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ing the Mystery Hotel RAW novel - Chapter (289)
288화 – 204호, 미션의 방 – ‘호텔 시네마’ (11)
– 차진철
“장군, 식사를 대령했나이다.”
“… 나가봐라.”
영화에 진입한 지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그 장면’이 시작됐다. 뻔히 알고 있는 독살 이벤트다. 이걸 먹어? 말아?
솔직히 이계의 별조차도 잠깐은 견뎌내는 내 몸이 독을 먹는다고 쉽게 무너질 것 같진 않았다. 오히려 독을 먹고도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있다 보면 흉수를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역시 이걸 먹는 건 좀 아니지.”
그만두기로 했다.
호텔 파티 전체의 기회야 여러 번 더 남았지만, 내 기회는 이걸로 처음이자 마지막인데 무리한 도박을 하고 싶지 않다. 아무리 생각해도 독이 있는 걸 알면서 처먹는 건 병신 짓이다. 무지막지한 맹독일 수도 있으니까.
“여봐라!”
이후의 진행은 의사 형님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바깥은 요란해졌고, 기다리다 보니 방벽 순찰 좀 돌다가 전략 회의를 했을 뿐이다.
*
— 히히힝!
“이것 참, 알고 있었는데도 엿 같긴 하네.”
회의가 끝날 때쯤, 눈 한번 감았다 떴는데 갑자기 전쟁이 시작했다. 알고 겪어도 황당한데 처음 겪었을 의사 형님이 얼마나 당황했을지 짐작이 갔다.
여기서부터는 나름대로 계획한 바가 있으니 그대로 진행하자.
“이봐!”
“장군님! 명령을 -”
“너, 계급 뭐냐? 나 다음 맞지?”
“마, 맞긴 한 -”
“네가 주변 군대를 이끌어라.”
“예?”
“그럴듯하게 말해야 하나? 지금부터 내 지휘권을 그대에게 이양하니, 용맹하게 맞서 싸우라!”
“예?”
이 정도 말했으면 적당히 알아처먹겠지. 제법 멋들어진 언월도 한 자루를 들고 말에서 내렸다.
애초에 말은 무슨 말? 호텔 동료 중 승마술을 익힌 팔자 좋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은솔 누님도 말 타봤냐고 물었더니 고개 젓더라.
무엇보다 나는 말보다 빨리 움직일 자신이 있다.
— 쾅!
전력을 다해 지면을 박차자 몸 전체가 정면으로 날아갔다. 뺨을 스치는 바람의 시원함과 사방에 날아다니는 핏방울의 비릿함을 동시에 느꼈다.
흡사 대포가 쏘아낸 포탄처럼 날아드는 날 발견한 적병의 표정이 삽시간에 일그러진다. 바닥에 발이 닿는 순간, 몸을 반 바퀴 회전하며 언월도를 휘둘렀다.
이런 길쭉한 창을 휘두르는 창술 따위 모른다. 21세기 현대인이 그딴 기술을 익혀서 어디에 쓰겠는가? 하지만 날카로운 무기란 충분히 강하게 휘두르면 사람을 벨 수 있겠지.
충분히 강한 힘은 그 자체가 기술이니까!
— 쩌어억!
팔에 묵직한 저항감이 느껴진다 싶더니 일격에 두 명의 병사를 베었다. 첫 번째 병사는 목부터 어깨가 동강이 났고, 두 번째 병사는 허리부터 무릎이 조각났다. 사방에 흩어진 살점. 이제는 인간이 아닌 고깃덩어리가 된 무언가를 보았다.
기이하게도 죄책감 같은 ‘인간적인’ 감정이 그리 느껴지지 않았다. 어차피 전쟁터이기 때문일까? 서로 죽고 죽이는 장소고 이 자들도 다른 사람을 베었을 테니까?
모르겠다. 다만….
시원하다. 가슴을 꽉 채우던 무언가가 쭉 내려가는 감각과 함께 시야가 탁 트였다.
베고 또 베었다.
