아깝도다.”
무르타니에는 가볍게 허공에 손을 뻗더니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와 동시에 몸 전체가 으스러지기 시작했다.
“으, 으아아아악!”
산채로 사지가 으스러지는 고통 속에서 빌고 또 빌었다.
아아…. 하늘에 계신 아버지. 대체 제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고통을 겪도록 하시나이까? 저는 일평생 성실하게 살며 많은 사람을 구했나이다.
그러니 부디 구원을 주소서. 이 지옥에서 나가게 해주소서. 그게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절 죽여주십시오.
*
“…”
“…”
침묵으로 가득한 극장, 앞 영화와 너무나도 다른 참혹한 분위기 속에서 모두가 말문을 잃었다. 마지막 순간, 고통 속에서 ‘포커페이스’를 잃은 김상현의 호소를 들은 동료들은 속이 먹먹해짐을 느꼈다.
“흐으윽!”
급기야 우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하자 가인은 이 상황을 진정시킬 필요를 느꼈다.
“지, 진정들 합시다. 의사 선생님은 완전히 죽은 게 아니에요. 마지막 말은 고통이 너무 심해서 한 말일 뿐입니다. 이따가…. 이따가 다 같이 식사하면서 위로해드립시다.”
차라리 안내인이 그놈의 ‘딴 따라단’거리는 소리라도 내면서 나왔다면 이 침울한 분위기가 멈추기라도 했을텐데. 안타깝게도 호텔 시네마의 성공을 위한 최소 조건은 ‘생존’이다.
똑같은 실패라 해도 엘레나는 마지막까지 생존했기에 심사위원의 평가는 받을 수 있었지만, 상현은 죽었기 때문에 아예 심사위원들이 나오지도 않았다.
그 대신, 스크린이 불투명해지며 바로 다음 사람보고 입장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아리는 다른 사람을 신경 쓰는 대신 차진철의 어깨를 짚었다.
“이길 것 같아?”
“… 무르타니에라는 놈?”
“응. 이 영화, 1편과는 전혀 다르네. 상현이가 마지막에 상황을 정확히 파악했어. 무슨 계략을 짜고 그런 영화가 아니야. 장르를 굳이 따지면….”
“무협 영화, 액션영화다. 머리 써서 무언가 하는 국면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강적과 겨뤄서 이겨야 한다.”
가인이 중요한 점을 지적했다.
“더 끔찍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지금 영화 시작한 지 겨우 30분 흐른 거 아세요?”
“두 시간 이상 남았네.”
“액션영화에서 최종 보스가 영화 시작 30분 만에 나올까요?”
“… 더 엄청난 괴물이 뒤쪽에 대기 중이겠구나.”
가인은 아리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우리, 크게 실수했네.”
“응?”
“여기에 엘레나가 들어갔어야 했던 것 같은데. 스크린에서 보인 무르타니에의 전투력이 대단하긴 했지만, 엘레나가 제압 못할 정도는 아니야.”
“이미 지나간 이야기는 그만두자. 그보다 상황을 보니 어지간한 사람이 들어가는 건 아무 의미 없는 횟수 낭비야.”
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유형의 영화라면, 예컨대 묵성이나 은솔의 진입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냥 무르타니에가 졸면서 내지른 창 한 번에 둘 다 꿰어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승엽이라 한들 크게 다르지 않다. 행운이 때로는 괴상할 정도의 위력을 발휘하곤 하나, 한계가 없는 힘은 아니다. 정말 무한했다면 이미 승엽이가 유산을 두어 개는 얻었겠지.
아직 기회가 남은 멤버 중 저런 존재와 맞서볼 만한 사람은 한가인, 차진철, 김아리 셋뿐이다. 심지어 저 존재 뒤에 더 강력한 존재가 대기 중일 것을 고려하면, 상황은 더욱더 위협적이다.
가인은 잠시 고민한 끝에 조심스러운 의견을 냈다.
“내 능력은 일종의 즉사기와 유사해. 통하면 무조건 이기고, 통하지 않으면 무조건 지는 느낌이지. 그러니까 빙의가 통하냐, 통하지 않냐에 모든 게 달렸어.”
“무르타니에에게 빙의가 통하지 않을 것 같아?”
“아니. 솔직히 그건 아니야. 반신에 준하는 격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면 빙의에 저항하지 못하는데 무르타니에가 그 정도로 격이 높아 보이진 않았어. 내가 걱정하는 건 그 후에 나올 존재지.”
그때, 차진철이 입을 열었다.
“내가 한번 가보마.”
“…”
“뭐, 영상으로만 봐선 모르겠지만 무림 고수든 뭐든 결국 인간 아니냐? 내가 축복 챙겨가서 이 악물고 패면 죽을 것 같은데.”
“창을 휘두르니까 검은 회오리가 막 날아다니던데요?”
“피하면 그만이지.”
모두의 시선이 차진철에게 모이자 차진철이 살짝 너스레를 떨었다.
“다들 왜 이래? 내 능력에 가장 맞는 영화가 이거 아니냐? 난 공포영화 쪽이 더 부담스럽고 싫다. 보나 마나 공포영화에선 황당한 괴물이 나와서 이상한 저주를 걸어대겠지. 그런 놈을 만나서 주먹 한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죽느니, 저 무르타니에랑 겨뤄보고 싶다.”
그 말과 함께 진철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누군가는 미안한 표정, 누군가는 걱정하는 표정이다. 마치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을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맡기는 듯한 분위기.
그 속에서 –
진철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광기의 기억이 부글거리며 끓어오름을 느꼈다. 101호, 상식개변 미디어의 첫 경험. 살과 피와 뼈로 가득한 투쟁의 기억.
한때, 그의 손이 대적의 목을 꺾고 팔다리를 으스러트리던 순간이 있지 않았던가? 오래전에 부서졌던 나무토막, 톤파로 적의 목젖을 꿰뚫던 때가 있었다.
기묘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도 알 수 없는 고양감이 끓어올랐다. 당장이라도 영화에 들어가고 싶었다. 무르타니에의 창을 피해 목을 비트는 자신을 그렸다.
“들어가겠습니다. 안내인! 난 축복이다. 별은 어차피 축복 없이는 못 써.”
스크린을 향해 들어가는 그의 귀에 이상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칼과 용암, 해골로 가득한 옥좌. 그 위에 걸터앉은 거인의 환영을 느꼈다. 자신이 택한 용사의 투쟁심에 기꺼워하는 웃음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