악귀 같은 표정을 지으며 달려드는 병사의 목을 쪼갰다. 즉시 창을 쥔 팔을 뒤로 뻗으며 손잡이로 등 뒤의 누군가를 후려쳤다. 보지 않아도 누군가의 상반신이 꿰뚫렸음을 알았다.
점점 언월도의 사용법에 익숙해진다.
애초에 지금의 내게 복잡한 창술 따위는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여덟 방위를 단박에 점하는 경로니, 부드럽게 받아치는 기예니 하는 복잡한 기술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
넘쳐나는 힘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담아 빠르게 휘둘렀다. 누구도 내 창을 받아내지 못했다.
슬슬 몇 명을 베었는지 헷갈릴 때쯤, 건너편에서 갈색 말을 탄 장수가 고함지르며 다가왔다.
“네 이놈! 이 푸르단이 너의 사악함을 -”
“무르타니에가 아니군.”
“장군님이 너 따위를 -”
아까처럼 강하게 도약했다. 삽시간에 날아드는 내 몸에 크게 당황한 상대는 자세를 제대로 잡지도 못한 채 번개같이 휘둘러진 언월도의 궤도에 휩쓸렸다. 단 일격에 장군의 몸통과 갈색 말을 동시에 쪼갰다.
이번엔 좀 과했나?
팔이 저릿한 느낌이 든다. 팔도 팔이지만 슬슬 언월도의 창대가 휘청이기 시작했다. 무기의 내구성에 한계가 온 듯하다. 조금 전에 벤 장수의 창의 상태가 괜찮아 보여서 바꿔 들었다. 슬슬 무르타니에가 나타날 때가 되었을 텐데….
“이봐! 무르타니에를 봤냐?”
뒤에 있던 아군 병사에게 무르타니에를 보았는지 물었다.
“흐어억!”
병사는 대답하는 대신 갑자기 뒤로 넘어지더니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 머저리는 아군 장수를 알아볼 줄도 모르나?
— 히히힝!
멀리서 거대한 말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흙먼지로 가득한 전장을 가르고 딱 보아도 비범한 덩치의 말이 다가왔다.
“하하하하! 제국의 장군이여. 날 그리 바삐 찾아다닐 필요 없네. 내가 그대를 베러 왔노라.”
“왔구나.”
“멀리서 널 보았노라. 기세가 대단하더구나. 제국에 이런 용사가 있는 줄 미처 몰랐다.”
“인마, 멀리서 날 봤으면 좀 일찍 일찍 왔어야 할 것 아니야?”
“허허! 말하는 모습이 일국의 장수라기보다는 저자의 왈패와 같구나. 그대를 발견하자마자 달렸는데도 늦은 것을 내가 어찌하겠나?”
살점이 덕지덕지 묻은 갑옷. 사방에 흩어진 시체들.
지금의 나는 아마도 내가 봐도 살 떨리는 모습이리라. 그런 나를 멀리서부터 보았다면서도 여유로운 태도로 다가온 적장을 보자 슬슬 긴장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창을 들어 올리며 시선을 맞대었다. 나도, 그도 섣불리 달려들지 않고 시선을 맞췄다. 이렇게 대치하다 보니 문득, ‘높이’가 다름을 느꼈다. 무르타니에도 그 점을 느꼈는지 피식 웃었다.
“그대, 전투 중에 말을 잃었는가? 옛 말에 따르면 말이 없는 장수는 장수가 아니라 하였다.”
“걱정하지 마라. 어차피 네 말도 곧 죽을 테니.”
“하하하!”
무르타니에의 말이 움직이는 순간, 자세를 낮추며 창을 고쳐잡았다.
땅을 울리는 진동이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창을 반치 내뻗어 말 쪽을 향하며 ‘나는 네 말에 집중하고 있다’라는 신호를 보내는 순간 –
무르타니에의 창이 허공을 갈랐다.
바로 지금이다! 즉시 옆으로 두 걸음 움직이자 칠흑빛 소용돌이가 내가 있던 위치를 휩쓸고 지나갔다. 저놈이 무슨 검기 비슷한걸 날려댄다는 건 이미 보고 들어왔는데 당해주면 바보지!
믿었다. 아무리 저놈이 괴물이라 해도 저런 마법 같은 기술은 연달아 쓸 수는 없겠지. 한번 쓰고 나면 또 쓰기까진 약간의 충전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래야 밸런스가 맞으니까.
무르타니에의 왼손이 느릿하게 뻗더니 허공에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나는, 이 병신같은 호텔에서 밸런스 따위를 찾은 내가 잘못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전신을 으스러트릴듯한 압력을 느낀다. 흡사 거대한 압착기에 들어가서 내 몸을 오렌지처럼 쥐어짜는 악독한 기세! 이 한 수에 의사 형님은 비참하게 무너지고 말았지.
“으아아아앗!”
기합으로 버텼다. 농담이 아니고 진짜다. 그냥 고함지르면서 전신의 근육을 팽창하고 온몸의 힘을 외부로 발산했다. 그냥 악으로 깡으로 버텼다!
— 펑!
폭탄이라도 터지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몸을 억누르던 기운이 마치 태양 빛 아래의 얼음처럼 사그라들었다. 동시에 무르타니에의 왼손에서 피가 튀었다.
이건 ‘반동’이다. 저자가 휘두르는 초자연적인 힘, 상대가 받아치거나 견뎌내면 사용자에게 반동이 돌아가는 원리인가?
“크으으윽!”
“이게 전부냐? 별것 아닌데?”
솔직히 별것 맞아. 아직도 온몸이 후들거려서 공세를 이어 나갈 수는 없으니 입으로 허세라도 떨 뿐이다.
“대체…. 대체! 네 몸은 쇠로 만들어지기라도 했냐? 어떻게 인간이!”
“와…. 야 씨발놈아! 방금은 진짜 억울하네.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 같은 새끼에게 ‘어떻게 인간이’ 같은 소리를 들어야겠냐? 포스 그립 쓰는 새끼한테?”
“포슈 구랍?”
“엿 같은 새끼가 진짜! 어설프게 발음 흉내 내지 마!”
후들거리는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아직 반동이 남아있기 때문인지 무르타니에는 내 움직임을 보면서도 반격하지 못했다.
발끝부터 솟아난 힘이 허리를 거쳐 팔에 실렸다. 몸 전체가 회전하며 발생한 거력이 창에 담기자 대기를 쪼개며 나아가는 창이 격렬히 진동했다.
섬전같이 날아든 창에 머리가 터져나가는 그 순간까지도 무르타니에의 말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지 못했다. 즉사했으니 조금은 다행이다. 위에 탄 놈이 개새끼지, 말에게 무슨 죄가 있겠어?
그 와중에 뒤늦게 반응한 무르타니에는 말을 걷어차며 그 반동으로 높게 뛰어올라 내 창의 경로를 벗어났다.
이제 이 자리에 말은 없다.
그저 바위를 두부처럼 으스러트리고 강철을 엿가락처럼 비트는 두 명의 무인이 각자 창 한자루 들고 서 있을 뿐이다.
잠시 서로 숨을 돌리는 찰나의 시간. 슬며시 주변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나와 무르타니에 주변의 병사들은 더 이상 싸우지 않고 넓게 둘러선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저들도 깨달았겠지.
이 전투, 수천의 병졸이 벌이는 혈투로 승패가 결정 나는 게 아니다. 그들은 단지 조연이요 운명을 받아들이는 약자일 뿐. 승패는 이 자리에 선 두 사람의 결투에 달렸다. 그러므로 나머지 사람들은 불필요하게 힘 뺄 필요가 없다.
“조금 전에 말했지?”
“…”
“네 말도 곧 죽을 거라 했잖냐. 내가 이런 흐름은 또 잘 읽거든.”
“몸이.”
“뭐?”
“이제 몸이 좀 가볍군. 과연 제국에도 장군이 있구나. 오늘 이 자리에서 한 명만 살아가리라….”
“폼 잡지 말고 그냥 처 와라.”
“으랴아앗!”
거친 외침과 함께 무르타니에가 창을 일직선으로 뻗으며 달려들었다. 공세의 시작부터 이미 창에 담긴 시꺼먼 기운이 나선으로 회전하며 모든 것을 갈아버릴 기세로 날아왔다.
반 발자국, 뒤로 물러서며 창을 횡으로 휘두르자 창과 창이 충돌했다. 그 순간, 무르타니에의 입가에 미소가 서렸다. 회전하는 묵빛 기운이 단박에 내 창을 조각내며 창날부터 창대까지 나뭇조각으로 만들었다.
하! 애초에 이런 평범한 창이 저 정체불명의 기운을 막아내리라 기대하지도 않았다!
믿었던 것은 대우주의 물리 법칙이다. 창과 창이 충돌한 이상, 아무리 정체불명의 마력이 내 창을 부순다 한들 무르타니에의 창 또한 궤도가 틀어질 수밖에 없는 법.
경로가 비틀어진 창을 피해 안쪽으로 접근하자 놀란 상대가 즉시 창을 뒤로 뻗었다. 과연, 무기술의 수준이 나와 한 차원 다르구나!
원래는 즉시 품에 파고들어 펀치를 날릴 생각이었지만, 생각보다 쾌속하게 무기를 회수하자 그 틈이 쉽게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
…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기운의 특징을 떠올렸다. 상대가 그 힘을 받아내고 견뎌내면, 사용자에게 반동이 돌아간다. 그러니까….
손을 뻗어서 무르타니에의 창대를 잡았다. 이 순간만큼은 이거 진짜 맞나? 내가 돌았나 싶었다.
“크으으윽!”
고통스럽다. 아까의 포스 그립과는 비교할 수 없다. 찰나의 순간, 시야가 붉게 물들고 입에선 이빨 대여섯 개가 터져나갔다. 입에서, 귀에서, 코에서, 가슴에서, 팔에서, 다리에서.
전신의 혈관이 터져나가며 순식간에 붉은 도깨비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도….
나는, 죽지 않았다. 내 손은, 상대의 창을 놓지 않았다.
— 퉁!
무르타니에의 창대가 부러지는 순간, 그의 전신에서 반동으로 인한 포탄 소리가 들렸다.
“흐, 흐읍!”
적막이 가득한 전장, 싸움조차 잊은 채 넋이 나간 병졸들이 시야에 흐릿하게 들어온다.
온몸에서 피가 흐른다. 내 몸에서도, 상대의 몸에서도.
고통.
고통.
고통.
매 순간 전신에 벼락이 내리치고 산채로 불로 지지는 듯하다. 입에서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그저 악으로 씹어 삼켰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왜냐하면 무르타니에도 비명 지르지 않았으니까.
내가 먼저 비명 지를 수는 없지. 그건 지는 거잖아?
순간, 현 상황을 생각하자 헛웃음이 나왔다. 병신이 아니고서야 이 상황은 딱 봐도 나랑 저 새끼 둘다 툭 건드리면 죽을 상황 아니냐? 그런데도 활 쏘는 놈이 한 명도 없어?
무슨 두 남자의 싸움이 결착이 나기 전에 외부인은 끼어들지 않겠다, 그런 거냐?
크! 아무리 영화라 해도 그렇지 이 전개는 진짜 개 병신 같구나! 유치하고, 한심하고, 우습다. 이런 병신같은 상황을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부른다.
‘남자의 로망’.
상대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서로 이 꼴이 된 시점에서 승부는 끝났다. 즉시 치료받지 않고서는 살길이 없는 무르타니에와 달리 나에겐 ‘재생력’이 있었으니까.
서서히 시야가 돌아온다. 출혈이 멎었다. 격통이 잦아들었다. 느릿하게, 하지만 온 힘을 다해서 적에게 다가갔다.
“마지막 유언 정도는 해봐라.”
너 정도 빌런이면 한마디는 하고 가야지.
“하늘의 신이시여…. 제가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나이다.”
가볍게 뻗은 손날이 적장의 목을 뚫었다. 험난했던 회전의 승패가 갈렸다.